800마력 후륜 페라리로 경험한 웨트 트랙
2019-05-14  |   71,032 읽음

800마력 후륜 페라리로 경험한 웨트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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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2형 자연흡기 6496cc 800마력 후륜의 향락(享樂)


V12 페라리가 갖는 의미

페라리를 상징하는 엔진은 당연히 자연흡기 12기통 엔진이다. 스페셜 모델 중에는 288GTO, F40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념비적 모델이 12기통이다. 현재의 엔트리급 페라리의 전신인 디노 206(dino 206)은 V6 엔진이라는 이유만으로 페라리가 만들었음에도 페라리 엠블럼을 달지 못했다. 엔초 페라리의 아들인 디노(알프레도 페라리)는 사망하기 1년 전 아버지 엔초에게 V6 1.5L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결국 디노의 영감과 헝가리 출신 엔지니어 비토리오 야노의 주도로 페라리 V6 엔진이 완성될 수 있었다. 디노 사망 후 10년이 지나 1966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그의 염원처럼 V6 엔진을 미드십에 얹은 스포츠카 디노 206이 등장하였다. 극진하게 아꼈던 아들의 염원이 담긴 차였음에도 페라리 엠블럼은 달지 못했다. 나중에 WRC의 전설이 된 란치아 스트라토스에 탑재되어 1974년~81년 사이 18번의 승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심장이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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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륜 조향 지원으로 큰 차체의 느낌을 지워준다 


페라리의 특이한 작명법

206, 246, 250, 275, 288, 300, 308, 348, 355 456, 512, 550, 575 등 페라리는 숫자로 짓는 이름을 오랫동안 선호해 왔다. 숫자 뒤에 붙이는 글자에도 다양한 의미를 담았다. 250 GTO나 512BB 이런 식으로 말이다. 250 GTO에서 250은 V12 3.0L 엔진의 기통 당 용적(250cc)을 뜻한다. 페라리 초창기에는 이런 형식의 이름이 많았지만 점차 엔진의 기통 수와 배기량, 출력 및 지역 명 등을 표기할 때도 생겼다. 812 수퍼패스트는 800마력-12기통을 뜻한다. GTO는 Gran Truismo Omologata(영어로는 homologated grand tourer)의 약자다. FIA가 주관하는 레이스 규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차라는 의미다. 공도로 뛰쳐나온 레이스카라서 강제 한정판일 수밖에 없다. 말이 호몰로게이션 자동차지 실제로는 레이스카다. 레이스카를 공도에서 타는 것이 불가능한 요즘에는 컬렉터들이 환장할 최고의 수집품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페라리 레이스카라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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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수퍼패스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레터링이 조수석 대시보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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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배기량 과급기가 넘쳐나는 시대 속 페라리는 V12형 6.5L 800마력 자연흡기 엔진이 탑재된다 


정통의 레이스 DNA

페라리는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역사적인 모델이 많지만 그중 기자가 좋아하는 페라리는 단연 250 GTO다. 당시 페라리 최고의 디자이너 세르지오 스칼리예티, 천재 엔지니어로 불리는 마우로 포르기에리, 지아토 비자리니의 협업으로 개발되었다. 지금도 250 GTO는 여전히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소더비 경매에 나올 때마다 최고가 기록을 경신한다. 2013년 10월 미국 코네티컷 주의 컬렉터가 익명의 개인에게 5,200만 달러(약 600억원)에 팔았다. 250 GTO의 심장은 콜롬보(colombo)엔진으로 알루미늄 블록과 헤드를 갖춘 OHC 엔진이다. 정확한 배기량은 2,953cc(3.0L), 실린더 보어 사이즈는 73mm, 피스톤 스토르크는 콜롬보 엔진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58.8mm. 이 엔진은 뱅크각 60° V12형에 매우 짧은 스트로크를 채용하여 박진감 있는 날 것 그대로의 레이시한 엔진이다. 특유의 페라리 V12의 끝내주는 하이피치 톤의 배기 사운드를 뿜어내어 자동차 마니아라면 잊을 수 없는 전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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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덕트 따위는 페라리에 없다. 오로지 공력을 위한 덕트와 스플리터만이 존재한다 


초창기 페라리는 레이싱카 부품을 활용해 만든 양산차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영향 덕분에 ‘V12가 아닌 페라리는 페라리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양한 레이아웃의 엔진이 쓰이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런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599와 F12 그리고 최근의 812 등 12기통 엔진을 고집하고 있는 GT 라인업은 페라리의 중요한 혈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진으로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매력

트랙에서 기자를 맞이한 페라리 812 수퍼패스트는 실제로 보았을 때 큰 덩치와 미려한 선들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를 압도한다. V12 엔진을 앞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다 보니 롱 노즈 숏 데크는 어느덧 페라리의 상징이 되었다. 뭇사람들이 페라리의 상징을 미드십이라고 생각하지만 페라리는 60년대 250LM에서 잠깐 맛보기를 보인 후 디노 206GT(1968)과 70년대 중반 BB 시리즈에서 본격적으로 미드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 그룹B 규정에 초점을 맞춘 288 GTO에서 화룡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 F40, F50, 엔초 페라리, 라페라리까지 수퍼카 라인업은 모두 미드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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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스티어링 방향지시기 버튼보다 더 튀어나와 조작이 편하다


그렇다고 FR 페라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길고 거대한 400과 412를 거쳐 456과 599, F12 베를리네타 등 12기통 엔진을 얹은 고급스러운 GT 페라리의 혈통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리고 그 최신형이 바로 812 수퍼패스트다. 812 수퍼패스트의 디자인은 많은 부분에서 250 GTO 디자인을 채용했다. 여전히롱 노즈 숏 데크 실루엣을 갖췄기 때문에 전설의 페라리 플래그쉽의 계보를 잇는다. 보행자 충돌 안전 기준이 강화되어 디자인에 제약을 받지 않을까 했지만 기우였다. 익스테리어는 너무나 아름답고 섹시하다. 항상 드는 생각이 페라리 프런트 미드십 차들은 사진으로 그 매력을 제대로 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미려한 선이 주는 감동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 최근 V12 페라리 모델은 출시될 때마다 디자인에 대한 반응에 얼마간 호불호가 있었다. 550 마라넬로, 599GTB, F12베를리네타 때에도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아름다움에 그저 탄복하게 된다. 여태까지 많은 페라리를 접했지만 V12 페라리가 최고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눈길을 더 사로잡는 건 리틀 페라리일 수 있으나 V12 페라리의 회전 질감과 사운드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V12 페라리가 진짜 페라리’라는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단, 운전 자체를 즐기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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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램프와 덕트를 감싸는 선은 550 마라넬로의 느낌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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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한 선을 다루는 데는 페라리가 단연 최고다. 다만 극적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엔초 페라리 때부터 이미 완성된 엔진

2002년에 등장한 수퍼카 엔초 페라리는 뱅크각 65°의 V12 F140B 엔진을 얹고 있었다. 812 수퍼패스트의 F140GA 엔진의 전신이니까 17년 동안 사용 중인 셈이다. 페라리는 F140 엔진을 내연기관 종말이 오기 전까지지 계속 개량하며 사용할 것이다. 최초 6.0L였던 배기량은 812 수퍼패스트에서 6.5L까지 키웠다.

실린더 보어가 2mm, 스트로크 역시 2.8mm 늘어나 자연흡기임에도 800마력의 출력을 발휘한다. 변속기는 건식 시퀀셜 6단에서 듀얼 클러치 7단으로 진화했다. 페라리는 599 GTB 이후부터 듀얼 클러치를 채용했다. F140은 워낙 완성도와 잠재성이 대단한 엔진이기 때문에 개량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해졌다. 데뷔한지 17년이 지난 엔진이지만 늘 기술을 뛰어넘는 감성으로 신형이 출시될 때마다 기대하게 만든다.


웨트 상황의 후륜 800마력 수퍼카

멋진 V12 페라리와 서킷은 완벽했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운이 없게도 쌀쌀한 온도에 많은 비가 내렸다. 트랙 주행이 취소될 수도 있었다. 후륜에만 800마력을 쏟아내는 차로 달리기에는 다소 위험한 환경이다. 피트에서 시동을 걸었다.

엄청난 배기량의 V12 6.5L 엔진 사운드는 4일 굶은 시베리아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했다. 트랙에서 열심히 돌고 있는 4기통 터보 차들의 아우성을 아이들링만으로 간단히 집어삼킨다. 맹수 한 마리의 포효에 겁을 먹었는지 트랙을 돌던 차들이 일제히 피트로 들어왔다. 오토 버튼을 눌러 해제하고 주행 모드는 스포츠로 고정, 오른쪽 패들 시프터를 당겨 출발한다. 피트를 나가자마자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아준다. 노면이 젖어있고 타이어 온도 역시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아 4000rpm 아래에서 변속을 했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탈만하다는 오만한 마음이 생긴다. 드라이브 모드를 레이스로 바꾸었다. 스포츠 모드에서도 극적인데 레이스 모드에서는 그 느낌이 배가 된다. 사운드와 댐퍼가 극단적으로 앙칼지면서 맹렬한 상태로 돌변한다. 액셀러레이터를 2/3 정도 밟으니 곧장 튀어나간다. 페라리 특유의 숏 스트로크 질감을 느끼면서 3000rpm에서 한달음에 레드라인인 8900rpm까지 도달한다. 최대 토크가 나오는 7000rpm 이상부터는 그야말로 맹수의 광포한 울부짖음이다. 늙어서 힘 빠진 호랑이가 아닌, 가장 전성기의 성체 호랑이 포효다. 아울러 엄청난 토크와 배기음, 진동이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 같은 떨림으로 전해진다. 800마력에 뒷바퀴 굴림, 게다가 젖은 노면이지만 슬립 컨트롤이 스릴 있어서 아주 재밌다. 그렇다고 해도 젖어 있는 트랙의 연석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마찰이 적은 연석에서의 슬립도 문제지만 연석 바로 옆 배수로에 있는 철망은 마찰력이 극도로 낮기 때문이다. 더욱이 젖은 트랙에서 랩타임 도전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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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트에서 슬립이 발생해도 약간의 카운터만으로 이내 자세를 잡는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운드

게트락제 7단 DCT의 반응과 직결감은 흠잡을 게 하나도 없었다. 습식 클러치 특성상 변속 충격을 느끼기 힘들지만 812 수퍼패스트의 레이스 모드는 과거 건식 시절의 ‘쿵’ 때리는 듯한 충격이 운전자를 흥분시킨다. 역시나 영락없는 페라리다.

고단에서의 rpm 상승 역시 저단처럼 날카롭다. 높은 단수에서도 회전수 상승이 빠르기 때문에 스티어링 림 상단의 LED 인디케이터에 집중해야 한다. 이 차는 속도계를 보는 차가 아니다. 시속 몇 km로 코너를 돌았느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페라리의 고정식 패들 시프터는 코너에서 변속하는 것보다 액셀러레이터를더 새게 밟아보지 않겠냐고 끊임없이 재촉하는 듯하다. 코너를 탈출하며 변속할 타이밍에도 발끝이 액셀러레이터로 향한다. 뒤가 흐르면서 꽁무니가 요동을 치지만 약간의 카운터만으로도 이내 자세를 잡는다. 게다가 귀와 두개골, 가슴까지 울리는 엔진 사운드가 사람을 아주 미치게 만든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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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모드로 트랙에서 달릴 때는 GT카가 아니다. 세상 어떤 메이커도 812 수퍼패스트처럼 극적이고 퓨어한 느낌의 주행 질감을 줄 수 없다


저단, 고단할 것 없이 리니어한 회전 질감, 주변의 소음을 집어삼키는 흉포한 사운드, 레이스 모드에서의 빠른 변속 타이밍으로 인한 시퀸셜 시프터와 같은 변속 충격의 느낌. 아울러 페라리 최초로 달린 전자식 스티어링(EPS)은 기존 유압식과 이질감이 없으면서 조종성은 더욱 정교해졌다. 2,720mm의 긴휠베이스임에도 후륜 조향 덕분에 고속으로 코너를 파고들 때 휠베이스가 짧은 차처럼 적극적인 공략이 가능하다. 아울러 세라믹 브레이크는 트랙에서의 과격한 사용에도 페이드 현상이 없을 뿐 아니라 브레이크 포인트를 지나친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속도를 줄인다. 분진이 나오지 않아 관리가 편하고, 일정 온도만 올라가면 시종일관 리니어한 제동력으로 감동과 신뢰를 준다.


달콤한 인생

812 수퍼패스트는 여기에서 더 나아질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해졌다. 한참 개발 중인 하드코어 버전은 지금의 차이를 어떻게 벌릴 수 있을까? 개발자들의 고뇌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812 수퍼패스트 운전석에서 경험한 일들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일까? 행사를 마치고 나니 조금 전까지 느꼈던 흥분과 감동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얼마후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이베이에 그리스 셀러가 내놓은, 전손 된 라페라리의 키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담아보았다. 그리고는 영동대로 스타벅스 주문대에서 커피 나오기를 기다리며 페라리 리모트 키를 또각 눌러 근처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을 새빨간 맹수를 깨우는 상상을 해보았다. 비가 내리던 그 날, 서킷에서 느꼈던 페라리와의 짜릿한 추억이 다시금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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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범수 기자 

사진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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