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수리남 남미대륙 속의 작은 네덜란드 2004-08-18
열대 우림에서흘러나오는 강은 바다처럼 넘실댄다. 흔히들 강은 땅과 땅 사이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고 한다. 나라와 나라가 강을 두고 마주보면 강은 바로 국경이 되는 것이다. 강의 하류는 경계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나 넓었던 강이 상류로 올라가면서 수많은 지류를 만나면 강폭은 좁아지다가 어디서부터가 본류이고 어디서부터가 지류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여기서부터 혼란의 불씨는 커져간다. 남미대륙 북단은 왼쪽으로부터 큰 나라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자리잡고 오른쪽 끝으로 조그마한 세 나라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있다. 가이야나와 수리남, 기아나다. 도토리 세 개가 브라질이라는 코끼리 머리 위에 앉은 꼴이다. 가운데에 자리잡은 나라 수리남은 왼쪽의 가이야나와 오른쪽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와 국경 분쟁에 시달린다. 양쪽의 국경이 되는 코란틴 강과 마로니 강이 상류에서 찢어지며 본류와 지류를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제각기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땅을 넓히려 목소리를 높인다. 유럽 열강의 침입으로 질곡의 세월 보내 수리남이 걸어온 길을 보면 ‘한 나라의 땅도 사람 사는 집처럼 주인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메리 인디오들이 고기잡고 농사짓고 사냥하며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던 이 땅을 유럽인들이 처음 본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7년 후가 되는 1499년이다. 신대륙 어딘가에 황금으로 뒤덮인 땅, 엘도라도가 숨어있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유럽의 건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600년대 초 가장 먼저 이 땅에 정착한 유럽인은 더치(네덜란드인)들이었다. 이들은 정글을 뚫고 강을 건너며 엘도라도를 찾아 헤맸지만 헛수고라는 걸 깨닫고 이 땅에 사탕수수와 코코아, 열대과일 농장을 마련했다. 네덜란드 무뢰한들은 땅만 빼앗은 게 아니라 땅주인인 인디오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인디오들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디오들에게는 유럽인들이 옮긴 감기도 치명적이었다. 여기에 악랄한 유럽 농장주들의 혹사가 더해져 인디오들은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농장이 늘어나면서 노동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백인들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시작했다. 대서양을 건너온 건장한 흑인노예들이 농장에 투입되었다. 달콤한 설탕과 고소한 코코아 그리고 메이스 후추 같은 온갖 열대 향신료는 유럽인들의 미각을 미치게 했다. 농장은 더더욱 커지고 노동력의 수요는 계속 늘어만 갔다. 쇠사슬에 묶인 흑인노예들도 계속 들어왔다. 농장주들의 혹사에 견디다 못한 흑인노예들은 농장을 탈출해 몰래 마련해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세월이 흐르며 유럽인들은 입맛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귀족들의 가구는 그때까지 오크(참나무)와 단풍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수리남 정글에서 베어낸 마호가니와 로즈로 만든 가구의 화려한 색깔과 나무 문양은 오크와 단풍의 목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의 벌목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카리브 인디오들이 모여 사는 갈리비 마을 처음엔 네덜란드가 수리남을 지배하다가 네덜란드의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국과 프랑스가 이 땅을 차지하고 협상에 의해 또다시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들여오기 어렵게 되자 그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끌고 왔다. 1975년 마침내 수리남은 독립했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아메리 인디오들은 거의 사라지고 아프리카에서 잡혀왔던 흑인노예의 후손과 인도네시아인들 그리고 인도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농장을 탈출했던 흑인노예 후손들은 부시네그로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정글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나라 국어는 네덜란드어지만 부시네그로들은 아직도 서부 아프리카 가나어를 쓰고 있다. 독립 후 이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데시는 잔인하게 민주 인사들을 처형하고 부시네그로들을 반정부적이라고 단정해 정글 속의 마을을 불태우며 무자비한 탄압을 계속했다. 온 나라가 내전에 휩싸였다. 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소용돌이가 멈춘 것은 겨우 4년 전이다. 피를 뿌렸던 내전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이제야 찾아온 평화를 이 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한다. 수도 파라마리보는 이제 중남미에서 밤길을 혼자 걸어도 겁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한 도시가 되었다. 도시 전체가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식민지시대 네덜란드풍 목조건물이 그 시절 그대로 남아있다. 파라마리보에서 북쪽 해안선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세 시간쯤 달리면 누런 마로니 강을 마주하며 도로가 끝난다. 강 건너 보이는 타운은 프랑스령 기아나땅 상로랑이다. 이 마로니 강가에서 인디오 청년 조지를 만났다. 유럽인들이 이 땅을 짓밟은 탓에 거의 사라졌던 아메리 인디오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지를 따라 모터보트를 타고 그의 마을 갈리비로 가는 길은 강 하류로 물살을 가르며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카리브 인디오 1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갈리비 마을은 조용하게 숲속에 숨어있다. 그들은 모두가 어부들이다. 마로니 강이 대서양으로 빠지는 하구엔 고기떼가 우글거린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오들은 이제 이 나라에서 소수종족에 불과하다. 그들은 덤덤하게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함께 묻어가고 있었다.
멕시코 라틴문화의 중심지를 찾아서 2004 로키-안.. 2004-07-29
칠흙 같은 어두움을 뚫고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미국 출국 스탬프를 찍고 멕시코 입국에 성공하지 못하면 국제미아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중남미 첫 국경 통과는 이렇게 불안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식민시대의 중심도시, 사카테까스와 당나귀 할아버지 미국 국경 검시관에게 탐험의 목적을 설명하고 마침내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국 국경을 통과했다. 하지만 멕시코 국경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 불법입국을 하고 말았다. 멕시코 최북단의 국경 도시 시우닷 후아레스의 첫인상은 혼돈의 지옥과 같았다. 치안부재와 자동차 도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날 자수하는 심정으로 국경으로 향했다. 멕시코에 긴급 투입된 장화민 대원의 능숙한 통역 덕분에 세관신고와 입국신고를 마치고 마침내 라틴 장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엔진을 걸자 무쏘 SUT는 춤추듯이 달린다. 멕시코 북부도시는 숨막힐 정도로 거칠고 황량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멕시코 전통음식 타코와의 만남, 그리고 그 음식과의 오랜 사랑이 시작되었다. 대원들은 또르띠아에 소스와 고기를 넣어 출출한 배를 채웠다. 붉은 황야를 가르며 멕시코 최초의 도시 치와와를 지나 멕시코 식민시대의 중심도시 사카테까스로 행했다. 미국 국경을 넘은 지 3일 만에 당도한 중부 최대의 도시는 멕시코의 신비를 유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수도원과 교회, 궁전, 광장 등 화려했던 스페인 스타일의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 통치가 끝나면서 이 지역에서 무장봉기와 반란이 일어남으로써 사카테까스는 식민시대의 중심지에서 ‘독립의 요람’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사카테까스로의 진입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언덕에 올라가 보면 산만한 듯한 구성과 색채가 독특한 느낌을 주고, 강인한 매력을 뿜고 있다.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부파(Bufa) 언덕에 오르기 위해 대원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향한다. 멕시코의 혁명 영웅 판초 빌라(Pancho Villa)의 동상이 우뚝 선 부파 언덕은 파란의 역사와 혁명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도시에서 탐험대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대를 이어 50여 년 동안 골목 어귀를 지키고 있는 당나귀 할아버지와의 만남이다. 할아버지는 마게이(용설란이라 불리는 선인장)라는 거대한 선인장에서 매일 꿀물 원액을 채취해 3시간 거리의 산길을 걸어와 이른 새벽 사람들을 만난다고 한다. 당나귀 할아버지라 불리는 노인 댁을 방문하기 위해 전대원은 머나먼 산골 마을의 용설란밭을 찾아갔다. 산길로 당나귀를 끌고 돌아온 노인이 우리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노인은 부인과 며느리, 개 두 마리, 당나귀 그리고 닭 몇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순박한 인상의 당나귀 노인은 용설란밭에 나가 즙을 채취해 탐험대에게 내밀었다. 떠나올 때도 당나귀를 이끌고 배웅해 주었다. 누추한 집을 찾아온 첫 외국이이라며, 부인과 함께 즐거워하던 노인과 작별하며 적은 사례금을 쥐어 주자 마지못해 사양치 않고 받던 그 손길, 어린 소년 같은 미소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탐험대는 남쪽으로 핸들을 돌려 구아나후아또로 향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고향, 구아노후아또 탐험대는 멕시코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광활한 중부 산악지역은 식민시대의 중심으로 스페인 문화와 멕시코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 심장부를 향해 전진한다. 그러나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미로 속을 헤매다가 코너를 돌자 파스텔톤의 화려한 색상의 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광의 도시 구아노후아또가 다가온다. 도시의 구성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화려한 색채로 다가서더니 이내 미로가 당황케 하고, 그것은 곧바로 재미로 변한다. 강 바닥을 개조한 지하차도가 굽이진 도시를 관통하는 진입로였던 것이다. 어두운 갱도를 지나듯 일방통행의 지하차도를 달려 환한 세상에 당도했다. 더 이상 차를 타고 다닐 수 없어 주차장에 무쏘 SUT를 세워 두고 나선다. 돈키호테 박물관을 지나 만남의 공원으로 향했다. 월계수가 푸르른 그늘을 드리운 광장 카페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즐기고, 개를 데리고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오랜만에 즐기는 휴식이다. 대원들은 모두 도시의 역사와 낭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하도로의 매력과 독특한 건축물, 수준 높은 벽화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생가가 이곳에 있었다. 사회 비판과 인간발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현한 그의 난해한 그림들은 초기 이태리 프레스코화와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이전의 시각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우화와 상징성을 담고 있다. 1886년 리베라가 태어난 집에는 1층에 생전에 쓰던 가구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과 3층은 그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키스의 계단으로 향했다. 청춘 남녀가 1m도 안되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사랑에 빠졌다. 연인들은 키스를 나누고 사랑을 이어오다 아버지에게 들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슬픈 사랑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키스의 골목을 추억하며 몰려든다. 대원들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골목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드디어 키스를 나눈다. 남자 대원들끼리…. 이 모습을 보고 관광객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밤이 되자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취재와 탐험만큼이나 대원들을 힘들게 한 것은 저렴한 숙소를 찾는 일이었다. 숙소 찾기를 탐험의 일과로 인정한 뒤로는 직관으로 숙소를 찾아내고 어디서든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대원들은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로의 입성(?)했다. 라틴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스페인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멕시코 여행은 스페인보다 더욱 기대되고 긴장감 또한 크다. 마리아치와 데낄라로 유명한 과달라하라 데낄라와 마리아치는 과달라하라의 모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리아치(Mariachi)의 서민적이면서도 슬픈 멜로디가 과달라하라의 으뜸가는 매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리아치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인근 도시 틀라께빠께(Tlaquepaque)의 공연은 더욱 낭만적이다. 거리의 악사인 마리아치라는 직업은 아이들에게도 흥미와 도전의 대상이다. 마리아치의 세계에 푹 빠진 어린 소년들도 눈에 띈다. 이처럼 마리아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과달라하라의 전통예술이자 문화의 한 장르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4∼7명으로 구성된 마리아치가 한 곡을 부르고 받는 돈이 만 원도 안된다. 이것을 나누어 갖기 때문에 생활이 빈곤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하다. 하루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술 데낄라를 찾아 나섰다. 데낄라 생산지인 데낄라 마을로 무쏘 SUT가 들어서자 이상한 차가 나타났다며 사람들이 웅성댄다. 데낄라 공장을 향해 차를 몰고 힘차게 달려간다. 데낄라 제조는 마게이 원료 채취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용설란의 줄기를 치고, 덩어리를 둥그렇게 다듬는 작업. 그리고 정리된 덩어리를 트럭에 옮겨 싣는 과정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다. 원료는 거대한 찜통에 담아서 찐다. 일주일 정도 익히면 잘 익은 고구마 같은 달콤한 향기가 나고 단내가 혀끝을 감돈다. 이것을 잘게 다듬어 채즙과 발효, 증류를 거쳐 멕시코의 대표적인 술이면서 세계인이 즐기는 주류로 탄생한다. 마을 어디에나 데낄라 판매점이 있고, 오크통에 담긴 데낄라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술 이름을 이 마을에서 따온 것처럼 온통 마게이(용설란) 천지고, 마게이를 채집하여 운송하는 트럭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마게이 농장의 광활함에 놀라고 거대한 마게이를 채취하는 일꾼들의 노련한 칼 놀림에 또 한번 감탄한다. 마게이 채취와 떼낄라 제조공정의 흥미로움, 마리아치들의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주는 과달라하라의 강인함과 정통성에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중부도시 중 가장 강인하고 색채가 농후한 문화도시다. 이어서 일행은 아메리카 대탐험 제2의 출발지인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중남미 종단 대기행을 위한 팀스위치가 멕시코시티에서 이루어진다. 2진 안데스 대원이 유럽을 거쳐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래스카를 출발해 이곳까지 동고동락한 로키 대원들과 아쉬운 작별도 해야 한다. 모처럼 안데스팀과 로키팀이 만난 멕시코시티에서 우리는 자동차 정비와 함께 이후 중남미 탐험을 위한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중심가 소나로사와 혁명광장 소칼로를 오가며 적응훈련과 함께 운전요령, 무전교신법, 위급상황 대처요령 등을 익히며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인디오 마을 오악사까에서의 잊지 못할 경험 탐험대원과 함께 10년 만에 콜로니얼 도시인 오악사까(Oaxaca)를 방문하니 설레임이 크다. 10년 전에는 밤차를 타고, 눈을 감고 오악사까를 찾았지만 지금은 한국산 무쏘 SUT를 타고 대원들과 함께 가는 길이다. 세계 최장의 대륙을 종단한다는 감동과 함께 멕시코 남부 중심고도(古都) 오악사까를 방문한다는 설레임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른 아침 오악사까 최대의 유적 몬테 알반 산 정상에 올랐다. 겨울이어서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멕시코시티의 유적 테오티와칸을 본 탓인지 장중함은 없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과 추억의 더듬는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몬테 알반 유적의 역사와 흔적을 더듬으며, 중심광장으로 향했다. 몬테 알반은 수 천년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 온 사포떼까 인들의 비밀세계였다. 스페인의 16세기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도 스페인군들은 매력적인 유물과 지형을 그대로 보존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심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원주민들은 오악사까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100만 명이 넘는, 멕시코에서 가장 큰 원주민 거주지로 남게 되었다. 덕분에 원주민의 문화가 잘 보존되었고, 오늘날 민예품의 보고로 남게 되었다. 오악사까에서 남동쪽으로 30여km 지점에 자리한 인디오 노천시장 틀라꼴룰라(Tlacolula)가 바로 그것이다. 일요일마다 장이 서서 인근 촌락에서 모여든 주민들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교환한다. 특히 화려한 민예품은 세계인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인디오의 세계관을 표현한 자수의 현란함을 떠나서 전통을 중요시하는 원주민들의 강한 자존심에서 우러나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오악사까를 떠나며 과달라하라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마게이밭을 지나게 되었다. 재배단지 주변에는 데낄라가 아닌 메스깔(Mescal)이라는, 벌레와 함께 마시는 독특한 토속주를 휴게소에서 팔고 있었다. 휴게소에 들른 일행은 메스칼에 취해 주인집 아들과 친해졌고 내친 김에 그 집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마게이 재배뿐만 아니라 오악사까의 토속주 메스깔을 직접 주조하고 있었다. 말을 이용해 마게이 재배와 주조를 하는 것을 보고 전대원들이 나서서 마게이 채취와 운반, 그리고 메스깔 주조 공정을 도우며 한나절을 일했다. 사포떼까의 웅장한 유적 몬떼 알반과 원주민들의 강한 자존심이 배어 있는 음식, 화려한 옷을 우리는 잊을 수 없었다. 더불어 벌레와 함께 마시는 토속주 메스깔의 독특한 향과 주조기법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끝없는 남행길을 달리다 2004-07-29
몇 달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앞길이 몇 번이나 뚝뚝 끊겼다. 세닉 RX4에 기계 고장이 일어나는가 하면 앞을 가로막는 폭풍설이 휘몰아쳤다. 유콘 지방에서 혹한에 갇혀 썰매개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과 어울려 한겨울을 꼬박 보냈다. 이런 기다림 끝에 다시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었다. 1년 전 북쪽 알래스카로 가면서 따라간 오직 한 가닥의 도로였다. 그 유명한 ‘알래스카 하이웨이.’ 2천km의 꾸불꾸불한 도로는 북방의 숲 속으로 사라졌고, 로키산맥의 봉우리들 사이를 에돌아 골짜기에서 큰 강으로 흘러갔다. 익숙했지만 이 도로는 아득한 거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유콘 지방의 수도 화이트호스 남쪽에서 이름을 들먹일 만한 첫 도시는 도슨 크리크였다. 남쪽으로 2천km를 넉넉히 뻗어나간 알래스카 하이웨이의 원점이었다. 파리-베를린의 2배나 되는 거리. 두 도시 사이에는 기름을 넣고 쉴 수 있는 역마차 정거장 노릇을 하는 곳밖에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우리는 크루즈 컨트롤을 걸고 남쪽을 향해 일로매진했다. 다행히 이 신비로운 도로를 에워싼 화려한 광야가 눈을 즐겁게 했다. 봄이 활짝 피고 있었다. 밝고 상큼한 초록이 끝없는 숲 위로 나타나고 있었다. 곰들이 가까운 길가에서 풀을 뜯고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강물을 덮고 있던 얼음장이 떠내려가기 시작했고, 녹아내리는 얼음장이 물결에 실려 갔다. 멀리 갈수록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다. 왓슨 레이크 남쪽은 날씨가 얼마나 맑은지 한여름 같았다. 겨울옷과 비버모자를 벗을 때가 되었다. 1년 전 아시아를 떠날 때 벗어 두었던 샌들이 반가웠다. 몇 킬로미터를 더 가자 온천이 우리를 맞았다. 참을 수 없었다. 거대한 캐나다 삼림 한복판에서 유황천에 서둘러 몸을 담갔다. 마치 꿈 속이거나 신화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그림에 딱 한 가지 그늘이 있었다. 바깥 기온이 너무 따뜻해 온천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하 40℃를 내려가는 북극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뜨거운 온천욕은 유달리 신기했다. 도로는 앞으로, 앞으로 뻗어 나갔고 끝이 없어 보였다. 몇 주일이나 수리센터에 갇혔던 세닉은 다시 태어나 힘차게 달렸다. 막막한 대평원의 품 속에서 도슨 크리크에 도착하자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로키의 산봉우리들은 물러나고 광대무변한 대평원이 펼쳐졌다. 크리 인디언의 땅. 겨우 며칠 전 눈이 사라졌다. 그러나 시골의 색깔은 늦여름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가을걷이를 한 들판은 아직 8월 말처럼 누랬다. 8개월이나 되는 겨울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빨간 목조 곳간의 산뜻한 건물이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아주 역사가 짧은 지방이 빚어낸 진짜 건축물이었다. 앨버타는 내년에 100주년 기념식을 치른다. 오랫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만 이 지방을 돌아다녔다. 모피를 찾아 서부로 온 대담한 소수의 덫사냥꾼이 있었을 뿐이었다. 1885년 유명한 캐나다 태평양 철도가 완성되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을 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유럽 이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이곳 땅값은 아주 싸다. 퀘벡이나 온태리오의 품팔이나 재간꾼이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하기 좋은 고장이다. 모든 것을 다시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아직도 그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개척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마을, 학교와 공동체를 건설한 자신의 노력을 자랑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 땅에 자기들의 자취를 남겼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북극권보다는 훨씬 남쪽이지만 대평원의 겨울도 매섭다. 지난 1월 기온은 영하 60℃로 내려갔고 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때로는 가혹한 기후와 무서운 폭풍설이 이 지방을 황폐화시킨다. 악명 높은 1930년대의 대공황은 이 고장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2003년 5월 이후 광우병 소동으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이 막혔다. 수시로 교역을 하는 두 나라의 양축농민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막막한 대평원에서 많은 카우보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헤매는 실정이다.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용광로 자갈길이 수백 킬로미터씩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세닉이 방향을 잃을 일도 여정을 놓칠 리도 없었다. 5월 초인데도 수은주는 사정없이 올라가 영상 27℃를 가리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캐나다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미처 알지 못했다. 북부 앨버타에 무더위가 닥친 3일 뒤 에드먼튼 부근에서 눈이 오기 시작했다. 해질 녘에 눈을 의심할 광경이 벌어졌다. 얇은 싸락눈이 고운 핑크빛 솜처럼 땅을 덮었다. 이미 곡식을 심은 농민들을 탄식케 할 충분한 재앙이었다. 오랜 겨울을 보낸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했다. 빨리 여름이 오기를 비는 마음 간절했다. 우리는 광막한 대평원 한복판에서 정동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트랙터들이 새로 곡식을 심으려고 들판을 다듬고 있었다. 미국에 갈 밀 저장용 사일로가 끝없이 퍼져 있었다. 곡물의 사막 한복판에 놀라운 도로표지판이 나타났다. ‘지루빌’, ‘팔러’, ‘생 폴’ 등 영어 사용국 캐나다에 프랑스어를 쓰는 고장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생 앙드레에서 온 마르탱은 우리 차에 달린 프랑스 번호판을 보자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이곳 앨버타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 퀘벡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마르탱이 말했다. “이 마을 주민 80%가 프랑스어를 쓰고 있어요. 학교와 행정기관에서도 프랑스어를 사용하지요. 오랫동안 싸워 이룩한 성과예요. 영어 사용자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답니다. 우리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니까요. 우크라이나인, 인디언이나 중국인도 이곳으로 많이 와 살고 있는데, 모두가 정답게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대평원 한복판에서 들려 오는 진정한 관용의 메시지였다.
Mykonos 아름다운 코발트빛 유혹 2004-07-22
영화 ‘지중해’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에게해를 동경하게 된다. 하얀색으로 채색된 소박한 집과 풍차, 코발트빛 바다와 강렬한 태양이 주는 여운은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는 충돌을 불러일으킬 정도. 순백의 아름다움과 격정적이고 화려한 밤 문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미코노스 섬은 이런 에게해의 로맨틱한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해준다. 가장 아름답고 유혹적인 그리스 섬 미코노스 섬의 매력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세련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주는 풍경은 경이롭고 한편으론 유쾌한 즐거움이 넘친다. 이 섬에서는 키클라데스 대부분의 섬에서 조우하게 되는 거친 산악 풍경과 걸출한 해변은 물론 화려함과 소박한 재미까지 모두 만끽할 수 있다. 낚싯배와 호화 요트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는 컬러풀한 항구의 모습은 키클라데스의 다른 섬들과는 다른 매혹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국제적인 미코노스 섬이 예술가와 지식인을 비롯한 세계 각 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 여름철 세계의 유명인사들은 이 섬으로 몰려와 휴식과 쇼핑을 즐기고, 각 국의 유람선도 덩달아 몰려든다. ‘스펙터클하다’는 말이 아쉬울 만큼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 그 어떤 시적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청명한 하늘에서 내려 쬐는 강렬한 빛의 발광. 미코노스 섬의 소소한 아름다움은 모든 감각을 즐겁게 한다. 그리스의 술과 음식, 경쾌한 음악과 흥겨운 나이트 라이프가 섬 생활의 즐거움을 더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다. 배가 섬 근처에 도착하면 먼저 항구에 정박한 작은 고깃배와 화이트, 블루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섬 전경이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에 조각배가 점점이 떠 있는 모습은 섬 자체의 낭만적인 기운과 함께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올린다. 항구에 내린 이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펠리컨. 오랜 시간을 섬사람들과 함께 해온 듯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는 펠리컨의 모습에서 미코노스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항구는 섬사람들의 삶의 원천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깃배에서 한가로이 어망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소박하고 정감 있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이 섬은 수천 년을 이어온 생활의 터전일 뿐. 항구 앞 카페에 앉아 무심한 얼굴로 고깃배를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의 모습이 그들과 다른 이질감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지중해의 매혹 모두 담은 호라 골목 미코노스 섬의 중심지는 호라(Hora)라고 불리는 복잡한 골목이다. 항구 인근에 펼쳐져 있는 호라는 키클라데스 섬들 중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 거리다. 호라를 향해 한 발짝 발을 들이면 항구의 소박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 곳곳에 세련된 보석가게와 카페, 디스코텍, 선물가게,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밝은 파랑 칠의 발코니와 제라늄, 붉은 넝쿨 꽃들이 흰 벽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바로 우리가 생각해온 지중해의 매혹, 그것에 다름 아니다. 온통 흰색으로 채색된 거리에서 치즈 파이를 오물거리며 보석가게를 기웃거리다보면 마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뉴욕의 티파니 보석상을 활보하던 오드리 햅번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쇼윈도에 장식된 반지,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 화려한 금빛 보석들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이처럼 세련된 상점과 타베르나(그리스 전통 레스토랑), 작고 인상적인 교회 등이 어우러져 필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만약 운이 좋다면 좁은 골목 사이로 바구니 가득 과일을 싣고 방울 소리를 딸랑이며 지나가는 당나귀도 만나볼 수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여름철의 호라는 낮과 밤의 시간적 경계가 바뀌고 만다. 낮에는 일광욕을 하며 해변에서 쉬거나 책을 읽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모두 골목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골목을 걷다보면 인근 클럽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수백 개에 이르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가 섬 전역을 울린다. 지중해의 강렬한 기운이 바다 저편으로 넘어갈 즈음이면 마을 동쪽 끝의 풍차가 있는 언덕으로 가보자.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의 장중한 모습. 마치 생명을 다한 듯 붉은 전신을 사방에 퍼뜨리며 아득하게 사라지는 태양의 마지막 모습은 온 신경을 마비시킬 만큼 매혹적이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타베르나에서 한 잔의 와인과 함께 바라보는 지중해의 일몰도 잊기 힘든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연인과 함께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추억이 될 것이다. 누디스트의 천국, 파라다이스 해변 미코노스 섬의 콘트라스는 일요일 아침 6시에서 8시 사이에 가장 극명하게 대비된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아직은 부드러움을 간직한 이 시간,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클럽, 디스코텍에서 밤을 즐기던 사람들이 거리를 공유한다. 미코노스의 여름을 함께 하는 이질적인 두 집단의 조우만큼 극적인 대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열정을 풀어놓을 수 있는 밤이 오기 전까지 다시 한번 적막 속에 빠져든다. 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차는 하얗고 파란 색의 대비와 함께 섬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준다. 미코노스는 매년 200~300일 정도 강한 바람이 부는데, 이 바람은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을 완화시켜주는 자연의 축복이다. 섬 주민들은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높이 쌓고 정원에 커다란 나무를 심어놓았다. 밀과 보리를 갈기 위해 세워진 풍차들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이고 섬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뿐이다. 미코노스 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해변이다. 여러 해변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파라다이스 해변과 수퍼파라다이스 해변. 파라다이스 해변은 누디스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언제나 혼란스럽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코발트빛이 일품인 이 곳에서는 한가로운 일광욕에 빠진 사람들부터 스쿠버다이빙, 제트스키 등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까지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종종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민망해지기 일쑤지만 정작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 해변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게이들이 많이 찾는 수퍼파라다이스 해변이 나온다. 이 곳은 미코노스 섬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이다. 선명한 푸른 바다와 순백의 해변은 지중해의 명성이 허명(虛名)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단조로운 해변 생활이 지겨운 사람들은 배를 타고 델로스 섬으로 가보자. 미코노스 섬이 통속적인 쾌락과 세속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면 30분 거리에 있는 델로스 섬은 정반대로 그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섬이다. 우리에게 델로스 동맹으로 잘 알려진 이 섬은 한때 고대 그리스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신화에 따르면 빛과 시, 음악과 치료, 궁술의 신인 아폴론의 출생지가 바로 델로스라고 한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이 섬은 점차 쇠락해 흑해 지역 왕인 미트리다테스의 약탈로 2만 명이나 죽는 비극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거대한 야외박물관이 되어 섬 곳곳에 남겨진 거대한 돌덩이와 주춧돌로 그 옛날의 부귀영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 특유의 밝고 경쾌한 만도린 소리를 들으며 돌아보는 미코노스 섬으로의 여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섬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휴식과 평화는 시간에 쫓기고 생활에 찌든 현대인에게 삶의 활력을 더해준다. 평화로운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미코노스 섬에서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작은 모퉁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사진 | 김선겸(여행 칼럼니스트) 미코노스 여행정보 ● 항공 : 한국에서 그리스 아테네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국내에서 가려면 동남아나 유럽을 경유해 가야 하는데, 유럽을 거치는 것이 한결 편하다. 네덜란드항공(KLM)이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아테네까지 주 6회 운항한다(☎ 02-2011-5500). 아테네에서 미코노스 섬까지는 매일 배가 출발하고 국내선 비행기도 취항한다. ● 환전 및 환율 : 그리스는 EU 가입국가. 국내에서 유로로 직접 바꿔 가는 것이 좋다. 2004년 6월 현재 환율은 1유로=1천423원. 신용카드는 섬 내에 있는 대부분 상점에서 쓸 수 있다. ● 교통 : 미코노스 섬 구석구석을 버스가 연결하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오토바이나 SUV를 렌트해 섬을 돌아본다. 렌트 비용이 생각보다 싸서 성수기 때 하루 30유로 정도로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다. 렌트를 하려면 국제운전면허증이 필수. ● 날씨 및 방문시기 :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철에는 고온건조하고 겨울철에는 반대로 비가 많이 내린다. 미코노스 섬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6~9월로 이 시기에는 유럽 각 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햇빛이 굉장히 강렬하니 선글라스와 자외선 차단 크림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 호텔 : 워낙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섬이라 호텔도 많다. 배가 도착하는 항구에 호텔 주민들이 나와서 무료로 픽업해가니 적당히 흥정해서 찾아가도록. 성수기인 6월 15일~8월 15일은 호텔 요금이 많이 올라가니 참고할 것.
과테말라 티칼(Tikal) 화려했던 마야문명의 꽃 2004-07-15
국경을넘어갈 때 항상 느끼는 것은 두 나라의 경제력 격차가 입국심사에 미치는 미묘한 차이점이다. 경제력의 격차는 노동시장에서 임금의 차이로 이어진다. 부자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 들어갈 땐 비자 받기도 쉽고 입국심사도 간단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나라로 들어갈 땐 까다롭기 짝이 없다. 가난한 나라 국민은 부자나라로 기를 쓰고 들어가려 하고 부자나라는 한사코 못 들어오게 하는 이유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의 노동시장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나라 국민이 가난한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에 가서 돈을 쓰자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 그렇고 우리나라와 중국이 그렇다. 한 지역에서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땐 부자나라에서 가난한 나라 순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역순이 되었다. 중미의 과테말라와 벨리즈(Belize)는 도토리 키 재기지만 그래도 과테말라가 비교 우위에 있어 벨리즈에서 과테말라로 들어가는 국경검문소는 장사진을 이뤘다. 울창한 정글 숲에 색색의 열대동물 노닐어 카리브 연안의 흑인소국, 벨리즈의 수도 벨모판에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 반쯤 가면 국경마을 카르멘에 닿는다. 간단한 출국신고 후 과테말라의 멘코스를 밟으면 긴 입국심사 행렬이 줄을 잇는다. 지겨운 시간 죽이기 끝에 내 차례가 되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콧수염 사내가 여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어본다. “여행 목적은?” “티칼을 찾아서.” 쾅, 두말없이 스탬프를 찍고는 고개를 들어 빙긋이 웃으며 “피라미드엔 올라가지마”라며 손가락 짓을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땡큐”를 연발하고 마침내 과테말라로 들어갔다. 과테말라 국경마을 멘코스에서 탄 콤비는 지겨운 기다림 끝에 만원이 되자 마침내 출발이다. 멘코스를 벗어나자마자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산 넘고 물 건너 서쪽으로 달린다. 푹푹 찌는 날씨와 냉방이 안 되는 고물차에 땀 냄새로 범벅이 된 정원초과 승객들……. 차라도 옆으로 지나가면 노란 흙먼지를 꼼짝없이 뒤집어 써야한다. 한 시간 반쯤 달려 엘 크루세에 도착, 거기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가면 울울창창한 열대 정글에서 원숭이 울음소리 요란하게 들리고 앵무새가 날아오르는 티칼(Tikal)에 닿는다. 태양이 떠오르는 뚜껑처럼 정글 위에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올랐다. 울울창창한 정글이 하늘을 덮어 티칼의 오솔길은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이름 모를 온갖 새들이 제각각으로 울다 때로는 오색찬란한 모습을 살짝 보이며 후두둑 날고, 원숭이들은 겁 없이 길 앞에 어슬렁거리고, 나무 개구리들은 새소리에 질 새라 합창을 한다. 싱그러운 정글의 산소는 모세혈관까지 스며든다. 화려했던 마야(Maya)문명의 꽃, 티칼. 티칼은 도대체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사라졌을까? 치첸이차, 욱스말, 코판 같은 마야유적이 멕시코와 중미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티칼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티칼은 울창한 정글 속에 파묻혀 있다. 과테말라는 적도에 가깝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지대라 사시사철 시원하다. 그러나 티칼이 자리잡은 북동쪽은 저지대로 전형적인 열대우림 지역이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던 마야왕국 티칼은 왜 시원하고 기름진 땅인 고원지대를 외면하고 푹푹 찌는 더위와 맹수, 모기, 독충이 우글거리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해답은 단 하나, 이곳엔 납유리의 일종인 플린트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린트는 철의 제련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티칼이 마야 최강의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철이다. 이들은 온갖 철제 연장을 만들어 이웃나라에 팔아 부를 축적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4천여 개의 유적 간직 티칼의 역사는 기원전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세계 최대 마야유적인 현재의 티칼이 축조된 것은 예수가 태어난 기원과 동시대를 이룬다. 기원 250년 경, 재규어의 발톱이라 불리던 약스왕은 현재의 멕시코 중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그 당시 전쟁 무기는 몽둥이와 돌멩이가 전부였지만 티칼 왕국의 군대는 날렵한 창과 칼로 무장해 적을 완파했다. 하지만 6세기 중반엔 티칼의 철 제련법을 익혀 칼과 창을 만든 동쪽의 이웃나라 카라콜이 티칼의 전쟁법을 전수 받아 티칼 왕국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티칼은 7세기 말엽까지 카라콜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8세기초 다시 나라를 찾은 티칼의 문더블콤왕이 티칼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티칼 왕국의 유적 규모는 엄청나다. 575m2에 50m를 육박하는 피라미드 옆으로 4천여 개의 유적이 산재해 있어 그 옛날 화려했던 티칼 왕국의 위세를 말해준다. 대광장의 쌍둥이사원은 위대했던 티칼왕 문더블콤의 묘지다. 44m 높이의 석조물 속에 180여 조각의 옥과 90여 개의 뼈 조각 상형문자, 그리고 진주와 가오리 척추에 사람의 피로 그린 그림……. 남서쪽 엘문도 페르디도엔 하늘을 찌르는 피라미드가 정글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이 피라미드엔 가파른 돌계단이 천국으로 오르는 길처럼 상층부로 이어진다. 계단 앞엔 경고판이 붙어 있다. “계단을 오르지 마십시오! 경고를 무시한 미국인 두 명이 추락사했음!” 그제야 벨리즈에서 국경을 넘어올 때 콧수염 입국관리관이 했던 계단을 오리지 말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티칼 입구 광장에서 소형버스를 타면 티칼로 들어갈 때 거쳤던 엘크루세를 지나 한시간 반만에 플로레스(Flores)에 닿는다. 플로레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라고데 페텐이차’ 라는 거대한 호수의 서남쪽 끝엔 ‘산타 엘레나’ 라는 도시가 호숫가에 앉았다. 이곳에서 호수 안으로 500m의 가느다란 제방 길을 따라가면 인구 2천 명의 섬, 플로레스가 나타난다. 그 옛날, 정복자 스페니시들이 휴양지로 만들어 놓은 이 섬은 스페인 별장 같은 예쁜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엔 그림처럼 예쁜 수공예점 기념품가게, 술집, 식당, 작은 호텔들이 늘어서 있다. 그루타스 동굴, 공예촌 그리고 산타 엘레나 동쪽 10km에 있는 아르카스 정글에 가면 콩고잉꼬 앵무새와 거미원숭이, 킨카주곰, 큰 소리를 지르는 하울러원숭이, 그리고 운이 좋으면 재규어도 만날 수 있다.
지구 꼭대기에 서다 끈질긴 겨울의 땅에 봄은 찾아왔.. 2004-06-18
정말 지루하게 기다렸다. 이따금 우리는 인내의 한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다행히 르노 세닉 RX4는 되살아났다. 화이트호스에 살고 있는 아일랜드 정비사 마크 오브라이언과 르노의 대담한 지원 덕택이었다. 프랑스에서 갓 도착한 새 엔진이 처음 굉음을 울리 때 벅찬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엔진의 감미로운 멜로디를 거의 잊고 있었다. 눈신을 신고 가루눈 속을 멀리 걸어다녔던 것도, 개썰매를 타고 달리던 기억도 사라진 뒤였다. 그러다가 다시 핸들을 잡고 충실한 우리 짐말을 몰고 나서게 되었다. 처음 몇 킬로미터를 달린 뒤 좋은 소식이 들렸다. 유콘강에 드디어 봄이 왔다는 것이다. 6개월 동안 이 땅을 휘어잡던 눈, 진눈깨비와 영하 20℃에서 40℃를 오르내리던 기온이 사라지고 포근한 봄이 찾아왔다니! 겨우내 강 위에 엉켰던 얼음판에서 큼직한 얼음조각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얼음은 녹아 내리고 깨어지며 봄을 알리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과 영롱한 색깔이 돌아오고 있었다. 유콘 지방 주민의 모습도 변해 갔다. 느긋하고 큼직한 미소가 차차 돌아오고, 오랜 겨울에 지친 얼굴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낮의 길이도 변했다. 4월 중순이지만 오후 9시 30분까지 해가 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해가 가장 긴 여름철과 같았다. 날마다 낮이 6분씩 길어졌다. 그러니까 1주일에 45분이었다. 엄청난 변화였다. 또 다시 덮친 겨울 유콘 지방에 여름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 되살아난 세닉을 시험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화이트호스에서 남쪽으로 처음 나타나는 큰 도시가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따라 1천500km 떨어져 있었다. 그처럼 멀리 내려가기에 앞서 우리는 그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유콘 지방 북동쪽에 케노 시티라는 작은 광산도시가 있다. 케노란 카지노에서 벌이는 게임 이름과 같다. 우리는 그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30km쯤 달리자 영화에나 나옴직한 고장에 들어섰다. 가문비나무숲에 덫사냥꾼들의 오두막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술집과 식료품상의 목조건물이 중심가 양쪽에 늘어서 있다. 색깔이 휘황한 건물 전면에 간판이 자랑스럽게 나붙어 있다. 훨씬 아래로 내려가자 광산박물관의 우중충한 건물이 나타났다. 근처에서 땅을 파서 횡재를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기념물이었다. 말과 마차가 없는 것이 영화와는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케노의 마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밤을 세우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새로 온 눈이 융단처럼 덮여 있었다. 온 도시가 10cm의 눈을 뒤집어썼다. 전날 반소매를 입었던 우리는 스노부츠, 파카와 겨울모자를 다시 끄집어냈다. 함박눈이 세차게 내렸다. 무겁고 축축한 눈이었다. 나이 지긋한 덫사냥꾼이 세닉을 녹이는 우리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유콘에 온 걸 환영하오!” 북극권으로 올라가다 갓 내린 눈구덩이를 간신히 피하면서 케노를 떠났다. 그런데 같은 날 도슨시에 갔더니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몇 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봄이 되돌아왔다. 쓰고 있던 비버모자가 너무 더웠다. 앞으로 3일간 날씨가 쾌청하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유명한 뎀프스터 하이웨이를 달려볼 황금의 기회였다. 도슨과 이누비크를 연결하는 750km의 비포장도로. 이누비크는 북극해의 바닷가에 있는 이누이트족의 땅이다. 이때는 어디서나 운전하기 좋다는 말을 듣고 운을 시험하기로 했다. 2004년은 이 신비로운 도로를 건설한 지 꼭 25주년 되는 해다. 놓쳐서는 안될 뜻깊은 기회였다. 알래스카를 돌아본 뒤 우리는 이런 여행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연료탱크를 가득 채우고, 25X짜리 연료통을 준비한 뒤 정북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눈 덮인 산봉우리에는 아직도 안개 너울이 걸려 있었다. 우람한 소나무숲의 초록은 흰산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냇물은 김을 내뿜고, 쌓인 눈더미 한복판을 뚫고 흘렀다. 그러다가 차츰 고도가 높아지자 설경이 세상을 덮었다. 해발 1천330m의 툼스톤 산꼭대기에 오르자 다시 한겨울이 우리를 에워쌌다. 지평선까지 뻗어나간 광막한 산줄기가 바로 아래 펼쳐졌다. 광대무변한 자연경관이 우리를 압도했다. 마치 지구의 정상에 올라온 듯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길을 멈출 수 없었다. 주위 1천km의 땅에는 단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크든 작든 마을은 없었고, 여기저기 덫사냥꾼의 오두막이 몇 채 있을 뿐이다. 북쪽 저 멀리 산줄기가 평평해지면서 광막한 북극 고원을 이룬다. 덫사냥꾼 피터와 실베인 260km를 달리자 주위 풍경이 달라졌다. 흰눈 속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천막 하나. 이곳에서는 ‘탐광꾼’ 천막이라는 그런 천막이었다. 19세기 말 골드러시 시절에 개척자들이 쓰던 것과 같았다. 잘라 묶은 가느다란 나무줄기에 희고 큼직한 캔버스를 덮어씌웠다. 입구에는 마치 환영단을 떠올리는 눈신 몇 켤레가 놓여 있었다. 캔버스 꼭대기에서 연기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들어오시오!” 얇은 칸막이 너머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를 쑥 디밀었더니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피터와 실베인이 눈에 띄었다. 그들 둘레에는 온갖 장비가 흩어져 있었다. 난로와 솥, 식료품이 널려 있고, 장작난로 위의 빨랫줄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굴뚝이 캔버스를 뚫고 밖으로 솟아올랐다. “들어와서 함께 커피나 한 잔 합시다. 낮잠을 자다가 방금 깨어났소.” 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피터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피터는 덫사냥꾼이었다. 겨울철에 그는 훨씬 남쪽에 있는 통나무 오두막에서 산다. 그곳에서 덫을 놓고 살았다. 그러나 두어 주 전부터 봄기운이 돌자 퀘벡에서 온 숲 속 사람과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천막을 쓰며 숲 속 생활을 했다. 북극권의 고독 속에서 불편한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피터와 실베인은 이런 생활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떠난 남쪽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들의 운명은 외로이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이곳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고된 생존경쟁을 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고 한다. 이처럼 하얀 사막 한복판에서 축복의 황홀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앞길 막히고 덫사냥꾼 친구들과 헤어진 뒤 계속해서 정북을 향해 달렸다. 그들의 천막에서 200km 가량 달리자 북극권과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나타났다. 우리는 잠시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프랑스를 떠난 뒤 이 경계선을 건너는 것이 이번으로 3번째였다. 처음에는 2000년 7월 노르웨이 북쪽, 2번째는 지난 여름 알래스카 북쪽끝 프루드호 베이에 가는 길이었다. 정북을 향해 계속 달렸다. 그러나 포트 맥퍼슨을 지난 뒤 곧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마지막 300km 저쪽에 있는 이누비크로 가는 길에는 얼음다리 3개를 건너야 매킨지강의 하류 삼각지를 가로지를 수 있다. 그래서 이 길은 겨울에만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도로 관리소가 건너가지 못하게 길을 막기로 했다. 따라서 앞으로 한달 남짓 동안 이누이트시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페리는 얼음덩어리가 녹기 전에는 다니지 못한다. 결국 끈질긴 겨울의 땅에서 봄마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남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였다. 광막한 북극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리 앞에는 대평원과 퀘벡이 가로놓여 있었다.
대족석각(大足石刻) 중국 불교예술의 결정체 2004-06-15
중국의 불교 석각예술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불교가 흥한 남북조 시대에 그 유명한 운강과 용문석굴이 만들어지고 당과 송나라를 거치면서 그 제작기법은 점차 세련되게 다듬어져갔다. 송나라 때의 석각예술은 중국 특유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성격이 특징. 대족의 석각들은 대부분 당나라 말기에서 5대10국, 송나라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송 미인풍의 불상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족(大足)은 중경에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아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곳의 불교석각만큼은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는 용문이나 운강, 돈황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대족이라는 이름은 부처의 족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을 주변 산에는 약 5만여 점의 크고 작은 조각들이 남아 있다. 이 중에는 유교나 도교와 관련된 석각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교에 뿌리를 둔 것들로 불만(佛灣)이라고 하는 얕은 마애석굴에 조각되어 있다. 송대 석각의 전형 보여주는 북산 대족석각은 지난 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한 곳에 몰리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어 돌아보는 것이 쉽지는 않다. 석각 분포를 보면 대족 북서쪽의 북산(北山), 남서쪽의 남산(南山)과 석적산(石篆山), 묘고산(妙高山), 동쪽의 탑이산(塔耳山), 동북쪽의 보정산(寶頂山) 등 곳곳에 널려 있다. 이처럼 산재한 대족석각을 짧은 시간에 모두 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불교예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북산과 보정산 석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다. 대족 시내에서 2km 거리에 있는 북산에는 약 500m에 걸쳐 290여 가지에 이르는 불교 석각군이 남단과 북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북산이 나온다. 완만한 계단이 놓인 산을 따라 다시 15분 정도 걷다보면 거대한 석각군이 몰려 있는 것이 보인다. 북산 석각은 대부분 송나라 때 작품이지만 3, 5, 9, 10, 51호 등 몇몇 석각은 당 말기의 것들이고, 이 중 51호 석각인 삼세불(三世佛)은 당나라 때 작품들 가운데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당나라는 중국역사상 영토나 문화적인 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만큼 이 때의 석각들에는 장중하고 단단한 느낌이 감돌고, 송대에 만들어진 조각들은 세밀하고 우아한 면모가 돋보인다. 52호 석굴은 감실의 삼존상―아미타, 관음, 그리고 지장보살―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편성과 당대 특유의 중후함, 송대의 온화함과 현실감을 한데 품고 있어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중국 조각예술의 흐름을 잘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북산 석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136호와 155, 245호 석굴을 들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을 그린 136호는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136호 석굴은 높이 4m, 내부 깊이만 6m에 이르는 큰 규모로 정면 벽에는 보리수 아래에 있는 석가모니가 새겨져 있고 주위 벽에는 문수, 보현, 관음보살과 역사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런 조각들은 대부분 크기만 2m가 넘는 것들로 하나같이 여인의 요염함이 깃들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속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매끈하게 처리된 피부와 조각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시원시원함은 송대 조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들. 원래 북산에는 1만여 개가 넘는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가 파손되었고 그나마 보존 상태가 괜찮은 것들은 철창으로 막아놓아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족석각의 백미로 꼽히는 보정산 북산과 더불어 가장 많은 석각이 남아 있는 보정산은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보정산 석각은 당 말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모두 남송 시대인 1179~1245년에 완성된 것이다. 보정산은 크게 대불만(大佛灣)과 소불만(小佛灣)으로 나뉘는데 중요한 석각은 대부분 대불만에 자리하고 있다. 말발굽 모양을 한 15~30m 높이의 절벽에 크고 작은 31개의 조각군이 형성되어 있고 2개는 석굴, 나머지는 얕은 마애굴이다. 보정산 석각은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대형 석굴 중에서 거의 마지막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무계획적인 북산과 달리 세밀하고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고 화려하며 웅장한 규모도 매력적이다. 보정산 석각은 그 소재가 다양하고 느낌도 강렬해 대족석각의 백미로 불린다. 석각의 내용은 주로 불교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조상(彫像)들은 매우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육도윤회, 열반전(涅槃傳), 보은경변(報恩經變), 부모은중경변, 지옥변상, 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의 경변석화로 벽면에는 본존을 크게 드러내고 좌우의 여러 단에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군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조상들은 남송 특유의 섬세함과 사실성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보정산 석각 입구에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분노한 표정을 담고 있는 호법신상군. 절벽에 나란히 조각된 호법신상들은 밀교(密敎)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인 선종의 호법신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밀교에서는 관음상을 주로 관능적이고 여성적으로 표현하고 호법신상은 남성적이며 분노에 찬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밀교의 호법신상이 석각 입구에 있기는 하지만 수문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호법신상 다음에는 육도윤회(六道輪回)를 표현한 석상이 등장한다. 이 석상은 무상대귀(無常大鬼)가 커다란 바퀴를 입으로 물고 두 팔로 받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퀴는 고해(苦海)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퀴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의 가슴에서 나온 빛에 의해 바퀴는 다시 여섯 갈래로 나뉘어진다. 각 갈래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있고 그 안에는 부처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만물의 시작은 심장에 있고 심장이 일체를 말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작은 동그라미는 모든 사람이 부처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육도윤회도 옆에 있는 3개의 커다란 불상조각은 화엄삼성상(華嚴三聖像)으로 보정산 석각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불상의 표정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하고, 드리워진 가사는 섬세하고 힘차다. 3개의 불상 중 문수보살의 손에는 탑이 놓여 있다. 책을 들고 있는 다른 지역의 문수보살상과 달리 대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단순한 진리 일깨우는 부모은중경변 화엄삼성도 옆에는 기념품이나 책자를 파는 상점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1천 개의 손이 조각된 황금빛 천수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조금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 불상은 송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시 보정산 석각을 대표하는 조각 중 하나다. 보정산에서 가장 유명한 석각 중 하나가 석가열반상(釋迦涅槃像)이다. 높이 5m, 길이 31m에 이르는 와불로 보정산 석각에서 가장 규모가 커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석상은 석가모니가 인도의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 것을 묘사한 것으로 와불 주변에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도열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열반상 바로 앞에는 꾸불꾸불한 도랑이 파여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많은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려하자 부처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길에 금을 그어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석가열반상을 지나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한없이 큰 은공을 묘사한 부모은중경변(父母恩重經變)이 눈길을 끈다. 태어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입까지 비뚤어질 만큼 큰 출산의 고통을 참고 있는 임산부나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자식을 품에 안고 누워 있는 여인상 등 주로 어머니의 은덕을 묘사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가 땅에 떨어져 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석각들이 의미하는 바는 종교적 가치나 예술적 상징성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정산 석각의 마지막 즈음에 자리한 지옥변상(地獄變像)에는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나쁜 일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창에 찔리는 모습이나 두 다리가 잘린 사람,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사람들, 혀가 뽑히는 장면 등이 무척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어 소름이 끼칠 정도. 석각에 새겨진 ‘나쁜 일을 하거나 부모에게 불효하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글귀나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죄짓고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시내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남산 석각은 북산이나 보정산에 비해 규모가 작고 볼품도 없지만 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도교 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대족의 석각들은 단지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교훈과 깨우침을 주어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대족석각은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조차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깨우침을 주기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족석각 여행정보 ● 항공: 대족과 가장 가까운 공항은 중경과 성도에 있다. 중경은 아시아나 항공이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운항하고 성도는 화, 목, 일요일에 연결된다. 중경에서 대족까지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버스가 있고 약 2시간 걸린다. 성도와 대족 사이에는 매일 6번씩 직행버스(4시간 소요)가 오간다. ● 숙소: 대족에서 외국인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은 두 곳밖에 없다.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대족빈관(大足賓館, ☎ 023-4372-1888)으로 2인실을 298~498위엔(元)이나 할인 받을 수 있다. 대족빈관보다 싼 곳에 머물고 싶다면 우정대주점(郵政大酒店, ☎ 023-4372-4200)을 이용하면 된다. 버스터미널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고 시설도 깨끗한 편이다. 2인실이 100~128위엔, 3인실은 158위엔이다. ● 먹거리: 터미널에서 나와 왼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앞에 조형물이 서 있는 사거리가 보인다. 조형물 오른쪽에 있는 도로(중경 방향)에 저녁때면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연다. 아주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어 식사하기는 무척 편하다. 이밖에 대족빈관 앞 보행자거리에도 밤이면 골목골목마다 노천식당이 많이 들어선다. ● 인터넷: 대족빈관 비즈니스센터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사용료는 1분에 0.6위엔(약 90원)으로 조금 비싼 편. 대족빈관 앞 보행자거리에도 싼값에 쓸 수 있는 PC방이 여럿 있다. PC방은 1시간에 2위엔으로 값은 싸지만 한글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 않아 다운로드받아 써야 한다. ● 여행요령: 대족석각은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어 돌아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볼 만한 것들은 모두 북산과 보정산에 몰려 있으니 두 곳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다. 보정산 석각이 가장 아름다우므로 아침 일찍 북산 석각을 들른 뒤 오후에 보정산 석각을 차분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돈황(敦煌) 사막 속의 오아시스 2004-06-10
혜초는704년(성덕왕 3년)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한 스님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조우(廣洲)에서 약관 16세에 배를 타고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구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4년 동안 천축국의 동서남북을 고행하다가 남천축국의 여행길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오언시로 읊어냈다. 날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을 전할까? 혜초는 천축국에서 돌아올 때 육로를 택했다. 지금의 캐시미르 지방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를 지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돈황까지 왔다. 그는 돈황에 머무르며 천축국 여행기를 쓴다. 그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신 명사산 천불동 중국의 북경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4천km 지점, 감숙성 서북쪽 황량한 사막 속에 돈황(敦煌)이라는 오아시스가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한무제 때부터 당, 송, 원을 거치며 이곳은 해상교통이 열리기 전까지 서역으로 가는 대상로의 길목이었다. 중국 본토의 비단, 도자기, 비취 등의 귀중품이 서쪽으로, 서쪽의 명마(名馬) 보옥, 전포 등은 동쪽으로 낙타 등에 실려 인도, 이란, 터키, 유럽까지 건너갔다. 훗날 우리는 이 길을 실크로드라 이름 붙인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서역으로 가던 대상들은 이곳 돈황에서 며칠을 쉬며 짐을 정비하고 낙타에게도 휴식을 갖게 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정보를 얻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그 길을 따라 문명과 문화, 종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문화가 들어온 것도 이 길을 통해서다. 8세기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고승 혜초도 인도에서 돌아올 때 천산산맥을 넘어 돈황을 거쳐갔다. 기나긴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고승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돈황에서 동남쪽으로 25km쯤 되는 곳에 명사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은 모래산이지만 동쪽 면은 절벽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른다. 이 절벽을 일컬어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른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시는 석굴이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1.6km나 이어진 절벽이 벌집처럼 석굴로 수놓아져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돈황의 막고굴인 것이다. 신비함, 경이로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수수께끼, 끝없이 이어 지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화려한 채색벽화와 무수한 조상들로 돈황은 사막의 전설이 되고 있다. 웃지 못할 과거를 간직한 막고굴 19세기말 청나라가 기울자 서구의 열강들은 동양의 거대한 땅 중국을 먹으려고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었다. 왕원록은 호북성 마성현 출신으로 숙주순방군 병졸로 있다가 제대하고 나니 해먹을 일이 없어 괴상한 옷을 걸치고는 자칭 도사가 되었다. 엉터리 왕도사는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돈황으로 흘러들어 왔다. 돌아다니는 것도 지쳤는지 안주할 거처를 찾다가 그는 명사산 동쪽 절벽에 오가는 사람 없어 폐허로 남아 있는 수많은 동굴 중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동굴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그 속에서 밥을 끓여 먹으며 겨울을 나기 위해 동굴 속 여기저기를 손질하다가 그는 입구 오른쪽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던 모래를 치우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벽이 점점 갈라졌다. 왕도사는 이상한 생각에 귀를 벽에 대고 두드렸는데 그곳에서 빈소리가 났다. 벽을 헐자 벽 속에서 조그만 문이 나타나 그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수많은 경서와 문서, 회화 두루마리가 한방 가득 차 있었다. 왕도사는 깜짝 놀라 몇 권의 경서를 들고 돈황의 지사에게 보였지만 그가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자 석실을 다시 봉해 버렸다. 이때는 중국을 먹기 위해 서구 열강들이 중국의 변방으로 탐험대를 보내던 때다. 1905년 10월 러시아의 오브루 체프가 소문을 듣고 왕도사를 찾아와 하찮은 선물을 주고는 두 보따리의 경서를 가져갔다.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1907년 봄 왕도사를 꼬셔 몇 푼의 돈을 주고 경서며 회화 25상자를 싸서 런던으로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고고학 교수 펠리오를 돈황으로 보냈다. 그는 한문과 산스크리트어 등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왕도사의 굴에서 일일이 체크해 알짜배기들만 29상자를 골라 프랑스로 실어보냈다. 그 속엔 세계적 보물인 우리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왕도사는 펠리오가 던져준 얼마의 돈을 챙겼다. 펠리오의 돈황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그제서야 돈황의 경서며 회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청나라 조정은 아무리 나라가 기울어도 이것만은 챙겨야 되겠다고 생각해 나머지를 북경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중 쓸만한 것은 왕도사가 모두 빼돌린 후였다. 북경으로 운반하던 관리도 얼마를 빼돌렸다. 1912년엔 일본의 오오다니 탐험대가 왕도사가 숨겨둔 것을 사갔고 1914년엔 영국의 스타인이 다시 와서 싼값에 왕도사로부터 다섯 상자를 챙겨 갔다. 중국은 현재도 스타인, 펠리오, 오오다니를 중국 문화재 3대 도둑이라 부른다. 1917년 돈황의 막고굴에서는 또 한번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전쟁에 진 러시아 병사 55명이 도망치다 이곳에 피신해 막고굴에서 불을 피워 끼니를 때우고 벽화 속의 금박을 벗겨내 정제를 했다. 지금, 사막의 오아시스 돈황은 웃지 못할 역사를 뒤로 한 채 그 신비스러운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여행객을 끌어 모은다.
눈보라 헤치며 알래스카를 달리다 ‘2004 로키.. 2004-05-19
국내 탐험여행 전문가 8명이 2003년 11월 27일∼2004년 3월, 120여 일간 쌍용 무쏘 스포츠를 타고 ‘로키-안데스 아메리카 대탐험’에 나섰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시작해 캐나다∼미국∼멕시코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에 이르기까지 판아메리칸 하이웨이 7만8천800km를 달리는 대장정이다. 탐험대(팀장 함길수)는 쌍용이 협찬한 무쏘 스포츠 2대를 타고 15개국 100여 개의 도시를 누볐다. 그 여정을 6회로 나누어 싣는다. 지난 10여 년간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탐험여행 동지 8명이 다시 뭉쳤다.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 구실을 하는 로키와 안데스 탐험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2004, Rocky-Andes America’ 대탐험은 15년간 탐험여행을 해온 필자에게도 녹록치 않은 도전의 대상이었다. 2003년 11월 27일 SBS 방송팀과 함께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항공화물로 미리 보낸 무쏘 스포츠 두 대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관수속을 마치고 엔진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출발이다. 북극권에서 한국 젊은이 만나 밤새 이야기 나눠 11월 말 알래스카의 주도 앵커리지는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눈꽃 세상이었다. 수은주는 영하 15℃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게다가 첫날부터 대원들의 팀워크와 화합이 최상이었다. 눈 덮인 도로를 차들은 스노 체인도 없이 잘 달리고 있었다. 타이어에 스파이크가 달려 있어 시속 80km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쏘 스포츠는 서울서 준비해 온 스노 체인을 걸고 시속 80km로 달렸다. 도중에 체인에 이상이 생겨 도로 한 켠에 정차하고 있는데 뒤차가 우리의 정치신호를 못 보고, 뒤늦게 피하다 눈에 처박히고 말았다. 대원들은 무척 놀랐으나 현지인들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체인을 정비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조금 전 사고로 인해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알래스카 중부 도시 페어뱅크스로 방향을 잡고, 개썰매의 고장인 와실라를 향해 출발했다. 도로는 생각보다 잘 포장되어 이었다. 앵커리지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북미 최고봉 매킨리. 대원들은 앵커리지에서 승용차로 2시간 30분 가량 달려 북쪽의 토킷나(Tolkeetna)시에 도착, 8인승 경비행기에 올라 매킨리의 만년설을 향해 쌍발기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해발 6천194m의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는 인간을 압도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비행기의 고공비행이 시작되었다. 빙하 지역을 지나자 이내 깎아지른 암벽과 깊이 1천260m의 빙하로 채워진 계곡, 디날리 국립공원을 감상하며 신비의 세계로 돌진한다. 대원들은 6천m 상공에서의 쾌감과 아찔함을 동시에 느끼며, 두통에 구토를 하기도 했지만 필자는 북미 최고봉의 짜릿한 감동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킨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제2의 도시로 향하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눈보라 치는 빙판길의 앵커리지 페어뱅크스 구간은 처음 찾은 대원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페어뱅크스의 도착과 동시에 다음날 진입할 북극권(Arctic Circle)으로의 비행 일정을 체크하고 체나 핫 스프링스로 떠났다. 이곳은 알래스카 최고의 온천과 오로라 캠프, 개썰매 및 경비행기 투어로 유명하다. 쌍발기 프로펠러의 둔탁한 엔진 소리와 함께 탐험대는 새하얀 천지를 박차고 올라 북극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었다. 신이 빚어 놓은 동토의 대지를 한 마리 새가 되어 날고 있었다. 알래스칸 오일 파이프라인이 동토 위를 지나고 있다.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날아간 지 1시간 반 만에 드디어 북극권 라인에 자리한 원주민 마을 비버크릭 빌리지의 공항 활주로에 사뿐히 랜딩했다. 강한 바람과 한기가 살을 애는 듯 했다. 대원들은 원주민 클리포드 애덤스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마을로 향했다. 70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우체국, 학교, 마을회관, 공동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빠짐없이 들어서 있다. 최초로 이 마을에 이주한 일본인 프랭크 야스다가 살던 통나무집을 지나 클리포드의 아담한 집에 도착한 탐험대는 작은 오두막집에 들어서서 영하 40℃의 추위에 언 몸을 녹였다. 야스다는 1년에 30여 마리의 곰을 잡고, 연어와 무스 사냥으로 겨울 식량을 준비한다고 한다. 다음날 야외 온천과 얼음 동굴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서빙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앞섰다. 그 날 밤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 이상은 패기에 넘쳐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델타 정션에서의 밤샘은 탐험대의 일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추위는 더욱 심해졌다. 어둠이 내리는 오후 4시를 기점으로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혹한 때문에 자동차 동파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무쏘는 튼튼한 벤츠 엔진을 얹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짐짓 위로하며 잠을 청했다. 걱정했던 대로 이른 새벽 엔진이 멈추어 있었다. 여러 차례 시동을 걸어 보았지만 심장은 살아나지 않았다. 엔진에 따스한 이불을 덥고, 오래 예열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일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마의 삼각지대인 알래스카-캐나다 국경지대와 캐나디언 로키의 전초기진인 밴프, 제스퍼 구간의 결빙도로 탈출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도로는 얼어 있고, 포장도로의 아스팔트 구간이 나타나면 블리자드가 몰아치곤 했다. 4WD로 전환해 시속 80km 정도로 달려야 했다. 이따금 오가는 거대한 유류 수송트럭들과 화물트럭이 눈보라를 일으켜 시야를 가렸다. 눈보라 속에서 촬영을 마치고 방송팀이 탄 2호차 안데스가 시속 100km 이상의 속력을 내면서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2호차가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빙판과 겹겹이 쌓인 눈 탓에 추격이 만만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2호차가 눈밭으로 굴러 버렸다. 도로 밖으로 굴러 떨어진 차를 보자 숨이 막혔다. 우선 대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노 체인을 걸어 견인을 시도했다. 수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차를 끌어 올리기에는 힘이 부쳤다. 포기하려는 순간 하이웨이 제설차가 우리의 차 앞에 멈추어 섰다. 체인을 건 채로 무리한 탈출을 시도한 탓에 브레이크 장치에 고장이 났다. 결국 토잉카(래커)를 불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 차를 정비해야 했다.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방송대원과 탐험대원간의 업무협조와 무전교신 체제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캐나다 최북단 유콘 테리토리를 향해 전날 2호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난데다 밤새 기온이 영하 40℃로 내려가 무쏘 스포츠의 심장은 또 다시 멎어 있었다. 인근 정비소로 두 차를 견인해 녹인 후 시동을 걸기로 했다. 불을 뿜는 송풍기를 돌린 지 40여 분, 무쏘는 잠에서 깨어난 듯 힘찬 엔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차 부속이 없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로키 B팀과 합류할 때 수리하기로 하고 브레이크 오일만 점검한 채 캐나다의 유콘으로 부지런히 출발했다. 알래스카 미국 국경을 통과해 캐나다 국경 지대인 비버크릭을 지나 화이트호스로 향하고 있었다. 앨버타주의 캐나디언 로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최소한 2박 3일간 논스톱 주행을 해야 한다. 오전에 차 정비로 시간을 허비한 탓에 오후 4시경 캐나다 국경을 통과했고, 화이트호스는 밤 10시는 되어야 도착할 듯 하다. 거리는 800km. 해가 너무 짧아 하이네스 정션(Haines Junction)에서 밤을 맞게 되었다. 클루아니 국립공원은 해발 790m의 마운틴 로간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유콘의 장엄한 산악풍경을 만나게 되리라. 대자연의 가없는 원시성에 감탄하며 유콘을 떠나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다시 미국의 해안지대인 스케그웨이로 기수를 돌렸다. 예상에 없던 또 한 번의 미국 국경을 통과해 목적지 스케그웨이(Skagway)에 당도했다. 작은 항구 도시에서 이튿날 페리에 차를 싣고 이동하게 된다. 제넬른 헤이거의 호스텔에서 팀원들은 오랜만에 와인 잔을 기울였다. 제넬른의 도움으로 몬티라는 어부를 소개받고, 다음날 10시경 출항을 하기로 했다. 그의 배를 타고 알래스카의 빙하와 바다표범, 고래를 구경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2시간 30분간 거친 바다를 달려 하인스에 도착했다. 북구의 그린란드와 같은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며, 대원들은 코스트 마운틴의 장엄한 노을빛 하늘과 가없는 바다, 하늘을 찌를 듯 한 장대한 산맥에 몰입되었다. 어부들의 밝은 웃음, 동토의 대양 위에 봄을 기다리며 희망을 노래하는 범선들…. 알래스카 남단 협곡에 자리한 이 작은 마을은 자유와 희망을 찾는 알래스카의 프론티어이자 대륙을 향한 염원이며, 바다를 향한 타오르는 눈빛이다. 바닷길 달려 캐나다 내륙 로키로 태평양과 바다 위 군도가 모여 또 하나의 알래스카를 탄생시켰다. 이름하여 알렉산더 아키펠라고.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와 태평양에 둘러싸인 알렉산더 군도는 신비의 섬 제국이다. 알래스카에서 미 내륙 본토 혹은 캐나다 내륙으로 진입할 때 고단하고 지리한 육로 대신 알래스카 마린 하이웨이(Alaska marine Highway)를 선택한다. 알칸(Alaskan highway)이 내륙의 동맥이라면 알래스칸 마린 하이웨이는 해양 하이웨이다. 사실 캐나다 유콘의 화이트호스를 출발해 와슨 레이크, 포트 넬슨, 도슨 크릭을 지나 캐나디언 로키의 심장 밴프로 향하는 길은 로키의 시작을 알리는 3천m급 산맥의 융기와 함께 한다. 고단한 여정과 험로, 그리고 지루한 환경은 로키를 만나기도 전에 사람을 지치게 한다. 우리 탐험대는 바다를 선택했다. 험준한 산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알래스카 대양의 찬 공기와 거친 바다가 그리웠다. 페리의 갑판에 무쏘 스포츠 두 대를 올렸다. 스케그웨이를 지나 주도 주노, 피터스버그, 렌젤에서 한고비 쉬고 나면 마린 하이웨이의 동맥 케치칸이다. 그리고는 내륙의 시작점인 프린스 루퍼트에 이르게 된다. 페리가 대양을 가르고 있다. 오전 8시 대원들과 페리의 갑판에 섰다. 캐나다 서부해안을 끼고 내려오는 해안도시는 포근한 풍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 고기잡이 어선들의 분주함이 삶의 희열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또다시 대륙으로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해발 4천m급 로키가 기다리는 밴프로의 장도가 시작된 것이다. 알래스칸 마린 하이웨이를 오가는 페리 ‘타쿠’와 이별이다. 대양을 뒤로 하고 로키산맥을 향해 탐험대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프린스 루터트에서 프린스 조지를 향하여 힘차게 액셀을 밟는다. 장장 8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하지만 탐험대의 목표는 로키의 심장 제스퍼와 애드먼턴이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프린스 조지에 닿았다. 건강을 염려해 쉬어 가자고 했지만 대원들은 제스퍼까지 내처 달려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로키의 심장부를 향해 주유소도 모텔도 없는 무인지경의 옐로 헤드 하이웨이를 4시간 동안 달려 장쾌한 롭슨 마운틴을 넘자, 우리의 안식처이며 로키의 중심부인 제스퍼가 탐험대를 맞이했다. 이때가 새벽 3시. 무스와 여우, 산양 등 다양한 산짐승들의 밤 외출 장면이 눈 앞에서 연출되었다. 드디어 2004 로키 안데스 아메리카 대탐험의 핵심 줄기인 로키의 허리에 온 것이다. 영하 30∼40℃의 혹한으로 매섭던 알래스카를 출발한 지 12일 만이다. 로키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대원들의 투지와 노고에 새삼 감사를 했다. 장거리를 달려온 대원들은 낙원 같은 에드먼턴의 도시에서 그동안의 여독을 풀기로 했다. 휴식은 보다 나은 도약을 예고한다. 로키를 배경으로 한 에드먼턴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시도 때도 없이 눈이 오는 엄동설한에도 쾌적한 삶과 쇼핑이 가능하도록 상점과 호텔, 유원지, 인공호수까지 유리 돔으로 덮인 세계 최대의 몰을 탄생시켰다. 바로 ‘웨스트 에드먼턴 몰’(WEM)이다. 빙점 아래의 한겨울에도 WEM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파도풀을 즐기고, 모형 잠수함과 돌고래쇼를 구경한다. 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지치다가도 해변이 그리워지면 비치의 파라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남국의 정취를 즐기기도 한다. 영하의 도시 에드먼턴에 이상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침내 파란 하늘이 열렸다. 로키에 입성하는 탐험대를 축복하는 듯 눈부신 태양이 로키의 산중턱에서 내리비치고 있었다. 촬영팀과 대원들은 춤추듯이 로키산자락의 신비의 계곡, 말린 캐년을 향해 달려갔다. 북미대륙을 서쪽 연안 지대와 중부 대평원으로 가르는 거대한 산맥 로키의 심장부를 향한 진군이 시작되었다. 캐나디언 로키의 거점이 되는 제스퍼와 밴프 구간의 아이스 필드 파크웨이가 이번 로키 대장정의 하이라이트다.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지속적인 빙하 활동이 환상적인 자연을 완성해냈고, 그 빙하시대의 자취가 콜롬비아 아이스필드다. 숨겨진 비경, 애서배스카 폭포를 만나기 위해 아이스 필드 파크웨이에 올랐다. 눈을 의심케 하는 로키의 장쾌한 산줄기들이 인간을 위협이라도 하듯 그 웅대함과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영하 20℃의 겨울임에도 멀리서 폭포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어떤 형체의 폭포일까 생각하며 다가간다. 선웹터 강과 애서배스카 강이 합류하여 수량이 증가한 물줄기가 단단한 암반 사이의 좁은 수로를 뚫고 빙하가 녹아서 흘러 내리듯 거친 물줄기를 쏟아낸다. 폭포 주변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다양한 각도에서 폭포와 로키산맥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폭포와 빙하 그리고 거대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로키의 신비한 베일을 벗겨내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는 유구한 대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개썰매 경주 ‘유콘 퀘스트’와 랑데부 축제 북극.. 2004-05-19
유콘 지방의 북쪽 엘도라도가 도슨시티. 우리는 북극권에 있는 이 도시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했다. 대평원과 퀘벡, 동해안으로 달려가자! 화이트호스에서 정남을 향해 떠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겨우 100km를 갔을까. 엔진이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새 엔진 올 때까지 두 달 기다려 실은 알래스카의 북극해를 떠나 남쪽으로 갈 때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가 우리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페어뱅크스에는 르노를 아는 정비사가 없었다. 그래서 엔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달렸다. 규칙적으로 ‘딱딱’하는 소리가 났지만 엔진 출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몇 주일 혹한이 몰아닥쳤다. 한때 도슨시티는 5일 연속 영하 40℃를 밑돌았다. 추위 앞에 엔진이 풀이 죽은 듯 했다. 우리는 눈보라 속에 세닉을 세워 두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시동을 걸었다. 엔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제일 가까운 마을에서 정비사를 불러다 실린더를 검사했다. 압력이 아주 낮았다. 타이밍 벨트에 고장이 났을까? 손을 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제발 어떤 밸브가 일그러지지 않았기를 빌었다. 너무 외딴 곳이어서 세닉을 가까운 도시 화이트호스로 끌어가기로 했다. 남쪽으로는 2천km가 넘는 에드먼튼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갔다. 아주 큰 골칫거리가 된 기계고장 때문이었다. 화이트호스에는 약 15개 서비스센터가 있었지만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르노가 판매를 중단한 지 20년이 넘었기 때문에 르노의 최신 모델을 손질할 사람도, 부품도 없었다. 지평선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제일 가까운 르노 딜러는 멕시코 국경 너머에 있었다.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르노를 팔지 않는 땅에 와서 궁지에 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령 인도와 네팔에서도 비슷한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이곳에는 사방에 차가 돌아다니지만 우리를 도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정비사가 겁을 먹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 변호사가 끼어 드는 일이 잦다. 전문 직업인들은 점점 몸을 사리고, 곤경에 빠질 일은 아예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를 도우려고 선뜻 나설 사람이 없었다. 10일간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아일랜드계 정비사가 우리를 도우러 왔다. 엔진 상부를 뜯어내고 타이밍 벨트가 온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실린더 헤드가 망가져 있었다. 캠샤프트의 통로 주변이 심하게 닳았다. 르노 본사의 고객서비스 기술진은 우리에게 새 엔진을 보내겠다고 회답했다. 엔진이 올 때까지 2개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묶이게 되었다. 좋은 음식 먹고 안마까지 받는 경주용 개들 이 무슨 불운일까. 우리는 북극권에서 한겨울의 추위에 갇히게 되었다. 평균기온 영하 25℃에 하루 낮은 4시간뿐이었다. 낙원과 같은 섬들과 청록색 석호가 있는 남부 태국에서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나 두려움은 금방 사라졌다.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한해 최대의 행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유콘 퀘스트. 세계에서 가장 힘든 개썰매 경주였다. 화이트호스 거리와 신문에는 온통 개썰매 선수들의 무용담으로 가득 찼다. 올해 출전하는 팀은 30개.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화이트호스까지 1천600km를 지원도 받지 않고 달려야 한다. 개썰매 선수들은 눈보라를 뚫고 얼어붙은 호수, 빙판길과 눈 덮인 산마루를 달려간다. 썰매에는 개를 먹일 육류와 연어 자루, 난로와 비상장비를 싣는다. 하얀 눈과 빙판길을 달릴 최소한의 식량과 장비만을 실어야 한다. 중간에 체크포인트는 8개뿐이다. 길게는 300km에 이르는 스테이지를 통과하기 위해 개들의 체력을 가장 알맞게 안배해야 한다. 5∼6시간마다 개를 세우고 먹이를 주고 상처를 치료한다. 필요하면 마사지도 해주어야 한다. 특히 발과 발톱을 꼼꼼히 살핀다. 개들은 모두 헝겊으로 만든 작은 부츠를 신고 있다. 날카로운 얼음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경주 코스의 중간지점은 도슨시티. 모든 팀이 36시간의 의무 휴식을 지켜야 한다. 추운 날씨에도 작은 도시에 구경꾼이 북적댄다. 신문과 TV 보도진이 몰려든다. 선수들이 쉬는 동안 개를 돌볼 전문 사육사들도 대기하고 있다. 얼어붙은 강을 따라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탐광꾼들의 천막이 있는가 하면 장비를 모두 안에 두고 장작 난로를 피우고 있는 덫사냥꾼들의 천막도 있었다. 다른 쪽에는 길다란 천막에 개를 넣어 두었다. 몸값이 비싼 운동선수들처럼 개들도 좋은 음식을 먹고, 안마를 받았다. 시끌벅적한 각종 콘서트로 오두막 열병 씻어내 도슨시티에서 푹 쉰 뒤 개썰매들은 다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매서운 추위 속에 달려가야 할 거리가 800km 남짓 남아 있었다. 결승점인 화이트호스에 도착하면 엄청난 상이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이 고장에서 겨울철에 두 번째 중요한 행사가 벌어진다. 바로 랑데부(RendezVous). 길고 긴 겨울철에 북극권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른바 ‘오두막 열병’이라는 폐쇄공포증이다. 통나무집에 갇혀 있다가 꼭 필요할 때만 밖에 나가 빙글빙글 돌다가 미쳐 버린다. 이런 착란증을 겪은 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광부와 덫사냥꾼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랑데부의 주요 목적은 오두막 열병을 털어내는 데 있다. 한 주일 내내 이 도시는 황금을 찾던 골드러시 시대로 되돌아갔다. 가게 주인들은 가게에 전통 장식을 걸어 놓았다. 날마다 저녁이면 프렌치 캉캉 무용수들이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돌아다니며 춤을 추었다. 각종 콘서트가 벌어졌다. 심지어 ‘미스 랑데부’ 선발대회도 열렸다. 차 대접이나 책읽기 등으로 경쟁을 시키고는 가장 뛰어난 아가씨를 골랐다. 축제 마지막 날 시내 중심가에서 경쟁이 벌어졌다. 전기톱 최고수를 뽑기도 하고, 밀가루 포대를 실은 썰매로 유콘에서 힘이 가장 센 개를 고르기도 했다. 어떤 행사를 하든 배경에는 컨트리 뮤직이 흘렀다.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는 날마다 밤이 늦도록 컨트리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유콘에서 마지못해 보내게 된 겨울은 우리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계 일주여행을 떠난 지 벌써 4년. 그래도 여행을 하면 놀라운 일이 끊이지 않는다!
별을 보고 잠들어 새소리에 깨어난다 비박에서 캠핑카.. 2005-07-16
아웃도어에서는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야 잘 놀 수 있다. 그래서 야외에 나갈 때는 의·식·주를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옷은 계절과 기능에 맞게 갖추면 되고 먹을거리는 라면이든 꽃등심이든 입맛 따라 고른다. 가장 고민되는 것은 잠자리. 야영장비를 일일이 챙겨 다니는 것은 부피든 가격이든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호텔까지는 아니더라도 콘도나 펜션 혹은 휴양림을 많이 이용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안심할 수 있고 마음놓고 쉴 수 있으며 물도 펑펑 쓸 수 있으니 편리하다. 하지만 야영에 비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낭만이 없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자연의 밤바람을 느끼며 잠들고 이른 아침 풀내음과 새소리에 잠을 깨는 기분은 겪어 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야영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 할 터. 마음에 맞는 스타일을 고르시라. ‘자연노숙’이라 할 수 있는 비박(bivouac)부터 ‘자연 속 호텔’ 격인 캠핑 트레일러까지 다양하다. 비박 비박(bivouac)은 ‘노숙’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이다. 쉽게 말하자. 골판지를 깔고 신문지를 덮고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지하도의 노숙자를 떠올려 보자. 바닥에 깔린 골판지를 에어 매트리스로 바꾸고 바람에 팔랑이는 신문지 대신 거위털 침낭을 덮는다. 그리고 지하도의 회색 풍경을 온통 녹색으로 바꾸면 노숙자의 찡그린 인상은 캠퍼의 행복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비박이란 야외 잠자리의 하나라기보다 아웃도어에서 텐트를 칠 상황이 아닐 때 최소한의 잠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암벽등반이나 종주산행에서 사용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가장 자연과 가까운 잠자리이기 때문에 요즘에는 하나의 잠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숙에 비유했다고 해서 비박이 싸게 해결될 수 있는 잠자리는 아니다. 1인용 텐트나 비박색은 20만∼30만 원, 침낭커버만 해도 10만 원이 넘고, 침낭 역시 수십만 원에 이른다. 가장 싸게 잘 수 있는 방법은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판초우의나 은박매트리스를 몸에 두르는 것, 이슬만 피하는 것이다. 텐트 텐트는 야외에 간이집을 지은 꼴로 가장 대중적인 야외 잠자리이다. 돔형과 캐빈형으로 나뉘는데 돔형은 말 그대로 둥근 모양으로 가볍고 튼튼한 대신 높이가 낮아 생활하기에 불편하다. 캐빈형은 통나무집 모양의 텐트로 생활하기 편하지만 무겁고 바람에 약하다. 화창한 날씨에 오토캠핑을 떠난다면 캐빈형이 ‘딱’이다. 요즘에는 높이가 높은 돔형 텐트도 많이 나온다. 텐트를 칠 때는 평평한 곳을 골라 비닐을 깔고(비닐은 지물포에서 파는 김장용 비닐, 비닐과 텐트 사이에 골판지를 깔면 더 좋다) 그 위에 텐트를 친다. 텐트 안에는 야외용 은박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놓는다. 주변의 벌레가 걱정되면 담배 두 개피 희생해서 주변에 뿌린다. 플라이 끈은 팽팽하게 할 것. 플라이 끈 중간부분에 은박지(알루미늄 호일)를 감아 놓으면 쉽게 눈에 띄어 지나는 이들이 걸리지 않는다. 값은 그야말로 천차만별. 돔형이든 캐빈형이든 기본적으로 최소한 20만 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일명 ‘명품 텐트’로 불리며 캠퍼들을 자극하는 스노우피크 텐트는 6인용 돔텐트가 100만 원이 훨씬 넘는다. 대신 매트리스가 필요 없고, 돔형이지만 천장이 높아 활동하기 편하며 천이 튼튼해 이슬이 스미지 않는다. 텐트에 관심이 있다면 자신의 용도와 형편에 맞는 텐트를 고른다. 루프텐트 루프텐트는 텐트를 자동차 지붕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차 위에 텐트를 고정시켜 이동 중에는 접고 잘 때만 펴면 된다. 일반 텐트처럼 땅을 고를 일도 없고 돌멩이 쥐고 펙 박을 일도 없다. 게다가 접어도 안에 공간이 있기 때문에 루프 박스로 써도 된다. 루프텐트 안에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 별도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제품에 사다리가 포함되어 있어 지붕까지 올라가기도 쉽다. 루프텐트의 장점은 마음만 먹으면 집이 ‘뚝딱’ 만들어진다는 점. 낮에 잠깐 눈 붙일 때도 그늘에 차를 대고 잠깐 올라가 편안하게 잘 수 있다. 현재 루프텐트는 이탈리아 수입제품과 국산품이 있다. 수입품의 경우 FRP 유리섬유를 이용해 무겁고 비싼 편. 월드카펜션(www.carpension.com)에서 만드는 ‘카펜션’은 ABS 수지로 만들어 가벼우면서도 저렴하다. 길이는 2m 10cm로 성인이 눕기에 충분하다. 가스식 쇼크 업소버를 이용해 여닫기도 편하다. 종류에 따라 125만∼155만 원. 캠핑카·캠핑 트레일러 캠핑카는 제대로 된 집을 차로 끌고 다니는 개념이다. 커다란 차에 집을 얹으면 캠핑카, 별채의 집을 차에 연결해 끌면 캠핑 트레일러라고 보면 된다. 이 둘을 통틀어 편의상 캠핑카라고 부르자. 앞의 3가지 잠자리 형태에 비해 캠핑카의 매력은 최고의 안락함과 편의성을 누릴 수 있다는 점. 캠핑카만 있다면 ‘급한 볼 일’도, 끈적함을 없애는 샤워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물통을 비우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캠핑카는 수입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만들기도 한다. 국산의 경우도 내장재를 수입하기 때문에 가격이 만만치 않다. 선택장비에 따라 값은 하늘과 땅 차이. 빌리는 것은 주말 24시간 기준 25만 원선. 캠핑 트레일러를 사려할 때 생각할 점은 차의 견인력. 내 차의 견인력에 맞는 트레일러를 사야 끌고 다닐 수 있다. 트레일러의 무게가 750kg 이상이면 특수면허가 필요하고 이동할 때는 트레일러에 사람이 탈 수 없다는 점도 알아둔다(자세한 내용은 본지 6월호 캠핑카 기사 참조). 글|서승범 기자 사진|박창완 사진팀장
Gallery The best place for t.. 2005-07-15
천지가 불상과 탑이나 '천불천탑'이네 그려 전남 화순 운주사 운주사에는 그 흔한 일주문 하나 없다. 험상궂은 얼굴로 악귀를 쫓는 사천왕도 안 보인다. 대신 곳곳에 널린 듯 서 있는 석불과 석탑들. 어떤 것은 부서져 처연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두들 이곳에 들른 갑남을녀의 고만고만한 소원들을 안고 있으리라. 해가 저물어 운주사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돌면 평안과 지혜도 깊어진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등줄기의 땀을 식힌다 전남 담양 대나무숲 나무도 풀도 아닌 것이 곧기와 푸르기로는 으뜸이요, 고소한 죽순에서 선선한 기운을 전하는 죽물까지 그 쓰임새가 많으니 고마울 일이다. 허나 살아생전 대나무의 미덕은 바람소리,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기운을 가졌다. 세상이 하 수상하여 모르고 뱉는 말, 남에게 상처 주는 말 많으니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에 귀를 씻을 일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넉넉한 개펄 경기도 화성 제부도 ‘제부도’라는 이름에는 개흙의 냄새가 물씬하다. 거무스름하고 미끈미끈하여 유쾌하지 않을지 몰라도 섬 전체를 둘러싼 개펄은 자연의 신비요 넉넉한 보고다. 차가운 개흙이 발가락 사이로 스미는 것을 즐기며 개펄과 놀다 보면 알게 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이 개펄에서 살고 있음과 개중에는 우리 입맛에 딱 맞는 것도 제법 있음을 말이다. 얘야, 봉평에 꽃 피었구나. 나들이 가자꾸나 강원 봉평 메밀꽃 메밀꽃은 7월 중순이 되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니 지금이야말로 ‘메밀꽃 필 무렵’이다. 굳이 소설가 이효석의 이름을 빌지 않아도 봉평은 메밀꽃의 고장이다. 게다가 강원도의 한적한 마을인지라 5일장에서는 메밀 인심이 후하다. 입심 좋은 아낙의 농은 덤이다. 슬쩍 발길을 돌려 메밀밭을 향하면 바람을 타고 꽃이 전하는 말이 들릴 것이다. 허허, 돌 구르는 소리 좀 들어보게 경남 거제 학동 몽돌해수욕장 한없이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섬 거제. 이 섬을 감싸고 도는 14번 도로. 그 어느 구석, 아늑하게 패인 곳에 동그란 몽돌들이 모여 바다와 경계를 이룬다. 여기에 하얀 포말이 한차례 휩쓸고 가면 돌들은 ‘다라락, 다라락’ 서로를 토닥거리며 부둥킨다. 예쁜 몽돌 골라 가방에 넣을 생각일랑 말고 마음에 몽돌 담아 보다 너그러워졌으면 싶다. 복날 무더위에 뼛속을 스미는 얼음 바람 경남 밀양 얼음골 삼복더위엔 간담이 서늘해지고 북풍한설엔 훈훈한 바람이 나오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 있을까. 그리하여 명의 허 준은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이곳 얼음골에서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때로 휴가도 일인지라 피곤하다면, 하루쯤 혼자 빈손으로 이곳에 들러 여름 땡볕과 휴가 스트레스로 달궈진 몸과 마음을 식혀봄은 어떤가. 말 없이 조용히 있어 더욱 아름다운 섬 전남 신안 임자도 우리나라에는 3천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국립공원의 이름을 가진 섬도 있고 영토분쟁으로 화제가 되는 섬도 있다. 임자도는 꽤 오래 전 간첩단 사건으로 잠시 입방아에 올랐을 뿐 지금은 잊혀졌다. 그저 섬 주민들의 생활 터전일 뿐인 섬, 되려 그래서 더 찾을 만하다. 섬이지만 차로 드나들 수 있는 것도 미덕이라 해야 할까. 산꼭대기에서 한 치 망설임 없이 내리꽂는 폭포 강원도 정선 백석폭포 강원도 정선의 졸두루 마을을 지나 한적한 5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멀리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외로운 물줄기를 볼 수 있다. 봉우리는 갈미봉이고 물줄기는 백석폭포이다. 아니다. 실은 봉우리가 아니라 절벽 위 능선이다. 뭐 어떤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씻어 줄 수 있는 폭포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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