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풍요로움에 대하여,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2019-05-17  |   66,937 읽음

미국식 풍요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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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EV 등 자동차 동력원의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저배기량에 과급기를 달아 출력과 효율을 높인 엔진도 많아졌다. 하지만 주행 질감에서는 여전히 대배기량 다기통 엔진에 못 미친다. V8 자연흡기 엔진의 매력을 경험하게 되면 멋과 풍요로움이 있는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범인(凡人)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을 던지는, 바로 그런 존재다.


현행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2013년에 출시되었다. 6년여 동안 연식변경으로 초기 모델의 단점이나 효율을 조금씩 다듬었다. 이번에 시승한 2019년형 에스컬레이드 플레티넘 트림은 18년형과 익스테리어, 인테리어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아울러 전동 사이드 스텝이 추가 되어 승하차도 편해졌다. 그릴은 기존보다 크롬이 추가되어서 그릴 사이사이 간격이 좁아진 덕분에 플래티넘이라는 트림명에 어울리는 웅장하고 단단한 용모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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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 사이사이 크롬이 추가되어 단단하면서 고급스럽다 


에스컬레이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롱휠베이스 모델인 ESV(Escalade Stretch Vehicle)를 선호한다. 하지만 기자는 숏 보디의 균형미에 눈길이 간다. 만약 산다면 숏 보디를 선택할 것이다. 기본형 에스컬레이드 자체도 워낙 육중한데 ESV는 전장이 더 길어 흡사 미니버스 덩치와 맞먹는다. 검은색 ESV라면 거짓말 조금 보태 운구차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아직 ESV는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아 도로에서 보이는 ESV는 직수입 업체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전한 미국식 마감의 아쉬움

에스컬레이드 플레티넘의 실내 소재는 요즘 나오는 영국 메이커보다 오히려 나은 수준이다. 천장과 필러까지 감싸는 알칸타라, 최상급의 가죽, 우드그레인, 하이글로시, 메탈 감각의 버튼 등 많은 부분에서 고급차로서의 위상을 다지기 위해 공들인 게 티가 났다. 디자인도 흠잡을 데가 없다. 불만인 건 미국차 특유의 단차와 햅틱(haptic) 버튼의 조작감 정도다. 차라리 물리버튼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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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알칸타라, 가죽, 우드로 마감되어 있다 


제일 거슬렸던 부분은 인테리어 단차와 투박한 고무 몰딩이다. 칼럼식 기어 디자인은 매우 훌륭하나 작동 질감은 고급스럽지 않다. 칼럼식 체인지 레버에 구리스를 발라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을 정도다. P에서 D로 내려가는 과정이 전혀 매끄럽지 않다. 3일간 시승하면서 한 번도 P에서 D로 단번에 움직인 적이 없고 아래에 있는 L1(로 기어)으로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각이 둔한 사람이라면 L1인줄 모르고 액셀 페달을 밟으면서 “차가 왜 이렇게 안나가?”할 수도 있으니 클러스터에서 꼭 D인지 확인해야 한다. 롤스로이스나 메르세데스 벤츠 등 고급차에서 드문 방식이 아닌 칼럼식 시프트는 이게 엄청난 기술을 요하는 게 아닐 터. 그냥 미국식 러프함으로 받아들이면 될 거 같다. 에스컬레이드의 경우 오른쪽으로 많이 돌출되어서 센터페시아 터치 스크린을 만질 때 레버에 팔이 닿는다. 달리면서 레버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왠지 불안하다.


남자의 가슴과 귀를 후벼 파는 박력의 V8

OHV 방식의 V8 엔진은 현존하는 가장 안정적이고 탈 없는 엔진이 아닐 수 없다.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복잡한 장치가 들어가지 않아 엔진 블록을 작게 만들수 있고 가볍다. 아울러 엔진 상단에 캠샤프트 같은 장치가 없어 저중심 설계가 가능하다. 더욱이 에스컬레이드는 블록과 실린더 헤드 까지 모두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하여 무게는 줄이고 내구성은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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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뷰 카메라 미러는 야간에 유용하지 않다. 저녁이 되면 꺼두게 된다 


OHV 엔진은 전성기가 이미 지나간 방식이다. 하지만 미국 메이커 한정으로 꾸준한 개량을 거쳐 기술적으로 더 이상 건드릴 곳이 없을 만큼 완성된 엔진이기도 하다. 내연기관이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는 한 미국인의 OHV 엔진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이 방식은 고회전이 어렵고 부조로 인한 간헐적인 진동 문제도 있지만 예찬론자에게는 이 또한 매력이다. 할리-데이비슨 바이크의 OHV 엔진 특유의 불규칙한 진동을 선호하는 마니아들과 비슷한 이유다. 고회전이 힘들다지만 서킷에서의 실적도 화려하다. 나스카(NASCAR) 레이스용 V8 OHV 엔진은 10,000rpm에서 800마력이 넘는 출력을 뿜어낸다.

에스컬레이드의 V8 엔진은 배기량 6.2L에 최신 기술을 더해 DOHC 엔진 못지않은 효율까지 손에 넣었다. 상황에 따라 밸브 타이밍을 바꾸고 직분사 시스템과 실린더 휴지 기능(Active Fuel Management)이 효율적인 연소를 돕는다. 넉넉한 토크로 저속에서만 강점이 있는 OHV는 이제 옛말이다. 아울러 우렁찬 배기음과 진동이 시동 걸 때마다 맹수를 깨우는 듯한 감각으로 심장을 뛰게 만든다.


롤스로이스에도 사용된 하이드라매틱

GM 산하에 있는 캐딜락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고급 브랜드다. 미국 대통령 의전차라는 상징성과 항공우주 분야에서 영감을 받은 테일 핀 디자인의 전성기는 미국식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지금의 미국 할아버지 세대는 2차 대전 이후~오일쇼크 이전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자동 변속기는 이런 풍요로운 시대에 발전된 기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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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티넘 트림에는 전동식 사이드 스텝이 장착되어 승하차가 편하다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고출력, 고토크에 대응하는 다단 자동 변속기가 그리 흔치 않았다. 21세기 초반까지 롤스로이스-벤틀리같은 최고급차라도 3단, 4단 AT가 주류였다. 1955년부터 2002년 롤스로이스 코니시 5세대까지(BMW 엔진이 들어간 실버세라프는 ZF제 5단 AT로 바뀌었다) 근 반세기동안 롤스로이스-벤틀리에 자동 변속기를 공급한 회사가 바로 GM이었다(이후 2006년까지 벤틀리 아르나지에 공급). 이 하이드라매틱(hydramatic) 변속기는 미국식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하이드라매틱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신형 에스컬레이드는 GM제 하이드라매틱 10단 자동변속기가(10L80) 탑재 되었으니 꾸준한 개량으로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꽉 찬 자연흡기

개봉역 1번 출구에서 정차되어 있는 에스컬레이드는 한눈에 띄었다. 엄청난 덩치, 각이 살아있는 보디라인, 정직한 선으로 그려진 그릴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익스테리어 캐릭터 라인은 기교가 없는 시원한 라인으로 마초 감각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어를 여니 덩치에 맞는 묵직함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껑충 높은 차체지만 자동으로 펴지는 전동식 사이드 스텝 덕분에 올라타기 힘들지 않다. 시트 포지션도 보기보다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기자의 몸에 맞게 시트를 세팅했다. 거구의 차체임에도 페달 높이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딱 맞는 운전 자세를 잡을 수 있다. 시동을 걸면서 OHV 특유의 진동을 예상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떨림은 없었다. 배기는 아주 밀도 있는 꽉 찬 사운드를 뿜어냈다. 독일산 V8과는 중저음 톤이 비슷하나 에스컬레이드 쪽이 자연스러운 날것 그대로의 사운드다. 여기에 수퍼차저나 터보차저를 달게 되면 배기통로가 막히면서 소리가 달라진다. 자연흡기 사운드를 선호하는 기자로서는 에스컬레이드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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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 들어간 소재는 웬만한 영국 메이커보다 나은 수준이다


온로드에서 빛나는

복잡한 서울 도심을 관통해 적막한 국도에 올랐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노면에서도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magnetic ride control)은 제 기능을 했다. 오일에 섞인 자성물질과 전자석을 활용해 댐핑 특성을 실시간 조절하는 기술이다. 1/1000 초 단위로 반응하여 최적의 드라이빙을 선사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름만 다를 뿐 페라리, 아우디의 댐퍼도 비슷한 원리다. 움푹 파인 맨홀과 적당히 솟은 요철을 넘어가는데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어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모노코크인지 프레임 보디인지 알아채기가 힘들다. 공도에서는 아주 훌륭한 댐퍼다. 다만 시골 골목에서 불법 설치된 요철을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경우 프레임 보디라는 걸 체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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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에 맞는 22인치 휠. 플레티넘 트림은 휠사이사이 크롬이 입혀져 고급스럽다 


지상고가 높은 차로 착각해서 비포장길을 마구 달리면 프런트 립과 범퍼가 훼손될 수 있다. 풀사이즈 SUV치고 전면은 지상고가 그리 높지 않다. 후륜구동 기반의 구동계에 프레임 보디라 해서 오프로더인 것은 아니다. 특히나 휠베이스가 긴 ESV라면 더더욱 오프로드 주행을 추천하지 않는다. 사실 에스컬레이드는 온로드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차다.


의외의 연비

이 차의 공인 연비는 6.8km/L. 국내 기준으로는 사악한 연비지만 미국산 풀사이즈 SUV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덩치와 무게, 막강한 제원, 가격을 고려했을 때충분히 납득할만한 수준이다. 출-퇴근 시간대 강변북로는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다. 강변 북로를 1시간 타면서 5km/L의 연비가 나왔다. 주행보조 장치를 키지 않고 얻은 수치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키고도 비슷한 수치였다. 차들이 뜸해지는 밤 11시에 고속도로에 올랐다. 보통 시승을 하면 일상적으로 차의 한계치를 실험해 본다. 하지만 에스컬레이드는 딱 2번 정도 풀 스로틀 했을 뿐이후에는 하지 않았다. 기름이 아까워서도 차가 불안해서도 아니다. 120km 미만 항속에서도 충분히 운전이 즐겁기 때문이다. “OHV 특성상 저속에서 큰 토크가 나오기 때문에 고속은 재미가 없어. 고속은 독일산 DOHC가 최고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에스컬레이드는 회전 상승이 빠를 뿐 아니라 고속에도 매우 안정적이다. 기술의 발전은 OHV마저도 이 수준으로 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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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도에서 봤을때가 가장 멋지다. 마치 살아있는 로봇 같다


후륜 구동에 크루즈 컨트롤로 속도를 120km에 고정했다. 이 상태로 180km 가량 달리니 9km/L의 연비가 나온다. 도심지에서는 자비 없는 덩치에서 오는 불편함, 극악의 연비가 발목을 잡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쾌적할 수가 없다. 도심이 아닌, 한적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에스컬레이드의 매력이 배가될 것 같다. 아울러 정속 상황에서는 중간중간 실린더 4개의 연료공급을 끊어 연료 소모를 줄인다. 미국 메이커들은 대배기량 엔진의 연료소모를 줄이기 위해 가변 실린더 기술을 비교적 일찍 도입했다. 하이드라매틱 10단 자동변속기는 각 단마다 록업 클러치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예전에는 일부 기어에서만 록업 클러치가 걸리거나 운전자의 발재간으로 해결해야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이제는 똑똑하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연료 소비를 줄인다. 토크 컨버터의 직결감도 흠잡을 데 없다.


어딜 가도 시선 집중

정체되어 있는 도로에 올랐다. 전폭이 넓어서 백미러를 볼 때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도로가 좁은 구도심의 경우 차선을 밟는 경우가 많아 몸이 절로 긴장된다. 이런 큰 차는 감으로 운전하는 것이 아닌 동공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작은 차를 유유자적 편하게 타던 입장에서 보면 에스컬레이드의 큰 덩치는 분명 핸디캡이다. 그런데 영등포역 앞에서 신호에 걸려 정차하고 있으니 많은 인파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일제히 에스컬레이드에 집중한다. 옆 차선에 있는 택시나 버스의 창문을 열고 차가 크고 너무 멋지다면서 칭찬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자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고급 스포츠카를 탈 때는 양보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에스컬레이드에게는 양보를 잘 해주는 듯했다. 도로에서의 존재감은 단연 으뜸이다.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흐뭇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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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개성을 드러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모듈러 엔진과 공통 플랫폼으로 개성적인 자동차는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에스컬레이드는 남다른 개성으로 가득하다. 한때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던 OHV는 효율 등의 문제로 이제 희소한 엔진이 되어버렸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꾸준한 개량을 통해 과거의 문제들을 지워나가고 있다. 이제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많은 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V 시대가 되고, 법적으로 내연기관이 금지되지 않는 한 OHV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아울러 이런 멋진 심장을 품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한번 경험해 보면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 이상의 존재임을 누구라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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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맹범수 기자 

사진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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