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아이코스? 오브콜스! 2017-10-12
광화문에서는 역시 궐련아이코스? 오브콜스!담배인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아니, 줄어들었다. 담뱃값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힘들어졌고 제대로 된 흡연구역 하나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쾌적한 흡연구역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공간이다. 아이코스 스토어 광화문점은 우리 모두에게 대안이 될 수 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운다. 혹한의 겨울에 따뜻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운다. 실내금연이 대부분 금지되는 요즘, 흡연가들에게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다. 담배를 피울 때면 영락없이 유목민 신세가 된다. 겨우 적절한 장소를 찾아 한 모금 들이키고 내뿜으면 연기도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떠돈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연기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딜레마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믿겠는가. 되묻지 마시라. 실화다. ​실내의 중심에서 담배를 피우다담배와 직장인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연기 몇 모금에 날려 보낸다. 옛날에는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익숙했지만 요새는 따가운 눈총 세례로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옥상이나 건물 주변에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빌딩 숲에 수줍게 자리잡은 아이코스 스토어 광화문점은 근처 직장인들의 새로운 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높이가 낮은 크림색 외관은 높게 치솟은 푸른 창문들 사이에서 잔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내부는 외관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크림색으로 꾸며진 인테리어는 매번 따뜻하게 반겨줄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스토어는 아이코스 이용자라면 자신의 아이코스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용이 끝나면 스페셜리스트가 클리닝을 도와주기 때문에 들르면 들를수록 이익 보는 기분이 날 거다. 간단한 미팅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실제로 매장에서 업무 전화를 하거나 매장을 약속 장소로 잡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한마디로 아이코스 고객의 전용 카페인 셈이다. 실내라서 행여 옷에 냄새가 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면 그 걱정, 홀더와 함께 차저 안에 넣어두기 바란다. 매장에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만이 느껴질 뿐 담배 냄새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2층에서 상담과 시연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코스가 기존 담배에 비해 갖고 있는 장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부분이다.   2층에도 디바이스와 액세서리가 진열돼 있어 시연하면서 둘러보기에 좋다​스토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고객을 돕기 위해서다. 스페셜리스트가 1:1 혹은 2:1로 사용자에게 설명을 해준다. 특히 첫 구매자에게는 아이코스에 관한 모든 것을 교육한다. 홈페이지에서 할인 코드를 받을 때, 제품 사용법에 관한 동영상을 끝까지 보도록 되어 있지만 사용법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홈페이지 사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스토어를 방문해 실수로 아이코스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자. 아이코스도 이젠 개성시대담배가 예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액세서리를 직접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홀더캡은 12가지 색상으로 판매 중이다. 2만원이면 단조로운 화이트와 네이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일반은 1만7,000원이고 메탈릭은 1만9,000원. 천연 소가죽으로 만든 파우치와 케이스도 6가지나 준비됐다. 전자 디바이스와 가죽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케이스에는 히츠 한 갑, 차저, 클리너가 꼭 맞게 들어간다. 배터리는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물건을 잘 떨어뜨리는 사람이라면 파우치가 필수다. 케이스는 4만9,000원, 파우치는 3만9,000원이다.​​천연 소가죽 케이스. 왼쪽 상단에 구성품이 알맞게 들어찬 자태를 보시라 천연 소가죽 파우치로 생활 흠집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카트레이는 아이코스와 함께 하는 자동차 생활의 품격을 높여준다​​ 사용이 끝난 히츠를 처리하기가 애매하다면 트레이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트레이의 표면은 재나 먼지가 깔끔하게 털릴 수 있도록 다듬어졌다. 스토어 관계자에 따르면 아이코스 사용자가 아닌 사람이 트레이를 사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디자인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탁상용 트레이​는 사이즈에 따라 두 가지로 가격은 각각 4만9,000원, 3만8,000원이다. 카 트레이는 다양한 도로 상황에서 히츠가 날아가지 않도록 뚜껑이 달려 있다. 가격은 4만5,000원. 예쁘다고 정신없이 사다보면 액세서리 값이 디바이스 값과 비슷해지는 상황이 생긴다. 돈이 나가는 건 슬픈 일이지만, 더 슬픈 사실은 디바이스가 망가졌을 때 할인 없이 제 가격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서울에 2곳, 고양에 1곳, 광주에 1곳, 부산에 1곳이 있고 편의점은 CU가 서울 전 지역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GS25를 제외하고 서울 이외에 편의점 구입이 가능한 지역은 경기, 광주, 대구, 부산, 청원 등이다. 자세한 안내는 각 편의점을 통해 확인하자. 이 밖에도 대학가, 카페, 바버샵, 마트 등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아이코스를 만날 수 있으니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점 위치를 찾아보길 바란다.  글 김태현 기자​ ​​HOW T0 1. 차저 안에서 천천히 홀더를 꺼낸다 2. 히츠를 돌리지 말고 홀더 밑에 공간이 남지 않을 때까지 반듯하게 넣는다​3. 예열을 하기 위해 버튼을 2~3초 누르고 진동이 오면 버튼에서 손을 뗀다. 깜박거림이 끝나면 사용한다​4. 히츠를 분리할 때는 꼭 홀더캡을 위로 올려줘야 한다. 겁먹지 말고 과감하게 올리자 ​5. 캡을 올린 상태에서 히츠를 분리해야 홀더에 잔여물이 남지 않는다 
강진(下) 2017-09-27
 아쉬움은 그리움으로 피어나고강진(下)​모란이 필 때면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 없다는 영랑생가는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고 듯하다. 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한국 서정시의 진수를 만끽하고,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이끈다.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자 온 몸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땀방울이 한순간 그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른다. 연신 얼굴을 훔치던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었다. 맞설 수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을 지나자 강진감성여행안내소의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하신 해설사가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 잠시 들어와 땀을 식히고 둘러보라고 권한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자 “어휴 시원하다”라는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듯 땀은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영랑의 시집 등이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고, 생가를 안내하는 홍보물이 놓인 공간이 눈에 찬다.  ​​​존영과 가구가 소박하게 놓여 있는 방​​시인의 감성 느낄 수 있는 영랑생가“고맙다”는 말과 함께 “생가의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첫인상을 얘기하자 모란이 필 때면 이곳을 찾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서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는 기분을  느끼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금세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생가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는 책을 읽는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조형물이 정겨움을 주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발길을 머물게 한다. 영랑의 존영이 놓인 방은 소박한 가구 몇 점을 통해 당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시루와 물동이 등 투박한 옹기와 맷돌이 터를 잡은 장독대에도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라는 영랑의 시비가 시선을 끈다.  ​ 영랑생가 정원 풍경​​장독대 곁에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 시비가 있다​안채에 돌아서니 대마무가 그늘을 내어주는 계단을 통해 세계모란공원과 맞닿아 있다.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을 주제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모란들을 심어놓은 곳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란왕도 대구에서 기증을 받았고, 연중 모란을 피게 하는 기술을 개발해 사철 볼 수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사계절 모란원도 조성했다. 공원의 정자에서는 강진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모란을 모아놓은 세계모란공원​영랑생가 곁에 위치한 시문학파기념관은 1930년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과 정지용, 용아 박용철 3인의 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됐다. 이들을 포함해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 시문학파 9명이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시문학파기념관이란 공간에서 다시 만나 순수 서정시의 진수를 선사하고 있다. ​ ​시문학파 9명을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 ​박용철, 정지용, 김윤식의 상​​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시문학파기념관에서 20여 분 거리의 ‘전라병영성’은 1417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왕조 500 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던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타고 갑오개혁으로 폐영, 지휘부의 건물과 유적이 소실돼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지속적인 복원사업을 통해 성문과 성벽이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성곽의 길이는 1km가 조금 더 되는데 그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공허한 현재와 역동적이던 당시가 겹쳐지는 묘한 여운과 마주한다.네덜란드의 상징 풍차가 반겨주는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핸드릭 하멜을 기념한 곳이다.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선원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후 감금되었다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다. 효종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온 하멜의 지식을 높이 사 훈련도감에서 일을 하도록 했고, 그 후 전라병영성으로 유배를 보내 7년을 머물렀다. 하멜기념관은 당시 그가 타고 왔던 배인 스페르 베르호를 상징하며 전시실은 5개 주제로 유물 15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 ​​하멜기념관에는 핸드릭 하멜 관련 유물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하멜기념관의 풍차​트레킹 코스로 사랑을 받는 가우도는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다.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하고, 섬의 생김새가 소에 다는 멍에와 비슷해 ‘가우도(駕牛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두 개의 출렁다리로 연결됐는데 길이가 긴 쪽은 1km에 이른다. 섬의 2.5km의 ‘함께 海길’을 걷다보면 바람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오고 햇빛에 부서지는 강진만의 바다가 은비늘처럼 번쩍인다. ​그러다가 앞서 헤어졌던 영랑이 먼저 와서 환한 얼굴로 어깨를 내어주고, 넉넉한 그의 품에 기대면 다시 또 그의 시가 스치듯 지나간다. 해상복합낚시공원은 손맛을 즐기려는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곳이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하루 1만원이고, 낚싯대도 5,000원에 빌릴 수 있다. ​​가우도 출렁다리와 해상낚시공원 ​​가우도의 영랑 조각상가우도 해변가의 조각상​빠르게 조여 오는 시간의 사슬을 끊어낼까. 아니면 걸음을 재촉할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에 고민할 새도 없이 몸은 본능적으로 서두름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나폴리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마량항에 이르자 ‘낭만과 여유’에 이끌려 본능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선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가서는 바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멈추게 만든다. 바다는 표정을 바꿔가면서 아낌없이 치장을 한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거북선 한 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 마량포구는 앞에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고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준다. 이곳에서는 지난 4월부터 매주 토요일 아름다운 항구를 배경으로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노래가 초대가수의 마이크를 통해 객석으로 전해지면 박수가 터지고, 더 이상 흥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무대로 나가 몸을 흔들어댄다. 가수도 관객도 신이 났다. ​​마량포구 앞에는 까막섬이 그림처럼 떠 있다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량포구 공원​​볼거리, 먹거리 풍성한 강진에서의 하루무대 뒤편의 횟집과 간이음식점 등을 지나면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공원과 만나게 된다. 등대는 장난감처럼 앙증맞고, 돌고래 조형물을 파인더에 들여 놓으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사치랄까.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지만 해가 기울면서 그림은 질감의 깊이를 더해간다. 마량놀토시장은 ‘3최’를 다짐하는데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신선도, 그리고 최고로 저렴한 가격이 그것이다. 여기에 수입산과 비브리오균, 바가지요금이 없다는 ‘3무’가 더해진다. 관광지의 흔한 풍경인 호객행위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를 마주하며 길을 재촉하지만 이제 멈춰야 한다. 천년고찰 무위사와 호남의 3대정원이라고 하는 백운동 별서정원, 그리고 월출산 자락의 다원 등 아직도 갈 곳이 수두룩하고, 오감을 자극할 먹거리가 풍성한 강진. 하지만 이제 발길을 멈춰야 한다. 머물고 싶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풍경들이 바람처럼 스치듯 떠올랐다 자취를 감추는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글과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중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특별한 주택, 토루(土樓) 2017-09-28
중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특별한 주택토루(土樓)우연찮게 토루를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예로부터 전란에 휘말릴 때가 많았던 허난성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해 복건성 산 속에 터를 잡았다. 이때 산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주거형태가 바로 토루다. 토루의 이색적인 모습과 주변의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으로 이곳은 영화 촬영 장소로도 종종 이용된다.​​​​​우리나라의 서울 남산타워에 납품할 제품을 복건성 첸조우(泉州)에서 만든다. 제품이 완성단계에 있어 검수차 첸조우에 들렀다가 샤먼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놓인 여행 안내서를 통해 토루(土樓:투로우)라는, 아주 오래된 주택이 있음을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이우에서 광저우를 가는 비행기 안에 비치된 잡지에서 보았던 주택이다. 구조가 참 특이해서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해서 여행사에 전화를 하니 아침 7시 15분까지 자동차 검사소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초반부터 난항이었던 왕복 10시간 대장정같은 복건성 내에 있다지만 토루가 있는 난징(南靖: 강소성의 난징과 다른 난징)까지는 꽤 먼 거리다. 가이드 말로는 왕복 10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그리 녹록한 여정은 아니다. 그런데 출발부터 갈 길이 더욱 험난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버스를 타고도 왕복 10시간의 대장정이었다​​샤먼을 출발한 지 1시간쯤 되었을 때 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어느 작은 마을 지나고 있었다. 화장실을 들른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 뒤 공장처럼 생긴 건물로 된 휴게소에 도착했다. 2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니 건물 전체가 생고무로 된 베개와 매트리스를 파는 매장이었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을 지나야만 버스를 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청산유수의 안내원이 생고무 베개와 매트리스의 장점을 소개하고 이를 체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곤 많은 판매원이 관광객들에게 달라붙어 각개전투하듯 베개와 매트리스를 권한다.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상품을 강매하는 것을 보니 오늘 얼마나 더 시달려야 할지 짜증이 앞선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층에서 내려오니 미로처럼 된 길을 따라 수입 커피와 코코넛 등 식품을 파는 매장이 있고 이어서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나온다. 그냥 나갈 수도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앞 사람을 따라 길고 긴 길을 돌고 돌다보니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지쳐 버린다.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은 쇼핑부터 시작된다​​​생고무로 만든 베개와 매트리스 매장​​​여행을 하다가 이런 상품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런 나의 추측을 뒤집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했다. 잔뜩 산 물건을 어떻게 가지고 돌아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계산대 바로 뒤에 택배회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객들을 상대로 상품을 파는 이들의 장사 수완이었다. 19세기의 비단 장사 왕서방은 저리가라였다. 마지막 순서는 음료수와 과일 매장이었다. 하긴, 한국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도 이런 식의 여행패턴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중국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 중국의 여행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작년 해외여행을 떠난 중국인들이 1억2,200만 명이나 되고, 중국 내 여행객도 44억4,000만 명에 이른다 하니 세계 여행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규모다. ​중국은 외국과 외교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무기로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2015년 홍콩에서 우산혁명이 발발하자 중국 관광객들의 홍콩행을 금지시켰다. 또한 대만에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자 여행 자제를 독려했다. 실제로 작년 400만 명을 넘어섰던 중국인들의 대만 여행이 올해는 25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사드 문제가 불거진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이다. 중국의 인해전술이 실감나는 부분이다.​나를 포함해서 38명이 탄 관광버스는 수없이 많은 산과 터널을 지나 쉬지 않고 달렸다. 토루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 지형의 연속이었다. 한계령과 같은 산을 수없이 지나치는데, 도로 옆은 천 길 낭떠러지다. 만약 이곳에서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뼈도 추리기 어렵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온다. 산에는 유자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깎아 일구어 놓은 차밭이 보인다. 복건성은 열대 기후이기 때문에 바나나, 파인애플 등 많은 열대 과일이 생산된다. 또한 운남성과 함께 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복건성을 대표하는 차로는 태관인(铁观音)이 있다. ​전란이 만들어낸 독특한 주거문화토루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가이드는 토루 형태로 지어진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번에도 역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기 전 입구에 있는 찻집에서 차부터 마셔야 했다. 물론 말로는 무료 시음 코너라고 하지만 차를 팔기 위함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토루가 형성된 마을은 일년 내내 물이 흐르는 깊은 산속에 조성되어 있다 ​​ 가는 곳마다 차를 마시는 행사를 가졌다. 현대판 비단 장사 왕서방들이다​​앉아서 차를 마시는 동안 차가 좋은 이유, 차를 마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듣다보면 차를 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선 돈을 내고 여행을 하더라도 이렇게 물건을 사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식당에서 제공하는 밥은 너무 허접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수준. 식당에서 관광객들에게 식사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차와 담배를 파는 공생관계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식사를 하고 다시 갈 길을 재촉하는데 인근의 마을이 모두 토루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만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전에 잡지에서 본 토루의 모습은 모두 원형이었지만 이곳에 산재해 있는 건물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원형이 가장 많았지만 직사각형과 정사각형도 있다. 토루의 역사는 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식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복건성 출신이 아니라 모두 허난성(河南省:하남성)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쓰는 언어 또한 복건성의 민난화가 아닌, 오래전에 중국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보기엔 별로이지만 방어에는 완벽한 구조의 주택이다 토루는 원형뿐만 아니라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다 ​등을 토루 형태로 만들었다​​허난성은 중국의 중원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부터 중국을 차지하려면 중원을 장악해야 한다고 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허난성의 소림사가 유명한 것도 전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면서 부터이다.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른 허난성 사람들은 깊고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깊은 산 속 누구도 침범할 것 같지 않은 안전한 장소에 정착 한 셈이다. 그런데 평화롭기만 할 것 같던 산속 마을에도 침입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산적들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에 겨워하던 이들에게 산적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악귀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족과 이웃들을 산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바로 토루다. 토루의 구조는 외부의 적이 침입할 수 없게 완벽하게 지어져 있다.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져 문을 걸어 잠그면 절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대부분의 토루는 4층으로 지어졌는데 구간을 나누어서 한 가정이 4층을 모두 쓰는 구조로 되어 있다. 1층은 주방, 2층은 창고, 3층과 4층은 침실이다. 침실이 3층과 4층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보통 한 집에 3세대가 살았기 때문이다. 토루는 흙을 사용해 지었지만 밑 부분은 돌을 이용해서 쌓고 지붕은 기와로 마무리해 건축미를 살렸다. 여기에 건물 앞 쪽으로 배수로를 두어 비가 많이 와도 잘 빠지는 과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큰도시로 떠나 빈 곳이 많다 ​토루 안쪽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오래 되었음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시설이 낡았다. 일부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있었다. 건물 외부는 흙으로 쌓았지만 안쪽은 나무를 엮어서 방을 만들었다. 좀 불편하기는 해도 이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었을 듯하다. ​​​많은 토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가장 큰 문제는 물이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한동안 안에서 지내며 이들이 물러갈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음식과 물의 확보가 관건이다. 그래서 토루 안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다. 이런 정황으로 살펴볼 때 물이 있는 지역을 골라서 토루를 지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홍수를 막기 위해 하단부에는 돌을 이용해서 지반을 다졌다​토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물이다. 물이 있는 곳에 토루를 지었다​그리고 모든 토루의 건물 안쪽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독실한 불교신자들이다. 복건성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광동성과 함께 종교에 가장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객지에서 전란을 피해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지켜줄 뭔가가 절실했으며, 이들은 집안에 부처를 모셔 둠으로써 마음의 안위를 찾았으리라. ​​​안쪽에는 부처상이 놓여져 있다. 객지에서의 생활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토루의 주인. 웃음 속에는 넉넉함이 있어 보인다 ​​사람들 떠나간 토루에는 장사꾼들이토루는 복건성 짱조우(漳州)와 롱옌(龙岩)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전체가 토루로 지어져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도 대단히 많다. 이들 모두 허난성에서 옮겨온 사람들이니 허난성이 얼마나 전쟁이 많던 지역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허난성은 쓰촨성(四川:사천)과 함께 중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1억이 넘는 지역이다. ​언뜻 보아서는 토루의 건물 구조가 독특해서 사람이 사는 건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한때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토루가 중국의 특별한 군사시설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고. 첩보 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분석해 보니 진기한 모양의 건물들이 엄청나게 산재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내가 보기에도 군사 연구소 같기도 하고 미사일 기지 같기도 한 특이한 건축 구조이다. ​​​한때 미국 정보기관에서 중국의 군사시설로 착각했던 토루다 ​​토루가 근래에 알려진 것은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토루가 지어진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 산중이다. 오래전에는 이곳을 왕래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속도로가 발달한 현재도 큰 도시에서 차로 3시간 이상 걸리니, 도로가 없었던 시절에는 몇 날 며칠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덩사오핑의 개방정책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토루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 이제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만이 살고 있다.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한 데다 그리 살기 편한 구조도 아니어서 젊은 세대들이 살기에는 적절치 않았던 것. 그래서 요즘은 관리가 되지 않는 토루가 늘어나 금이 가고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건물이 더러 눈에 띄었다.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는 법. 일부 토루는 금이 가고 비바람에 패어 간다​​​거주공간으로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이렇게 지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진다​​토루의 주인들 대신 장사꾼들이 이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토루 안에 들어서면 차를 대접하기 위한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물론 차는 무료로 제공되지만 자신들의 차가 중국 어느 곳에서 생산되는 차보다 훌륭하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차를 사 달라는 뜻이다. 차 이외에도 각종 기념품과 담배를 팔고 있다. 이날도 이곳에서 재배한 담배 잎으로 즉석에서 담배를 말아 판매하고 있었다. 원래 담배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는데 이곳에서 만든 담배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인지 모르겠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말아서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토루에 도착하자 이 지역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관광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안 그 가이드는 처음에는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실 토루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귀찮은 내색 없이 대답을 꼬박꼬박 해주던 안내원은 내가 차를 사지 않자 갑자기 냉정한 태도로 돌변했다. 급기야 내가 질문을 해도 나중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가게에서 상품을 사면 가이드에게 일정의 수수료를 지급하게 되어 있는 것이 관광업계의 불문율이다. 내가 차를 사야 자신한테 돈이 들어오는데 그러지 않으니 괘씸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필요 없는 차를 억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전날 샤먼에서 태관인을 2봉지나 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내가 차를 사지 않은 것이 섭섭하다고 하더라도 180도로 돌변하는 그녀의 태도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는 장사에 혈안이 되어 정작 안내해야 할 장소를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토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장삿속에 시간이 쫓겨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 못내 아쉬웠다.   ​​ 토루의 현지 안내원. 물건 파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을 전체가 토루이다 보니 좀 답답한 느낌도 든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토루의 둔탁한 모양과 조화롭지 못한 것.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어 일년 내내 맑은 물이 마을의 냇가를 거쳐 흘러 내려가며,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대나무와 울창한 열대림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런 멋진 풍광 때문에 가끔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이용된다. 2006년 소개된 ‘윈수야’(云水谣: 옛 고을의 이름)라는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깊고 깊은 산속에 토루의 터를 잡았다​아름다운 풍광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다​​돌아오는 길에 만난 의외의 복병마지막으로 난징에서 가장 크다는 토루를 관람했다.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직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일부 벽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내부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4층짜리와 달리 여기는 5층이었다. 토루는 기본적으로 가운데가 텅 빈 공간이고 벽 쪽으로 방이 만들어진 형태인데 이곳은 내부가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다른 토루와 같이 1층은 주방, 2층은 창고이고 나머지 3개 층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대가족을 위해 설계된 듯하다. 안쪽에는 역시나 불상이 모셔져 있고 우물이 여러 개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 후난징에서 가장 크다는 직사각형의 토루. 높이가 25미터에 이른다 ​큰 구조의 토루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살았으니 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대로부터 전란이 많았던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또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토루를 지어야 했던 중국인들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루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의 주택이다. 비록 먼 길을 왔지만 실제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독특한 볼거리가 주는 감동에,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남부의 8월은 덥다. 무덥고 습한 날씨는 사람을 금방 지치게 만든다. 토루를 돌고 나자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힘들고 목이 말랐지만 진기한 토루를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런 하루였다. 샤먼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행히 쇼핑 코스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샤먼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차들이 엄청나게 밀려 있고,  톨게이트가 끝나는 지점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차들이 정차한 뒤 신분증을 제시하고 트렁크를 열어 경찰의 검색을 받는 사이 승객들도 버스에서 내려 임시로 마련된 검색대를 지났다. 한 명씩 신분증을 확인하고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9월 샤먼 시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로 인해 검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란다. 브릭스는 신흥 경제 5개국으로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말한다. 어쨌건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허긴 작년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회의를 위해 회의장 인근 주민 3만 명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시민들의 불편 따위 개의치 않는 중국정부의 스타일에 다시한번 놀라면서 토루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글 사진  양인환​700년의 역사와 현대의 상징인 코카콜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진(上) 2017-09-07
다산 정약용의 숨결과 발자취를 오롯이 만나는강진(上)​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거짓말을 보태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 연지석가산이 시선을 끈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키우던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쉽다면 2014년 문을 연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키가 작은 구릉과 너른 들의 끝자락이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시 포개어지며 지는 해의 기운을 빨아들일 즈음, 강진읍내의 가로등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켠다. 발길이 드문 소도시지만 버스터미널은 광주와 목포, 순천 등에서 차가 도착할 때마다 대처로 나갔던 이들이 하나 둘 땅을 딛고 걸음을 재촉한다. 여정의 끝이어서일까, 노곤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눈망울은 곧이어 하늘에 지천으로 깔릴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아마도 그리운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일 게다.2010년 10월 전남 영암의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KIC)에서 국내 최초로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려 처음으로 강진을 찾았을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국내외 팬들이 몰려들었지만 목포와 영암 일원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한참 모자랐다. 값은 평소보다 2~3배가 뛰었고, 그나마 자리를 잡기도 불가능해 도심에서 조금씩 떠밀리어 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진이나 장흥을 지나 보성과 순천에 숙소를 정하는 게 나았다. 마침 일정보다 하루 더 일찍 내려왔기에 저 멀리 순천의 송광사를 둘러보고, 벌교에서는 태백산맥의 소화를, 보성의 녹차밭 대한다원 등지를 쏘다녔다. 그러다 멈춘 곳이 강진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땅거미가 올라오자 한 몸 쉬어갈 곳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몸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냥 강진에 갈 뿐이다”강진은 F1 그랑프리의 여파에서 비켜선 듯했다. 읍내의 숙박시설은 여유가 있었고 값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짐을 풀어놓을 것도 없이 그대로 방에 던져 놓은 후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시내를 둘러보았다. 도시에서는 초저녁이라고 해도 좋을 때임에도 일찍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간판은 한 집 건너 불을 내렸고 불이 켜진 곳도 이내 어둠의 대열에 합류했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 더 밝기를 더해가는 것과 비례해 저녁을 건너뛰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던 기억이 새롭다.  강진.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전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설고 조그만 도시는 유흥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빛바랜 사진처럼 다가서고 있었다. 유 교수는 “조용하던 시골은 은둔자가 낙향을 했던 곳이었거나 유배객의 귀향지였을 뿐”이라면서도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채취가 살아 있다”고 이 땅을 소개했다. 그리고 당시 그와 함께 답사를 했던 제자들은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해에 수십여 차례 목포(숙소가 있는 곳)와 영암 서킷(KIC)을 오가지만 강진과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가끔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해도 좀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여름, 일을 핑계로 강진행을 단행했다. 단지 일탈이라는 이름으로……. 모처럼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가족여행. 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올린 후 목포 톨게이트를 통과할 무렵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멈춰야 했다. 세상은 곧 어둠의 망토를 두를 것이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이 더 이상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목포에서 맛집으로 제법 이름을 알린 옥암로의 ‘별 스넥’에서 병어회로 저녁식사를 한 후 평화광장으로 나갔더니 분수 쇼가 한창이다. 음률에 맞춰 무희처럼 흐느적거리다 다시 휘감아 돌고 격하게 수직으로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신이 났고, 연인들은 아름다운 시공간을 마음껏 음미하며 추억쌓기에 여념이 없다. 이튿날, 서두른다고 그렇게 재촉을 했음에도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렸다. 이곳에서 다산초당까지 거리는 50여km에 불과하나 시간상으로는 1시간이 걸린다. 남해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강진IC를 빠져나온 후 강진군청으로 방향을 잡으니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창밖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벼와 잡풀들이 뽐내듯 다투는 녹색의 향연과, 이에 질세라 푸르고 깊은 하늘, 그리고 시뻘건 백일홍이 드문드문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창문을 열자 한여름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어 차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안내하는 이정표 ​​강진 초입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지척이다. 동백나무와 삼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등이 제공하는 짙은 그늘에 얽히고설킨 나무의 뿌리들이 마중을 나왔다. 정호승 시인은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지하에 있는 뿌리가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중략)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그렇게 오른 다산초당(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은 초가가 아니라 기와를 올렸다. 본디 초가였던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반뜻하게 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은 윤씨 집안의 서당으로 쓰이던 이곳에 놀러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경치에 반했다. 이에 시를 지어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10여 년을 이곳에서 머문 다산은 18명의 제자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썼다.  ​초당의 툇마루에 앉으니 동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인해 앞이 막혀 어두컴컴하다. 오른편으로 다가서자 조금 과장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연못이 시선을 끈다. ‘연지석가산’으로 불리는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곳에 잉어도 키웠는데, 잉어의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가면 백련사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길이는 1.0km 정도지만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산초당에는 ‘다조’와 ‘丁石’ 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다산초당의 부족함 기념관에서 가득 채워 다산의 숨결을 느끼지 위해 찾은 다산초당. 하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게 다일까? 다산은 이렇게 초당에서 훗날 자신의 발자취를 찾아올 후인들에게 잠시 땀이나 식히고 가기만을 원했을까?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불볕더위에 숨이 턱 막혔고,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쳐낸 손수건은 흥건했다. ​그러나 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산기념관’이라는 이정표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 다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진군이 다산의 유배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다산초당 아래에 세운 것으로 2014년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 입구에 제자를 가르치는 다산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해 놓았고, 벽면에는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감찰기관을 두려워하고, 그 위로는 조정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목민관이 경계해야 할 4가지가 새겨져 있다. ​​다산에 대한 갈증은 다산기념관에서 채울 수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다산과 제자들이 공부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다산이 축저한 수원 화성 모형​다산의 각종 저술과 당시 교류했던 학자들의 별첩과 간찰들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은 다산이 공부하던 어린 시절부터 관료생활 시절의 모습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의 죽음과 뒤이은 유배로 강진에 머무른 과정 등도 동영상으로 알기 쉽게 재현해 놓았다. 기자는 특히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 있는 ‘하피첩’과 ‘매화병제도’에 시선이 고정된다. ​결혼한 지 30년, 유배 간 남편과 헤어진 5년 후 다산의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가져와 장롱 밑에 넣어둔 붉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다.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랜 그 치마는 여인의 모든 것으로, 남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이에 다산은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나눠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주었다. ​이것이 ‘하피첩’이고, 남은 치맛자락에 유배생활로 12년 동안 보지 못한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매화 꽃가지 위에 정다운 멥새를 그려 선물한 것이 ‘매화병제도’다. 이밖에 기념관은 다산의 일생과 주변 인물들을 그림과 동영상, 조형물 등으로 제작해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친근감 있게 만들었다. ​​​관료생활을 하던 때의 모습​다조에서 차를 즐기는 다산의 모형 ​시집가는 딸에게 선물을 한 매화병제도​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과 경직의방 다산기념관에서 자동차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백련사’가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년)에 지어진 이 사찰은 고려후기에 8국사와 조선후기 8대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은 크기도 어마어마해 5.2헥타르의 면적에 7,000여 그루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통일신라 문성왕 1년에 지은 백련사 ​ 백련사 대웅전 옆에 활짝 꽃을 피운 백일홍​ 백련사 한 전각의 실내 ​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됐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까지 이르는 300m의 비탈길은 오래된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비자나무가 도열하듯 늘어서 햇빛을 걸러낸다. 대웅전에서는 예불 올리는 승려의 독경과 목탁소리가 은은하다. 그 곁에는 수백 년의 세월동안 뿌리를 내렸을 백일홍이 단청 고운 처마와 수시로 바뀌는 하늘빛, 그리고 저 멀리 강진만의 물결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백련사 경내로 오르는 길 백련사에서 훤히 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아직도 강렬함을 잃지 않는 햇빛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장기가 슬슬 고개를 내민다. 오늘의 메뉴는 강진에서 한정식으로 유명한 ‘남문식당’. 하지만 자리가 없다. 한껏 기대하고 갔는데, 헛물을 켜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손님이 생선구이 정식을 하는 식당을 소개해준다. 돌솥에 밥을 해서 내놓고, 고등어와 열기, 전어 그리고 갈치를 구워서 내는 집이었는데, 정갈하고 깔끔한 맛에 감탄이 저절로 일었다.(다음호에 계속)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강진읍내의 생선구이 정식집의 상차림​ 
독수리 5형제의 유럽 원정기 2017-08-25
독수리 5형제의 유럽 원정기 2017년 1월호에 이어, 다시 돌아왔다. 유럽의 드라이빙 명소를 달리고 온 BMW Z3 클럽 멤버들의 두 번째 유럽 자동차여행기.       세계로 달려가는 ‘독수리 5형제’ 이진후 아시아나항공 기장이다. 비행기는 어쩔 수 없이 자동운전을 겸하지만 땅에서는 수동 운전만을 고집한다. 2000, Z3, Z4 모두 수동변속기 차만 가지고 있다. 서요한 서 인터내셔널 대표로 M5, 911, Z3를 탄다. 평소엔 시속 100km 이상도 잘 달리지 않다가 클럽 가입 후 가장 거칠게 운전하고 있는 반전남.​정현종 건축회사 임원으로 Z3, Z3M을 보유 중인데 자동차를 거의 프라모델 피규어 다루듯 최상으로 관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용재 팀 닥터와 준비조를 맡고 있는 이비인후과 의사다. Z3를 보유하고 있고, 자타가 공인하는 차덕후다. ​김정환 이번 여행에 새로 합류한 막내. 뉘르부르크링에서 너무 빨리 달린다고 지적받을 정도로 호쾌한 드라이빙이 특징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며, 현재 E90 335i 수동을 몰고 있다.    ​멈추지 않는 드라이빙 클럽 여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의 여행엔 확고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모호한 이 개념을 키워드로 풀자면 ‘로드스터’와 ‘고갯길’이다. 지난해 우리 나름의 ‘1차 유럽원정’을 다녀왔지만 너무나도 아쉬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처음 나서는 드라이빙 투어라 그랬을 것이다. 출발 전 서울에서 엄청난 검색과 준비를 했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장은 달랐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더 많아서다. 마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그란 투리스모와 실제 드라이빙의 차이만큼이나. 허나, 그걸 알게 된 덕분에 2차 유럽원정을 또 가야겠다는, 충분하고도 확고한 명분이 주어졌다. 지난번 유럽원정을 함께 했던 4명에 ‘젊은 피’ 1명을 더해 총 다섯 명이 2주간의 유럽투어에 오르기로 했다. 우선 1차에 이어 다시 한번 김용재가 착실히 기초 조사를 담당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물론 우리도 그가 무결점 코스를 준비했다고 믿는다. 숙박은 물론이고, 렌트카 역시 6개월 전에 미리 예약 및 지불까지 완료했다. 가장 중요한 차는 이번에도 BMW Z4 수동이나 메르세데스 벤츠 SLC 수동으로 예약했지만, 마음속으로 ‘제발 걸리지 말라’고 빌었던 아우디 TT가 당첨되고 말았다. 해외여행을 해 본 이들은 알 터이지만, 미리 예약을 해도 현지에서 차를 받을 땐 같은 차급의 다른 차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모두들 실망하기는 했지만 지난해에도 겪어본 일이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벤츠는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자동으로 빌릴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말하겠지만 아우디는 반전 그 자체였다).  우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경비에 대해 밝혀야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자 다섯이서 2주간 비행기와 렌트비, 유류비와 숙박, 식사 등을 포함해서 쓰고 싶은 대로 썼다고 생각했는데도 1인당 350만원 정도 들었다. 크다면 큰 금액이지만 여행의 수준과 느낀 점들을 생각하면 그리 큰돈도 아닌 것 같다. 다들 출발 전, 가족들에게 이미 충분히 봉사활동 수준의 포인트를 적립한 상태였기에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낼 돈을 마음 편히 쓰고 올 수 있었다.드디어 출발!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다섯 남자들은 모두 여행 기간 동안 놓아야 할 업무들을 미리미리 처리해놓고 오느라 인천국제공항에 모였을 땐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여행이 주는 설렘은 모든 피로를 극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행했던 순간마다 느꼈던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르니 말이다. ​속도제한 있는 아우토반과 V8 호텔의 클래식카 박물관차는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차종들을 고를 수 있다는 렌터카 서비스, 식스트(sixt)에서 빌렸다. 역시 그들은 일처리가 빨랐다. 일사천리로 차를 받자마자 속도무제한의 아우토반으로 시원하게 내달렸다. 연비 따윈 생각하지 않고 시원하게!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겪어보면 다르다. 아우토반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직도 ‘속도무제한’의 환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속도제한 구역이 더 많다. 그 점을 인지하고서 무제한 구간이 나오면 우리는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더 빨리 달렸다. 더러 클래식카도 보이고 공랭식 포르쉐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괜찮은 주행신이 나올 것 같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누군가 카메라를 들이밀면 운전자가 알아서 연출해주기도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번에는 무전기를 휴대했는데,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앞서 간 차가 위험한 상황을 발견하면 바로 알려줘서 뒤따르는 차들이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설사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도 무전기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국제 미아가 될 법한 상황들을 미연에 방지했다. 특히 경찰이나 단속카메라가 나올 때면 더욱 큰 도움이 되었다. 이윽고 공항에서 차를 타고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V8 호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자동차 테마 호텔이다. 온갖 자동차 용품으로 호텔을 꾸민 곳인데 심지어 화장실의 비누까지도 자동차 모양이다. 소위 ‘환자’들의 호텔인 것이다. ​ ​​ 호텔 옆에는 클래식카 박물관이 있었다. 페라리 458이나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차들이 많았다. 재규어 E-타입이라든가 포드 코브라, 페라리 디노, 람보르기니 미우라까지 정말 눈이 호강한다는 말을 여기에서 실감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정말 웬만한 자동차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제이 레노나 아랍 부호들의 전시장도 좋겠지만, 여기 V8 호텔의 박물관은 무료다! ​​​다음 행선지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이번 여행에서 오스트리아를 저렴한 스위스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알프스를 중심으로 국경선을 마주한 여러 나라 중에서 오스트리아는 언어나 배경이 스위스와 꽤 비슷하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어린 시절 즐겨 봤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기도 해서 더욱 끌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잘츠부르크로 가다 말고 예정에 없던 코스, 체암제 호수로 차를 돌렸다. 자유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정해진 코스로만 다니다 보면 숙제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출발 전에도 서로에게 누누이 강조한 사항이다. 여행은 숙제가 아니고 우연의 연속을 즐기다 오는 것이라고. ​​​체암제 호수에서 보낸 몇 시간은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친구들과의 자유로운 여행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출근 안 해도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잘츠부르크까지는 예상보다 금방 도착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만난 카 마니아들 오스트리아에서 차를 빌릴 때 렌트카 직원이 인근에 이름 모를 트랙 한 곳을 소개했다. 혹시나 하고 가보니, V8 호텔 박물관에서 봤던 차들이 실제로 굉음을 내며 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기 중인 차들의 주인들은 갤러리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구경도 시켜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이곳에 나온 자동차들은 하나 같이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간혹 고장 난 차들이 있긴 했지만 차들의 연식을 본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독일은 클래식카의 번호판도 따로 준다고 한다. 국가 차원의 관리라니, 그저 부럽기만 했다. ‘아, 정말 멋지게들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우리끼리 정해 둔 일정이 있었지만 그런 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 ​독일 국경을 지나 오스트리아를 들어오는 순간부터 노면의 소음이 올라 차이를 느끼긴 했지만, 도로는 잘 관리된 편이었고 드라이빙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주변 풍광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의 포스터와 똑같았다. 다음 목적지였던 소금광산 할슈타트도 마치 조각 같은 모습이었다. 과연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될 만했다. ​​​​많은 관광객들을 피해 바로 발길을 돌린 곳은 한국의 온양 온천과 비슷한 바드 가슈타인(Bad Gastein)이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신혼여행지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한 커플도 보지 못했다. 호텔이 워낙 골짜기에 있어서인지 구글 내비게이션도 여기선 제 역할을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마지막 일정은 반드시 차로 둘러봐야 할 우리 나름의 ‘절경 3종 세트’로 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알파인 도로, 이탈리아 북동부 산맥으로 알프스의 일부를 이루는 돌로미티(Dolomiti, 독어로 Dolomiten), 그리고 사소룽고(Sassolungo)이다. 이 세 곳은 거의 근거리에 위치해서 한 번에 돌아보기에 그만이었다. 특히 사쏘룽고는 이름 그대로 바위산을 돌아가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로스글로크너로 올라가는 길은 거의 갈지(之)자를 그리며 정상까지 이어진다. 내리막은 더하다. 3종 세트를 완주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다.쇼핑을 좋아하는 이에게 이탈리아는 구찌의 나라이겠지만 차를 좋아하는 이에겐 페라리의 나라다. 역시나 운전자들도 이탈리안다웠다. 한국인들과 비슷한 운전 성향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나 할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웬지 마음이 편했다. 이탈리아의 여정 중 하이라이트는 스텔비오 패스(Stelvio Pass). 정말 끝없이 계속되는 헤어핀 코너로 인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전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헤어핀이 존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차가 직진하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텔비오 패스 정상에 도착하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페라리 석 대가 도착했다. 게다가 모두 희귀한 한정판 클래식 모델들이었다. 차 값은 상상에 맡기겠다. 이때부터 주변 차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우리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차를 향해 모여들었다. 차 주인들은 모두 부부 동반이었는데, 그 중 한 분에게 물어본 바로는 네덜란드 출신의 부호들인 듯했다. 차를 스위스까지 탁송으로 보낸 다음, 거기서부터 와인딩을 시작해서 이곳 정상까지 올라왔다고. 보통 산중에 산으로 마테호른(Matterhorn)이나 몽블랑(Montblanc)을 꼽는데, 차를 좋아 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스탤비오가 으뜸이다. 이곳을 한 번 달리고 나니 고갯길을 통달한 느낌마저 들었다.  원정에서 발견한 아우디의 맛 여기서 며칠 동안 운전을 하면서 벤츠와 아우디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벤츠SLC는 나름 후륜의 특성을 보여 주었고 핸들링 또한 정확하게 운전자의 의도대로 따라주었다. 반면 실내 옵션은 아직 과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편의성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장 내비게이션은 시인성은 좋으나 접근성은 좀 더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하드톱 적용으로 인한 비용 상승에도 불구하고 가격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한 고육지책이라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행한 아우디 TT는 S라인이었다. BMW로 치자면 M팩과 비슷한 성격이다. 주행 느낌은 코너를 제외하곤 벤츠보다 우위였으나 역시나 기본 구동 방식과 앞뒤 무게비는 어쩔 수 없는지 4륜임에도 불구하고 언더스티어의 성향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잘 숙성된 2.0TFSI 엔진은 절정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렌트카임에도 명품급 회전질감을 보여주었다. 소형 터보는 낮은 rpm에서 약간의 랙이 느껴지지만 2,000rpm만 넘어서면 레드존까지는 아주 고른 분포로 과하지 않게 출력을 쏟아 주었다.  트렁크는 소프트톱으로 인해 충분히 여유로워 소위 이민 가방이 들어가고도 남는 공간을 제공했다. 실내는 완전 노벨상 감이다. 단순하며 직관적인 디자인은 핸들링에서의 단점을 커버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센터콘솔에 있는 필기인식 기능은 운전 중에도 쉽게 조작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점은 운전 중에 빛을 발한다. 조작계통이 모두 직관적이어서 설명서를 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다. 버추얼 콕핏은 내비게이션과 계기판을 절묘하게 조합시켰다. 보통 다른 차를 운전할 땐 센터페시아에 있는 내비게이션을 보느라 시야를 조금씩 돌려야 했지만 이 차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운전자 안전에도 무척 도움이 된다. 정말이지 디자이너들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다. ​스위스와 프랑스, 오롯이 나를 생각한 시간들 스위스에서 우리는 전설의 고개, 고타드 패스(Gotthard Pass)로 향했다. 험난한 공사로 인해 악마에게 처녀 제물을 바쳐야 할 때, 처녀 대신 염소를 바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으스스한 전설답게 고타드 패스는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양새다. 원래 길이 너무나 험난하여 고갯길이 다시 생겼다고 한다.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예전 길이 폐쇄되어 있었다. 정상에 올라 옛 길을 보니 돌들도 많이 굴러 떨어져 있고 토사가 노면에 가득했다. 하지만 새로 난 길 또한 전설 못지않은 험난한 코스였다. 여기 저기 오르락내리락 하는 바이크들을 보고 이곳이 명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타드 부근에서 숙박을 할 때 우리도 제물을 바쳐야하는 건 아닌지 싱거운 농담을 했다. ​​​​우리보고 스위스 3대 고개를 뽑으라고 한다면 클라우센 패스(Klausen Pass),  푸르카 패스(Furka Pass), 그리고 그림젤 패스(Grimsel Pass)를 들겠다. 클라우센 패스는 스위스다운 절경을 양옆에 끼고 깊고도 험한 낭떠러지 길을 가슴 졸이면서 달리는 곳이다. 모두 해발 2,000~3,000m 사이의 고개여서 출발지 고도가 1,500m는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다. 지난해 1차 원정에서 마테호른을 오를 때 고산증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우리의 팀 닥터 김용재 씨가 나눠준 초콜릿을 먹고 상태가 호전되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차에 저장해두고 미리미리 초콜릿을 먹어서인지 고산증으로 인한 고생은 없었다. 유비무환 거안사위(有備無患 居安思危)라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방문한 코스라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일부는 산을 한 번 더 돌았다. 오로지 산과 드라이빙에만 집중하며 각자의 시간을 만끽했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폭포의 물소리는 관음사에 울려 퍼지는 풍경 같이 고요하고도 은은하게 마음을 치유해주는 듯했다. 마치 혼자 산 정상에 있어 스위스 전부를 혼자서 빌린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역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발견하게 되나보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알불라 패스(Albula Pass)도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이산 이갑룡도사가 세운 것 같은 돌탑들이 무더기로 있어 무속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수많은 돌탑들은 여행객들이 하나씩 쌓은 듯했다. 우리도 발복(發福)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돌들을 쌓으면서 산의 기운이 스며들기를 기원했다.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남 프랑스로 향하는 도중 향락의 도시 모나코(Monaco)를 거쳐 니스(Nice)에 도착했다. 깐느 영화제로 익숙한 이 도시는 마치 서울의 홍대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밤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잔뜩 막힌 길을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옆 동네 깐느(Cannes)가 차분하고 좋았다. 밤이 오고, 우리는 다시 영화 ‘007 골든아이’의 추격신 배경이 된 루트 드 젠틀리(Route de Gentelly)로 향했다. 국립공원 속에 있는 이 길은 유명세만큼 감추고 싶은 보물과도 같았다. 달리는 동안 우리 차의 브레이킹엔 날이 서 있었다. 한 번 실수로 저승 직행길이란 생각이 들었달까. 카메라는 차마 들지 못하고 차에 모셔두었다. 어두운 밤의 라이딩이 주는 흥분을 누르며 숙박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여행 중에도 휴식은 필요하니까.  ​​​​​이윽고 귀국을 앞둔 여행의 마지막 날. 프랑스 남부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북상하는 경로를 잡아 아침부터 서둘렀다. 지난해 들렀던 500번 코스를 다시 달렸다. 비도 간간히 오고 차도 별로 없어서 흥분한 탓일까? 아니 방심한 때문일까? 내리막에서 좀 달렸더니 어디선가 불이 번쩍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귀국하고 얼마 뒤 위반 요금을 잘 냈다며 증명서(?)가 날아왔다. 감사하게도 과속 벌금은 간편한 카드 결제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차량 반납까지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여행을 무사히 마친 안도감과 아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2주간의 기억들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특히 좋은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이라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내년에는 만화 ‘이니셜 D’의 배경이 되었던 일본 군마지역을 달려볼까 구상 중이다. 사실 이미 계획과 준비는 끝났고, 차만 배에 실으면 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딱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자동차여행, 한 번 하게 되면 계속 하게 됩니다.”글, 사진 이진후  정리 김미한(프리랜서)​​​ 
징기스칸의 역사가 숨쉬는 대초원의 땅- 내몽골 2017-08-14
징기스칸의 역사가 숨쉬는 대초원의 땅내몽골 언젠가 한번쯤 꼭 들르고 싶었던 내몽골을 우연한 기회에 찾았다. 징기스칸의 숨결이 남아 있는 메마르고 거친 야성의 땅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 그야말로 대초원이었다. 예전에는 농사가 불가능한 불모지였지만 오늘날에는 무궁무진한 광물자원 덕에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곳. 하지만 잔뜩 기대했던 초원과 사막의 여행 코스는 너무나 상업화되어 있어 실망감을 안겼다.  ​​​​​밤새도록 귓전을 때린 것은 바람소리였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위잉”소리를 내며 다시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내몽골의 초원에서 지내는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바람소리와 모래먼지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곳의 초원은 거친 야성과 몽고인들의 열정적인 숨결이 함께 녹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내게 중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신장과 티벳, 그리고 내몽골의 초원을 들고 싶다. 그렇지만 그동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으로 치부하며 갈 마음조차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출장차 산동성 칭다오를 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내몽골 성도인 후허하오터까지는 약 1,200km밖에 되지 않음을 알았다. 기차로 이동을 해도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오후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다. 꿈에만 그려오던 내몽골 땅을 처음으로 밟아 볼 기회였다.​징기스칸을 탄생시킨 척박한 대지역에 내리니 파란 하늘이 나를 반긴다. 중국에서 15년 넘게 지내면서 이토록 파란하늘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기온은 30℃가 훨씬 넘었지만 습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끈적거림이 없다. 내몽골의 성도인 후허하오터의 첫인상은 그래서 좋았다. 내몽골은 118만㎢로 중국 면적의 약 12%를 차지한다. 신장, 티벳 다음으로 크고 몽골과 러시아로 이어진 국경선의 길이가 4,220 km나 된다. ​ 후허하오터 기차역. 몽골식 주택인 게르의 모양이다 ​​후허하오터의 파란 하늘. 하늘은 파랗지만 지면에는 모래 먼지가 많이 날린다​​이렇게 큰 지역이 몽골이 아닌 중국 땅이 된 것은 몽골의 슬픈 역사에서 기인한다. 몽골은 한 때 중국과 유럽까지 영토를 차지한 위대한 징기스칸의 나라였다. 바로 원나라다. 그러나 원나라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징기스칸이 죽고 난 후 후계자를 둘러싼 암투로 국력이 급격히 소진되는 바람에 새롭게 일어난 주원장의 명나라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중국의 일부가 되어 몽골이 아닌 중국인으로 살아오다가 청나라에 의해 내몽골과 외몽골로 갈라져 통치를 받는다. 이때 실효적 지배를 위해 한족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몽골족보다 많은 한족이 내몽골에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쇠퇴하고 새롭게 들어선 중국이 국공내전의 혼란 속으로 빠져 들면서 몽골은 독립을 선언한다. 1938년의 일이다. 중국이 이를 용인하지 않았으나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몽골은 몽골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때 내몽골은 복잡한 정세에 휩쓸려 몽골에 편입되지 못하고 중국의 영토로 그대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몽골 간판에는 몽골글자와 중국어가 함께 쓰인다  몽골 글자​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모습이 이채롭다 ​공공 자전거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래선지 오토바이 영업이 없었다​​내몽골의 작은역. 몽고족은 체격이 무척 크다​​내몽골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자치구로 지정된 곳이다. 중국은 22개의 성과 5개의 자치구, 4개의 특별시, 2개의 특별 행정구(홍콩과 마카오)로 구성되어 있다. 내몽골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다. 게다가 지하자원이 무궁무진해서 자원의 보고이다 보니 중국으로서는 노다지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희토류 자원은 전국의 97%를 보유하고 있고 석탄, 알루미늄 등 엄청난 양의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 중국에서 가장 부자마을로 알려진 어얼둬쓰 역시 내몽골에 있다. 중국 석탄의 60%가 생산되는 이곳은 인구가 10만 명에 불과하지만 200만 명이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 놓은 도시로도 유명하다. 사람이 살지 않은 빈 아파트가 즐비해서 유령 도시라고 불릴 정도다. 내가 내몽골에 갔다 왔다고 하니 주변에서 모두들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어얼둬쓰가 어땠는지 물어봤다. ​내몽골에는 한족과 몽골족, 회족. 만주족 등 18개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인구 2,400만 명 중 한족이 80%, 몽고족이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대도시에는 대부분 한족이, 초원에는 몽골족과 만주족이 산다. 몽골족은 전통적으로 초원에서 양을 키우며 살았던 민족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몽골족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진으로 보았던 초원은 실제 경험해 보니 그리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거칠고 메마르고 야성이 넘치는 초원은 인간의 본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런 척박한 환경이 징기스칸을 지구상 최고의 기마부대로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중국과 유럽까지 영토를 차지했던 징기스칸은 몽골족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기대와는 달랐던 초원과 사막 여행내몽골 여행의 출발점은 성도인 후허하오터다. 이곳에서 초원이나 사막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단독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개인이 교통이나 숙박시설을  잡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실제로 초원에 있는 여행 프로그램은 모두 여행사와 연계가 되어 있었다. 호텔에 비치된 안내서를 보고 전화를 했다. 마침 내가 그토록 원하던 초원과 사막을 여행할 수 있는 1박 2일의 여행코스가 있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던 여행사 직원이 “내일 호텔로 모시러 가겠다”고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 내심 내몽골의 초원 여행이 이렇게 간단할 줄은 미처 몰랐다며 즐거워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후허하오터는 개발이 한창이다. 도심에 높은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후허하오터에서 만난 한국산 자동차  ​다음 날 아침 정확하게 8시 반에 가이드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런데 여행객은 나와 상하이에서 온 청년이 전부였다. 운전기사와 가이드까지 포함해 달랑 4명이 승합차를 타고 초원으로 향했다. 후허하오터에서 험준한 산을 몇 개 넘으니 대평원이 나타났다. 하늘과 땅이 반으로 갈라진 평원이다. 그 위로 곧게 뻗은 도로가 끝없이 펼쳐지고, 드넓은 들판에는 사람 사는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내몽골의 대초원이다.​​​황량한 초원을 이동하는데에는 오토바이가 유용한 수단이다​​약 3시간을 달려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몽골의 초원에 다다랐다. 사진으로 보았던 몽골식 주택 게르가 눈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니 몽골족들이 노래를 부르고 스카프를 걸어주며 술을 권한다. 몽골식 손님맞이란다. 술이 독해서 딱 한 잔 마셨는데도 취기가 돈다. ​​몽골인들은 양을 기르면서 풀을 찾아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간편하게 설치하고 철수할 수 있는 이동식 주택이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게르인데 요즘은 벽돌과 단열재를 넣어서 짓는다고 한다. 예전처럼 풀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착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몽골의 초원은 대부분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여행사와 초원에 게르를 지은 몽골족이 계약을 맺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초원을 여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따라서 여행 상품의 가격은 저렴한데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 몽골족은 초원에서 양을 기르며 생활했기 때문에 설치와 철수가 간편한 이동식 주택이 필수적이었다​​안내원이 말을 타는 프로그램이 필수 코스라고 말했지만 일행인 젊은 청년은 초원만 보러 왔지 말을 탈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다. 혼자서만 타겠다고 나서기도 뭣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런데다가 점심을 먹고 나니 초원에서의 일정이 끝이 났다. 젊은 중국 친구는 하루 일정의 여행이라 후허하오터로 돌아갔다. 혼자 초원에서 할 일도 없고 해서 여행사 직원에게 후허하오터로 돌아가서 자겠다고 했더니 여행 약관상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나를 다른 여행사에 인계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돈을 받고 넘겼는지 돈을 주고 넘겼는지는 모르겠다. ​  징기스칸은 말을 타고 이 초원을 누볐을 것이다 ​​초원의 밤은 길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무인도에 갇힌 신세나 다름없는 몸이다. 게다가 추웠다. 말을 안 탔다고 괘씸해서 그랬는지 난방이 안 되는 방으로 숙소를 배정했다. 낮에는 섭씨 30도가 넘는 고온이지만 밤이 되면 10도 이하로 기온이 뚝 떨어진다. 내몽골을 오기 전에 일기예보를 보았더니 기온이 20~30도였다. 그래서 간단한 여름옷과 점퍼 하나만 가지고 왔을 뿐이다. 다행히 침대가 2개여서 다른 침대의 이불까지 가져다 덮고 추위를 버텨냈다. ​예전에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했던 황운기 선수의 말이 생각났다. 사막이라 더울 줄 알고 반팔 티셔츠 하나만 달랑 입고 갔는데 차가 사막에서 고장이 나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단다. 사막의 낮은 뜨겁지만 밤에는 영상 1∼2도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엄습한다. 턱이 덜덜거리도록 밤새 추위에 떨어야 했던 황운기 선수의 처지가 오늘 나의 신세와 같았으리라. 또 하나 밤새도록 나를 괴롭힌 것은 창문을 때리는 바람소리였다. 내몽골 초원에 머문 이틀 동안 계속 내 귓전에 들린 것은 “윙윙” 소리를 내는 무서운 바람소리였다. ​8월에 잠시 초원으로 변하는 반사막몽골의 초원은 극한의 땅이다. 여름에는 최고 40℃가 넘는 폭염이 작렬하고 겨울에는 영하 40℃의 추위가 몰아친다. 게다가 수시로 부는 모래바람 덕에 앞이 보이지 않고 숨쉬기조차 어렵다. 그렇기에 징기스칸은 따뜻하고 기름진 남녘의 땅을 호시탐탐 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봄에는 씨를 뿌리고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전원생활을 꿈꾸었다. ​몽골족을 처음 대하는 순간 마치 우리 이웃집 아저씨와 동네 처녀, 총각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와 닮은 모습에 놀랐다. 이들의 얼굴은 우리와 너무나 비슷했다. 지금껏 만나보았던 중국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덩치가 무척 컸다. 한눈에 보아도 “아, 이 사람들이 몽골족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레슬링이나 씨름을 잘할 것 같은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수천킬로 미터를 운전하는 화물차기사들은 연료를 별도로 싣고 다니면 주유를 한다​ 몽골족. 우리네 이웃집 아저씨같은 모습이다​​밤새 추위와 씨름을 한 후 다음날 황량한 초원을 가로질러 사막으로 향했다. 초원이라고 하지만 풀보다 모래가 훨씬 많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반사막이다. 8월에 잠시 비가 내리면 초원은 눈부신 초록색으로 변한다고.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거친 땅에서 살아가는 많은 생명체가 있다. 양들은 코로 모래를 헤치며 풀을 찾아 하루 종일 초원을 누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에서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이겨내고 살을 베어내는 듯한 맹추위를 견뎌내는 양들의 모습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3시간 넘게 대평원을 지나니 점차 모래가 많은 지역이 나온다. 내몽골에는 사막이 많다. 우리가 방문한 사막의 세계는 내몽골에 있는 사막 중 일곱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그런데 이곳도 상업화되어 장삿속이 판을 치고 있었다. 입장료가 무려 480위엔(8만1,600원)이나 하는데, 여기에는 낙타와 사륜구동차를 타는 코스가 포함되어 있다. 입장권을 사지 않으면 사막을 구경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표를 사야만 했다. 그런데 내몽골의 여행코스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 사막을 여행상품화한 중국인들의 장삿속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내몽골의 모래 사막을 즐기기 위해 4륜구동차가 준비되어 있다​​사막은 모래가 무척이나 고왔다. 이렇게 고운 모래를 본 적이 없다. 해변의 모래는 파도가 만들었지만 이곳 모래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져 그런 모양이다. 가벼운 바람에도 모래가 날려 봄이 되면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넘어온다. 내몽골의 사막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민간단체에서도 내몽골에 나무를 심는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 돈으로 8만원이 넘는 비싼 입장료에 비해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낙타를 타는 것도 10여분에 지나지 않았고 사륜구동차를 타고 사막을 달리는 것도 5분 정도에 불과했다. 겨우 이걸 경험하려고 그 먼 길을 왔나 싶을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낙타는 무척이나 많아 대략 세어 보아도 100마리가 넘었다. 오래전부터 사막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낙타가 제일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낙타의 발바닥은 평평해서 모래 위를 걷기 편하고 물을 먹지 않고도 오랫동안 버틴다. ​​​내몽골에는 사막이 많다. 사막을 이동할 때에는 낙타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예전 사람들은 이런 낙타를 이용해 사람과 물건을 날랐다. 낙타가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낙타의 목청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조련사의 말을 안 듣는지 마구 낙타를 때린다. 그리고 모래를 낙타의 얼굴에 마구 퍼 붓는다. 괴로워하는 낙타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은 이곳을 찾은 이방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막 여행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사진에서 보았던 사막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니, 그동안 내가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모습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막여행 이후는 계속 쇼핑이다. 버스는 여행사와 계약된 상점마다 들른다. 안내원의 틀에 박힌 안내 멘트와 함께 보석과 양털 제품이 전시된 매장으로 안내했다.  ​사막화로 인해 내몽골은 파란 하늘과 어울리지 않게 먼지가 많았다. 도시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거리를 다니는 자동차를 살펴보니 다른 지역과 달리 검정색이 거의 없다. 짙은 색 차에 먼지가 내려앉으면 눈에 확 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몽골의 자동차들은 대부분 흰색과 은색이 주류를 이룬다. ​​내몽골 사람들은 마스크를 기본적으로 쓰고 다닌다​​몽골과 국경을 접한 린옌하오터오후에 후허하오터로 돌아온 후 린옌하오터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린옌하오터는 몽골의 수도울란바토르로 넘어가는 국경에 위치한 도시로, 후허하오터에서 550Km 떨어져 있다. 마침 밤 11시 5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밤새도록 평원을 달렸다. 눈을 뜨니 동이 트는 차창 밖으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은 영원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이게 바로 몽골의 초원이구나! 징기스칸 무리들이 말을 타고 누볐을 대평원을 오늘은 거대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린다. ​​린옌하오터 역. 기차를 이용해서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아침 6시 55분에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린옌하오터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도시다. 택시와 산륜처(삼륜차) 기사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허름한 옷차림의 산륜처 기사가 “어디를 가느냐?”며 접근해왔다. “국경으로 가자”고 했더니 10위엔(1천700원)을 달라고 한다. 국경이 그리 멀지 않은 모양이다. 덜컹거리는 산륜처를 타고 몽골과의 국경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방문하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한다. 그래서 걷거나 차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다른 나라의 국경이 부러웠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중국에서 국경도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홍콩으로 통하는 썬전(심천)이다. 그동안 썬전을 통해 홍콩을 수없이 다녔다. ​그러나 린옌하오터의 국경은 썬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산륜처 기사가 데려다준 곳은 울란바토르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가 지나는 국경이었다. 경비가 상당히 엄했다. 멀리 몽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지 않은 역사 건물과 철로를 공사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산륜처 기사에게 걸어서 들어가는 국경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차를 타고 가야한다”고 한다.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썬전에서도 가능했으니 이곳에서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국경으로 통하는 길에는 인도가 없다. ​​​린옌하오터의 몽골과의 국경 ​​터벅터벅 큰 대로를 걸어서 경비 초소 앞까지 갔다. 국경을 경비하는 군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멈춰 세운다. 내가 “몽골로 가려고 한다”고 하니 걸어서는 갈 수 없다며, 자동차나 기차를 이용하라고 알려준다. 허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처럼 이곳을 걸어서 방문하는 여행자는 없을 듯하다. 국경을 통해 폐차 직전의 지프차들이 계속 오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몽골에서 들어오는 지프는 빈차이지만 몽골 쪽으로 향하는 지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다. 몽골과 중국의 국경도시인지라 국경무역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린옌하오터의 몽골 국경에 있는 감시탑​​공룡화석과 운석으로도 유명해그런데 지프차에는 몽골 번호판이 달려 있다. 모두 몽골 쪽에서 넘어온 차다. 중국에서 운행되는 모든 차는 중국 번호판을 달아야 한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차도 중국 번호판을 달아야 하는데 이곳만은 예외인 것 같다. 경비 초소에서 제지를 받고 나와 여행사를 찾았다. 혹시 비자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렇지만 실망스럽게도 외국인은 이곳에서 비자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만약 몽골 비자가 있다면 버스나 기차를 타고 몽골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홍콩이나 썬전과 달리 그런 목적으로 방문하는 외국인이 없으니 이를 대행해 주는 기관이 없는 것이다.​​​몽골에서 넘어오는 차량은 몽골 번호판을 달고 있다​​택시를 타고 린엔하오터 시내를 돌았다. 인구 5만 명의 도시라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국경도시인지라 간판에 몽고어와 중국어, 러시아어가 함께 섞여 있다. 이곳에서는 러시아인들이 꽤나 상주하면서 중국 물건을 몽고와 러시아로 보낸다고 한다. 내몽골의 성도인 후허하오터에는 한족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지만 몽골과 국경을 맞댄 린옌하오터에는 몽골족이 95%에 이른다. ​내몽골에는 하오터란 지명이 들어간 곳이 많다. 이는 몽골어로 ‘녹색도시’란 뜻이다. 린옌하오터 외곽에는 공룡공원이 펼쳐져 있다. 오래전 공룡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곳은 공룡들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공룡화석이 자주 발견된다. 또한 운석이 많이 떨어지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스런 곳이다. 중국의 유인 우주선이 탐사를 마치고 귀환하는 곳도 내몽골의 초원이니 중국에게 있어 내몽골은 보석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후허하오터에서 이우까지 가는 기차가 없어 상하이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상하이까지는 무려 25시간이 걸린다. 상하이까지 간 후 이우까지는 고속열차를 이용할 계획이다. 모레 오후나 되어야 이우에 도착할 것 같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경주 2017-08-02
역사와 문화의 숨결과 함께 하는 경 주​짙은 안개를 뚫고 종소리가 은은하게 산사에 울려 퍼지는데 그 기운이 마치 파도가 너울대는 것 같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안개비가 옷깃을 적신다. 석굴암은 문화사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지만 실제 ‘아, 이게 바로 석굴암이구나!’라는 놀라움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살며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진공의 시간을 통해 더 많이 채울 수 있게 상념의 찌꺼기를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순간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자 영혼은 육체를 벗어난 듯 훨훨 날아오른다. 가야할 곳이 없고 머무를 곳이 없다보니 바람처럼 자유롭다. 그러다가 신화와 전설의 무대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의 하늘 아래에 서면 그 수많았던 사연들이 엊그제의 꿈처럼 마중을 나온다. 발을 붙이고 사는 곳과의 거리가 가깝든 아니면 천리 밖이든 경주는 허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처럼 추억이 공유되는 곳이다. 박혁거세와 김알지, 선덕여왕, 김유신과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 아사달과 아사녀, 불국사 등등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씩 불러내노라면 마치 내가 천년 세월의 주인공이 된 듯 같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성냄과 즐거움에 빠져들었을 즈음 “다음 도착할 군위·영천 휴게소에서 15분 동안 쉬어가겠다”라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그러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의 저항을 끝내 이겨낸다. 서울시청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에 올라 당진-영덕 고속도로(청주-상주 구간)로 갈아탄 다음 다시 얼마 전 개통한 상주-영천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경주까지 기존 노선을 이용할 때보다 30여 분 단축됐다고 한다. 영천-군위 휴게소는 지금까지 평범하게 보아왔던 휴게소의 통념을 뛰어넘는다. 근대화 시대를 상징하는 듯 ‘군위 영천 제1공장’이라는 이름표를 걸었고, 실내는 70년대 이전 시대를 테마로 꾸몄다. 휴게소 관리실에 “예전에 실제 사용했던 기계와 물건을 재활용한 것”이냐고 물어보니 휴게소의 차별성을 위해 향수를 공유할 수 있도록 새롭게 디자인한 것이란다.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휴게소의 인테리어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니, 경주 일정보다 한발 앞서 우리를 추억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추억을 자극하는 군위-영천 휴게소의 실내​세계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정오 무렵 일행(여행 작가와 여행블로거로 구성된 팀)을 태운 버스가 경주의 한 식당에서 멈춘다. 떡갈비와 우렁 쌈장으로 구성된 메뉴는 정갈했지만 정작 손 갈 곳이 없다는 손님들의 혹평을 들었다. 곧이어 회색 하늘이 어지러워지자 바람도 따라 출렁거리며 가볍게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이제 본격적인 장마 영향권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한 편의 시를 읊게 한다. ​​​대롱대롱 매달린 붓끝의 먹물이하얀 종이를 제멋대로 오가며 춤을 추는 것처럼이리저리 옮겨가며 비를 뿌려댄다산 능선은 칠흑보다 더 검었고뿌리를 단단히 박은 벼 위를 한가롭게 날던 백로는날개 짓 한 번으로 제 집으로 돌아간다고개를 떨궜다 튕기듯 풀잎이 일어나며 여름을 연주한다.​ 국내를 대표하는 관광지 경주는 학창시절에는 수학여행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추억여행으로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 도시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끝없이 회자되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첫걸음을 떼는 세계문화유산 불국사는 학생들과 연인, 그리고 가족들이 경내를 오가며 청운교와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에 얽힌 사연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의 재상 김대성이 751년 창건하기 시작해 774년에 그가 죽자 나라에서 이를 맡아 완공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신라의 국력과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때로, 불국사는 이 시기의 대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방화로 일부를 제외한 2,000여 칸의 건물이 불탔지만 1604년부터  중건에 들어가 1700년대에 비로소 가람의 형태를 다시 갖추었다. 그리고 1973년에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시작해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안양문 등을 중수하고 범영루, 무설전, 비로전, 관음전 등을 옛터에 복원했다. 회랑과 나머지 문들은 아예 없어진 것들을 재건하고, 석축과 계단은 큰 폭으로 수리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천왕문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관음전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사천왕문을 지나자 자하문과 범영루, 그리고 안양문의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자태에 저절로 탄성이 일어난다. 핸드폰과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고, 삼삼오오 무리들이 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곧추세운다. 경내는 석단으로 그 아래와 위의 세계를 구분하는데,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현세를 뜻한다. 석단은 각각 대웅전과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 청운·백운교와 국보 제22호 연화·칠보교 두 쌍의 다리를 통해 각각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이끈다. 청운·백운교의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한다. ​ ​연화칠보교를 통해 오르는 안양문​​범영루를 뒤로하고 대웅전을 마주하자 왼쪽에는 석가탑, 오른쪽으로 다보탑을 거느렸다.  석가탑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을 품고 있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이 탑을 ‘무영탑’이라고도 하는데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현진건에 의해 소설화된 ‘무영탑’의 전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석가여래가 설법을 할 때 다보여래의 진신사리가 든 탑이 땅에서 솟아나 설법을 찬탄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보여래를 형상화한 다보탑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냥 머물게 한다. ​​불국사 석가탑사람들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사연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고개를 들자 처마 끝에 안개가 걸리듯 내려앉으며 흐르고, 토함산의 정상이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미소를 보낸다. 비로전과 극락전을 둘러본 후 경내에 마련된 카페에서 차 한 잔으로 1,300여 년 전의 울림을 음미한다. 그렇게 호사를 누린 후 꼬불꼬불한 산길을 여유 있게 달린 버스가 토함산 석굴암 주차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짙은 안개를 뚫고 종소리가 은은하게 산사에 울려 퍼지는데, 그 기운이 마치 파도가 너울대는 것 같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안개비가 옷깃을 적신다. ​​​안개를 두른 토함산이 이따금씩 정상을 보여준다​​석굴암은 문화사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지만 실제 ‘아, 이게 바로 석굴암이구나!’라는 놀라움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해설사의 말처럼 복원이 허술하게 이뤄져 손상이 된 데다, 내부를 관람할 수 없는 것도 감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게다가 복원과정에서 나온 석재들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찬란했던 불교유산의 꽃이 제대로 피어나는 것은 언제쯤일까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인다. ​​석굴암 가는 길에 드리운 짙은 안개​석굴암 전경​​왕의 길을 걷는 축제 ‘천년 야행’뉘엿뉘엿 해가 기울자 992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경주, 천년야행’이라는 축제를 준비한다. 매년 7월 초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개최하는 이 행사는 신라의 군악대인 고취대의 퍼레이드에 이어 참가자들이 ‘처용가’를 낭송하면서 분위기를 돋운다. ​빛을 망토처럼 서서히 두른 첨성대는 그윽한 달빛 아래서 낮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사람들은 밤길을 밝혀줄 등을 들고 ‘왕의 길’을 걷는다. 신라 왕경의 아름다운 야경은 물론 유적에 담긴 신라 역사와 야설 등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첨성대를 떠나 동궁과 월지(안압지), 동부사적지, 계림과 교촌마을 등으로 이어진다.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사람들은 별에게 ‘소망등’을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별무리가 떠다니는 것처럼 소망등의 물결이 첨성대와 조화를 이뤄 황홀경을 만들어낸다. ​ ​조명을 두르고 천년야행을 준비하는 첨성대 동궁과 월지는 옛 안압지의 이름이다 별들 곁으로 다가가는 소망등​​이튿날, 오다가는 멈추고 그러다 다시 다가서는 비를 벗 삼아 교촌마을을 거닐고, 각종 소품과 음료를 파는 상점의 테이블에서 한 숨을 돌리니 전날의 피로가 얼음 풀어지는 듯하다. 교촌마을에서는 향교와 교동법주, 최씨고택 등으로 발길과 시선을 잡아끈다. 특히 이곳의 별미인 교리김밥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고 한다.  ​ ​경주 최씨고택​​경주 여행의 필수 코스인 대릉원은 미추왕릉과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발굴을 마친 황남대총은 5만9,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지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천마총만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나온 천마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대릉원 근처의 쪽샘유적발굴관은 이들의 발굴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분황사를 둘러보고 황룡사 터를 거닐면 세월의 덧없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황룡사는 2만5,000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절로 황룡사 9층 목탑, 금동장륙상을 포함한 대사찰이었지만 고려 고종 25년인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은 그 너른 터에 주춧돌과 함께 학계의 고증을 거쳐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한 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분황사​ 황룡사의 흔적은 주춧돌로만 기억될 뿐 ​​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했다​ ​남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삼릉’(안내판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은 울창한 송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송림을 지키는 것은 무덤인가? 무덤을 지키는 것이 송림인가?’라던 한 소설가의 질문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무덤이라고 했다.​​울창한 송림 사이에 자리잡은 삼릉 ​​1박 2일의 빡빡한 경주여행은 시간을 넘어 문화의 향기를 어느 정도 음미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면 열흘 아니 그 이상으로도 부족할 것 같아서다. 그만큼 경주는 발길이 머물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역사와 문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를 뒤로 하고 떠나는 발길이 무겁고 아쉬운 이유다.     ​글 사진 김태종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 상하이 2017-07-12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 상하이(上海)아편전쟁 패배 후 강제 개항되었던 굴욕적 역사를 지닌 상하이는 이제는 중국 경제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도심에는 화려한 빌딩들이 즐비하며, 거대한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증권거래소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상하이 사람들은 북부와 남부를 아우르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상하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래서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닌 상하이 사람(상하이런)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다. 도심을 뒤덮은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한국의 화장품 간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2012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하이를 둘러본 뒤 “천지가 개벽했다”고 했는데, 푸동의 야경은 이 말이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상하이에서는 스타 벅스와 맥도날드 간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상하이는 오랜 중국 역사에서 변방에 머무르며 청나라 말기까지만 해도 인구가 1만 여 명의 자그마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하이는 인구 2,400만 명의 중국 최대 도시이자 경제의 중심축이다. 어쩌면 홍콩과 더불어 중국의 근대 100년 역사를 축소화해 놓은 도시라고 할 만큼 수많은 치욕과 영광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상하이가 지금과 같은 중국의 최대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아편 전쟁의 영향이 크다. 영국에 참패한 중국은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며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대중교통은 지하철과 버스다. 버스를 기다리는 상하이 시민들부자들이 많은 상하이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이동수단으로 삼고 있다​서울의 종로격인 화웨이루​​개항과 함께 8개 나라 조계지 들어서1845년 개항과 동시에 영국을 필두로 미국과 프랑스 등 8개 나라의 조계지가 만들어졌다. 당시 상하이는 분명 중국 땅이었지만 조계지에서는 중국의 법이 통하지 않았다. 외국인 관할하에 있는 공원에는 “중국인과 개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붙을 정도로 중국인은 침략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다. 당시 표지판에는 “개와 자전거 입장금지”와 함께 “중국인 입장불가”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굴욕적인 역사를 극복하고 21세기 들어 미국에 버금가는 G2 국가로 성장했으니, 가히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상하이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제국들의 조계지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자 정치의 중심축이다. 반면 경제 수도는 상하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 치면 베이징은 워싱턴 D.C,, 상하이는 뉴욕이다. 상하이는 뉴욕과 닮은 점이 많다. 뉴욕은 모든 인종과 문화를 녹여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런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뉴요커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뉴욕과는 조금 다르지만 상하이 역시 중국의 북부와 남부 문화를 하나로 모아 자기들만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쇼롱보(小龍包)도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상하이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거주한다. 이들의 생활방식도 상하이 사람들과 비슷하다​  한 때 손중산의 숙소로 쓰였던 곳이 아직도 있다​​중국은 장강(長江)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구분한다. 북방과 남방 사람들은 체격도 다르고 성격도 판이하다. 북방인은 골격이 크고 성격이 급하며 다혈질인 데 반해 남방 사람들은 체격이 작고 차분한 편이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북방은 용맹한 장수가 많았고 책사들은 주로 남방에서 나왔다. 상하이는 이런 남과 북의 장점들을 고루 섞어 놓은 도시다. 그래서 사람들의 체형이 다양하다. NBA에서 활약했던 야오밍도 상하이가 낳은 유명인사다. ​상하이는 북방도 남방도 아닌, 중국내의 특별한 지역이다. 그래서 상하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닌, 상하이런(上海人:상하이 사람)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외국에서 만난 상하이 사람들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중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상하이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상하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상하이 출신으로 이우 도매시장에서 5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장 사장은 아침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커피로 식사를 한다. 그는 다른 중국인들처럼 길거리 식당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커피로 대신한다. 자신은 상하이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중국인들과는다른 우아한 아침식사(미국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장 사장의 아들은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중이며, 친구 대부분이 자식들을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을 보냈노라 자랑을 늘어놓는다. 또한 그가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타이완과 홍콩,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나와의 만남을 기꺼워하는 것도 자신이 상대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임을 자랑하기 위해서인 듯싶다.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밖에서 사먹는다. 상하이에서도 소문난 집에는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룬다​​​외국에 나갈 때면 그는 중국 여권을 보여주기 싫어 주머니 깊숙한 곳에 여권을 감추다시피 한다. 그리고는 중국인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추태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중국인이지만 상하이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마치 홍콩 사람들처럼. ​합리적이고도 실용적인 상하이 사람들상하이 사람들을 만나보면 잘난 체를 잘하고 또 박식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 자연스레 상하이 사람이 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그들은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 내 타 지역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는 않지만 어쨌건 상하이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계산이 철저하며 실용적이다. ​상하이 공원의 풍경 역시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중국의 공원은 아침마다 춤을 추고 운동을 하는 이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상하이 공원에서는 세계정세에 관하여 토론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광경이다. ​ ​상하이공원 - 상하이 사람들은 상하이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이번 여행길에 상하이 시내의 한 공원에 들렀을 때도 한 무리의 중년들이 한국의 사드 문제에 대해 열띤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제라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진지했던지 모임을 주관하던 이가 ‘당신 한국인 같다’며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고 했더니 미국의 사드 배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무슨 말을 할지 상당히 궁금해 하는 눈치다. 중국인들은 사드가 대단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군의 막사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까지 미군이 감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금방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다. ​내가 사드를 배치하려는 배경과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드 배치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런 결론이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 격론이 오갔다. 그렇지만 막무가내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던 북방 도시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들은 미국은 언젠가 상대해야 할 적이지만 아직 힘겨루기를 하기에는 벅찬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만난 많은 중국인들은 이참에 미국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고, 특히 북방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힘겨루기에 나서야 한다며 목에 힘줄을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사람들에게서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세계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고 또 상당히 냉철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사람들의 단면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상하이는 한때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공략할 때 중심축도 상하이였다. 그래서 상하이 역시 반일감정이 존재한다. 다만 충동적이지는 않다. 개방적인 도시답게 일본의 다양한 패션 매장과 음식점들이 인기리에 성업 중이다. 일본 문화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한류가 중국을 휩쓰는 가운데 일본은 소리 소문 없이 중국인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일본의 무지(MUJI)는 상하이에도 의류, 문구는 물론 생활용품, 식당, 서점이 하나로 된 복합 상점을 운영 중이다. 상하이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본 상품의 쇼핑을 즐긴다.     ​​​​상하이의 중심거리 난징루에는 해외 브랜드가 즐비하다​​상하이 남자들은 집안 청소는 물론 빨래, 청소 등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힌다. 반면 상하이 여자들은 대단히 드센 편이다. 중국인들이 농담조로 하는 말 중에 대만여자 다섯이 홍콩 여자 한 명을 못 당하고, 홍콩여자 다섯이 상하이 여자 한 명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개방 이후 타이완과 홍콩 남자들이 상하이 여자들에게 호되게 당해서 돈 다 빼앗기고 패가망신한 후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상하이 여자들은 조심해야 할 상대라는 말이 허툰 소리가 아닌 모양이다.​임시정부를 통해 우리와도 인연 깊어상하이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도시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을 염원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중국으로 피신한다. 그 후 김구를 중심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일본에 대항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결행했던 것이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개별 처단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나선 이가 이봉창 의사다. 1932년 1월 8일 일본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 일행에게 수류탄을 던짐으로써 조선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그해 4월 27일 윤봉길 의사는 홍구 공원(현재 루신공원)에서 벌어진 상하이 점령 경축식장에서 수통으로 만들어진 폭탄을 단상으로 던졌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 참석자 대부분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된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변장을 하고 한동안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국민당 장제스는 중국 군인 30만 명이 못하는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 거사 이후 중국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 장제스의 지시로 한국인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정식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마당루에 있는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 임시정부가 있던 마당루는 프랑스 조계지에 속했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주택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상하이에 조계지가 형성된 후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조계지에서는 일을 할 많은 사람들을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혼란한 중국 정세 속에서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몰려든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서구식 연립주택이 지어졌다. 초창기에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화재 위험성 때문에 나중에는 석재로 건설했다. 이를 농탕(弄堂)이라고 한다. 원래 중국말로 농탕은 골목길을 뜻하는데 당시 상하이에 지어진 이런 구조의 건물을 농탕이라 불렀다. 상하이에는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1930년대에 건설된 상하이의 주택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은 현대의 생활에는 불편하다 농탕은 상하이에 지어진 연립주택 형태의 건물이다​ ​제주도 땅을 분양하는 사무실, 이제 제주도의 부동산 열기는 식었다고 보여진다​​중국인들은 잠옷을 입고 외출을 데 익숙하다. 잠옷 바람으로 수퍼마켓에 가고 은행도 간다. 심지어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보기엔 좀 그렇지만 어찌 보면 무척 실용적인 생활의 한 단면이다. 중국 남부는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대단히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 잠옷 바람으로 잠을 자고 그대로 외출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잠옷을 입게 된 것은 1930년대 상하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영향이 크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 잠옷을 입고 베란다에 앉아 있는 일본 여자들의 모습이 중국인들 눈에는 그렇게 우아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고. 중국인들의 잠옷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과거와 현재의 중국 한 눈에 볼 수 있어상하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와이탄(外滩)과 동방밍주탑(东方明珠塔)이다. 와이탄과 마주하고 있는 푸동(浦东)은 역동적인 상하이의 축소판이다. 상하이에는 멋지고 높은 건물이 많이 있는데, 그 중 상당수가 푸동에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가 자랑하는 동방밍주탑 동방밍주는 높이 468m의 방송용 타워다. 그 주변에 중국에서 가장 높은 상하이 타워가 우뚝 솟아 있다. 지하 5층, 지상 128층에 높이 632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지하 2층, 지상 100층의 상하이 금융센터가 있으며 그 옆으로는 미래에셋 빌딩도 보인다. ​이렇듯 많은 금융 빌딩이 상하이에 있는 이유는 썬전과 함께 중국의 금융을 선도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주식이 거래되는 증권거래소가 상하이와 썬전에 있다. 중국 이미지와 주식 시장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상하이지수는 이미 3,000을 넘어선 지 오래다. 얼마 전에 주식을 공개해 중국 제3의 부자가 된 순풍택배의 왕에위(王衛)는 중국 자본 시장의 규모를 알게 해준다. 당시 순풍택배의 시가총액은 무려 3,074억1,700만 위안(50조6,000억원)에 달했다.  ​동방밍주 건너편으로 보이는 와이탄은 유럽풍의 건물로 인해 마치 유럽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상하이는 근대의 유럽과 중국의 현대적인 모습을 함께 지닌 특별한 도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나라 관리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예원이 있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유서 깊은 곳이다.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중국 전통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원의 규모와 아름다움, 어머니를 향한 효심에 감명을 받지만, 한편으론 이런 호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강제적인 세금징수와 노역으로 피땀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와이탄의 화려한 야경​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예원​​상하이의 밤은 화려하다. 와이탄과 더불어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 있으니 바로 신천지다. 1991년 홍콩 자본이 투입되어 개발된 신천지는 카페와 팝 등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최근 들어 서울의 인사동 거리처럼 각광받고 있는 텐즈방(田字坊) 역시 상하이의 명물이다. 원래 가내 수공업 형태의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던 열악한 환경의 거주지였던 이곳을 상하이 시는 도시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와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젊은 건축가들이 예전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기존의 건물을 살리면서도 개성 넘치는 쇼핑가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신천지는 홍콩의 자본으로 개발되었다  텐즈방​텐즈방은 우리의 인사동과 같은 곳이다​​상하이는 한마디로 현대와 근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근대 중국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국 속의 또 하나의 중국이라 할 수 있다.  글, 사진 양인환 
연평도 2017-07-07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더욱 더 또렷한 연평도​​해가 뉘엿뉘엿 지는 연평도는 ‘하이라이트’를 준비한다. 바로 구리동해수욕장이다. 북한의 옹진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이 해수욕장은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냈을 ‘몽돌’과 자동차가 달려도 빠지지 않을 너무도 고운 백사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여기에, “오늘의 당신을 응원 했습니다”라며 기운을 북돋워주는 석양이 어찌도 아름답고 고맙던지. 넋은 이미 반쯤 나갔고, 시간은 멈췄다. 파도도 소리를 죽였다.​​​ “아프고 슬프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어요.”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는 북한군의 포격으로 한순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포탄이 떨어지는 곳은 군 시설과 민간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북한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대연평도의 모습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고, 삶의 현장이 쑥대밭이 돼 아연실색하던 연평도 주민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새롭다. 북한의 만행은 국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다시 한번 안보의 중요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당의 모 국회의원이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하는 해프닝에서는 미연에 이를 막지 못한 정부와 여당에 대해서도 무능함의 극치라며 날선 비판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7년 전의 비극적 사건이날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 이후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했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이 파괴됐다. 당시 국제사회는 북한을 강력하게 규탄했지만 북한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다고 맞서 양측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흐르는 세월은 서릿발처럼 각인됐던 그날의 잔상들을 조금씩 씻어냈다. 그리하여 “아득히 먼 저편에서 일어났던 사고였나?”라고 할 만큼 희미해진 2017년 5월의 어느 날, 연평도를 찾을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일. 섬이라는 단어가 갖는 여운에 연평도라는 의미를 부여하니 1박2일의 여정을 기다리는 설렘이 조금씩 크기를 더해갔다.연평도를 찾으려면 인천광역시의 ‘인천연안여객터미널(흔히 연안부두라고 부른다)’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에서 대연평도(소연평도 경유)까지 운항하는 배는 ‘플라잉카페리호’로 무게가 573톤, 속도는 33노트에 이른다. 2시간이면 목적지에 닿으며, 요금은 왕복 기준으로 평일은 10만9,100원, 주말은 11만9,800원이다. 인천 시민은 50% 정도 할인혜택이 주어지며, 섬 주민들은 이보다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였던 플라잉스카이호플라잉스카이호의 내부. 대연평도까지 가는데 2시간이 걸린다​인천항여객터미널을 찾으려면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오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인천항시설관리센터 홈페이지(http://www.icferry.or.kr)를 참조하면 된다. 매일 1회 출항하지만 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차이가 있으니 반드시 확인을 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출항 시간 10분 전까지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으면 승선을 거부당할 수도 있으니 여유를 두고 항구에 도착하도록 하자.지정된 자리에 앉자 자대로 복귀를 하는 듯한 군인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시계는 과거로 흘러 군대라는 공간에서 멈춘다. 고단했던 훈련병 시절, 자대 배치를 받던 당시의 풍경, 전입신고, 내무생활, 훈련 등등이 주마등처럼 펼쳐지고 어느새 병장 계급장을 달고 전역신고를 하는 장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아~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아득한 시간의 건너편에는…….’​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충민사배는 어느새 인천대교를 빠져나와 망망한 서해바다에 몸을 맡겼다. 바다는 가까운 듯 멀었고, 물결은 잔잔하게 찰랑거렸다. 이따금 어선과 상선이 스치듯 지나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섬들을 밀어내면서 나아간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돌아보니 선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사이로 소연평도가 눈에 들어온다.오가는 이들이 발길이 멈추자 배는 다시 대연평도로 항로를 틀었다. 그리고 10여 분 후 도착한 선착장의 풍경은 연안항여객터미널을 떠나면서 생각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복과 전투화가 군인들을 대변하고 있었고, 짧게 잘라서 속살이 확연하게 드러난 두피와 ‘다. 나. 까’로 끝내는 말투 등이 묘한 이질감으로 다가오면서 느슨해졌던 내 안의 세포들을 살짝 긴장시켰다.​​대연평도 선착장대연평도 여객터미널. 출항시간은 그날그날 확인해야 한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행은 시작을 알린다. 연평도는 숙박 및 편의시설이 충분하게 갖춰지지 않은 곳이어서 민박과 펜션에서 묵어야 한다. 정해진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늦은 점심으로 끼니를 해결하자 특유의 노근함이 밀려온다. 그냥 이대로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1박2일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해설사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뗀다. 그날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려고 했던 것일까? 도로는 말끔했고 곳곳에서 허름한 상태의 집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일부의 건물들도 신축을 한 듯 산뜻했다.​​​꽃게탕이 푸짐하다​연평도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곳은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충민사’로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임경업 장군이 식수와 부식을 구하기 위해 가시나무를 무수히 꺾어다가 지금의 당섬(堂島) 남쪽 ‘안목’에 꽂아놓고 간조 때 이름 모를 물고기를 무수히 포획했던 것이 조기잡이의 시초라고 전해진다.​​충민사는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조기잡이 배를 그려놓은 벽화​​안보교육장에서 느끼는 그 날의 참상발길은 한걸음 더 나가 다시 그날(2010년 11월 23일)로 향한다. 포격을 맞아 폐허가 된 건물들의 사진이 담벼락에 걸렸는데 탄식이 절로 인다. 연평도 성당에도 3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는데 다행히도 이곳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성당의 주임신부는 “성모의 도움으로 신도들과 성당이 무사할 수 있었다”며 그날 이후 마리아상을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3발의 포탄이 떨어지고도 성당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부른다​안보교육장은 그날의 참화를 더욱 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포격을 맞은 세 채의 집을 당시 그대로 보존한 곁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시실을 구성해 안보와 관련한 각종 자료와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1, 2차 연평해전 당시의 북방한계선(NLL) 침범과 해전상황을 기록·전시·상영해 북한의 만행을 알리는 동시에 안보를 더욱 다잡는 계기를 제공한다. 포격을 맞아 새로 지은 집들은 옥상 난간을 철근으로 둘러 한눈에도 포격피해 주택임을 알 수 있었다.​​​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안보교육장​​포격을 맞아 전소되었던 집을 새로 지었다​연평도에 있는 3곳의 대피소 중 가장 큰 곳이 제1대피소다. 포격을 맞은 이듬해인 2011년 7월경 세워진 이곳은 533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내부에는 응급의료 시설을 갖추고 일정기간 머물 수 있는 생활용품들이 채워져 있다. 대피소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함께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펼쳐진 내부공간을 마주하면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시설들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어휴~’라는 한숨이 끝내 터지고 만다.​​제1대피소의 입구​​대피호 내부에는 응급시설과 생활용품이 갖추어져 있다​조기 파시(조기를 경매하는 시장)가 시작되었다는 안목항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바다가 물러가 모습을 드러낸 갯벌과 해변은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고, 햇살은 따가웠다. 30여 분을 걸어서 닿은 그곳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이들과 파도소리를 안주삼아 흥에 겨운 취객들이 섬처럼 꽈리를 틀고서 미동조차 없었다. 이곳에서는 보말을 잡는 체험도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여행객들의 한때의 작은 즐거움이 이곳 어민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보말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다​​자연휴양지로 각광받을 그 날을 기다리며해가 뉘엿뉘엿 지는 연평도는 ‘하이라이트’를 준비한다. 바로 구리동해수욕장이다. 북한의 옹진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이 해수욕장은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냈을 ‘몽돌’과 자동차가 달려도 빠지지 않을 너무도 고운 백사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여기에 ‘오늘의 당신을 응원했습니다’라며 기운을 북돋워주는 석양이 어찌도 아름답고 고맙던지. 넋은 이미 반쯤 나갔고, 시간은 멈췄다. 파도도 소리를 죽였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문을 닫겠습니다!”라는 초병의 씩씩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연평도의 빼어난 절경​이튿날, 희미한 안개(미세먼지일 수도 있음)를 뒤로 하고 망향전망대에 오르자 북한의 포대가 설치돼 있고 최근 김정은이 시찰했다는 장제도가 손에 잡힌다. 망원경 너머로 북한의 어선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도 들어온다. 이어 여정은 조기 파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조기역사관과 연평해전에서 피격을 당한 참수리호와 같은 기종의 배를 전시하고 있는 연평도 함상공원으로 이어진다. ​​​망향전망대에서는 북한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함상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참수리호안보전시장에 늘어선 전차와 장갑차 연평도에서의 1박2일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보 등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이곳 연평도는 안보관광지가 아닌, 천혜의 자연휴양지로 각광받을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슬픈 역사 간직한 아름다운 해안도시 - 칭다오 2017-06-19
 슬픈 역사 간직한 아름다운 해안도시 칭다오(青岛) 칭다오는 맥주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산동성의 해안도시다. 날씨는 물론 사람들의 체격도 비슷한 이곳에 90년대 초부터 많은 한국 기업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칭다오는 19세기 말 독일의 침공을 받아 남의 땅이 될 뻔했다. 영국-일본 연합군에 패해 독일인들은 물러났지만 그들이 지어놓은 건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이국적 분위기를 뽐낸다.  ​​​ 칭다오(青岛:청도)는 말 그대로 깨끗한 해안 도시이다. 칭다오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친근함이었다.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과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동성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의 평균 체격은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 그런데 산동사람들 역시 중국 안에서 골격이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가 산동성 출신이다. 9척 장신(약 2미터)인데다 골격도 대단히 굵었다고 전해 온다. 중국의 우수한 운동선수들 중 산동성 출신이 많다. 그래서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산동성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 산동성을 비롯한 동해안에 신라인들의 거주지역인 신라방이 조성되어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산동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체격이 큰 편이다​​역사적으로도 한국과 인연 많아 칭다오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 기업체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노사분규와 인건비 상승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상당부분 잃었다. 오랜 기간 노동탄압을 당해왔던 근로자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정부의 조정능력이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 때 정부는 제조업체의 외국 진출을 적극 장려했고 당시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대거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것이 1992년이었다. 당시 중국의 인건비가 월 5천원에 지나지 않았으니 임금인상 투쟁과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제조업체로서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공장용 토지를 싼 가격에 제공하고 법인세를 5년간 면제해 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생산 근거지를 중국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한국 업체의 중국 이전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한국에서 공장을 유지하던 분들에게 아직도 어렵게 한국에서 공장을 하나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광저우에서 일을 마치고 칭다오 행 비행기를 탔다. 출발시간이 2시간여 늦어져서 칭다오에 도착한 시각이 밤 11시였다. 택시를 탔더니 호텔까지 100위엔을 달라고 한다. 상하이나 썬전(深圳)과 같은 대도시라면 몰라도 중국의 기타 지역에서는 미터기가 있으나 마나다. “내가 매번 다니는 길인데 20위엔이면 간다”고 했더니 80위엔에서 60위엔..다시 50위엔으로 내려온다. 중국에서는 매번 택시 요금 때문에 시비가 붙는다. ​2년 전에 베트남에서 온 바이어와 함께 광저우에서 택시를 탔더니 공항까지 200위엔을 달라고 한다. 이를 거절하고 미터기로 가자고 했더니 이상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공항가는 길이 아니라고 했더니 맞다고 계속 우긴다. 광저우 기차역에서는 지창루를 따라 가다 공항 고속도로를 타면 된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강한 어조로 맞다고 우기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광저우 타워가 앞에 보였다. 서울로 치면 공항방면이 아니라 천호동 쪽으로 가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화를 벌컥 내며 “여긴 공항 가는 길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그래도 “맞다”고 우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서 현재의 위치를 손으로 짚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곤 연신 진땀을 흘린다. 공항에 도착하니 택시 요금이 330위엔이 나왔다. 본래 광저우 역에서 공항까지 100위엔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택시에서 내려서 공안을 불렀다. 택시 기사는 요금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뺑소니를 쳤다. 베트남에서 온 바이어는 결국 시간이 늦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을 했다.​ ​거리에서 만난 무장경찰​​절반 가까이 줄어든 한국인들칭다오에는 아직도 한국 기업이 많다. 초창기에는 1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공장을 운영했으나 지금은 많이 철수를 해서 5만 명 정도로 줄었다.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칭다오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허허벌판에 공장을 짓고 농사를 짓던 중국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급여까지 주었으니 그야말로 칭다오 정부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 중국인들이 독립을 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외국기업들은 중국의 법규를 다 지키면서 일을 해야 하니 제약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공장은 시간외 근무를 하더라도 초과 수당이라는 것이 없지만 외국 기업들은 이를 꼬박 꼬박 지불해야 하니 가격 경쟁력이 사라졌다.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가진 기술이라는 게 사실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다 보니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한 세금을 면제해 주던 기한이 넘으면서 자금상황이 어려워졌고 세계적인 불경기로 주문이 감소하면서 하나 둘씩 폐업하는 업체가 늘어났다. 중국에서 폐업하려면 폐업신고를 해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 누렸던 모든 혜택을 중국 정부에 토해 내야 하는데 사정이 어려워서 폐업하는 상황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기업들이 야반도주를 택했다. 지금도 언제 야반도주할지 모르는 업체들이 많다고 한다. 그만큼 칭다오의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인 불경기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도로에는 한국차들이 많이 발견된다. SM5는 한국 회사들이 중국에 투자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차다 ​ 한국인이 많은 편이라 한국 음식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칭다오로 한국기업들 덕분에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중국내 조선족의 위상이다. 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한국 기업이 있는 청도로 대거 몰려오는 새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문화적인 차이 외에도 언어상의 문제로 일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 때 통역을 담당하던 이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만약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없었다면 조선족은 아직도 중국의 변방에서 농사나 짓는 소수민족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날 조선족들 중에는 큰 사업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국 기업이 진출한 초창기에는 한국 사장 밑에서 일을 했던 그들이 이젠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한국인 직원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독일식 건축물 많이 남아있어칭다오를 감싸고 있는 해변 주위에는 고풍스런 독일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한 때 독일이 이곳을 지배했던 영향이다. 100여 년 전 지어진 독특한 건축 양식의 독일식 건물들은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여기가 중국인지 유럽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독일인들이 만들었던 별장이 현대식 건물과 멋진 대조를 이룬다​1842년 영국이 난징 조약으로 홍콩을 영구지배하기로 한 이후에 서구 열강들은 호시탐탐 중국을 노렸다. 당시 독일이 선택한 곳이 바로 칭다오였다. 1897년 칭다오에 들어온 독일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 군인들이 나섰지만 서방의 신식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독일에 굴복한 청나라는 1898년 3월 6일 칭다오를 99년간 조차하는 굴욕적인 협정에 서명했다. ​ ​​독일인들이 집단거주하던 지역. 이런 치외법권적 거주지를 조계라 불렀다​오늘날 칭다오 맥주가 유명한 것은 당시 독일인들이 거주하면서 독일식 설비와 기술로 맥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칭다오 맥주는 1903년 설립되어 1906년 뮌헨 국제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03년에는 칭다오 맥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맥주 박물관을 개장했다. 칭다오 맥주 공장 안에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방문객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칭다오 맥주는 최근 100주년을 기념해 박물관을 개관했다​독일의 칭다오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지지 못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세르비아의 청년에 의해 암살을 당하면서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을 맺었고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함께 대응하는 공동 전선을 펼쳤다. 1차 대전은 천만 명이 사망하고 2천만 명이 부상을 당하는 처절한 씨움이었다. ​ 1900년 독일인들에 의해 세워졌던 소청도 등대는 일본군이 침공하면서 크게 부서졌다​​등대 주변의 간이철로 역시 독일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영국은 중국에 진출해 있던 독일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을 차지한 후 중국 땅을 넘보던 일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빌미로 1914년 일본군은 칭다오를 공격해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서 독일의 칭다오 지배는 종말을 맞이한다. 오늘날 칭다오에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 미카엘 성당과 저택들, 그리고 당시 경찰서로 쓰던 건물들이 전형적인 독일 양식을 보여준다.​​​성 미카엘 성당으로 오르는 길 양쪽으로 독일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칭다오 반환을 외치며 일어났던 5.4운동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는 우리의 3.1운동과 같은 역사적인 운동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일본은 전리품으로 산동성을 점령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군벌이 지배하던 상황이라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또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혼란기였다. 이에 항거해 베이징 학생들과 시민들이 봉건주의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일어난 것이 5.4운동이다. 이들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동반도의 반환을 요구했다. ​​​5.4 광장에 있는 기념탑​당시 많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배에 고통받던 많은 나라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3.1 운동 역시도 여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중국에도 자극을 주었고,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루신 공원 ​루신은 저장성 출신의 작가이자 사상가로 5.4운동 이후 중국에 큰 변화를 몰고온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중국의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에도 유럽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와이탄을 마주보고 있는 황푸지구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조계지가 있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를 개항하면서 영국인들이 거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한 치외법권적 거주지를 조계(租界)라고 불렀다. 상하이와 함께 광저우에도 영국과 프랑스인들이 살던 지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의 중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이리저리 찢기는 덩치 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청나라를 숙명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조선의 운명은 험한 파도위의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칭다오도 그런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도시다. 현재 칭다오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이다. 칭다오를 산동성의 성도(수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지난(濟南;제남)이 성도이다. 산동성은 중국에서 농산물이 제일 많이 재배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김치도 전량 이곳 배추로 만들어진다. 우습게도 우리나라 식당에서 사용하는 김치를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다 보니 산동성이 세계 최고의 김치 수출 기지가 되었다. 산동성은 위도가 같아 기후도 비슷한 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칭다오를 많이 선택하는 이유는 거리가 가까운 점도 있었지만 이런 환경적인 부분도 많이 작용했다 보여 진다. 산동성 사람들은 공자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서인지 남아 선호사상이 매우 강하다. 또 여자들이 남자들을 대신해서 힘든 일을 다 할 정도로 생활력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남자들은 집안에서 놀고먹고 여자들이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지하철은 2016년 12월이 되어서야 개통이 되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리고 노선도 건설 중인 것까지 3개이지만 아직까지는 한 개 노선만 개통된 상태. 그래서 도심은 하루 종일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10년 전 칭다오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동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었다. 고층건물들이 경쟁하듯 늘어선 지금의 칭다오 교통상황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혼잡한 시내를 들어가려면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버스비는 2위엔(340원)으로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혼잡한 시내로 들어가려면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3개 노선이 계획된 칭다오 지하철은 아직 한 개 노선만 운행 중이다​​사드로 인한 반한감정은 상대적으로 낮아요즘 사드문제 때문에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어느 때보다 강하지만 칭다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다지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이 지역경제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하의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정부에서 지시를 내리면 무조건 따른다. 그러다 보니 한국 상품 불매운동과 한국식당 출입을 금지 때문에 현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중국인들은 사드의 실체를 잘 모른다. 사드가 설치되면 중국에 실제적인 위험이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드가 마치 공격용 무기인 것으로 잘못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중국 전역에서 반일감정이 고조된 적이 있다. 당시는 영토 문제라 지금의 사드 문제보다 더욱 격렬했다. 일본 식당에 돌을 던지고 일본차를 때려 부수는 폭력사태까지 유발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직접적인 폭력을 당할 위험에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부득이 외출을 해야 할 경우에는 ‘한국인이라고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칭다오에 있는 일본계 백화점 자스코(JASCO)는 물건을 도둑질 당했다. 그것도 중국 공안들이 버젓이 보고 있는 앞에서의 약탈이었다. 자스코는 거금 8천억이라는 손해를 봤지만 일본정부에서는 유감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번 사드사태를 보면서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펼쳐 나가는 G2국가로서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드의 본질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뒷전으로 하고 대한민국에 경제적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대국답지 못한 행동이다. ​​ 사드의 본질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뒷전으로 하고 대한민국에 경제적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대국답지 못한 행동이다. ​​칭다오 인근에 스다오(石島)라는 부두가 있다. 이곳은 우리 서해 바다의 황금어장을 노리는 중국 배들이 출항하는 곳이다. 불법으로 우리 어장을 싹쓸이 하고 대한민국의 해양경찰에게 위해를 가하는 해적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배를 쇠창살로 무장하고 흉기로 우리의 해양경찰을 위협한다. 이들 불법행위를 단속하다가 경찰관이 2명이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어느 나라 어부가 다른 나라 해양경찰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있는가? 중국 정부는 이런 일이 발생을 하면 원인을 제공한 중국 어부들의 불법행위를 단속을 해야 하지만 앵무새처럼 유감이라는 성명만 발표한다.중국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 의존도는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때 큰 타격으로 돌아 올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도 한·중간 사드와 유사한 사태가 일어날 경우 그들이 경제보복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대책을 세우고 보완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피해를 반복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장 다변화를 꾀해야만 할 때다.    글 사진  양인환(중국통신원)
오버랜더의 축제 한마당- 2017 오버랜드 엑스포 2017-06-14
​오버랜더의 축제 한마당2017 OVERLAND EXPO오버랜더를 위한 차량과 소품을 전시하고 여행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개최되는 오버랜드 엑스포는 미국 동부와 서부에서 매년 열린다.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애리조나에서 열린 2017 오버랜드 엑스포에 직접 참가했다. 멋진 캠핑카들과 그보다 더 눈부신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 우주부부(윤진영&신선아)필자 윤진영은 아내와 함께 자동차여행 중이다. 2016년 9월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캐나다, 미국을 거쳐 현재 멕시코에 이르고 있다. 중앙대학교 천체관측 동아리 ‘Cosmos’에서 처음 만나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의 별명은 ‘우주부부’(Cosmosian). 그들은 지난해 각기 직장을 퇴사한 뒤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낮에는 땅을 달리고 밤에는 별을 담으며 먼 나라 어딘가를 누비고 있다.  멕시코 칸쿤에서 2,500km를 달려 미국 국경을 넘었다. 4일이 걸렸으니 하루에 약 600km씩 운전한 셈. 무리를 해서 미국에 온 이유는 바로 ‘오버랜드 엑스포’(Overland Expo)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오버랜드(Overland)는 Over(가로지르다)와 Land(땅)의 합성어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이용해 국경을 넘나드는 장거리 여행을 뜻한다. 이러한 여행 방식을 오버랜딩(Overlanding)이라 하고, 여행자는 오버랜더(Overlander)라 부른다. 미 대륙을 여행하는 오버랜더의 99%는 북미 혹은 유럽인이다. 지금껏 우리부부 외에 동양인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러시아를 경유해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고는 있지만 육로로 다른 나라에 갈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을 감안하면 오버랜딩은 꿈같은 여행이다.오버랜더를 위한 차량과 소품을 전시하고 여행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개최되는 오버랜드 엑스포는 미국 동부와 서부에서 매년 열린다. 올해는 마침 우리의 여행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애리조나 포트터트힐 카운티공원에서 열려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개성만점 캠핑카, 오버랜더와의 만남행사장 도착 시간은 오전 12시경,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다행히 한 달 전쯤 VIP 초대권을 받아뒀기에 자리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버랜드 엑스포에서는 실제로 오버랜딩을 하고 있는 여행자에게 심사를 통해 VIP 티켓을 발부해준다. VIP에게는 모든 부대행사 참가기회와 캠핑장이 무료로 제공된다. ​​ VIP 사이트 전경. 오버랜딩 중인 여행자 중 심사를 통해 VIP 티켓을 발부해준다​이번 엑스포는 총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250개 이상의 전시 부스와 170개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었고, 다양한 푸드 트럭까지 참가해 생각했던 것보다 행사 규모가 훨씬 크고 화려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괴물 같은 거대 캠핑카들에 넋을 잃었다. 실내엔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이고 전자레인지까지 있다.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은 화려한 캠핑카가 있는 반면 앙증맞은 트레일러들도 눈길을 끈다. ​​괴물처럼 거대한 캠핑카들이 넋을 잃게 했다 괴물 캠핑카의 내부.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있다  행사장 곳곳을 세 시간 정도를 구경하고 나자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해발 2,000m의 고산지대인 데다 강렬한 애리조나의 햇살 때문이다. 푸드 트럭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푸드 코트의 이름은 오버랜드 오아시스(Overland Oasis). 메뉴는 미국답게 바비큐가 주를 이루고 있다. 뭘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맥주 트럭을 발견하곤 고민할 것 없이 맥주를 마시러 갔다. 이곳 플래그스태프 지역의 작은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맥주인데 맛이 기가 막힌다. ​​팀버리프 트레일러라는 이름의 소형 트레일러가 마음에 쏙 들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팀버리프 트레일러 대표 캐빈 몰릭입니다​​앙증맞은 트레일러들이 매력적이다​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딘가에서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중앙아메리카 여행세미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발표자는 멕시코, 파나마 등의 중미를 2년간 여행한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질문이 ‘중미는 여행하기 안전한가?’ 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안전합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현재 멕시코를 여행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말에 100% 동감한다. 우리도 6개월간 멕시코를 여행했지만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의외로 3일간 머물렀던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우리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지였다.​​​중앙아메리카 여행세미나 참가자들은 중미 여행이 안전한지 궁금해 했다​정신없이 구경하다보니 어느 순간 주변이 한산해진다. 공식 행사시간인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캠핑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텐트로 가던 중 관록이 묻어나는 차량이 있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가까이 와서 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차량 주인의 이름은 바바라. 우리와 같은 토요타 4러너로 미국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멕시코도 여행하고 싶지만 남편의 반대로 못하고 있다는 그녀에게 멕시코의 매력을 장황하게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맥주도 한잔 기울였다. 서로의 여행경험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이곳에서 만난 바바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토요타 4러너로 여행 중이었다​​다채로운 부대행사와 볼거리 다음날, 캠핑장 청소차량 소음에 눈을 떴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준비된 프로그램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되어 과자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날 가보지 못한 동편 행사장부터 방문해보니 세상에나! 한국에서는 한 대도 보기 어려운 캠퍼밴들이 오리떼 마냥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1972년식 포드 이코노라인을 개조한 차량부터 메르세데스 벤츠 스프린터까지 다양한 캠핑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코노라인, 스프린터 등 다양한 캠퍼밴을 볼 수 있었다  1972년식 포드 이코노라인 캠퍼카​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2015년식 포드 이코노라인이었다. 운전석 부분을 제외한 전체를 강화유리섬유로 제작해 무게를 대폭 줄였다고 한다. 거기다 풀타임 4WD로 개조해 어떤 오프로드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차체가 유리섬유로 구성된 2015년식 포드 이코노라인. 25만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동편 행사장에는 오프로드 드라이빙 체험공간도 있었다. 랜드로버와 BF굿리치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였다. 준비된 시승차는 물론 본인 차량으로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스 난이도가 꽤 높아 차가 뒤집어질 것 같은 아찔한 광경이 자주 연출되었다.   랜드로버가 주관하는 오프로더 체험장BF굿리치가 주관하는 오프로더 체험장  모터사이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전시장도 있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3륜 바이크들은 자동차 못지않게 화려했다. 모터사이클에 문외한인 탓에 그저 눈요기만 했지만 마니아였다면 지갑을 열기 충분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반가운 브랜드도 만났다. 바로 세나(SENA). 바이크용 블루투스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 브랜드인데 멀리 타향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행사부스 책임자인 제이는 30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 세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4년째 이 엑스포에 참가했지만 한국에서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수많은 모터사이클 여행자를 볼 수 있었다​​바이크용 블루투스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 브랜드 세나 부스에서 한국계 직원 제이를 만났다​차를 한 번 움직이면 500km는 우습게 가야하는 미국이다 보니 행사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당일치기 관람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인 만큼 행사기간 동안 묵을 수 있는 캠핑장도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차를 세워둔 VIP용 캠핑장은 가장 외진 곳에 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이트들을 지나쳐가야 했는데 이게 문제였다.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개성 있는 차를 보고 주인들과 한두 마디 나누노라면 발걸음 떼기가 쉽지 않다. ​​​랜드 크루저 커스텀 리빌딩 업체에서 전시 차량들. 값은 대개 7만 달러를 호가한다​X캠퍼의 트럭 캠퍼. 차를 제외함 캠핑 모듈 가격은 1만~2만 달러 정도 독일커플 오버랜더의 2003년식 디펜더​이날 역시 귀여운 자동차로 여행하고 있는 매기 덕분에 한 동안 발걸음이 묶였다. 그녀의 애마는 토요타 랜드크루저. 매일 괴물 같은 차들만 보다가 가녀린 체구의 랜드크루저를 보니 신선했다.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미국을 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장비 세팅이 번거로워 좁다란 트렁크에서 잠을 해결한다고 했다. 곧 캐나다로 간다는 우리의 말에 미국을 떠나기 전 포웰 호수, 그랜드 티튼, 데스벨리를 꼭 들러보라고 권했다. 여행자들의 공식 작별인사인 “Safe Travel!”을 외치며 이틀째 밤을 마무리했다. 오버랜드 엑스포 코리아를 꿈꾸며행사 마지막 날. 참가 업체들이 제각기 간단한 음식을 제공한 덕분에 행사장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무료 아침이라 하니 가벼운 주머니로 다니는 여행자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도넛부터 오믈렛, 타코까지…….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행사다.​​ 마지막 날에도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났다. 포드 F550 픽업트럭 개조차에 태극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차 주인은 40년째 여행 중이라는 웨스트콧 부부. 여행 중 지나온 나라의 국기를 붙인다는데, 한국에는 2015년 방문했다고 한다. 부부는 한국인들의 매너와 친절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우리를 무척이나 반겼다. ​​​2년 전 한국을 여행했던 웨스트콧 부부와 함께!​차에는 40년 세월의 여행 노하우가 짙게 녹아 있었다. 실내에는 샤워실, 화장실, 심지어 와인저장소까지 있었다. 올해 말 멕시코에 간다는 그들에게 지난 6개월간의 멕시코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꼭 가봐야 할 곳, 운전 매너, 경찰 피하는 법, 무료 캠핑장 등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 캘리포니아에 오면 꼭 들리라는 신신당부에 몇 번이나 알았다고 답한 뒤에야 헤어질 수 있었다. 웨스트콧 부부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행사장을 빠져 나왔다. 행사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2박 3일도 턱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키 작고 새카만 한국인 오버랜더 부부가 신기했는지 많은 이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선배 오버랜더들로부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노하우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준비하던 2012년부터 사진으로만 보던 이 행사에 직접 참가할 수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오버랜딩이 쉽지 않다. 하지만 자동차여행을 꿈꾸는 이들은 적지 않으니 언젠가 한국에서도 오버랜드 엑스포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 이번 행사에 참가한 우리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래본다.   글, 사진 윤진영(www.cosmosian.co.kr) ​  
단양에 가다 2017-06-02
봄바람 불고 볕 내리는 그 어느 날 단양에 가다 ​충주호 유람선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면서 윤선도의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가 수묵화처럼 다가온다.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눈을 뜨면 충주호의 절경이, 다시 눈을 감으면 신선들이 노닐던 풍경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아련하게 펼쳐진다. ​​​​​휴대폰이 파르르 떨며 옅은 숨을 토해내고는 곧이어 쥐어짜내듯 강도를 높여간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그야말로 미몽의 시간이다. 숙면의 끝자락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저항은 얼마가지 못해 백기를 내걸어야 했다. 지난밤 맞춰놓은 시간은 벌써 7분이나 지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약속장소에 닿을 수 없어 갑자기 마음과 몸이 부산을 떤다.  10여 분 후 현관을 나서면서도 “늦으면 어떡하지”라는 조바심이 일었다. 총총걸음을 내딛으면서도 연신 휴대폰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적지에 내려줄 버스는 찬 공기를 가르며 이미 떠나버리고 없을 터. 새벽의 분주함도 헛품으로 남을 일이다. 무엇보다도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에 한껏 들떠 있던 기분이 씁쓸함만 남긴 채 사그라 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운전으로부터의 자유’, ‘달콤한 수면’, ‘이기적인 사색의 게으름’, ‘여행의 여유’ 등등 그 어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때 스치듯 떠오른 붉은 볕의 고장이라는 단양(丹陽). 국내 여행사들이 선보이는 소셜커머스의 그 많은 상품 중에서 “단양에 와보지 않고서는 천하절경을 논하지 말라”는 문구가 구미를 당겼다. 여기에다 ‘마음을 푹 놓고 여행을 하고 싶은 워너비 패키지족’ 등은 봄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3만원이 채 되지 않은 비용으로 충주호 뱃놀이를 즐기고 도담삼봉의 절경에 빠지며 국내 최대의 사찰이라는 구인사를 둘러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한 매력이 또 있을까. 그렇게 덜컥 예약을 해놓고 보니 출발은 이른 새벽.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려고 서두르다보니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다행스럽게도 서두른 보람이 있어 45인승 버스는 한 자리만을 남겨두고(도착 시간에 늦을 같아 취소됐다고 한다) 서울을 벗어난다. 첫 목적지 장회나루선착장까지는 잠실에서 170여km로 광주-원주 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한다. 소요 시간은 2시간 30여분. 10시 30분에만 닿으면 되기에 제법 여유가 있었다.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고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자 눈은 저절로 감기고, 새벽에 잠시 맡겨놓았던 잠의 세계를 돌려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이드가 “휴일이어서 많은 이들이 나들이 행렬에 동참했는지 교통 체증이 심하다”며 “지금 이 상태로는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이어 그는 “이렇게 되면 점심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에 미리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다. 대기시간을 줄여야 한다”며 식당 연락처를 알려주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유람선이 출항(1시간 30분 간격)을 10여 분도 채 남기지 않은 시간이 되어서야 버스는 장회나루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2시간 이상이 늦었으니, 일정 전체가 차질을 빚을까봐 가이드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나보다. 옆 좌석의 한 여행자가 “요즘은 여행객들이 더 잘하고 시간과 질서를 잘 지키기에 가이드도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며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니 의욕 넘치는 초보인 듯하다”며 오랜 여행으로 쌓은 경험을 말해준다. ​ ​2시간 연착으로 출항 10분 전에 버스가 도착한 까닭에 가이드가 조바심을 부렸다​바닥에 발을 딛자 근질근질하던 몸이 한껏 기지개를 켠다. 하늘은 맑았고, 5월의 산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단양 8경의 하나라는 구담봉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왔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의 끝에 이르자 유람선이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3층으로 설계된 유람선에 올랐다. 1, 2층은 쾌적한 실내에서 미끄러지듯 나가는 잔잔함을 맛볼 수 있고, 문을 열고 나가 난간에 기대면 귀밑머리를 스치듯 지나는 바람의 손결에 충주호 주변의 경치가 느릿한 파노라마의 잔상으로 따라붙는다. 선장의 구수한 입담에 여행객들은 시종 웃음과 미소로 여독을 털어낸다. 반면 사방이 탁 트여 햇살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3층은 충주호의 절경과 봄날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구담봉. 단양8경 중 하나다 ​배 안 간이매점에서 산 맥주를 한 모금을 들이키니 목젖을 타고 건너오는 짜릿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면서 윤선도의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가 수묵화처럼 다가온다.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눈을 뜨면 충주호의 절경이, 다시 눈을 감으면 신선들이 노닐던 풍경이 씨줄과 날줄이 오가는 것처럼 아련하게 펼쳐진다. 얼마가지 않아 왼쪽으로 희고 푸른 바위들이 우뚝 솟아올라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돌기둥처럼 생긴 석봉들은 비가 갠 후 옥과 같이 푸르고 흰 대나무 순이 돋아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옥순봉이라 불린다. 이 주변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는데, 옥순대교에서 구담봉 방향으로 올라가면 병풍을 접은 것과 같고, 반대로 하류로 내려오면 병풍을 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유람선 3층에서 바라본 충주호의 절경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화가들이 가만 둘 리 없는 법. 조선 명종 때의 황준량은 일엽편주가 옥순봉을 지나는 모습을 보고 “조각배에 탄 사람이 병풍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단원 김홍도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는 실경산수의 화법으로 ‘옥순봉도’를 그려 1796년에 제작된 ‘병진년화첩’에 남겼다. 엄치욱, 이운영 등 많은 고금의 화가들이 신비스러운 옥순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비가 갠 후에 푸른 옥처럼 푸르고 대나무순이 돋아난 것처럼 보인다는 옥순봉 ​ 40여 분을 항해한 후 청풍선착장에서 10여 분 정박한 유람선이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오자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섰다. 미리 주문한 마늘더덕구이가 한상 차려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가이드는 또다시 재촉이다. 20분에 식사를 마쳐야 다음 일정이 수월하다고.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손꼽히는 도담삼봉은 푸른 강물 위에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이중 가운데 봉우리(중봉)가 가장 높고, 남과 북에 낮은 봉우리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중봉은 장군 같은 늠름한 모습이고, 남봉은 교태 어린 여인을 닮아 첩봉 또는 딸봉이라 불린다. 이를 외면하는 듯 홀로 서 있는 북봉은 처봉 혹은 아들봉이라 이름지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저녁노을로 아름답게 물든 도담삼봉을 보고 그 빼어난 경치를 이렇게 노래했다.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에는 저녁노을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은 푸른 절벽에 기대어 자고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진다 ​  도담봉은 단양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손꼽힌다 ​​​아쉬 남긴 구인사와의 짧은 만남단양군 소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한불교 천태종 본산 구인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966년에 창건되어 현재에 이르렀으니 역사는 겨우 50여 년. 세월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며 숙연함이 감돌게 하던 여느 유명 사찰에 비해 청년의 활기찬 기운이 감돈다고 할까. ​​소백산자락에 자리잡은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1966년 창건된 구인사는 고색창연한 여느 사찰과 달리 청년의 활기찬 기운이 감돈다.​​소백산구인사라는 현판이 내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천왕문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웅장하다. 이어지는 대법당과 목조강당인 광명당, 사천왕문과 국내 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 걸음을 떼고 눈길을 줄 때마다 감탄사가 저절로 인다. ​​​ 1 소백산구인사라는 현판이 걸린 구인사 일주문  2 일주문을 지나면 웅장한 천왕문이 나타난다 3 구인사 박물관 입구 4 구인사 박물관​​​단청과 연등이 산에 만발한 꽃들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거기다 단청과 연등, 그리고 산에 만발한 꽃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봄날의 향연이 마치 선계와의 경계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구인사에서 주어진 시간은 1시간여 남짓. 더 이상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자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안녕, 구인사. 다시 오마, 단양이여!​​​​​구인사충북 단양군 소백산의 구봉팔문 중 제4봉인 수리봉 아래에 자리잡은 구인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본산이다. 1966년 창건됐으나 천태종의 개조인 상월조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46년이었다고. 첫 번째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자리에 지어진 대법당을 비롯해 목조강당인 광명당, 사천왕문과 국내 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이 있으며 50여 동의 건물에 동시 수용인원이 5만 6,000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수리봉 정상에는 상월선사의 묘가 있는데 이는 화장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 불교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상월선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이 자리를 잡아놓았다고 한다. 이 절은 특히 치병에 영험이 있다고 하여 매일같이 수백 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관음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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