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된 차로 F1 서킷을 달리다
2018-07-11  |   64,605 읽음

FI TRACK EXPERIENCE

10년 된 차로 F1 서킷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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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혹사시키지 마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래된 포르테 쿱과 함께 서킷에 올랐다.


솔직히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14만원이면 F1 서킷을 맘껏 탈 수 있다는 동료의 솔깃한 제안에 후다닥 신청을 한 뒤에야 기자의 차가 10년이 다 된 포르테 쿱(2009년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피로가 누적돼 평소에도 석 달에 한 번 꼴로 정비소를 들락거리는 상황. 혹여 트랙 위에서 서버릴지 몰라 신청을 물릴까도 생각했지만, F1 서킷을 달려보고 싶은 욕망이 눈을 멀게 했다. 그렇게 늙은 포르테 쿱을 데리고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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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오토바이 헬멧과 작업용 장갑. 조금 처량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아꼈다


14만원으로 트랙을 80분이나 달릴 수 있는 ‘혜자’로운 행사는 ‘SK 지크 레이싱 페스티벌.' 다른 브랜드 오일을 애용하는 기자가 이런 혜택을 누려도 되나 싶지만 ’지크 엔진오일 쓰는 차만 출전 가능‘ 같은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트랙 주행은 20분씩 4번 총 80분이 주어져 영암 트랙을 질리도록 누빌 수 있다. 그만큼 차에겐 가혹한 환경이 될 테지만.

기자의 포르테 쿱은 2.0L 수동 모델이다. 배기량별로 나눈 A~D 4개 그룹 가운데 1,400cc~2,000cc급 B조로 배정됐다. 나름대로 가장 큰 2,000cc 배기량이라 유리할 것 같지만 턱도 없는 소리. 요즘 과급기가 난무하는 신차들 앞에선 2.0L 자연흡기 엔진 158마력 출력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튜닝이라고는 앞·뒤·아래 차체 강성 보강만 조금 해놓은 게 전부라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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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 상설 트랙. 고저차가 적은 편이며 완만한 코너와 격한 코너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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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킷 라이선스 교육. 이론교육 후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교육만 잘 받으면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걱정 마시길  


내 차의 한계, 조목조목 파악하다

직업 특성상 고성능 차로 서킷을 달릴 기회는 많았으나 정작 내 차로 달리는 건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370km 가량 떨어진 영암 서킷 역시 처음. 수동 변속기(시승차는 수동변속기가 거의 없다)로 트랙에 오른 것도 처음이다. 포르테 쿱에 앉아 헬멧과 장갑을 착용한 채 피트에 서있자니 운전면허시험장 출발선에 섰던 그때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드디어 트랙 입장을 알리는 초록 불이 켜지고, 올망졸망한 B조 차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일단 첫 바퀴는 타이어 온도를 높이고 트랙도 파악할 겸 서서히 달린 후 두 번째 바퀴부터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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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에서 바라본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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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로 F1 선수가 된 느낌으로 달릴 수 있다


이날 준비된 코스는 3.04km 길이 상설 트랙. 첫 코너는 긴 직선 후 급격히 꺾인 헤어핀 코너다. 직선 주로에서 시속 150km까지 냅다 때려 밟은 후 코너 진입 전 브레이크를 밟자 제법 든든하게 속도가 준다. 얼마 전 디스크와 패드를 교체한 게 주효했던 모양. 오히려 트레드 웨어 500에 빛나는 사계절 타이어가 먼저 한계를 드러냈다. ‘끽~끼긱~끽’ 바닥을 놓을 듯 말 듯 브레이크를 조절해 코너 안쪽으로 방향을 꺾으니 예상보다 일찍 그립 한계를 넘어 언더스티어가 발생한다. 평소 고갯길에선 접지력이 이렇게까지 부족하지 않았는데, 아마 폭이 넓은 트랙 위에서 속도감이 무뎌졌나 보다. 이후 언더스티어를 제어하며 달리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고성능 타이어가 절실했다.

세 개의 코너를 지나면 고저차가 있는 직선주로가 나온다. 2단 기어에서 페달을 있는 힘껏 밟자 뒤에서 달리던 소형차들이 멀어진다. “하하 내 차가 1.6처럼 보이지만 2.0이다 이놈들아”하며 속으로 뿌듯해 할 무렵, 갑자기 노란 섬광이 성큼 다가온다. 룸미러로 확인한 모델은 마쓰다 RX-7. “네가 왜 여기에...”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로터리 엔진의 호쾌한 소리가 기자를 스쳐 갔다. 설마 배기량 1.3L라고 B그룹에 나온 걸까? 덕분에 잠깐 신났던 2.0L 포르테 오너의 자부심은 우물 안 개구리의 치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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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데이는 경쟁이 아니어서 대부분 운전자의 매너가 좋다


이어지는 두 개의 완만한 코너는 레코드라인만 잘 타면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은 채 통과할 수 있다. 포르테 쿱 서스펜션이 순정치고는 꽤 탄탄해 고속 코너에서 든든히 버텨주고, 158마력을 고속에서 쥐어짜 봐야 바닥을 놓칠만한 힘이 나오지도 않기 때문. 다만 두 고속 코너가 끝난 후 이어지는 직각 코너가 문제다. 빠른 속도에서 감속하며 코너 안쪽으로 방향을 트니 뒤가 바깥쪽으로 슬쩍 흐른다. 감속으로 무게가 앞으로 쏠려 뒷바퀴 접지력이 빠르게 줄면서 생긴 오버스티어다. 악명 높은 포르테 쿱의 피시테일 현상도 비슷한 원리. 브레이크를 살짝 풀고 카운터 스티어로 자세를 추스르긴 했지만 직접 겪어보면 간덩이가 콩알만 해진다. 아무렇지 않게 앞서 달리는 아반떼 스포츠의 뒤 멀티링크 서스펜션이 새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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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차부터, 중형 세단, 수퍼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들이 트랙 주행을 위해 모였다  


이런 현상은 마지막 코너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직선 구간 전 90°로 급하게 꺾이는 구간으로, 감속과 함께 코너에 진입하면 역시 뒤가 미끄러지면서 코너 안쪽으로 파고든다. 다만 이번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오히려 오버스티어가 흥미를 돋운다. 마치 직선 구간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진입하는 쾌감이 일부러 오버스티어를 유도하게 만든다.

마지막 직선구간에서의 가속은 1.2톤 가벼운 무게 덕분에 158마력 출력으로도 부족함이 없다(B그룹 안에서는). 그런데 기어비가 아쉽다. 2단으로 힘차게 가속한 후 3단으로 변속하면 rpm 바늘이 푹 꺼진다. 이건 평소에도 느껴왔던 문제지만 서킷 주행에서 그 답답함이 배가된다. 포르테 쿱 5단 수동 변속기 종감속비는 4.188, 기어비는 1단부터 순서대로 3.636/1.962/1.189/0.905/0.702. 3단 기어비가 늘어져 2단에서 rpm을 아무리 높여본들 변속하면 맥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2~3단 변속이 가장 많은 영암 서킷에서 정말 불편했다. 아마 포르테 쿱 개발진은 트랙은커녕 고갯길도 제대로 달려보지 않은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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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cc 미만 A조 주행 장면. 온갖 선수들이 참여해 오히려 B조보다 화려했다


이후 네·다섯 바퀴를 더 돌아도 될 만큼 트랙 위에서 20분은 충분했다. 그리고 20분 내내 고통받은 10년 차 포르테 쿱도 의외로 멀쩡했다. 계기판상 냉각수 온도는 요지부동이고 클러치 감각도 큰 변화가 없다. 단 브레이크 반응이 먹먹해지고 타이어는 접지력이 많이 떨어졌다. 이런 아쉬움이 들 즈음 체커기가 흔들리며 주행이 종료됐다.  

남은 주행은 이제 세 번. 이미 충분히 달렸는데 지루하진 않을까? 천만의 말씀. 네 번 모두 주행해도 더 달리고 싶을 만큼 영암 트랙은 재밌다. 달리면 달릴수록 익숙해져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매 코너가 항상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코너를 공략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10년 차 순정 포르테 쿱으로도 트랙 주행을 즐기는 데 무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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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주행 후 냉각 중인 포르테 쿱. 다음 주행까지 80분이나 쉴 수 있다


물론 고성능 스포츠카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운전을 즐기는 데 필요한 건 좋은 차보단 운전자의 열정이다. 어차피 트랙데이는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트랙 위 또 다른 묘미. 내 차의 부족한 부분을 찾는 재미다. 이날 서킷을 누비면서 4계절 타이어의 성능과 늘어진 기어비, 부족한 뒷바퀴 접지력 등 단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이를 하나씩 보완하고 다시 트랙을 달려 또 부족한 부분을 찾아 고치다 보면 내게 맞춘 진짜 ‘튜닝’을 할 수 있을 터다


만만찮은 ‘후폭풍’

트랙데이를 즐긴 뒤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 기자의 포르테 쿱은 견인차에 끌려간다. 별안간 클러치가 먹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원인은 클러치를 밀어주는 릴리스 실린더의 고무호스 파열. 그저 오래되어 생긴 문제일 수 있지만 서킷 주행의 피로가 크게 한 몫 한 걸로 보인다. 이 외에도 트렁크 안에 넣어둔 여분의 헬멧이 쿵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브레이크 램프 뒤를 치는 바람에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자잘한 고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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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을 달리고 나면 지우개처럼 타이어 ‘똥’이 나온다


그래도 차 상태는 기자의 통장과 비교하면 양반이다. 트랙데이 하루 참가비 14만원, 서킷 라이선스 취득비 10만원, 서울-영암 왕복 교통비 약 15만원까지 숙식비를 빼고도 대략 40만원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비싸다면 비싼 대가. 아마 차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시도조차 망설일만한 값이다. 그러나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한 기자는 다음 트랙데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번엔 고성능 타이어와 함께다.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은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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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경주장으로 더 유명한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은 국제자동차경주연맹(FIA) 공인 최고등급인그레이드1 서킷이다. F1에서 보기 드문 시계 반대 방향이고, 1.2km 기다란 직선 구간을 갖춘 게 특징. 총 길이 5.615km로 그 규모는 축구경기장 170개에 달한다. 그러나 F1 경주장이라 불리는 별칭과 달리 누적된 적자 때문에 지난 2014년부터 F1 경기는 열리지 않는다. 요즘엔 국내 레이싱과 레이싱 이벤트, 그리고 자동차 테스트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SK 지크 레이싱 페스티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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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로부터 공인받은 트랙데이. 헬멧과 장갑 등 최소한의 안전 장비만 갖추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올해 기준 1000cc 미만 A조, 1,400cc~2,000cc급 B조, 2,000cc~3,800cc C조, 3,800cc 이상 D조 등 다양하게 등급을 나누어 경차부터 수퍼카에 이르기까지 어떤 차든 비슷한 등급의 차들과 함께 트랙을 즐길 수 있다. 지난 4월 28~29일 라운드 1이 개최됐으며, 6월 16~17일 라운드 2가 열렸다. 


 

글 | 윤지수 기자 사진 | 윤지수,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 지크레이싱(www.zicrac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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