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아메리칸 오리진 컨티넨탈과 부커스 2018-05-17
아메리칸 오리진컨티넨탈과 부커스전통 세력 블렌디드 위스키와 이에 맞서는 신흥 세력 싱글 몰트 위스키는 양강 구도를 형성한 지 오래. 최근 여기에 더해 새로운 조류가 생겨났다. 저 멀리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버번위스키다.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버번, 부커스를 마셨다. 부커스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차가 있었다. 링컨 컨티넨탈이었다.라이징 스타, 링컨미국 포드의 고급차 브랜드 링컨(Lincoln). 지난달 편집부가 진행한 플래그십 기획 기사에는 끼지 못한 브랜드다. 엄연히 기함 세단 컨티넨탈(Continental)을 보유 중인데도 말이다. 아시아, 유럽 고급 세단들의 흥겨웠던 파티에 자동차 대국 미국이 함께하지 못한 건 컨티넨탈의 전륜구동 기반 사륜구동 시스템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고급차는 뒷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편집부의 이유 있는 고집을 꺾는 덴 실패했지만, 링컨은 요즘 시장에서 보란 듯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6년 북미 국제 모터쇼에서 화려한 부활을 알린 컨티넨탈은 국내 출시 직후 링컨 브랜드 월별 판매량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의차 이미지가 강했던 링컨의 화려한 부활이다. 링컨은 컨티넨탈을 통해 1980년대까지 존. F.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대통령의 의전차로서 그 위상이 하늘을 찔렀던 영광의 세월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낯선 위스키, 버번이렇듯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링컨이지만 아직 길 위에서 쉽게 만나긴 어렵다. 처음 버번(Bourbon)을 마셨을 때가 그랬다. 도로에서 운 좋게 링컨 차를 만난 격이랄까. 어릴 때부터 집안 장식장을 채우고 있던 발렌타인이니, 로얄살루트니 하는 블렌디드 위스키는 기자를 ‘양주’에 눈 뜨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이젠 트렌드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안착한 싱글 몰트는 아예 몇 병 구비해놓고 나이트캡(잠을 청할 때 마시는 술)으로 즐기고 있다. 그런데 버번은? 술에 관심이 있더라도 깊이 있게 그리고 오래 즐겨온 게 아니라면 맛도 모르는 이가 태반일 거다. 나부터가 그랬으니까.버번위스키는 북미 지역 특산물인 옥수수와 호밀을 이용해 만든다. 보리, 쌀을 이용한 부드러운 위스키에 익숙한 우리에게 버번은 꽤 낯설 수밖에 없다. 술 많이 마시기로는 당당히 월드클래스를 자처하는 한국의 국민 술, 소주는 버번의 도수에 비하면 애교에 그친다. 43도는 기본, 45~50도에 달하는 것도 많다. 일반적인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거친 맛도 버번의 특징. 그중 부커스(Booker's)는 강한 알코올과 거친 맛 뒤에 숨은 부드러움이 기억에 남는 버번이다.원숙미 품은 컨티넨탈컨티넨탈은 엄연히 링컨 브랜드의 우두머리 자리를 꿰찬 플래그십 세단이다. 현재로선 캐딜락 CT6와 함께 우리나라에 판매되는 미국 대형 세단의 대표 모델이다. 사실상 유럽산 세단이 평정한 우리나라이지만 신진 세력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유럽산이 평정하다시피 한 위스키 시장에서 분투 중인 버번과 닮았다. 부커스를 들이켜면서 컨티넨탈이 떠오른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배경, 어딘지 모를 낯선 인상······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출신을 불식시키고 마는 완성도를 갖췄다는 데서 일맥상통한다. 인지도를 중시하는 첫차 구매 경향 때문에 링컨은 어느 정도 운전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오너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컨티넨탈도 마찬가지다. 비싸고 흔한 대형 세단 사이에서 특별함을 즐기고 싶은 이들의 타깃이 된다.컨티넨탈이 보여주는 실력은 다분히 플래그십스럽다. 일단 외모부터 가망 고객군을 넓히기 위해 스포티함을 버무리는 여느 대형세단들과 비교해도 기품이 있다. 클래식함이 넘치다 못해 뚝뚝 흘러내린다. 실내 역시 몇천만 원 더 비싼 세단 못잖은 디테일들로 뒤덮여있다. 인생 1막을 넘어 생애 전환기를 지나며 여유를 찾는 이라면 컨티넨탈의 내실 있는 기품에 흡족한 미소를 지을 거다.컨티넨탈의 최고출력은 393마력으로 라이벌인 CT6 3.6의 340마력을 크게 웃돈다. 비슷한 가격의 제네시스 EQ900(3.3터보 370마력)까지 포함시켜도 우월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동을 켤 때만 해도 차분히 일어나던 컨티넨탈은 페달을 깊숙이 밟자 묵직한 바디를 잊게 만들 정도로 빠르게 가속한다. 잠시 과욕을 부렸나 싶어 페달에서 살짝 발을 떼면 대형 세단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짐짓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간혹 거친 노면을 거르지 못하고 엉덩이까지 전달하는 건 약간 아쉽지만 이미 고득점을 한 탓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10세대 컨티넨탈은 최상위 트림 프레지덴셜 모델이 8,940만원에 팔린다. 빠다코코낫 품은 부커스부커스는 미국 켄터키주의 짐빔(Jim Beam) 증류소에서 만든다. 짐빔 증류소의 5대 사장이었던 부커 노(Booker Noe)는 누가 증류소 집안 아들 아니랄까봐 술을 끔찍이 아낀 애주가였다. 6~8년 숙성된 짐빔 위스키 중에서도 최상급 원액을 그대로 병에 담아 소수의 지인들과 나눠 마셨는데 이것이 바로 은밀한 버번위스키, 부커스의 탄생 배경이다. 원액 그대로 담았으니 도수는 무려 60도를 웃돌아 럼, 고량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발효통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63도 안팎이다. 부커스는 병마다 각기 다른 라벨을 붙여 숙성 연한과 도수를 표기하고 있다. 숙성통끼지 섞거나 물을 더해 도수를 맞추기 않는,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위스키다. 맛을 보기 전에 향을 조심스레 맡는다. 날카롭게 피어오를 알코올이 분명 재채기를 부를 테니 말이다. 유리잔 바깥을 천천히 타고 오른 코는 어느덧 절벽을 넘어섰다. 이상한 일이다. 알코올의 화한 느낌은 전해지지만, 바닐라, 메이플 내음이 이를 덮어 버린다. 어릴 적 자주 먹던 과자 빠다코코낫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나던 냄새다. 술을 딴 지 오래 됐나 싶어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불과 엊그제 딴 새 술이라고.머리를 긁적이며 한 모금 마셔본다. 첫 느낌은 부드럽다고 느낄 정도로 오일리하다. 그러나 캐스크 스트렝스인지라 알코올이 혀를 재빠르게 훔치고 사라진다. 그 뒤로 버번임을 알리는 묵직한 매운맛이 입안 전체를 자극한다. 통후추 혹은 산초 같은 조미료를 혀에 바로 떨군 듯한 맛이다. 이 때문에 입천장은 잠시 얼얼해지기까지 하지만 부커스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낸 내게 달콤한 뒷맛을 선물한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버번위스키의 풍미와 다를 바 없지만, 거친 맛은 덜고 재료 본연의 캐릭터가 잘 전달되게끔 세팅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도 버번은 버번인 만큼 아무래도 위스키에 혀 좀 적셔봤다는 경력자들에게 어울린다. 젊은 고객보단 유행을 좇지 않는 원숙미를 갖춘 연령대가 어울리는 컨티넨탈처럼 말이다.지난번 오반 14년이 데일리 위스키라면, 부커스는 위클리, 혹은 먼슬리에 가까운 술이다. 불타는 금요일이나 월 마감을 끝낸 날에 입에 한잔 털어 넣기 딱 좋다. 하이볼로 유명한 일본 산토리가 짐빔 증류소를 인수한 탓에 일본에서 사는 게 부커스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구하려면 10만 원에 웃돈 몇 만원을 더 얹어야 가능하다.글 김민겸 기자 사진 포드세일즈서비스코리아, 에드링턴코리아
서울 남산 순환로와 페스타 다이닝 , 봄날에 간다 2018-05-17
서울 남산 순환로와 페스타 다이닝봄날에 간다답답한 서울 하늘 아래서도 청명한 날이 있듯, 서울에도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서울 남산 순환로다. 명동에서부터 소월길을 따라 국립극장까지 이어지는 길. 그 길의 끝자락에서 꽃처럼 예쁜 한식 한 상을 맛보았다.봄에 가장 좋은, 남산 순환로복작거리는 명동역 주변을 빠져나와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향하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길은 곧 소월길을 따라 국립극장을 향한다, 악셀러레이터에 얹은 발끝엔 나도 몰래 힘이 들어간다. 큰 행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딱히 차 막힐 일이 없어, 바쁜 일상 속에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어 자주 찾곤 한다. 남산 순환로는 사계절 모두가 만족스러운 드라이브 코스. 봄날의 벚꽃과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 단풍과 하얀 겨울눈이 내린 풍경 등 남산을 중심으로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봄이면 흐드러진 벚꽃나무에서 벚꽃잎이 살포시 보닛 위로 내려와 앉는다.봄꽃을 만끽할 수 있는 남산순환로컨템퍼러리 한식 레스토랑, 페스타 다이닝풍광에 젖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다다른 국립극장. 맞은편엔 한국이 낳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인 타워호텔을 리노베이션해 지난 2010년에 문을 연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 눈에 들어온다. 도심 속 리조트를 표방하는 이곳은 야외 수영장 ‘오아시스’로 유명한데 이름처럼 삭막한 서울 아래 단비 같은 핫플레이스 중 하나다. 창밖으로 오아시스를 바라볼 수 있는 ‘페스타 다이닝(Festa Dining)’은 고든 램지의 수제자로 유명한 스타 셰프 강레오의 노하우가 담긴 컨템퍼러리 한식 레스토랑. 2015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식음 총괄 디렉터로 부임한 강레오 셰프는 ‘테이스트 오디세이’라는 미식 프로모션을 통해 최상의 식재료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140여 개 시군을 누볐다. 그가 4만 5,000km에 달하는 여정을 통해 발견한 최상의 식재료로 개발한 40여 가지 메뉴를 페스타 다이닝에서 선보인다. 180석 규모의 페스타 다이닝은 크림색을 메인 컬러로 구성, 우아한 대리석 테이블과 웜그레이 색상 가죽의자로 럭셔리한 분위기를 낸다. 인테리어의 하이라이트는 6m 높이에 달린 샹들리에. 천장을 가득 메운 크리스탈 비즈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하다. 레스토랑 앞으로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가 편리하며 발레 주차도 가능하다.크림 컬러의 페스타 다이닝 인테리어꽃같이 아름다운 대접, 한상 차림같은 값이면 상대적으로 한식은 양식보다 만족하기 쉽지 않다. 익숙한 맛이기에 기대치가 더욱 높은 탓이다. 페스타 다이닝이 추구하는 컨템퍼러리 한식은 맛은 물론 보는 재미가 훌륭하다. 메뉴 하나하나에 지역 이름을 넣은 이유는 ‘좋은 요리는 좋은 식재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이 귀중한 요리를 장인이 정성스레 만든 식기에 담아내어 봄날의 꽃같이 아름다운 한상 차림을 완성한다.오찬과 찬합으로 구성된 런치는 순서대로 나오는 코스가 아닌, 한상차림이다. 아내와 함께 주문한 메뉴는 오찬 선과 찬합 진. 먼저 오찬 선은 장충동 족편과 금산 산야초 겉절이, 서산 대하 탕평채와 홍시소스, 남산 한우 등심구이로 반찬이 구성된다. 여기에 산 5-5 골동반상이 나오는데 산 5-5는 페스타 다이닝의 주소이고 골동반(骨董飯)은 비빔밥의 옛말이다. 전통적인 비빔밥의 느타리버섯, 도라지, 애호박, 취나물, 시금치 등 고명을 프랑스 음식 발로틴(다진 고기나 생선, 야채를 단단히 말아 삶은 것)처럼 동그랗게 만다. 이것을 1.5cm 두께로 썰어 찜통에 찐 뒤 밥 위에 얹으면 끝. 토마토로 맛을 낸 고추장을 소스로 제공하는데 텁텁하지 않은 감칠맛을 더한다. 익숙한 듯 낯선 비빔밥이 한우 등심구이 같은 반찬과 잘 어우러진다. 후식으로는 개성약과와 우유아이스크림이 나온다.개성약과와 우유아이스크림오찬 선 한상차림찬합 진은 커다란 반합 형태로 서빙되며 단마다 나눠진 음식이 눈을 즐겁게 한다. 득량만 귀어회와 볏집 훈연회, 치악산 큰송이 버섯 떡갈비 등을 반찬으로 해남 연잎 밥상이 차려진다.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연잎밥에 송이버섯의 풍미가 가득한 떡갈비의 궁합이 마음에 든다. 후식으로 나오는 진양콩 두유 크림블레와 라즈베리 소르베에서 한식과 양식을 오가는 강레오 셰프의 진가를 엿볼 수 있다.진양콩 두유 크림블레와 라즈베리 소르베찬합 진 한상차림 페스타 다이닝 Festa Dining주소 서울 중구 장충단로 60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페스타동 1F전화 02-2250-8170운영시간 11:30~22:00(브레이크 타임 15:00~18:00)가격 (런치) 찬합 선, 4만 8000원, 찬합 진 5만 8000원, 오찬 선 5만8000원, (디너) 정찬 11만 원, 만찬 15만 원 주차 주차 가능, 발레 서비스 유료 제공홈페이지 www.banyantreeclub.com글, 사진 최종인(여행칼럼니스트)
유러피언 감성을 담은 히팅 디바이스 , 글로 2018-05-02
유러피언 감성을 담은 히팅 디바이스글로와 함께하는 상쾌한 드라이브  차에 냄새가 배지 않고 재가 떨어지지 않는 글로! 자동차 마니아와 청결한 드라이브를 원하는 소비자가 애용하는 이유다.  애스턴마틴,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 세계적인 럭셔리 자동차의 고향 영국. 럭셔리카의 군더더기 없는 외관과 실용적인 실내장치도 영국인들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다. 브리티쉬 아메리카 토바코(BAT)의 히팅 디바이스 ‘글로’ 역시 이 같은 특징이 살아있는 영국 출신이다. 심플하고 매끄러운 보디의 깔끔함은 벤틀리의 측면을 떠올리게 하며, ‘하나의 버튼, 하나의 디바이스’라는 제품의 특징에도 영국인이 선호하는 멋과 실용성을 담았다. 아울러 혁신적인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재가 없고 냄새가 없으며 솔질 몇 번으로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어 관리도 쉽다.  담배냄새와 충전의 걱정을 덜다최근에는 자동차 마니아와 편리함을 중요시하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흡연 디바이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의 다양한 장점이 드라이브를 즐기며 사용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를 태우는 가장과 자동차를 아끼는 마니아들은 우선 내장재에 밴 담배 냄새가 걱정이다. 찌든 담배 냄새는 중고차 가격을 떨어뜨리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글로라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글로는 담배 스틱을 태우지 않고 기기 내부에서 가열하기 때문에 냄새가 적다. 따라서 흡연시 동승자를 배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장재에 담배냄새가 배지도 않는다. 또한 담뱃재가 없는 까닭에 시트에 재나 불씨가 떨어질 염려도 없다. 차량을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제품으로 꼽는 이유다. 흡연 후 작은 꽁초만 기기에서 빼면 되므로 뒤처리도 간편하다. 아울러 일체형 기기로 휴대성이 좋고 차량의 USB를 이용해 충전도 가능한 덕분에 장거리 드라이브와 캠핑에도 배터리 걱정이 없다. 한번 완충 시 한 팩을 다 태울 수 있을 정도로 배터리 용량도 넉넉하고 충전기를 따로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글로는 블루, 블랙, 실버, 골드, 핑크 총 5가지 색상으로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여름에 시원한 맛을 제공하는 부스트와 스위치이번 여름에 시원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부스트(Boost)와 스위치(Switch) 2종을 사용해 보자. ‘부스트’는 기존 던힐 네오스틱 스무스 프레쉬의 부드러운 풍미와 시원함을 담았고 입안에서 터지는 캡슐을 통해 더욱 강력하고 진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스위치’는 던힐 고유의 풍부한 토바코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제품으로, 필터 내 캡슐을 터뜨리는 동시에 청량한 목 넘김을 더한다.‘부스트’는 부드러운 풍미와 시원함, ‘스위치’는 던힐 고유의 풍부한 토바코의 맛 그리고 캡슐이 입안에 진한 상쾌함과 청량한 목 넘김을 더한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5-02 10:02:44 카라이프 - 자동차상식에서 이동 됨]
버스 혹은 기차로 난닝에서 하노이까지 2018-04-20
버스 혹은 기차로난닝에서 하노이까지쿤밍에 간 김에 육로로 베트남 하노이에 가기로 했다. 광시성 성도인 난닝에서 핑샹까지 고속버스로 3시간 반을 달린 후 다시 택시를 20분 타야 국경에 도착할 수 있다. 베트남 국경에서 하노이까지는 무려 6시간이 걸렸다. 국제선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중국의 운남성(云南省)과 광시 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는 베트남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의 분위기는 중국 내륙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이라기보다 마치 동남아시아에 온 느낌이랄까. 쿤밍(昆明:곤명)에서 일을 보고 지인이 살고 있는 광시성의 성도인 난닝(南宁)에 들렀다. 그동안 난닝을 변방의 작은 도시 정도로만 생각해왔었는데 도심을 꽉 채운 높은 건물과 고층 아파트들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난닝은 광시좡족자치구의 성도이자 베트남으로  가는 관문이다. 난닝은 동남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으로 매년 아시안 박람회가 열린다. 중국이 지향하는 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니 난닝은 베트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가 그리 멀지 않아 육로를 통해 갈 수 있으니 이 또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하노이를 가보기로 했다. 난닝에서 하노이로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기차이고, 다른 하나는 버스다. 난 버스를 타고 베트남 국경과 맞닿아 있는 핑샹(凭祥)까지 간 후 걸어서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코스라고 여겨졌다.  육로를 통해 베트남 가기난닝에서 핑샹까지는 고속버스로 3시간 반이 걸린다. 길은 잘 닦여져 있었다. 험한 산길을 뚫고 끝없이 이어진 4차선 고속도로는 중국의 힘을 느끼게 한다.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철도망이 가장 잘 깔린 나라다. 또한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인프라가 발달해 있다. 버스를 타니 물 한 병을 나누어준다. 난닝에서 출발한 버스가 한 번도 쉬지 않고 핑샹까지 내달린다. 계림에서 시작된 험난한 카르스트 지형은 난닝을 넘어 베트남 하롱베이까지 이어진다. 핑샹 톨게이트에 다다르자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올라타서 검문검색을 한다. 국경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베트남 글자들과 함께 환전상도 보인다.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핑샹은 작은 도시다. 핑샹은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다. 국경도시인 만큼 베트남과의 교역이 활발해 규모가 상당히 클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 밖이었다. 원래 여기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핑샹에서 내리면 바로 베트남 국경일 줄 알았는데 택시를 타고 20여분을 더 가야 한단다. 택시를 잡아타고 베트남 국경으로 향하니 요이관(友谊关: 우의를 다지는 곳) 양쪽 길에 환전상들이 길게 늘어섰다. 요이관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방치된 채 서 있는 프랑스식 건물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했을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요이관 안에 지어진 프랑스식 건물,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때 지어진 건물이다.중국 핑샹은 국경도시다. 상점마다 베트남 글자와 환전 표시가 눈에 띈다핑샹의 거리 풍경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요이관에서 베트남을 보는 관광을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통일전망대와 같은 곳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험한 산악 지형으로 이어져 있다. 요이관 정상에 서니 발밑으로 베트남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임이 한눈에 느껴진다. 실제로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할 때 이 길을 지나갔다. 중국 핑샹의 요이관,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베트남은 오랜 내전 끝에 1975년 통일국가를 이뤘다. 인접국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후 베트남과 국경 분쟁을 벌였다. 이에 베트남군은 1979년 1월 캄보디아로 진격하여 친 중국 정권인 폴 포트를 몰아냈다. 이전에 베트남은 중·소 분쟁에서 소련(현재의 러시아)을 지지해서 중국의 분노를 산 데다 캄보디아를 점령한 후 친 베트남 정권을 세워 중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격분한 중국은 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베트남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베트남의 북부는 험악한 산악지형인 데다가 미국과의 전투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까지 가지고 있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보며 40km까지 전진한 후 베트남 정부에 자신들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했다고 판단하고 철군하기에 이른다. 중국에게는 상처뿐인 베트남 침공이었다. 베트남 국경 기다려도 움직이지 않는 버스중국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고 나니 멀리 베트남 출입국관리소가 보인다. 버스가 중국과 베트남 중간 지점에 섰다. 도로에 선이 있고 중국 글자로 322번 도로의 종착점이라는 표시가 보인다.중국과 베트남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중국 322번 도로의 종단점. 이 선을 기점으로 중국과 베트남이 갈라진다.중국과 베트남의 경계선, 왼쪽이 베트남 오른쪽이 중국이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온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을 나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이렇게 걸어서 외국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베트남 출입국관리소는 중국에 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우람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중국과 베트남과의 경제력의 차이를 가는 곳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 국경의 버스 터미널중국 출입국 관리소에서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길. 이 길을 따라가면  베트남 출입국 관리소가 나온다. 드디어 베트남 출입국관리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약간 긴장이 된다. 입국 심사관이 내 여권을 몇 번이고 뒤척였다. 이 길을 통해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치민이나 하노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간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을 보면서 오래 전 파병 국군들과 총부리를 겨누었던 베트콩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우리나라의 청룡과 맹호, 백마부대가 월남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다. 베트남을 통일한 북부 베트남은 당시 우리와는 적대적 관계였다. 아무튼 이런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 베트남 화폐는 모두 호치민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베트남 이민국에서 15일간 체류할 수 있는 스탬프를 찍어준다. 이제부터 베트남 땅이다.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 출입국관리소에서 나오니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난닝에서 듣기로는 베트남 이민국에서 나오면 바로 하노이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이민국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전기자동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금은 10위엔. 중국 돈도 사용이 가능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조그만 코치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내가 생각했던 버스 터미널과는 거리가 멀었다. 갈 길이 제법 먼가보다. 하노이까지 40위엔을 달라고 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바로 출발한다던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승객이 다 차야 출발하는 시스템이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도 자리가 채워지지 않자 승객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운전기사는 요지부동이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중국인들이었다. 승객들이 급하니 자동적으로 호객꾼이 되었다. 출입국 관리소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우리 버스를 타라고 권하는 호객꾼으로 변했다. 무려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출발하게 되었으니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베트남의 도로는 중국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경제력의 차이가 실감났다. 중국 난닝에서 핑샹까지는 4차선 고속도로가 잘 다져져 있었는데 베트남 국경 도시인 랑손에서 하노이까지는 2차선 국도가 전부였다. 중국 난닝에서 핑샹까지 4차선 고속도로가 뚫려있다. 생각보다 험난했던 하노이 가는 길 버스 기사의 운전 솜씨는 무시무시할 정도다. 2차선 도로이다 보니 차가 무척 많이 밀렸다. 중간에 화물 트럭이 있으면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뒤를 따랐다. 반대편 차선에 오는 차가 없다 싶으면 쏜살같이 중앙선을 넘어서 달려 나간다. 꼬불꼬불한 산악지역이라 시야 확보가 쉽지 않은 데서 반대편 차선으로 나갈 때면 가슴이 철렁했다. 때로는 상대편에서 차가 달려와도 막판에 아슬아슬하게 차선을 변경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영화 추격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운전기사가 스턴트맨 출신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중국보다 운전이 훨씬 거칠었다. 모든 자동차들이 비슷해서 거의 목숨을 내놓고 운전하는 것처럼 보여질 정도다. 출발하면서 시작된 경적 소리 역시 하노이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하노이 시내에는 오토바이 행렬들도 복잡하다. 랑손에서 하노이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오후 4시경에 출발했으니 늦어도 7시 반에는 도착하리라. 베트남에 오기 전에 하노이에 도착하면 근사한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출발 할 때에만 해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시간이 계속 지체됐다. 버스는 아무 곳에서나 서서 승객을 내려주고 또 태우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중국 국경에서부터 하노이까지 직행이 아니라 도중에 승객을 태우고 내려주는 특별한 버스였다. 국경을 운행하는 버스들은 모두 이런 식이다. 어느새 도로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마을 인근에 다다르자 차가 엄청 밀렸다. 교통사고가 나 있었다.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충돌한 현장은 끔찍했다.  버스 기사가 저녁을 먹겠다며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갈수록 태산이다. 식당은 중국 분위기가 물씬하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폴란드 청년이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처음 오는 길인데 난들 알 수 가 없다. 베트남에선 영어도 안 통하고 중국어도 안 된다. 그런데 이 친구 말로는 자신은 차비로 30위엔을 내기로 했다며 자랑을 한다. 내가 바가지를 쓴 것이다. 폴란드 청년은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베트남에 3개월 정도 머물면서 영어를 가르칠 예정이라고 한다. 참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했더니 용돈 벌이밖에 안 되기 때문에 돈을 모으지는 못한다고.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게 좋아서 지금까지 30여 개 나라를 돌아 다녔다는 그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예 자전거를 가지고 베트남까지 왔다.  하노이 인근에 오니 4차선 고속도로가 나타난다. 베트남에는 고속도로가 전혀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베트남은 남북의 길이가 2,600km나 된다.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는 아직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속도로변에 포장마차처럼 맥주와 간단한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이곳에서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차가 오면 탑승을 하는 식이다. 일종의 간이 버스 정류장인 셈이다. 때로는 방향이 다른 승객들을 다른 버스에 넘겨주기도 한다. 나도 이곳에서 다른 버스에 팔려 넘겨졌다. 내가 가는 방향의 버스에 옮겨 타야 했다. 중국에서도 하던 식이다. 하노이에 도착하니 밤 10시 반. 6시간 이상을 길에서 허비한 셈이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쌀국수는 건너뛰어야 했지만.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베트남 상인들. 중국 상품들을 나르고 있다. 허름한 역에서 출발하는 국제선 기차하노이는 호치민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노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하노이에서 하룻밤을 잔 후 다음 다시 중국 난닝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샀다. 기차 여행은 버스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차표는 하노이 역에서 샀는데 출발은 다른 역에서 한다고 한다. 약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출발 시간보다 여유 있게 가기아람 역으로 향했다.  하노이역. 국제선 열차는 하노이 북부 기아람 역에서 출발한다.중국 난닝에서 베트남 하노이를 달리는 국제선 열차.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미터기가 정신없이 돌아간다. 한 번에 몇 바퀴씩 돌아가니 제대로 된 미터기가 아니다. 택시 요금이 720만동(약 3만5,000원)이 나왔다. 호텔 지배인이 알려 주기를 대략 250만동(약 1만2,500원) 정도 나올 거라고 했는데 3배 가까이 나왔다. 내가 택시 기사한테 250만동 이상 못 주겠다고 버티니 흥정이 들어온다. 500만동에서 400만동, 다시 350만동(약 1만7,500원)까지 깎았지만 바가지를 쓴 것이 분명하다.조그만 시골 동네에 있는 기아람 역 그런데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이 허름한 동네다. 게다가 주변이 무척 어두웠다. 국제선 기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접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택시 기사를 기다리라고 하고는 역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 보았다. 역무원이 국제선 열차가 출발하는 역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주변에는 건물다운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시골 간이역 같은 곳에 국제선 열차라니…….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승객들이 하나 둘씩 몰려든다. 대부분 중국인들이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9시에 개찰을 시작한다. 개찰구에서 베트남 검표원이 기차표와 함께 여권을 확인한다. 역 안에는 별도의 탑승장이 없고 불이 전혀 없어 캄캄하다. 시골 간이역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철길을 따라서 걷다가 어둠속에 서 있는 열차에 올라탔다. 기관차를 포함해서 총 5량의 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한 칸만 이용하고 나머지 열차의 문은 모두 잠겨진 상태다. 아마도 승객이 많으면 문을 열어 승객을 태우는 방식인 듯하다. 승무원들은 모두 중국인이다. 기차 역시 중국에서 온 것이다. 열차에 올라타고 나니 다시 신분증을 검사한다. 그리고 열차 운행 중의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베트남과 중국 국경을 통과할 때는 짐을 가지고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베트남에서 중국을 들어오기 위해 새벽에 2번이나 내려서 출국 및 입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정각 9시 20분이 되자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출발한다. 기차는 어둠을 뚫고 산길을 달렸다. 중국과 달리 베트남의 철로변은 깜깜하다. 게다가 철로가 단선이다. 그래서 대부분 복선인 중국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열차는 모두 침대칸으로 침대가 3층으로 되어 있고 양쪽을 마주보는 배치로 한 칸에 6명이 탑승한다. 내가 탄 칸에는 나를 제외한 승객이 모두 중국인이었다.국제선 열차의 침대. 양쪽으로 3층 침대가 있다. 내 앞 칸에 자리잡은 난닝 출신의 중국인은 하노이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하노이에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요즘 중국 공장들이 대거 베트남으로 이전하고 있어서앞으로의 사업 전망이 좋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인건비가 급격히 올라 단순 임가공 제품은 이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발 빠른 중국 사업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베트남에 진출해서 사업 기반을 다져 놓은 상태다.  잠시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승무원이 “모두 일어나라”는 소리를 목청 높여 외친다. 베트남 국경에 도착한 것이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 20분. 곤히 자야 할 시간에 일어나려니 무척 힘들다. 나는 간단한 백 팩 하나뿐이지만 일부 승객은 들기도 힘든 큰 가방을 2개씩이나 옮기고 있었다. 모든 짐을 들고 내렸다가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한 후 다시 들고 올라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셈이다. 베트남 출입국관리소는 무척 허름했다. 건물이나 장비 모두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눈빛만큼은 매의 눈처럼 매섭기만 했다. 특히 중국인 여행자들에게 대단히 거칠게 대했다. 중국인들이 베트남인들을 무시하는 데 맞서 베트남 사람들 역시 중국인들을 하인 취급하듯 한다.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고 나서 다시 기차에 올랐다. 피곤하기 짝이 없다. 올라타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낭만과는 거리가 먼 험난했던 기차 여행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승무원이 다시 나를 깨운다. 통역이 필요하단다. 체코에서 온 승객이 한 명 있는데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단다. 그런데 화장실에 문제가 있어 소변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무슨 국제선 열차가 이 모양인지. 이런 상황을 설명하니 체코 아저씨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린다. 설명을 하는 나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이 중국 국경까지 참고 가는 수밖에…….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승무원의 우렁찬 외침이 우리를 깨운다. 중국 국경에 도착한 모양이다.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린다. 새벽 4시10분이다. 역 표지판을 보니 핑샹역이다.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향할 때 지났던 국경 도시다. 중국 출입국관리소는 베트남에 비해 깨끗하고 시설이 완벽하다. 중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게 큰 소리 치는 이유를 알 만하다. 핑샹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출발할 때 5량이었던 기차가 핑샹에서 20량으로 늘어났다. 국제선 열차가 이곳에서부터 국내선 열차로 바껴 난닝까지 운행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각 역을 지나면서 많은 승객들을 태웠다. 이곳에서는 일반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많다. 고속철이 편하고 빠르긴 하지만 운임이 비싸기 때문이다. 난닝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반이다. 잠자리가 불편한 침대 열차를 12시간 넘게 타고 왔으니 상당히 피곤하다. 게다가 새벽에 세 번이나 깨어야 했으니 정신이 몽롱했다. 중국과 베트남을 이어주는 낭만적인 국제 열차의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하루였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출발한 국제선 열차는 난닝역에서 끝난다. 하노이역에서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었다. 베트남에도 미인들이 많다 글 사진 양인환     
판매, 정비 등 클래식카 모든 정보를 한 곳에, 크레비 클래식카 컴퍼니 2018-04-13
판매, 정비 등 클래식카에 관련된 모든 정보 한 곳에크레비 클래식카 컴퍼니  미국의 클래식카 시장은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고가의 클래식카부터 폭스바겐 비틀 같은 대중적인 모델,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모델과 미국에서만 판매되었던 핫로드 등 다양한 모델이 공존한다. 비교적 깊은 클래식카 역사와 낮은 문턱, 그리고 탄력적인 법령이 어우러졌기 때문. 클래식카 컴퍼니 크레비 역시 이 같은 환경에 힘입어 온갖 종류의 클래식카가 한데 모여 있다.   크레비 클래식카 컴퍼니 위치는 유로카 바로 건너편이다. 존 웨인 공항 근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크레비는 판매와 유지 보수를 포함해 클래식카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취급한다. 대중적인 모델부터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모델도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오래된 모델까지 있다. 쇼룸만 둘러보면 일관성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여러 세대, 여러 종류의 차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나름대로 특색 있다.  1920~30년대 차들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하다전구가 개발되기 전 헤드램프  딱히 고급스러운 부분은 휴게 공간뿐이다. 철저하게 미국 취향으로 만들어진 이 공간은 오래된 소품으로 가득해 마치 무성영화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쇼룸 인테리어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들이 붙어 있으며 깨끗한 바닥과 몇몇 설명 패널이 전부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차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별다른 인테리어 소품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전시된 자동차 자체가 가장 좋은 소품이기에 자동차에 집중할 수 있게 꾸며 놨다. 후드탑 엠블럼은 처음엔 라디에이터 마개로 시작됐다  크레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시물들은 역시 미국차다. 가장 화려했던 시기라 불리는 1960년대 머슬카와 포니카,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캐딜락 등이 그 주인공. 과감한 터치와 풍만함 가득한 과거 미국차들을 한 곳에서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미국도 다른 지역처럼 유럽산 클래식카의 인기가 높은 편이지만 전통적인 미국차와 핫로드에 대한 수요는 꾸준하다. V8 엔진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풍요로운 시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V8 엔진이 올라간 핫로드와 400m 드래그 경주를 위한 퍼니카는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자동차 문화 코드다  물론 유럽 클래식카도 다양하게 갖춰 놨다. 연식별로 다양한 메르세데스-벤츠 SL과 페라리, 재규어 E타입 등 미국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모델이 모여 있다. 크레비에 있는 차들은 언제든 운행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며 일부는 오너들이 유지 보수를 맡긴 차들이다. 크레비의 간판에는 분명 클래식카 컴퍼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쇼룸을 돌아다니다 보면 1980년대 이후 2000년대의 차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주로 다루는 차는 클래식카지만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그 밖의 차종도 소수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의 고가 스포츠카도 있다. 대부분이 위탁 판매 혹은 정비를 위해 들어온 차들이다  오래된 차들, 나무 부품이 많은 이유? 자동차는 초기부터 금속을 사용해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나무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자 부족 때문이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자동차 수요는 철강 산업을 촉진시켰는데, 문제는 철강 산업이 자동차뿐 아니라 다리나 항만, 건물을 짓는 사회기반사업 등에 폭넓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나무 부품을 어느 자동차, 어느 메이커가 처음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차들이 등장한 시기는 대부분 급속한 산업 성장 또는 전쟁이 터졌을 때였다. 생각보다 튼튼했던 나무 부품은 부족현상이 어느 정도 해결된 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철판에 비해 단가가 낮고 가공이 쉬웠으며 내구성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더 좋은 소재들이 많이 개발되면서 나무 부품을 사용하는 차는 박물관이나 클래식카 관련 업체에 와야 볼 수 있다.    페라리 550 바르케타 피닌파리나 크레비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차 중 하나가 페라리 550 바르케타 피닌파리나다. 페라리의 전통이라 불리는 FR 레이아웃(페라리는 미드십을 비교적 늦게 만들기 시작했다) V12 GT 혈통인 550 마라넬로의 오픈 버전이다.   550 마라넬로는 365 GTB/4 데이토나의 직계 후속으로 1996년 등장했다. 2000년 등장한 550 바르케타 피닌파리나는 12대의 프로토타입을 포함해 총 448대가 생산되었으며, 있으나 마나 한 얇은 소프트톱이 제공된다. 페라리 측 설명에 따르면, 진정한 오픈 에어링을 즐기기 위한 차로서 소프트톱은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차 내에는 넘버링 플레이트가 있는데 이중 P01부터 P12까지가 프로토타입이다. 그러나 프로토타입과 이후 양산 버전은 넘버링 외에 일반인들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비슷하다.     풍요롭던 시절의 미국차  2000년대 초반까지도 V8 엔진과 픽업트럭, 핫로드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무려 60%를 넘었다. 이후 계속된 경기 불황에 여파로 연비가 좋고 덩치가 작은 차가 각광을 받았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은 덩치가 크고 V8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를 좋아한다. 미국 박물관을 다녀보면 미국차,   특히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오일쇼크 직전까지 차들에 대한 그네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덩치도 크고 연비도 나빠 대세에서는 밀려났지만, 적어도 북미 대륙이라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차를 찾기 어렵다. 특히 현지에서 1,000km 이상 장거리 주행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크고 넉넉한 차가 왜 필수인지 수긍할 것이다.    글  황욱익(자동차 칼럼니스트) 사진  류장헌 현지 코디네이터  권규혁, Edmund Jenks(Motor Press Guild) 
카풀앱 체험하기 2018-04-06
카풀앱 체험하기우리 함께 타요! 카풀앱은 체계적인 드라이버 검증과 사용자 인증을 거친다. 덕분에 탑승자와 드라이버 모두 일반 택시보다 더 안전하게 이용이 가능하다. 70년대 일어난 오일쇼크 당시에는 카풀이 자동차 광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카풀을 권장하여 에너지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목적에서다. 그러나 낯선 이와 함께 차를 이용한다는 점 때문에 범죄 발생의 우려와 이용자 간의 불편함이 따랐고, 이 때문에 카풀 문화가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IT 기술을 활용하면서 사용자가 점차 늘고 있다. 이미 기자 주변에도 여러 명의 지인들이 카풀앱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주변 사용자들의 호의적인 평가에 따라 직접 카풀앱 체험에 나섰다. 드라이버(운전자) 등록 과정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카풀앱은 풀러스와 럭시다. 자신의 차로 승객을 태우는 ‘드라이버’가 되기 위해선 각 회사의 드라이버 전용 앱을 핸드폰에 깔아야 한다. 모든 등록 과정은 스마트폰 앱에서 이루어진다. 안전한 카풀 이용을 위해 드라이버 검증절차는 필수.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운전면허 정보입력과 면허증 사진 촬영이다. 또한 운행하는 차의 보험가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보험증서와 자동차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등록증을 추가로 요구한다. 자동차는 본인 또는 가족 명의로 된 자동차만 가능하며 가족 명의일 경우 가족관계증명서를 추가로 제출해야 한다. 승합차, 영업용 자동차는 등록할 수 없고 탑승자의 안전을 고려해 15년 이상의 오래된 자동차도 등록이 어렵다. 카풀앱 업체는 자사와 연계된 자동차 정비소에서 자동차 점검을 무료로 실시하고 통과된 차에 한해서만 드라이버 등록을 허가하고 있다. 이 역시 이용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다. 카풀은 우버(Uber)나 리프트(lyft)와 달리 유상운송행위의 성격이 약하다. 정해진 출퇴근 동선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드라이버와 탑승자 간의 상호관계도 그만큼 중요하다. 카풀앱은 이러한 성격을 고려해 드라이버와 탑승자의 프로필을 설정하고 자신에 맞는 사람들과 매칭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프로필은 집과 회사의 대략적인 위치를 띄우며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들이 뭉칠 수 있도록 맛집, 드라이브, 음악, 반려동물 등 다양한 관심사 아이콘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뒷자리 선호, 비흡연, 조용한 성격(대화하고 싶지 않음) 등 운전자와 탑승자 간의 불편할 부분들을 미리 알려 비슷한 성격의 사용자가 만날 수 있게 돕는다.  카풀앱 사용방법모든 등록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자는 퇴근을 함께 할 탑승자를 검색해 보았다. 앱에 뜨는 탑승자 목록은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탑승자일수록, 이동거리가 짧고 긴 순서에 따라 먼저 띄운다. 그리고 옆에는 이동거리와 그에 따른 요금이 표시된다. 카풀앱은 이용시간과 쿠폰에 따라 드라이버에게 추가적인 인센티브 금액을 지불하며 탑승자에게도 할인쿠폰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활용하면 같은 구간에서도 평소 1.5배 이상의 요금을 더 받을 수 있다. 탑승자를 선택하면 탑승자의 프로필 정보를 확인해 뒷좌석을 선호하는지, 조용하게 목적지를 가기 원하는지, 혹은 꺼려하는 성별이나 나이는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탑승자나 드라이버가 서로 불편할 이유가 있다면 배차 취소도 가능하다. 다만 취소율이 높을수록 다음 이용이 어렵다. 취소율을 보고서 드라이버나 탑승자가 매칭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탑승자가 있는 곳까지는 T맵과 카카오 내비게이션 앱을 통해 길안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한 탑승 전에도 드라이버와 탑승자 간의 채팅기능과 통화연결기능도 갖추고 있어 세부적인 위치확인과 시간변동 등 중요한 내용을 서로 전달할 수 있다. 기자가 만난 첫 번째 탑승자는 월간 <자동차생활> 사무실 근처의 전자회사 전장사업부에 서 일하는 30대 남자 직장인이었다. 기자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그는 일주일에 평균 8회 정도 이용하는 헤비유저. 카풀앱을 이용한 지는 대략 1~2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기자는 그에게서 카풀앱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드라이버와 자동차 서류, 정비소에서 점검을 받아야만 드라이버 활동 자격이 주어진다프로필은 드라이버의 관심사를 띄워 성격이 비슷한 탑승자의 매치를 돕는다출발지와 목적지를 띄워 자신의 이동 동선에 맞는 탑승자를 선택할 수 있다드라이버 역시 탑승자의 대략적인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다탑승자가 위치한 장소까지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한다여정 내역에서는 운행에 따른 수입을 보여준다  탑승자 인터뷰(L 전자회사 전장사업부/30대 남자 직장인) 집은 홍은동이고 회사는 강서구거든요. 평소 택시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면 편도 1만6,000원 정도 나오지만 카풀앱은 60% 수준이면 됩니다. 한마디로 요금이 저렴하기 때문에 이용하는 거지요. 또한 50% 할인 등 다양한 쿠폰을 사용하면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회사에 택시를 타고 출퇴근하는 동료들에게 카풀앱을 알려준 뒤로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더군요. 자동차는 주로 국산 세단과 SUV 등 다양한 모델을 타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비싼 차는 아우디 A6였구요. 그렇지만 역시 수입차는 드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주로 차를 산 지 얼마 안 된 운전자들이 운전에 재미를 붙이며 카풀앱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에게 왜 카풀을 하는지 물어보면 주로 용돈벌이와 게임기 구입 같은 비자금 마련이 가장 많았습니다. 자녀의 과자 값을 벌기 위한 소소한 목적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탑승자 입장에서 좋은 차, 나쁜 차를 가리지는 않지만, 오래된 차는 아무래도 꺼리게 됩니다. 차령이 오래되면 불안한 게 사실이니까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언젠가 신형 아반떼 AD를 탄 적이 있는데, 그 드라이버는 탑승자들에게 승차거부를(탑승자가 드라이버의 차의 매칭을 취소하는) 많이 당한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하더군요. 그는 아마도 자신의 차가 아반떼라서 그런 거 아니겠냐며 푸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드라이버 프로필을 살펴보니 자동차 사진을 올리지 않았더군요. 저는 사용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깨끗하게 세차한 차 사진을 올리면 취소가 적을 거라며 조언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그의 차를 타게 되었는데 저의 말대로 차 사진을 올린 뒤로는 취소가 확 줄었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글 이인주 기자 사진 이병주  
구름 위의 도시 쿤밍(昆明) 2018-03-15
구름 위의 도시 쿤밍(昆明)   리장, 샹글리라, 옥룡설산 같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와 인접해 차를 실어 나르던 차마고도가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이곳은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생활양식을 지닌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터전이기도 하다. 성도인 쿤밍은 해발 1,900m에 위치해 ‘구름 위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지난해 고속철도가 연결되어 상하이에서 12시간 만에 닿을 수 있다.  중국 중남부에 위치한 윈난성(云南省: 운남성)은 중국에서 가장 특별한 고장이다. 치차이(七彩:무지개)의 고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이곳은 다양한 민족·문화·음식이 어우러져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관광지인 리장(?江), 상글리라, 옥룡설산(玉?雪山) 등 웅장한 자태를 지닌 지형이 많은데, 이 중 수억 년 전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충돌로 생긴 지각변동 때 태어난 해발 5,396m의 옥룡설산은 만년설을 끼고 길이 16km에 깊이가 2,000m에 이르는 거대한 협곡이 만들어져 있다. 호랑이가 건너 다녔다는 호도협(虎跳?)이다. 협곡위로 만들어진 길은 사천과 티벳을 거쳐 인도로까지 이어진다. 과거 운남의 차(茶)를 운반했던, 세계에서 가장 험한 길의 하나인 차마고도(茶?古道)다. 아름다운 풍광과 숱한 전설을 간직한 운남성에는 2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까닭에 중국보다는 태국이나 미얀마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실제로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그 길이만도 3,207km이른다. 동남아시아로의 통로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이런 입지적인 조건 때문에 탈북자들의 중국내 종착점으로 쿤밍을 이용해왔다. 이곳에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탈출을 하는 루트가 그동안 가장 안전한 것으로 여겨왔다.       쿤밍의 운남성 민족촌, 각 민족들의 생활상과 주택을 만나볼 수 있다 환경오염에 신음하는 천혜의 관광도시다양한 모습을 지닌 운남성은 인구 4,300만 명에 성도는 쿤밍(昆明:곤명)이다. 작년에 상하이에서 쿤밍까지 2,600km나 되는 거리가 고속철로 연결되어 이제는 두 도시를 왕래하는 데 고속철로 1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일반 열차로 가면 꼬박 44시간을 가야 한다. 당연히 필자는 이우에서 고속철을 타고 쿤밍으로 가기로 했다. 중국 남서부는 산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쿤밍으로 가는 길은 험한 산을 수없이 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산을 뚫기도 하고 높은 산 위로 다리를 놓아 건설한 철길을 보니 중국의 힘이 느껴진다. 10시간 넘게 고속철로 가는 길이 조금 지루하기는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인지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저장성과 장시성에도 산이 있지만 운남성 인근 산세는 완전히 다르다. 고도가 높은 산들이 연이어 펼쳐져 깊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사천성과 티벳으로 연결되면서 5,000m가 넘는 산맥과 이어진다. 쿤밍 역에서 만난 라오스 청년들. 쿤밍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쿤밍은 해발 1,900m에 위치한 구름 위의 도시다. 지대가 높으면 기압은 낮아진다. 그래서 공을 차면 훨씬 많이 나간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야구를 하면 홈런이 많이 나오는 것도 같은 원리다. 공기가 맑고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로 인해 쿤밍은 1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천혜의 관광 도시다. 그렇지만 쿤밍도 급격한 도시화 및 경제개발의 여파로 환경오염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해발 2,500m인 서산에 오르면 쿤밍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왔던 쿤밍은 눈부신 파란 하늘 아래 바다처럼 푸른 덴츠(?池) 호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하늘 위 호수인 덴츠는 녹조로 인해 진한 녹색이었다. 덴츠는 중국의 6대 담수호로 면적이 311㎢나 되어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산 위에 이렇게 큰 호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스럽다. 1980년 초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호수였으나 급격한 공업화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각종 공장에서 정화되지 않은 오염수가 유입되어 황폐화되고 있는 것. 멀리서 보면 큰 호수가 녹조로 인해 마치 넓은 초원처럼 보인다. 또한 서산에서 본 쿤밍은 스모그로 인해 선명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천혜의 환경을 지녔다는 쿤밍마저 공업화의 폐해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쿤밍 서산은 해발 2,500미터다. 케이블카를 타고 서산에 오르면 쿤밍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1,900미터에 형성된 쿤밍은 구름 위의 도시다  해발 1,900미터에 형성된 텐츠호수도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녹조현상으로 호수가 녹색을 띄고 있다  운남성은 인근에 귀저우성, 광시, 쓰촨성(사천), 시장(西藏:티벳)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다.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좡족을 비롯해서 이족, 백족, 묘족, 와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북방의 위구르족(新疆:신장)과 만주족, 몽골족, 회족,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내가 생활해왔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소수민족의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을 길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소수민족 학교도 많아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인구가 줄어 민족 학교가 폐교하는 동북의 조선족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족들은 한국과의 수교 이래 대부분 도시로 진출해서 지역 사회가 붕괴되는 현상을 빚었다.      일대일로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시내는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새롭게 건설되는 높은 건물과 고층 아파트들이 변화하고 있는 쿤밍의 오늘을 말해준다. 시진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서부 대개발을 내세우며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지역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쿤밍 역시 그 중 하나다. 또한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쿤밍시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중국에서 육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쿤밍시 전경. 인구 430만 명의 도시다  쿤밍의 유적지는 많지 않다. 중국 역사에서 뒷전에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쿤밍시에도 지하철이 있다. 계획된 6개 구간 중 4개 노선이 개통되었고 두 개 노선은 아직 건설 중이다. 이에 따라 최근 들어 쿤밍의 인구도 부쩍 늘었다. 인구 증가와 함께 자동차도 급격히 증가해 출퇴근 시간에는 시내 중심부에 교통 체증이 엄청나다. 사실 시내에는 자동차보다 전기 오토바이가 훨씬 많다. 전기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다. 출근 시간에는 통제원들이 줄을 이용해서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오토바이들의 출발을 제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는 2층 버스가 많았다. 요금은 1위엔(우리 돈으로 170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서산에 오르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는 바이주(백족:白族)라고 한다. 바이주의 근거지는 따리(大理:대리)이다. 택시 기사 말로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쿤밍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고들 한다고. 소수민족들의 특별한 억양 때문이다. 전동 오토바이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쿤밍의 지하철 1,2호선이 개통되었다    회족은 중국 서북부의 회족 자치구에 살고 있다 시간을 내서 쿤밍 인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석림(石林)을 방문하기로 했다. 시내 여행사에 알아보니 식사까지 포함해서 280위엔이라고 한다. 아침 7시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한참 꿈속에서 헤매던 새벽 5시에 전화가 왔다. 6시까지 올 테니 내려와 기다리라는 전갈이다. 7인승 빵차가 와서 나를 태우더니 시내를 돌면서 5명을 더 태웠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침 8시다. 2시간 넘게 시내를 돌아다닌 셈이다. 내가 불평을 했더니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절대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비용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120위엔, 어떤 사람은 130위엔인데 나만 280위엔이다. 내가 바가지를 쓴 것이 분명하다. 버스 터미널에는 관광을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고 그들을 태울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마치 출정을 앞둔 군대의 진영과 같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베트남과 라오스, 태국으로 가는 국제선 버스도 있다. 쿤밍에서 라오스 비엔티엔으로 가는 버스는 험한 산길을 38시간이나 가야 한다고. 그런데 버스 안에 화장실이 없다. 그래서 우산을 필히 준비해야 한단다. 급하면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봐야 하는데 우산을 칸막이로 사용한다나……. 남자들은 그나마 안면몰수하고 버티겠지만 여자들은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 특히나 험한 장시간 코스라 차멀미를 하는 승객이 있을 경우에는 모든 승객들이 고생을 한다. 나도 18시간을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본 경험이 있지만 38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 고난의 행군에 다름 아니다. 중국인들과 함께 한 석림 관광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하루 일정 중에서 석림 구경은 2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쇼핑이었다. 중국 관광객 중에 한국전에 참전한 노병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사드’문제를 걸고 나온다. 한국이 사드를 배치하는 바람에 중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침을 튀겨가며 나를 힐난했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일행 중 한 명이 ‘왜 여기에서 사드문제를 거론하느냐’며 그를 말렸다. 다른 사람들도 오늘은 즐겁게 여행이나 하자며 거들었다. 사드 때문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동안 숨죽여 살아왔다. 중국인들은 북한의 핵개발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사드만 문제를 삼는다.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 챙긴다. 노 병사와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나라와 세계정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리고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나중에 헤어질 때에는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를 하자며 즐거워했다.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으니 당시 국군이었던 필자의 아버지와는 목숨을 걸고 싸웠을 터. 예전에 목숨 걸고 싸웠던 적군의 아들과 이제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다. 장관을 이루는 쿤밍의 석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여 자전거, 쿤밍도 예외가 아니다 쿤밍에도 전기 오토바이가 대세다. 가는 곳마다 전기 오토바이 주차 장이 마련되어 있다   석림에서 만난 소수민족석림은 2억7,000만 년 전 지각 변동에 의해 해저에 있던 기암괴석들이 돌출하면서 생겨난 지형이다. 총 면적 350㎢에 형성된 돌무더기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장관이다. 석림은 대석림과 소석림, 내고석림, 신석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석림과 대석림만 개방되어 있다. 석림은 이족들의 터전이다. 이족들은 진한 빨간 색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색이 조합된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다. 주위 배경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석림을 돌아보는 일정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민족촌의 안내원들이 소수민족 복장을 입고 안내를 한다.  관광객들은 화려한 이족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묘족의 주택, 한족들의 주택 구조와는 다르다. 석림 관광을 끝내고부터는 쇼핑이 계속됐다. 각종 차와 기념품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하기 전 그림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리곤 다시 운남 차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식사를 끝내고 30여 분 이동해 항산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방문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항산화 물질을 이용해 만든 건강식품과 화장품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 강사의 설명을 관심 있게 들었지만 졸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쿤밍시를 바로 앞에 두고 옥을 파는 상점으로 들어서길래 마음속으로 이것이 마지막이길 빌었다. 규모가 어마 어마하게 컸는데, 사진은 못 찍게 했다. 매장을 둘러보기 전, 진짜 옥과 가짜 옥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허름한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차고 있는 옥팔찌가 우리 돈으로 수천만원이나 하는 것들이다. 중국에서는 옷차림이나 얼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쿤밍시로 돌아오니 저녁 7시. 밤공기가 차다. 쿤밍의 겨울은 온화하다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추웠다. 해발 2,000m에 가까운 고지대이니 따뜻할 리가 없다. 쿤밍에는 민족촌(民族村)이 있다. 우리의 민속촌과 비슷한 민족촌에서는 각 민족들의 주택구조와 생활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야 하나의 민족이라 언어나 생김새가 동일하지만 중국은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만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몽고족은 현재 몽골과 중국 내몽골로 나뉘어져 있다. 태국의 소수민족인 타이족(?族)도 이곳에 산다. 이들은 태국을 표기할 때 쓰는 태(泰)자가 아닌 태(?)자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한족과 유사해 보이지만 일부 소수민족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특히 신장의 위구르족은 중국인이라기보다 중앙아시아나 터키인에 가까운 얼굴이다. 게다가 언어는 러시아어와 비슷하니 중국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회족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와족(?族)은 동남아시아인들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한족들은 소수민족에 관심이 없고, 얼마나 많은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민족촌의 이슬람사원, 중국의 서부는 이슬람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운남성에는 29개 소수민족이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해오고 있다  마오저뚱과의 인연으로 우대정책 받아민족촌을 뒤로 하고 쿤밍의 중심지인 난핑제(南平街:남평가)를 방문했다. 200여 년 전에 지어진 전통 건축물과 현대식 건물이 복잡하게 얽혀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이곳에서 화려한 소수민족 복장의 여행 안내원을 만났다. 자신을 이족(?族)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소수민족에 대한 자랑을 한참동안 늘어놓았다. 어제 들렀던 석림이 본거지인 소수민족이다. 오래전에는 이족(夷族)이라고 불렀는데 마오저뚱의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한자 표기를 ‘?族’(이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족(夷族)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소수민족은 마오저뚱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대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마오저뚱이 소수민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펼 정도로 호의적으로 대한 것은 대장정 당시 소수민족으로부터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국민당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에 쫓겨 장시성 뤼진에서 시작된 대장정은 출발 당시 8만 명이었던 인원이 대부분 죽고 8,0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소수민족들이 살던 산악 지역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고. 만약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장정이 성공할 수 없었을 터이니 어쩌면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쿤밍에서 100년째 성업 중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곳도 인근의 귀조우나 광시성과 같이 쌀국수가 보편화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쌉쌀하고 매콤한 맛이 전에 먹었던 계림의 쌀국수와 비슷하다. 남부 소수민족들은 한족과 달리 매콤한 맛을 즐긴다. 주변 상점에는 화려한 색을 입은 소수민족들의 전통 공예품이 많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민족이 다르다. 워낙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다 보니 전부 기억하기도 쉽지가 않다. 확실히 이곳은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다. 소수민족은 복장뿐만 아니라 각종 장신구도 화려하다  운남성에는 소수민족 학교가 많다. 소수민족 학교 학생들의 모습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운남성에는 거의 절반에 이르는 26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난핑제 인근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엄청나게 큰 성당이 하나 더 있다. 중국 정부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이렇듯 엄청나게 큰 성당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 성당의 신부는 교황청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국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임명한다. 중국과 교황청은 아직까지도 외교관계가 없다. 중국에선 선교가 금지되어 있다. 외국인이 선교를 하다가 걸리면 구금기간을 거치고 나서 바로 추방된다. 종교행사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지만 선교가 금지된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난핑제 인근에 세워진 성당.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선교활동은 금지되어 있다  차의 고장에 들어선 스타벅스 매장들요즘 쿤밍시에는 스타벅스가 성업 중이다. 차의 고장인 운남성 성도 쿤밍에 스타벅스가 많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운남성은 앞서 설명한 대로 중국을 대표하는 차 생산지다. 특히 푸얼시(普?市)에서 생산되는 푸얼차(普?茶)는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차를 인도까지 운반하기 위해 험난한 차마고도를 넘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에는 2,000개가 넘는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일 뿐 아니라 2021년까지 중국에 5,000개가 넘는 매장을 열 계획이라 하니, 차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전통차 대신 커피를 즐겨 마신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다루는 것이 문화인의 척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중국 젊은이들의 세태다. 이들은 스타벅스를 이용하며 자신들이 선진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낀다. 스타벅스는 중국에서 단순히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미국 문화를 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요사이 운남성에서는 차밭을 갈아 업고 커피나무를 심는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머지않아 중국이 커피의 나라로 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운남성은 차의 고장이다. 운남성 보이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운남성은 차의 고장이다. 운남성 보이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글 사진 양인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다, 남원 2018-02-20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다남원 남원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절절한 사랑의 무대인 광한루를 배경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소화되고 살을 불렸다. 더해서 지리산이 내어주는 풍요로움 또한 남원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우는 든든한 역할을 했을 터. 지금 이 순간에도 남원은 남녀의 사랑과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영글어가고 있다.    전통 예술이 활짝 꽃을 피운 남원시 옻칠공예관이름난 산에는 일찍부터 가람이 들어섰으니 남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도자들이 만들어서 사용하던 목기(木器)의 제조 공법이 민가로 이전됐고, 남원은 그래서 이름을 더 얻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실상사에는 한때 3,000여 명의 수도승들이 머물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목기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산사는 기울어갔고 목기 대체품들이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제기(祭器)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을 뿐 실제 생활로 녹아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 장인 박강용 선생 등 장인들의 노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 문을 연 남원 옻칠공예관은 옻칠 공예의 정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1,980㎡의 부지 위 660㎡의 공간에 전시관과 옻칠작업장, 정제실, 건조실, 디자인실 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옻칠 공예의 그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와 수저세트, 다기, 반상기를 비롯해 제기 및 제사상 세트 등이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멋을 뽐낸다.  옻칠공예란 내부 아름다운 광택을 내는 반상기 세트   천연도료인 옻칠을 하면 외부의 습기를 흡수하거나 방출해 일정한 수분을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나무로 만든 생활용구나 공예품에 옻칠을 하면 표면에 견고한 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광택이 나고 오랫동안 사용해도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토피 개선 효과를 비롯해 방충, 항균, 원적외선 방출, 방부 및 탈취 효과까지 있어 가장 완벽한 도료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초급과 중급, 그리고 전문가반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주 1~2회 운영하고 있다. 관람료는 없고 평일 09:00~18:00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에는 닫는다(자세한 사항은 전화063-631-5725로 문의).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 품은 광한루원, 예촌 이야기를 엮어내고 많은 이들이 덧칠을 하며 끌어가는 데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바로 불세출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사랑’이 남원에서는 365일 단 하루도 지지 않고 활짝 꽃을 피운다. 광한루원은 바로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그네를 타는 춘향을 지켜보며 애틋한 정을 키워가는 이몽룡. 둘이 나눈 사랑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가다 보면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이별, 그 후에 닥친 춘향의 고난, 과거에 급제한 몽룡이 어사가 되어 변 사또의 폭정을 단죄하는 장면, 두 사람의 아름다운 해후라는 줄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기에 춘향전은 이미 1935년부터 ‘성춘향’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후로도 ‘춘향전’, ‘탈선춘향전’, ‘춘향뎐’ 등으로 꾸준하게 리메이크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임권택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감독들이 메가폰을 잡은 것은 물론  허장강, 박노식, 신성일, 장미희, 이덕화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했다. 김희선과 이민우가 열연한 TV 드라마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18세기의 소녀 21세기를 살다’라는 테마로 구성된 광한루원의 춘향관은 저마다 이몽룡이 되어 춘향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오작교를 건너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진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선조 15년(1582)에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길이 57m, 폭 2.4m에 4개의 홍예경간(무지개 모양의 다리나 기둥 사이의 공간)으로 새로 놓은 다리다.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다.  광한루원의 춘향관 잎을 잃은 감나무가 꽃을 피웠다월매의 집도 재현해 놓았다 남원으로 유배를 온 황희 정승이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광통루는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라고 한 후 광한루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에 연꽃을 심고, 오작교를 놓고,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이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었다. 봉래섬은 백일홍, 방장섬은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은 영주각을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말았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중건된 것으로 1794년에 영주각이, 1964년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광한루원 바로 곁에는 전통 한옥으로 지은 호텔 ‘예촌’이 있다. 최기영 대목장을 비롯한 이근복 번와장, 유종 토수 등 대한민국 최고의 한옥 명장들이 직접 시공에 참여해 전통의 멋이 그대로 흐른다. 황토, 대나무, 해초 등 오롯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사용해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구들장과 함께 옻칠 기법으로 마무리한 이곳은 2017년 한국관광의 별 숙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굳이 숙박을 하지 않아도 호텔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호남제일루라 쓰여진 광한루   광한루원 바로 옆에 자리잡은 한옥 호텔 예촌 고풍스러운 예촌의 객실 내부 온돌방으로 만들어진 객실 내부이도령과 춘향의 동상   천년고찰 실상사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마주하며 찾은 실상사는 한때 3,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생활을 했을 정도로 융성하던 곳이었다. 너른 들 한가운데 버티고 선 가람은 심산유곡에 자리를 잡아 신비한 기운을 더하는 산사에 비해 세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불러 마을을 이루고, 민초들의 삶을 어르며 풍족하게 해주어 ‘극락정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실상사는 한 때 3천여 명의 승려가 생활했던 사찰이다 동서 삼층 석탑을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실상사의 철불 부처상증각대사의 탑비 증각대사 사리탑실상사의 석장승 뭔 절이 동네 앞에, 너른 들판 논 가운데 멋없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갖는 의문에 기자 역시 공감한다. 이에 대해 주지스님은 홈페이지를 통해 이렇게 밝혀 놓았다.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실상사는 남녘에서 가장 크고 깊은 지리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수만 평의 논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너른 들판이 여름이면 새록새록 자라는 벼로 초록바다가 되고, 실상사는 그 속에 마치 섬처럼 떠 있다. 가을날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룰 때면 마치 보물선이 흔들리는 듯하고, 겨울이면 벼를 베고 난 휑한 들판에 무상(無常)의 모습으로 있다. 그리고 다시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자리한다. 마음을 열고 보면 너른 들판 가운데 멋 하나 없이 밋밋하게 있는 그런 절이 아니다. 실상사가 처음 이곳에 자리할 때는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다. 그러던 곳이 부처님의 품을 찾아든 사람들로 마을이 생기고 논밭이 만들어지다 보니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선계와 속계를 구분하는 만수천을 대하면 다리 입구의 석장승이 “어서와! 이곳은 처음이지?”라고 마중을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다른 석장승이 실상사로 안내를 한다. 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시야에 아련하게 들어온다. 이곳은 국보와 보물의 보고여서 그 보물들을 꺼내어 보다보면 천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남원 허브관 허브관 안에는 각종 허브들이 꽃을 피운다 허브 관련 제품 생태 교육장에서 상영중인 작품  잘보면 나비의 날개로 만들었다지리산 ‘생 햄’과 ‘흑돈’을 아십니까?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그 길을 만들어갔던 이의 고단한 일정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스페인어로 하몬(Jamon)으로 불리는 생 햄이 남원의 운봉읍 화수리에서 제대로 숙성되어가고 있다. 돼지고기를 훈현시키지 않고 소금에 절여 만드는 생 햄은 본토인 스페인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식재료다.산간지방의 깨끗한 공기와 수분이 적절하고 바람이 찬 지형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버크셔 흑돈을 원료로 지리산 고랭지 기후의 청정성과 희소성이 결합해 탄생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화춘 씨는 농업진흥청 등에서 활동한 종자개량 전문가였다. 그런 박 박사가 퇴직 후 고향인 남원에 버크셔 품종 흑돼지를 들여와 우리 풍토에 맞도록 품종을 개량한 것이다. 박 박사에 따르면 스페인의 하몽은 사육하는 방식(완전 방목, 반 방목, 축사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면서 “지리산 생 햄도 각종 환경 등을 고려해 가치 산업으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아울러 그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을 통해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등 농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리산 생 햄은 자연환경과 천일염만을 이용해 장기간(겨울에 원료를 선택해 정형과 염지를 한 후 초기 건조과정을 거쳐 봄에 건조, 여름에 저장을 해 다시 겨울에 출시한다) 숙성시킨 식품으로 신선육 상태에서 바로 제조를 하기 때문에 단백질 및 지방조성이 우수한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쉐프의 요리는 잘 숙성된 생 햄이 은근하게 짭짤한 기운이 퍼지다가 이내 고소한 감칠맛이 되어 침샘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재료가 되는 흑돈의 맛은 과연 어떨까? 사실 음식이란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가가 천양지차여서 객관성을 부여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로지 주관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명문화한다는 것은 독자들의 권리를 일정부분 침해할 수 있어 꺼려진다. 그럼에도 이를 소개하는 것은 우선 독특한 조리방식 때문이다.    대한민국 1.2%만 드실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건 지리산 고원 흑돈은 허영만 화백의 ‘식객’ 등에 소개되기도 했다. 삼겹살과 목전지, 그리고 항정살 등으로 구성된 ‘흑돈 명품 한 마리’는 우선 상차림이 정갈한데다 고기의 상태가 좋아 과연 허 화백이 내세울 만했구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기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원료와 불 조절에 있다. 일단 고기의 품질을 확인했으니 그 다음은 불판에서 구워내는 순서. 여기에서도 차별화된다. 돼지고기는 기름기가 거의 빠질 만큼 바삭하게 익혀야 제맛이라는 기존의 암묵적 룰을 여지없이 깬다. 살짝만 익히는 것을 권하는데, 한 점 깨물면 쫄깃한 식감에 입안에 툭 터지는 육즙이 일품이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짓던 것과 비슷한 묘한 표정이 절로 지어진다. 느끼함도 거의 없어 젓가락은 연신 불판으로 향하고, 여기에 술 한 잔 곁들이니 행복 그 자체다. 그러는 사이사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 맛있다!”지리산 고원식당 063-625-3663     지리산 흑돼지를 맛볼수 있는 고원 흑돈 식당 버크셔를 개량했다는 흑돈은 쫄깃한 식감과 터지는 육즙이 일품이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동남아의 용으로 승천을 꿈꾸는 베트남의 중심, 호치민 2018-01-12
 동남아의 용으로 승천을 꿈꾸는 베트남의 중심 호치민세계 최강 미군을 몰아내고, 중국과 1,000년 동안 싸워왔다고 주장하는 베트남. 중국의 대체지로 부상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을 찾았다. ​​​​거래처의 초청으로 방문한 베트남 호치민의 첫인상은 대단히 역동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 넓은 도로를 꽉 채운 오토바이들의 질주와 굉음은 베트남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중국에만 오토바이가 많다고 여겼었는데, 호치민에서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를 볼 줄이야! 오토바이는 호치민 시민들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거리에 울려퍼지는 배기음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처음엔 마냥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토바이의 행렬이 소음 공해를 넘어 공포로 다가올 정도.베트남은 자동차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까닭에 자동차 가격이 엄청 비싸다. 기아 경차 모닝이 베트남에서는 2,00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니, 일반 시민들에게 자동차는 그림의 떡. 이를 대신해 한결 저렴한 값에 구입할 수 있는 2륜차가 대중화되었으며, 베트남의 오토바이 등록대수는 대략 4,000만 대가 넘는다고 한다.​​거리를 꽉 메운 오토바이 행렬, 호치민은 하루종일 오토바이들의 질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거리에 넘쳐나는 오토바이의 행렬오토바이가 일상생활과 밀접하다 보니 이를 위한 카페와 식당이 많다. 큰 식당에 승용차 주차장은 없어도 오토바이 주차장은 필수. 고급 아파트에도 오토바이를 위한 주차장이 별도로 있고, 대형 수퍼마켓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찮게 들른 이마트에도 주차장 대부분을 오토바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오토바이 주차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필수적으로 헬멧을 쓰고 다닌다. 함께 탑승한 동승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많은 오토바이에 여럿이 함께 타고 다니니 위험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오토바이를 자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동승한 어린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운전자와 끈으로 연결하거나, 발판에 의자를 놓아 아이가 앉아서 갈 수 있도록 하는 등 나름대로의 지혜를 발휘한 흔적도 엿보인다. 운전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호치민의 교통체증은 어딜가나 비슷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엉켜 항상 복잡하다​예전에는 자전거가 대세였으나 이젠 오토바이에 밀려 보기가 어렵다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 영업이 합법이다. 우버와 그랩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거리에는 일본차와 함께 한국의 현대·기아차가 많이 보인다. 한국차의 경우 현대 i20과 기아 모닝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소비자들의 소득수준이 낮다 보니 중대형차보다는 소형차가 더 많이 팔린다고. 베트남의 1인당 GDP는 2,200달러(2016년 기준). 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진출이 대단히 활발하다. 그동안 중국 일부 지역에서 조용히 장사를 하던 이온(AEON) 마트는 베트남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의욕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많은 일본 기업들이 2011년 센카쿠(다오위다오) 사태 이후 중국에서 철수했다. 반일 감정이 상존하는 중국에서 계속 영업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던 차에, 센카쿠 사태가 기폭제가 되었다. 한국 기업 역시 지난해 사드 문제로 홍역을 앓은 후 중국을 벗어나 베트남으로 옮겨오는 상황이다. 어쩌면 일본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한국차가 무척 많다. 기아모닝과 현대 i20가 택시로 쓰인다​베트남은 한때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반일감정이 없다. 일본업체가 건설 중인 호치민 지하철 공사장이다​베트남은 어느 나라보다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지녔다. B.C 111년부터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 지금도 중국 문화의 잔재가 뿌리 깊이 남아 있다. 이후 1886년부터 1940년까지 50년 넘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쳐들어왔으며, 종전 후에는 다시 프랑스와 다툼을 벌인다. 격전 끝에 1954년 독립을 쟁취하지만 이번에는 국토가 남북으로 갈렸다. 그 와중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다시 한번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에 지배당했다고 하지 않고 ‘우리는 천 년 동안 싸워서 중국을 물리쳤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프랑스와의 전쟁은 물론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호치민 인근에 있는 구찌 터널(Cuchi tunnel)을 둘러보면 베트남 사람들의 끈질긴 정신력과 투쟁 정신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월남전 당시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B-52 폭격기를 동원한 융단 폭격은 지금 보아도 경이로울 정도. 당시 B-52가 뜨면 그 지역은 완전히 초토될 정도의 가공할 화력이어서 한 번 훑고 지나가면 한동안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그런 미국의 공격을 버텨내고 베트남을 통일한 월맹(북베트남)의 힘은 주민들과의 밀착협력이었다. 미군은 베트콩(북베트남 군)과 주민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밀림 속에 만들어진 터널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신출귀몰 전략의 일환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사라지는 베트콩을 미군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게릴라 전술에는 터널이 큰 역할을 했다. 엄청난 전력의 열세를 이러한 기상천외한 전술로 이겨낸 것이다. 터널의 총 길이가 자그마치 250km에 이르고 미군 사령부 밑까지 뚫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터널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기어서 다녀야 한다​​투쟁의 역사가 숨쉬는 구찌 터널터널의 지하 1층은 지휘부가 있고 지하 2층은 거주시설, 지하 3층은 강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로 연결되는 구조다. 취사를 위해 몇 단계에 거쳐 연기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하고 수술이 가능한 야전병원까지 갖추었다니 완벽한 군사 기지가 아닐 수 없다. 기가 막힌 것은 250km에 이르는 터널 전부를 호미 같은 손도구로 파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터널의 입구는 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좁았다. 터널 안 역시 몸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규모다. 덩치 큰 미군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런 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높이 때문에 대단히 불편한 자세로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데, 터널 체험 삼아 그렇게 100 미터 가까이 이동했더니 통증 때문에 3일 동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터널은 몸 하나 겨울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다​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터널 입구가 작다 ​구찌 터널 주변에는 부비트랩과 바닥에 죽창이 설치된 함정 등이 보인다. 많은 미군들이 이런 단순한 무기들에 말려들어 처참하게 죽어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대한민국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대한민국 군대가 최초로 해외에 참전한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1965년부터 비둘기 부대를 필두로 청룡(해병대)과 맹호, 백마부대가 1973년까지 투입되었다. 총 32만 명이 참가해 5,099명이 전사했고 1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번영과 군 장비의 현대화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시 전투 지원부분에 참여했던 한국의 건설 및 운송 업체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일본이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물자 수송과 정비 등을 통해 패전의 아픔을 딛고 경제를 재건하게 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요즘 일본이 북한을 부추겨 한반도에서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맹위를 떨치던 맹호부대와 귀신 잡는 해병으로 유명한 청룡부대는 베트콩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군은 전투도 잘하지만 베트콩들에게 무척 잔인했던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렇지만 베트남에는 반한 감정도, 반미 감정도 없다. 아마도 미국과도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지구상에서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 나라 중에서 베트남만이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다.베트남 사람들의 한국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특별하다. 한국 드라마와 K팝에 푹 빠져 있고, 한국 상품에 대한 인기가 대단히 높다. 중국에서 큰 시련을 겪고 있는 롯데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발랄하고 활기찬 베트남의 학생들, 이들은 전쟁의 참화를 모르는 신세대다베트남의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의 미인들 호치민에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중국과 프랑스의 많은 영향 받아호치민 시의 명칭은 원래 사이공이었다. 동나이 강 삼각주에 형성된 사이공의 역사는 1698년부터 시작되었으니, 300살이 넘는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30년이 넘는 치열한 내전 끝에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한다. 북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것은 국민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호치민이라는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치민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호 아저씨’란 애칭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호치민은 청렴한 삶에 있어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북부, 중부, 남부의 세 지역에 골고루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호치민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생을 마쳤다. 베트남 정부는 1976년 통일을 이룩한 후 사이공 시를 현재의 호치민 시로 바꾸어 베트남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록하기로 했다.​​​호치민은 베트남인들의 영웅이다. 사이공 시를 호치민 시로 변경한 것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호치민시 전경, 베트남의 영웅인 호치민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치민시로 개명했다​호치민 시민들은 만약 월맹이 아니고 베트남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면 지금쯤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 전쟁 직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그들보다 훨씬 낮았다. 베트남이 통일 후 사회주의의 길을 걸으며 퇴보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며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호치민에 오토바이가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카페였다. 특히 노상카페는 베트남만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다.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 탓도 있지만 베트남인들의 커피 사랑은 유난하다. 한국으로 수입되는 커피의 원산지를 보면 베트남인 경우가 의외로 많은데, 실제 베트남의 커피 생산량은 브라질과 쌍벽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호치민 거리에는 유럽풍의 근사한 카페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카페마다 오토바이 주차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노상 카페도 저마다 개성이 넘친다. 길에다 목욕의자를 쫙 깔아 놓고 커피와 음료를 준비하면 바로 노상 카페가 된다. 길을 걷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바로 이용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편하고 좋은 카페가 어디 있겠는가.​​​​호치민은 카페문화가 발달해 있다. 베트남의 커피 생산량이 브라질을 추월했다고 한다​호치민에서 제일 크다는 벤탐시장, 20여 년 전의 중국과 비슷한 모습이다​ 베트남에도 베트남 글자가 있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영어에 조합해서 만들어준 것이다. 프랑스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유럽식 빵 문화다. 베트남인들은 조식으로 전통적인 반꿍과 함께 프랑스식 빵을 먹는다. 반꿍은 중국 광동의 창펀과 비슷한 음식이다. 창펀은 밀가루 반죽을, 반꿍은 쌀로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베트남은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가다. 넓은 농토와 메콩 강의 풍부한 수량, 그리고 온화한 기후 덕분에 3모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쌀을 이용한 식품들이 많다. 우리도 즐겨먹는 쌀과자와 쌀국수가 대표이다. 또한 열대과일의 천국이기도 하다. 남북 해안의 길이가 3,444km에 이르는 긴 지형에서 다양한 과일이 생산된다.호치민 시내를 돌다 보면 많은 유럽풍의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대부분 100여 년 전 프랑스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웅장한 건물들은 지금도 베트남 정부의 관공서로 쓰이고 있다. 호치민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한다는 유럽풍의 우체국 건물은 엄청난 크기에 놀라게 된다. 지금이야 우체국의 기능이 점차 줄어든다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베트남 전역으로 배달되는 우편물을 처리해야 했으니 이렇듯 큰 규모로 지어진 것이 짐작이 간다. 우체국 옆에 우뚝 서 있는 노트르담 성당은 대대적인 수리 중이었다. 베트남에는 가톨릭 신자가 9%나 된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그 비율이 80%가 넘는다고 한다. 2015년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호치민의 절을 찾았었다.​​​우체국 앞에서 기념품을 파는 상인, 종이로 만든 단순한 제품들이다​​노트르담 성당은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미국 오바바 대통령이 재임시절 방문했던 호치민의 절. 베트남은 불교 국가다​​베트남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부동산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부자들을 위한 주택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인지 베트남인들은 미신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춘절과 중추절을 중요한 명절로 여기며 중추절에는 중국인들처럼 월병을 먹는다. 그렇지만 중국과의 사이는 좋지 않다. 요즘 남중국해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중국의 야욕은 여러 나라와 영해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필리핀은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베트남까지도 중국과 영해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이런 영해 분쟁으로 요즘 베트남에서는 반중국 정서가 강하다. 2012년에는 중국회사 공장들이 폐허가 되고, 3명의 중국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중국 공장들의 베트남 진출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건비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을 잃고 있는 중국의 공장들이 북부 하노이 주위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인들도 미신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무사고를 빌기위해 부적처럼 꽃을 차에 달고 다닌다높은 발전 가능성 품고 있는 베트남호치민을  방문한 것은 한국 거래처인 (주)올림피아 대표이사 김진웅 사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기념품을 제조해서 수출하는 올림피아는 이 분야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바이어들이 기념품 업계의 삼성이라고 부른다. 공장을 둘러보니 직공들이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일사분란하게 일하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중국 공장에서는 이미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사출이나 수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 3D 업종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이 공장을 지키고 있을 정도다. ​​​올림피아 직원들, 한국인, 베트남인, 그리고 필리핀 연합이다 ​ 베트남은 저렴한 인건비와 근면한 젊은 노동자들로 인해 경제 발전 가능성이 어느나라보다 높다 ​베트남은 젊은 노동력이 넘쳐난다. 어느 공장에 가든 젊은이들이 가득하다​베트남은 오랜 내전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연령대가 1958년생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국이 안정되면 자연적으로 베이비 붐 세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베트남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현재 베트남의 인구는 9,500만 명. 1980년 이후에 출생한 인구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노동력이 넘쳐 나는 이유다. 베트남의 국민성은 유교 사상이 몸에 배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들 간의 우애를 중요시한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교육열도 높다. 게다가 근면까지 하다. 동남아시아의 강자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올림피아의 현지 공장에는 한국인의 후예가 있었다. 김 사장을 현지에서 도와주고 있는 단홍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당시 사이공의 조선소에서 일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삼남매를 남겨 두고 훌쩍 한국으로 떠난 후 연락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 많은 고생을 했다. 베트남에는 수천 명의 ‘라이 따이한’(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존재한다. 자신들의 피가 섞인 베트남인들을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간 미국과 달리, 우리 정부는 그들에게 무심했다. 그래서 단홍도 한동안 난 왜 한국인 아버지를 만나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엿한 중년 사업가로 성장해서 남부럽지 않을 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대한민국을 방문했지만 끝내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남부에 속한 호치민과 북부의 하노이는 경쟁 관계다. 하노이가 베트남의 수도이면서 중공업이 발달한 반면 호치민은 경공업이 발달했다. 그렇지만 개방 이후 많은 외국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호치민으로 몰려오고 있다. 호치민과 하노이의 거리는 2,300km나 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고속도로가 없다는 것이 큰 취약점이다. 베트남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부터 뚫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최고의 투자 국가다. 그동안 중국에서 실패한 것을 베트남에서 회복하려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먼저 거쳤고, 타이완도 이에 가세했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호치민은 한창 발전 중이다. 아직도 포장이 안 된 도로가 많다호치민의 이마트, 베트남에서 성공신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APEC 정상회의가 11월 10일부터 다낭에서 열렸다. APEC을 알리는 입간판들이 곳곳에 설치 되어 있다​​동남아시아 최강자 자리 멀지 않아호치민에서 가장 높은 68층의 비텍스코(BITEXCO) 빌딩에 오르니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 펼쳐진다. 베트남 북부는 산악지역, 남부는 평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치민은 남부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호치민에서 가장 크다는 벤탐시장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규모가 적다. 게다가 팔리는 상품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직까지 베트남의 제조업 구조가 임가공 형태이다 보니 제품다운 제품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지금의 발전 속도로 보면 베트남 제품들이 중국제품을 대체하게 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1억에 가까운 인구와 근면성을 무기로 동남아시아의 최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베트남. 그 중심에 호치민이 있다. ​글·사진 양인환​​​호치민에서 제일 높은 68층의 Bitexco 빌딩. 새로운 건물들이 계속 건설되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보고, 진도 2018-01-05
역사와 문화의 보고진도 햇살 가득한 날의 진도 여행은 진도개와의 만남으로 서막을 연다.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벽파진에는 군민의 성금을 모아 1956년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가 세워져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거센 조수가 만들어내는 울돌목의 아스라한 물살소리는 거대한 해전의 치열한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거침없이 내닫는 겨울의 발자국이 진도에는 채 닿지 않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햇빛을 받아 단풍잎은 그 아름다움을 더 간직하려는 듯 가지 끝에서 빛나기도 하고, 더러는 찬란했던 생을 마치고 땅에 떨어져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잎을 잃은 감나무가 홍시를 가득 달고 커다란 꽃나무처럼 서 있는 풍경이 정겹다. 햇살이 가득한 날의 여행은 진도의 이름을 더욱 더 빛나게 한 진도개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진도개(진도에 있는 모든 종류의 개를 뜻하는 것은 진돗개라고 한다)는 천성이 영리하고 용맹스러워 예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들이 진도에 서식하게 된 유래는 1270년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을 때 몽골에서 제주도 목장의 군용 말을 지키기 위해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진돗개의 진도개 이른 아침부터 공연을 보려는 이들로 북적이는 진돗개 테마파크에서 도해(다도해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함)와 민국, 다영이가 각기 다른 주제로 재주를 뽐낸다. 도해는 ‘환영합니다’라는 펼침막으로 관중들과 인사를 나눈 후 냉장고의 문을 열어 물을 꺼내고, 훈련사가 불러주는 숫자를 똑같이 짖어 영리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가끔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등 무언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에 대해 훈련사는 “사실 난처한 상황이다. 진도개는 호기심이 많고 예민해서 반응이 빠르게 나타난다”며 “평소보다 일찍 시작한데다 사람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고 멋쩍어했다. ​​진도개 테마파크의 조형물​베테랑 민국이는 복종 훈련과 총에 맞은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내고, 애국가에 맞춰 국기 게양도 척척 해낸다. 다영이는 고난도 장애물을 매끄럽게 소화한다. 이처럼 진도개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과정까지는 3~6개월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평일에는 오전 10시와 오후 3시(평일 공연장), 그리고 주말에는 오후 1시에 주말 공연장에서 공연이 있고, 1시 30분에는 진도개의 경주를 볼 수도 있다. ​​진도개 공연장에서 훈련사와 민국이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3층 건물의 홍보관 1층은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견종을 안내하는 세계지도가 펼쳐져 이해를 돕고, 국내의 진도개를 포함한 삽살개와 풍산개, 그리고 동경이의 모형으로 친근감을 준다. 2층은 진도개의 시각과 후각·청각·속력·충성심·사냥방법 등을, 3층은 역대 진도개 챔피언과 우수 진도개 선발대회 입상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보다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면www.jindo.go.kr 를 참고하도록.​​진돗개와 진도개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진돗개박물관​빠르게 과거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끝으로 추수를 끝낸 들과 초록의 숨을 틔워 파릇한 대파밭, 출하를 준비하는 배추밭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명량해협의 길목이자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벽파진에는 ‘이충무공 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진도군민의 성금을 모아 1956년 세워진 이 비는 독특한 구조 때문에 “어, 이게 뭐지?”라며 한참을 둘러보게 된다. 우선 거북기단은 자연 그대로 바위산을 깎고 모양을 만들어 언덕과 일체감을 주었고, 물을 살짝 고이게 만들었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거북은 매일 망망대해를 헤쳐 가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아니 휘영청 밝은 달밤에는 실컷 바다에서 노닐다가 동이 트기 전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로 시작되는 비문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씨를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를 쓴 이 비문은 총 888자의 글자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도 어디쯤 하나 같은 글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결국 그 정성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늘가의 햇발이 바다를 쏘아 비치고구름 가 저 멀리 섬들 푸르게 옹기종기 있구나서쪽 바람 부는 소리 밤들어 몰아치니 성난 물결 벽파정을 뒤집듯 때리네​​충무공 전첩비 아래에는 조선중기의 문장가 장유가 읊었던 벽파정이 있다. 오랜 세월 흔적 없었다가 지난해 5월에 다시 세워진 정자에 올라서면 편액의 시들이 때로는 웅혼한 기상으로, 한편으로는 안빈낙도의 허허로운 여유로움으로 마중을 나온다.​삼별초의 흔적이 있는 용장산성과 남도진성시계 바늘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용장산성에 이른다. 몽고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기지가 있던 곳으로, 모두 불에 타고 행궁의 터와 석축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전할 뿐이다. 지금도 당시의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규모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아직도 복원계획이 잡히지 않았다. 용장사 극락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 당시를 회고하는 듯하고, 전시관은 삼별초와 용장산성에 관한 모형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삼별초가 항전을 벌였던 용장산성용장산성 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알린다​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 곁에는 일손을 멈춘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 싸가지고 온 밥과 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있다. 배추 잎사귀에 밥 한 덩이를 듬뿍 얹고 된장으로 간을 한 후 투박하고 주름진 손으로 건네준, 정 가득한 쌈을 받으니 고소하고 달콤한 향내가 입안에서 진동한다. 바람은 간지러웠고 햇살은 어머니처럼 포근했다. 동백은 겨울을 지나 4월까지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질 것이다.​​동백은 4월까지 피고 지고 또 필 것이다​총길이 610m의 남도진성(南桃鎭城)은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 만호를 배치하고 현재와 같은 형태로 축성했다. 동문 앞의 노랗게 열매를 맺은 멀구슬 나무를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발길에서 벗어난 풀과 나무들이 제멋대로 하늘과 땅을 향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노란색 열매로 가득한 멀구슬 나무​성의 이름에 들어 있는 ‘桃’는 복숭아를 뜻하는데, 이는 성 앞산에서 보았을 때 복숭아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때 성내에서는 65호 정도가 살기도 했지만 3년 전에 마지막 집이 떠난 뒤,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아름다운 옛 돌담길도 모두 허물어져 쓸쓸하고 휑한 모습이다. 남문 앞 자연석으로 만든 1.5m의 홍교(무지개다리)는 나무를 쌓은 후 중심이 되는 돌과 주변의 돌들을 황토로 채운 후 불을 질러 굳힌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조금 더 아래 쌍홍교 너머로 남문의 성루가 어른거린다.​​남도진성은 앞쪽 산에서 보았을 때 복숭아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서망항은 출항하려는 배와 이제 고단한 몸을 누이기 위해 들어오는 어선들로 분주하다. 한창 꽃게가 나는 철이어서 출항을 준비하는 배는 연료를 가득 채우고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활할 동안의 양식을 싣느라 생기가 넘친다. 진도군 소득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시사철 만선의 풍어가 보장되는 넉넉한 어장이다. 한 번 출항하면 돌아오기까지 대개 7~10일 정도 걸린다고.​ 서망항은 진도에서 가장 큰 항구다​​반면 바로 옆 팽목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짓누른다. 세월호 사고가 있기 전만해도 지극히 평범한 항구였지만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방파제를 캔버스삼아 배에 갇힌 이들이 무사하기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그림과 글귀들이 마냥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 “긴 여행 끝내고 이제는 돌아오렴” 등등. 하늘나라 우체통이 있는 방파제 끝 등대까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기게 되는 길이다. ​ 세월호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팽목항​​판옥선과 돛대에서 모티브를 얻은 녹진전망대 금치산 전망대에서 세방낙조 전망대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만큼 빼어난 곳이다. 해가 넘어가고 수평선의 바닷물이 너울지는 그곳에 하순영 시인의 세방낙조 시비가 있다. ​​나는 알았네셋방리에 와서섬과 섬이저문 하늘을 내려받아바다의 무릎에 눕히는 순간천지는 홀연히 풍경이 되고홍주빛 장엄한 침묵이 되고어디선가 울려오는 아라리가락일렁이며 잠가드는 섬의 그림자때로는 꿈도 꽃이 되는가저 불빛에 붉게 젖어한 생애 황홀한 발자국을 찍네​​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세방리의 낙조​​어떻게 이보다 더 세방리의 낙조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기다림은 유한하고 만남은 찰나였다. 섬과 섬 사이로 점점 기울어가다 마침내 바다와 깊은 입맞춤을 하면 진도의 밤이 스르르 열린다. 이처럼 새방낙조가 아름다운 것은 계절에 따라서 해가 지는 위치가 달라지고, 소품처럼 늘어선 섬들이 그 아름다움에 덧칠을 하기 때문이다. 진도타워 전망대는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그리고 주변의 섬들을 내려다보던 녹진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3년 전 들어섰다. 7층의 전망대는 진도군의 7개 읍면을 상징하는데 조선시대의 판옥선을 모티브로 돛대를 올렸고, 주변에는 명랑대첩 당시 13척의 배를 조형물로 구성했다.​​진도타워 전망대는 판옥선과 돛대를 모티브로 했다진도와 내륙을 잇는 진도대교진도를 안내해준 이평기 씨 ​2층에는 진도역사관과 옛날사진관, 명랑대첩 승전관 등 전시 시설들이 마련돼 있고, 3층부터 6층까지는 관광객을 위한 편이시설들이다. 꼭대기 층인 전망대는 날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데, 진도대교의 멋진 모습과 다도해의 경관, 그리고 다리 너머 해남의 산과 들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거센 조수가 만들어내는 울돌목의 아스라한 물살소리는 이곳에서 치러진 거대한 해전의 치열한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운림산방, 조도, 관매도 등등이 발길을 잡는 진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진도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못내 두고 온 님처럼 아쉬움에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음이 그저 먹먹할 뿐이다.  ​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여행의 보석과도 같은, 고창 2017-12-01
​여행의 보석과도 같은고창 고창갯벌은 2010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국제 협약에 따라 보호를 받는 보석 같은 곳이다. 계단식 논농사를 지었던 운곡습지는 경작을 멈춘 후 저층산지의 원형으로 복원되고 있고, 천연기념물과 법정 보호종을 비롯해 549종의 동식물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여행작가협회에서 진행하는 고창 팸 투어 당일. 정확하게 새벽 다섯 시에 울린 알람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어나 순조로운 출발을 자신했다. 하지만 얼마 전 손에 넣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가 일으킨 혼란의 대가는 컸다. 제법 집에서 멀어졌을 즈음 두고 온 것을 알았고, 이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는 출발시간에 가까스로 닿을 만큼 촉박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걸음은 빨라져 어느새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출발장소까지 실어다줄 전동열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지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잠시 후 실낱 같은 희망이 보였다. 마침 급행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 어쩌면 제시간에 닿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제법 평온해지자 이제야 검은 새벽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는 자동차 브레이크등으로 불이 붙은 것 같았고, 강물에 비쳐서 너울대는 모습이 장관이다. 검은 커튼 자락이 서서히 올리어지듯 어둠이 물러나자 경부고속도로는 각자의 사연을 싣고 떠나는 차들로 빼곡하다. 이제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라만차의 기사처럼 어둠을 향해 과감하게 속도를 높였다.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 예요”라는 노랫말이 가인 송창식의 목소리로 애잔하게 귓전을 맴돈다. 아마도 꽤나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서울 광화문을 떠난 버스는 3시간을 넘게 달려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IC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초겨울의 날씨를 한껏 들이키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았던 선운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단풍이 절정을 지났다고는 해도 햇빛을 받아 빨갛고 노랗게 늙어 가고, 구경을 나온 이들은 시간과 빛이 만들어내는 그 단아한 아름다움에 취한다. 걸음은 더딜 수밖에. 그리고 은행나무가 내어주는 여유를 받아들인 상점들이 손님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본다.​​선운사의 단풍은 절정이 지났음에도 아름다웠다​​사실 선운사만큼 잘 알려진 곳도 드물다. 봄철의 동백에 이어 가을 선운사의 꽃무릇도 영광의 불갑사와 함평의 용천사 일대가 3대 군락으로 이름을 올린 지 오래다. 이 때문에서 선운사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등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사하촌은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는 지척이지만 걸음은 더뎌진다. 빛과 교감해 수시로 색을 바꾸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허투루 지나치는 건 고욕이다. 도솔천의 검은 물에 비치는 단풍 또한 일품이다.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은 참나무와 동백나무 잎이 썩어서 우러난 탄닌 성분이 함유됐기 때문이다.천왕문을 지나 맞는 대웅전 안뜰은 배롱나무가 꽃과 잎을 잃어버린 스산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백일 동안 꽃이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꽃말이 ‘부귀’라니 저렇게 다 비워야 채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이 한 번 더 간다. 대웅전 뒤편의 동백숲은 진한 초록으로 빼곡한데 꽃 봉우리가 터트릴 채비를 하고 있다.선운사의 동백은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통해 유명하다. 입구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를 쓴 배경은 주막집 주모와의 관계 등 여러 얘기들이 돌고 있지만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은 ‘미당이 선운사 동구에 있던 막걸리집을 옛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찾았지만 그 흔적을 알 수 없어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건조하게 적고 있을 뿐이다. 미당이 이렇게 선운사의 동백을 노래하자 시인 김용택과 최영미도 각각 ‘선운사 동백꽃’과 ‘선운사’를 통해 사랑 때문에 울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울고, 사랑을 못 잊어 하는 내용으로 거들고 있다.​​​선운사 동구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디다​​ 선운사 경내의 감나무 ​​람사르 고창갯벌은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부안면·심원면 일원의 이 갯벌은 2007년 고창갯벌 습지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후 2010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따라서 습지보호를 위해 제정된 국제 협약인 ‘람사르 협약’에 따라 보호를 받는다. 지난해 람사르 갯벌센터가 들어서고 올해부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방문하는 이들과 고창주민들의 해양보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다양하면서도 체계적인 교육과 관찰활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프로그램은 무료지만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창 람사르 갯벌센터​​1층 전시실은 갯벌의 상태, 서식 생물과 갯벌의 정화작용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갯벌에서 취득한 다양한 형태의 생물로 교구를 마련해 이해를 높인다. 2층에서는 월별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움직이는 갯벌’, ‘바지락이 꿈틀꿈틀’, ‘바다쓰레기를 부탁해’ 등등 갯벌교육이 이뤄진다. 마을 주민들이 교육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데 피드백을 통해 수준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것. ‘갯벌인형극’과 ‘갯벌댄스’ 등을 보고 참여하면 흥이 저절로 일어난다.​​ 갯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갯벌인형극이나 갯벌댄스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인형극을 진행한 갯벌상태 안내인 최선하 씨는 센터가 문을 열 때 지원해 교육을 받은 후 활동하게 됐다면서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동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니 다를 재미있어 한다”고 기뻐했다. 이어 그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이 갯벌의 소중함을 표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만돌갯벌체험학습장은 트랙터를 활용해 갯벌의 끝까지 들어갈 수 있다. 지주식 김 양식장과 썰물이 빠져나가는 길목에 설치해두는 정치망 그물에서는 각종 어류들을 만날 수 있다. 조개류를 캐서 가져가거나 만돌 마을 비닐하우스에서 바로 맛볼 수도 있다. 김 양식장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면 최상의 품질을 얻는다고 한다. 어느덧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마음을 곱게 어루만지며, 황혼이 내려앉자 시간의 흐름이 걸음을 늦춘 듯 고요함으로 다가선다.​​ 갯벌에 들어가 지주식 김양식장, 정치망 그물도 만나볼 수 있다​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다​​갯벌 체험용 트렉터​ 한적한 시골마을의 ‘선운도원’에서는 고추장을 만들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놨다. 여행작가로 활동하던 김수남 씨가 귀촌해서 운영하는 곳으로 조청과 고추가루, 메주가루, 소금물로 간단하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참가한 이들은 “고추장을 직접 만드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막연함이 있었는데 쉽고 재밌었다”며 “집으로 돌아가 혼자서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풍천장어가 익어가고 있다 ​의외로 어렵지 않았던 고추장 만들기 체험​이튿날 찾은 고창국화축제장은 기대보다는 실망이 컸다. 알찬 구성과 화려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남 영암의 국화축제를 벤치마킹이라도 해야 할 듯 보여주는 것도 없고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도 없다. 하지만 꽃은 피었으니 그 향기에 벌들이 찾아들어 얼마 가지 않아 실망은 곧 감탄으로 바뀐다. 사람의 손길을 최대한 절제한 국화밭은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창국화축제는 기대에 못미쳤다 ​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와 닿아 있고 길은 운곡람사르습지로 이어진다. 안내를 맡은 운곡습지생태관광협의회 김동식 회장은 고창의 유래와 역사는 물론 고인돌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을 곁들인다. 김 회장에 따르면 고인돌은 고창읍과 아산면에 분포되어 있는데 4자리 숫자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즉 2로 시작하면 고창읍에 있고 그 다음 숫자는 구역을, 그리고 뒤의 두 숫자는 개수를 의미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고인돌이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선다. 그리고 우리의 DNA에 먼지처럼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고인돌 박물관의 선사유적지​ 동양 최대 고인돌. 무게가 300톤이나 된다​ 산등성이로 올라서면 2011년 람사르 운곡습지의 초입이다. 람사르 협약은 희귀하고 독특한 습지 유형을 보이고 있거나 생물다양성이 풍부해 보존가치가 높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계단식 논농사를 지었던 이곳은 경작을 멈춘 후 저층산지의 원형으로 복원되고 있어 활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수달과 삵, 말동가리,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과 법정 보호종을 비롯해 549종의 동식물이 분포되어 있다. ​​운곡 습지 탐방로​청량산 문수사 ​​아름다운 문수사의 단풍​탐방로는 습지보호를 위해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만 만들었다. 초겨울 낙엽들의 군무를 만끽하다 어느 순간 쏟아지기 시작되니 비가 내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루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라는 소프트한 포장지에 쌓여 의식의 서랍 속 향주머니와 함께 고이 담겨 있는 듯 낙엽 밟는 소리다. 풍경도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네 인생이 그러한 것처럼……. 돌아서는 길, 고창읍성, 무장읍성 등 고창에 남겨 둔 보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고창 여행의 TIP고창읍성 팜팜스테이션 ‘들하담’고창은 하루 이틀에 결코 속살을 내어주지 않는다. 산과 바다와 농촌, 여기에 다양한 눈부심으로 다가오는 문화유산까지. 그렇다면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팜팜스테이션은 여행객들의 이런 고민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고창군의 농촌관광 우수 사업농가 브랜드 ‘팜팜’이 운영하는 방문자센터다.농촌관광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데다 자전거 대여나 짐 보관 서비스는 물론 팜팜 농가들의 믿을 수 있는 로컬푸드를 만날 수도 있다. 팜팜스테이션 들하담(들과 하늘을 담고 있다)은 고창 유일의 게스트 하우스다.문의 063-563-8808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만돌마을의 아름다운 낙조 ​​
중국 속의 타이완, 금문도(金门岛) 2017-11-10
중국이야기중국 속의 타이완, 금문도(金门岛)복건성의 항구도시 샤먼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한 금문도는 중국이 아니라 타이완의 영토다. 1958년만 해도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이곳은 이제 중국과의 왕래가 수월해졌고, 나아가 중국 관광객이 없으면 생활하기 힘든 곳이 되었다.​​  샤먼(厦门:하문)은 중국 복건성(福建省:푸젠성) 남부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아편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42년 영국과 맺은 난징조약에 의해 개항된 5개의 항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샤먼에는 1920년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지은 아름다운 근대식 건물들이 산재해 있어 마치 유럽의 한복판에 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타이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전략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다. 진먼다도(金门岛:금문도)는 바로 샤먼의 코앞에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금문도가 타이완 땅이란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은 중국과 대만의 화해정책으로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지만 1958년만 해도 이곳은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우연찮게 방문하게 된 금문도내가 샤먼을 거쳐 금문도를 방문하기로 한 것은 얼마 전에 우연히 광저우에서 만났던 이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이다. 5년 동안 생사를 모르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이 사장과 나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지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왜 보이지 않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는 그동안 뉴스 속에서나 듣던 경악할 일이었다. 이 사장은 이우에서 5년 넘게 환전을 하며 짭짤하게 돈을 모아온 알부자였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상대방에게 돈을 보내려고 할 때 환치기라는 환전상을 통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환전사기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렀다. 동북에 사는 한국인 A씨로부터 한국으로 2억원을 보내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돈을 받아 한국으로 보냈는데 덜컥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A씨가 지정한 B씨에게 건넨 그 돈은 최종적으로 남대문시장에 있는 조선족 여자에게 전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전달된 돈이 겉에는 진짜 지폐였지만 안쪽은 모두 흰 종이로 만들어진 위조지폐였다고. 알고 보니 한국에서 돈을 받아 조선족에게 전달한 한국인 B씨는 처음 거래를 요청한 A씨와 한 패거리였다. 나중에 돈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족이 A씨를 찾아 나섰지만 계획적으로 일을 벌였으니 가만히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끝내 A씨를 찾지 못한 조선족은 이 사장의 거처를 수소문해 이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에서도 이런 추적은 사실상 불법이다. 어쨌든 이우로 온 그는 이 사장이 사기를 쳤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우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중국 경찰은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며 이 사장을 석방했다. 조선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파출소에 계속 있겠다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파출소에서 나온 이 사장은 그들에게 다시 납치되어 아파트에 감금된 채 매일 2억원을 물어내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이 사장은 전화를 통해 진행한 일이라 B씨의 존재도 모를 뿐더러, 어쨌건 돈은 제대로 전달되었으니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버텼다. 그렇게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맨발로 아파트를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그 길로 친구와 함께 상해 공항으로 갔지만 이미 조선족의 조직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궁리 끝에 멀리 복건성까지 가기로 작정하고 밤새도록 차를 몰아 샤먼에 도착한 후 금문도로 갔다. 타이완에 속한 금문도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치안이 철저한 만큼 조선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남대문 경찰서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응당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5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터. 고초를 겪었던 당시 상황이 눈앞에 어른거렸는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사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사장의 아픔을 떠올리며, 오늘 그가 갔던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불과 1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타이완 땅샤먼에서 금문도로 가는 배는 30분 간격으로 있다. 금문도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홍콩 가는 것과 비슷한 정도였다. 중국과의 양안 관계는 복잡하지만 타이완으로 가는 뱃길은 평화롭기만 하다. 샤먼의 마토(码头:선착장)에서 금문도의 마토까지는 배로 35분이 걸린다. 선착장이 샤먼 시 안쪽에 있어서 그렇지 가장 근접한 곳에서 간다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금문도에서 중국 샤먼까지는 10km 내외의 거리이지만 타이완의 수도인 타이페이까지는 100km나 된다. 타이완에 속한 섬이지만 타이완 본토보다 중국이 훨씬 가깝다. ​​ 샤먼과 금문도를 운행하는 배 ​​샤먼에서 금문도까지 배로 35분이 걸린다​금문도에 내리니 중국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샤먼의 출국장에서는 약간 긴장감이 돌았지만 금문도의 입국장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중국과 워낙 가까운 곳이라 중국의 휴대폰을 그냥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바로 로밍이라는 표시가 뜬다. 타이완은 비자가 필요 없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지도 않고, 이민국에서 90일간 체류할 수 있는 스탬프를 찍어준다.배에서 내리니 건너편으로 샤먼의 빌딩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 건너편이 중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여행안내소에서 지도를 한 장 얻었다. 배에서 볼 때에는 그리 큰 것 같지 않았는데 실제로 돌아보니 꽤 큰 섬이다. 남북의 길이는 5km이지만 동서로는 20km나 된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제주도와 비슷한 인상이랄까. 무더운 날씨에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금문도 샤먼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도로는 잘 닦여져 있다. 열대지방 분위기가 난다​선착장의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 기사와 흥정을 했다. 4시간 정도면 금문도의 주요 볼거리는 다 돌아볼 수 있다는 말에 택시를 타고 섬을 누비기로 했다. 요금은 1시간당 100위엔(1만7,000원).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보거나, 미리 국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금문도 선착장. 택시는 모두 일본 도요타였다 ​금문도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많은 관광객들이 스쿠터를 이용해서 섬 관광에 나서고 있다 ​금문도의 첫 인상은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과거 수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지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시내 곳곳에 설치된 방공호와 콘크리트 참호가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 ​​​평화스러워 보이는 금문도의 모습. 한때 중국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교차로에는 광고판과 참호가 함께 있다​​어딜가나 콘크리트로 지언진 참호를 볼 수 있다  인구 15만 명의 금문도는 타이완의 계엄령이 해제된 1995년까지는 군인들만이 살던 삭막한 섬이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항상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긴장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개방정책 이후 양국의 관계는 양안에서 협력 모드로 바뀌었다. 물론 타이완의 집권당인 민진당이 경제협력은 계속하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약을 내세우면서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복잡미묘한 중곡과 타이완의 관계타이완과 중국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청의 지배를 받던 타이완은 1870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에 할양된다. 이후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6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에는 반일 감정이 아직 크게 남아 있지만 타이완에는 그런 면이 적다는 점은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된다. 금문도에는 큰 빌딩이나 주택단지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그리 큰 혜택을 입지 못해서인지 오히려 중국에 친화적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면세점이 있는 것도, 돈을 펑펑 쓰는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다. 실제로 금문도의 주요 수익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서 거두어들인 것이다. 최근 들어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는 바람에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다 보니 금문도 사람들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더 크다. ​ 마오쩌둥 차를 판다는 입간판. 중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한다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면세점. 중국 관광객을 겨냥해서 지었다 ​​금문도의 부동산값도 엄청 올랐다. 중국 인들의 투자 덕분이다​​요즘 타이완 정부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중국 정부에서 여행객들의 대만행을 억제하고 있다. 사드 사태로 인한 한중 갈등과 비슷한 양상이다. 주민들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불필요한 마찰로 중국 관광객이 오지 않는 데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 대만이든 중국이든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장제스 정권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한때 이곳이 중국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금문도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오랫동안 국공내전을 치렀다. 1949년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도망을 친다. 공산당으로서는 중국을 차지하긴 했으나 타이완이 남았으니 진정한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바로 타이완을 공격해서 통일의 숙원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에 100만 명이 넘는 인민해방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타이완으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금문도부터 넘어야 한다. 샤먼에서 타이완까지는 약 80km 가 넘지만 금문도는 바로 중국의 코앞에 진을 치고 있다. 따라서 통일을 향한 중국의 집념은 금문도에 대한 포격으로부터 시작된다. 1958년 8월 23일 중국 포병들이 일제히 포를 발사했다. 그날 이후 금문도에는 47만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금문도에서 총 85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부상을 당했다. 2,649채의 주택이 완전히 파손되었으며, 반파된 가옥도 2,397채에 이르렀다. 당시 금문도에는 4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섬 주민은 모두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문도는 섬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다 보니 군사시설은 중국의 포격에서 건재했다. 지질학적으로 섬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지반에 굴을 만들어 웬만한 포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천혜의 방어진지였다. 현재 금문도의 지하 진지들은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지하 벙커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넓고 높은 통로와 함께 지휘소까지 갖추어 놓았다. 또한 고속단정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뱃길까지 만들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결국 44일간의 전투 끝에 중국은 대만 침공을 포기하고 만다. ​​요새화되어 있는 지하갱도 입구 ​암석 안에 만들어진 진지는 잠수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뱃길까지 만들어 놓았다​지하에 상당히 넓고 긴 터널을 뚫어 요새화했다 화강암 속에 지어진 진지는 폭탄으로도 절대 부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가는 곳마다 중국과 전투를 했던 무기들을 진열해 놓았다 ​​많은 지역에 전쟁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단순하지 않은 사람들의 속내당시 중국의 전력은 병력 수만 많았지 종합 전투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지금이야 핵무기는 물론 항공모함까지 보유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금문도 하나 제압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니었다. 사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한 것도 군사력보다는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와 민심 이반 현상 때문이었다. 비록 타이완으로 퇴각은 했지만 장제스의 국민당이 보유한 화력은 막강했다.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만 해도 타이완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1971년 26차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상임이사국의 권한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당당히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미국은 타이완이 중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다.이런 타이완과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게 된다. 1969년 미국은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종식시키자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에 참전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연일 반전 데모가 열려 미군들의 사기가 꺾인 상태인 데다 중국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당시 소련)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1969년에는 우수리 강을 사이에 둔 영토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서로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미국과 중국은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1971년 알바니아의 발의로 타이완(당시 중화민국) 대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교체하기에 이른다. 이때 헨리 키신저가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특수한 임무를 맡았고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해 이른바 ‘핑퐁외교’를 펼친다. 그리고 1972년 2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한다. 중국이 그동안 대륙을 가렸던 죽의 장막을 거두어 내는 순간이었다. 나를 안내한 택시 기사는 타이완 사람이지만 중국으로 통일이 되어도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타이완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사고라서 의외였다. 타이완 본토 사람들은 중국을 싫어하지만 국민당과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자신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어느 날 중국에서 쫓겨난 장제스 일행이 몰려와 주인 행세를 해왔다는 생각에서다. 이들은 타이완이 예전부터 중국과 다른 나라이므로 당연히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장제스의 동상, 금문도 주민들은 장제스의 동상이 이젠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타이완 내의 민심은 상당히 복잡하다. 운전기사는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사업을 하다 보니 중국인들이 오지 않으면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중국과 대만 간의 정치적인 대립이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중국 관광객이 꾸준하게 들어오길 바랄 뿐이다. 그런 그에게 국적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닐 터. 대륙에서 건너온 대만 사람들은 아직도 대륙 통일의 꿈을 꾸지만 이제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타이완을 능가하는 GDP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중국이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중국과 사업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처럼 중국이든 타이완이든 통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장사만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돈의 위력 지금은 평화로운 섬이지만 가는 곳마다 예전에 사용하던 군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굴을 파서 조성한 군 병원과 바닷가를 끼고 건설된 휴양소,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위문공연을 벌였던 영빈관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덩리쥔(邓丽君)이 이곳에 와서 타이완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고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록들도 전시되어 있다. 타이완군의 군복을 입고 경례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중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덩리쥔은 한때 타이완 최고의 가수로 “텐민민(甜蜜蜜), 웨랑따이표워떠신(月亮代表我的心)”등 유명한 노래를 남겼다. 아직도 중국에서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이 좋아하던 가수가 적군인 타이완의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약간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 ​군인 휴양소, 전투에 참가하고 나면 이곳 휴양소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예전에 군병원으로 쓰였던 곳, 군사도시라는 것 을 실감할 수 있다​​​​지하에 지어진 야전병원 모든 길목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참호를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덩리쥔이 대만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가장 복잡하다는 구 거리도 그리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상점마다 붉은색 장식이 치렁치렁 걸렸고 안쪽에 재물신이 모셔진 모습이 중국 복건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불교와 미신에 심취해 있는 그들의 삶은 복건성 사람들의 문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다만 중국 관광객이 많이 줄어 예전의 호경기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어느 거리나 한산한 것이, 중국 관광객이 다시 몰려오지 않으면 사람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것 같다. ​​​ 타이완에는 불교신자가 많고 절은 대단히 화려하다  금문도 사람들도 미신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  ​ 조용하고 한적한 구 시가지, 바로 앞에 중국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대만식 전통빵을 한 박스 샀다. 인심 좋게 생긴 주인아주머니는 우리가 한국에서 보던 화교들의 모습과 판박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반가워했다. 한때 대한민국과 타이완은 거의 혈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1992년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안타깝게도 타이완과는 단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만인들이 믿었던 대한민국마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원통해 했던 기억이 난다.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빵집 사장님. 한국에 있는 화교와 판박이다 타이완에서 유명하다는 금문도의 고량주 공장​​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정겹다. 그들 역시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해결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와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경제가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글 사진 양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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