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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2017-07-07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더욱 더 또렷한 연평도​​해가 뉘엿뉘엿 지는 연평도는 ‘하이라이트’를 준비한다. 바로 구리동해수욕장이다. 북한의 옹진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이 해수욕장은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냈을 ‘몽돌’과 자동차가 달려도 빠지지 않을 너무도 고운 백사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여기에, “오늘의 당신을 응원 했습니다”라며 기운을 북돋워주는 석양이 어찌도 아름답고 고맙던지. 넋은 이미 반쯤 나갔고, 시간은 멈췄다. 파도도 소리를 죽였다.​​​ “아프고 슬프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어요.”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는 북한군의 포격으로 한순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포탄이 떨어지는 곳은 군 시설과 민간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북한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대연평도의 모습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고, 삶의 현장이 쑥대밭이 돼 아연실색하던 연평도 주민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새롭다. 북한의 만행은 국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다시 한번 안보의 중요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당의 모 국회의원이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하는 해프닝에서는 미연에 이를 막지 못한 정부와 여당에 대해서도 무능함의 극치라며 날선 비판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7년 전의 비극적 사건이날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 이후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했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이 파괴됐다. 당시 국제사회는 북한을 강력하게 규탄했지만 북한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다고 맞서 양측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흐르는 세월은 서릿발처럼 각인됐던 그날의 잔상들을 조금씩 씻어냈다. 그리하여 “아득히 먼 저편에서 일어났던 사고였나?”라고 할 만큼 희미해진 2017년 5월의 어느 날, 연평도를 찾을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일. 섬이라는 단어가 갖는 여운에 연평도라는 의미를 부여하니 1박2일의 여정을 기다리는 설렘이 조금씩 크기를 더해갔다.연평도를 찾으려면 인천광역시의 ‘인천연안여객터미널(흔히 연안부두라고 부른다)’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에서 대연평도(소연평도 경유)까지 운항하는 배는 ‘플라잉카페리호’로 무게가 573톤, 속도는 33노트에 이른다. 2시간이면 목적지에 닿으며, 요금은 왕복 기준으로 평일은 10만9,100원, 주말은 11만9,800원이다. 인천 시민은 50% 정도 할인혜택이 주어지며, 섬 주민들은 이보다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였던 플라잉스카이호플라잉스카이호의 내부. 대연평도까지 가는데 2시간이 걸린다​인천항여객터미널을 찾으려면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오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인천항시설관리센터 홈페이지(http://www.icferry.or.kr)를 참조하면 된다. 매일 1회 출항하지만 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차이가 있으니 반드시 확인을 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출항 시간 10분 전까지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으면 승선을 거부당할 수도 있으니 여유를 두고 항구에 도착하도록 하자.지정된 자리에 앉자 자대로 복귀를 하는 듯한 군인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시계는 과거로 흘러 군대라는 공간에서 멈춘다. 고단했던 훈련병 시절, 자대 배치를 받던 당시의 풍경, 전입신고, 내무생활, 훈련 등등이 주마등처럼 펼쳐지고 어느새 병장 계급장을 달고 전역신고를 하는 장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아~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아득한 시간의 건너편에는…….’​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충민사배는 어느새 인천대교를 빠져나와 망망한 서해바다에 몸을 맡겼다. 바다는 가까운 듯 멀었고, 물결은 잔잔하게 찰랑거렸다. 이따금 어선과 상선이 스치듯 지나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섬들을 밀어내면서 나아간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돌아보니 선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사이로 소연평도가 눈에 들어온다.오가는 이들이 발길이 멈추자 배는 다시 대연평도로 항로를 틀었다. 그리고 10여 분 후 도착한 선착장의 풍경은 연안항여객터미널을 떠나면서 생각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복과 전투화가 군인들을 대변하고 있었고, 짧게 잘라서 속살이 확연하게 드러난 두피와 ‘다. 나. 까’로 끝내는 말투 등이 묘한 이질감으로 다가오면서 느슨해졌던 내 안의 세포들을 살짝 긴장시켰다.​​대연평도 선착장대연평도 여객터미널. 출항시간은 그날그날 확인해야 한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행은 시작을 알린다. 연평도는 숙박 및 편의시설이 충분하게 갖춰지지 않은 곳이어서 민박과 펜션에서 묵어야 한다. 정해진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늦은 점심으로 끼니를 해결하자 특유의 노근함이 밀려온다. 그냥 이대로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1박2일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해설사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뗀다. 그날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려고 했던 것일까? 도로는 말끔했고 곳곳에서 허름한 상태의 집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일부의 건물들도 신축을 한 듯 산뜻했다.​​​꽃게탕이 푸짐하다​연평도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곳은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충민사’로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임경업 장군이 식수와 부식을 구하기 위해 가시나무를 무수히 꺾어다가 지금의 당섬(堂島) 남쪽 ‘안목’에 꽂아놓고 간조 때 이름 모를 물고기를 무수히 포획했던 것이 조기잡이의 시초라고 전해진다.​​충민사는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조기잡이 배를 그려놓은 벽화​​안보교육장에서 느끼는 그 날의 참상발길은 한걸음 더 나가 다시 그날(2010년 11월 23일)로 향한다. 포격을 맞아 폐허가 된 건물들의 사진이 담벼락에 걸렸는데 탄식이 절로 인다. 연평도 성당에도 3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는데 다행히도 이곳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성당의 주임신부는 “성모의 도움으로 신도들과 성당이 무사할 수 있었다”며 그날 이후 마리아상을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3발의 포탄이 떨어지고도 성당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부른다​안보교육장은 그날의 참화를 더욱 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포격을 맞은 세 채의 집을 당시 그대로 보존한 곁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시실을 구성해 안보와 관련한 각종 자료와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1, 2차 연평해전 당시의 북방한계선(NLL) 침범과 해전상황을 기록·전시·상영해 북한의 만행을 알리는 동시에 안보를 더욱 다잡는 계기를 제공한다. 포격을 맞아 새로 지은 집들은 옥상 난간을 철근으로 둘러 한눈에도 포격피해 주택임을 알 수 있었다.​​​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안보교육장​​포격을 맞아 전소되었던 집을 새로 지었다​연평도에 있는 3곳의 대피소 중 가장 큰 곳이 제1대피소다. 포격을 맞은 이듬해인 2011년 7월경 세워진 이곳은 533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내부에는 응급의료 시설을 갖추고 일정기간 머물 수 있는 생활용품들이 채워져 있다. 대피소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함께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펼쳐진 내부공간을 마주하면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시설들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어휴~’라는 한숨이 끝내 터지고 만다.​​제1대피소의 입구​​대피호 내부에는 응급시설과 생활용품이 갖추어져 있다​조기 파시(조기를 경매하는 시장)가 시작되었다는 안목항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바다가 물러가 모습을 드러낸 갯벌과 해변은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고, 햇살은 따가웠다. 30여 분을 걸어서 닿은 그곳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이들과 파도소리를 안주삼아 흥에 겨운 취객들이 섬처럼 꽈리를 틀고서 미동조차 없었다. 이곳에서는 보말을 잡는 체험도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여행객들의 한때의 작은 즐거움이 이곳 어민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보말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다​​자연휴양지로 각광받을 그 날을 기다리며해가 뉘엿뉘엿 지는 연평도는 ‘하이라이트’를 준비한다. 바로 구리동해수욕장이다. 북한의 옹진반도를 마주하고 있는 이 해수욕장은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냈을 ‘몽돌’과 자동차가 달려도 빠지지 않을 너무도 고운 백사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여기에 ‘오늘의 당신을 응원했습니다’라며 기운을 북돋워주는 석양이 어찌도 아름답고 고맙던지. 넋은 이미 반쯤 나갔고, 시간은 멈췄다. 파도도 소리를 죽였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문을 닫겠습니다!”라는 초병의 씩씩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연평도의 빼어난 절경​이튿날, 희미한 안개(미세먼지일 수도 있음)를 뒤로 하고 망향전망대에 오르자 북한의 포대가 설치돼 있고 최근 김정은이 시찰했다는 장제도가 손에 잡힌다. 망원경 너머로 북한의 어선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도 들어온다. 이어 여정은 조기 파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조기역사관과 연평해전에서 피격을 당한 참수리호와 같은 기종의 배를 전시하고 있는 연평도 함상공원으로 이어진다. ​​​망향전망대에서는 북한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함상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참수리호안보전시장에 늘어선 전차와 장갑차 연평도에서의 1박2일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보 등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이곳 연평도는 안보관광지가 아닌, 천혜의 자연휴양지로 각광받을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슬픈 역사 간직한 아름다운 해안도시 - 칭다오 2017-06-19
 슬픈 역사 간직한 아름다운 해안도시 칭다오(青岛) 칭다오는 맥주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산동성의 해안도시다. 날씨는 물론 사람들의 체격도 비슷한 이곳에 90년대 초부터 많은 한국 기업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칭다오는 19세기 말 독일의 침공을 받아 남의 땅이 될 뻔했다. 영국-일본 연합군에 패해 독일인들은 물러났지만 그들이 지어놓은 건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이국적 분위기를 뽐낸다.  ​​​ 칭다오(青岛:청도)는 말 그대로 깨끗한 해안 도시이다. 칭다오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친근함이었다.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과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동성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의 평균 체격은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 그런데 산동사람들 역시 중국 안에서 골격이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가 산동성 출신이다. 9척 장신(약 2미터)인데다 골격도 대단히 굵었다고 전해 온다. 중국의 우수한 운동선수들 중 산동성 출신이 많다. 그래서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산동성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 산동성을 비롯한 동해안에 신라인들의 거주지역인 신라방이 조성되어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산동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체격이 큰 편이다​​역사적으로도 한국과 인연 많아 칭다오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 기업체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노사분규와 인건비 상승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상당부분 잃었다. 오랜 기간 노동탄압을 당해왔던 근로자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정부의 조정능력이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 때 정부는 제조업체의 외국 진출을 적극 장려했고 당시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대거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것이 1992년이었다. 당시 중국의 인건비가 월 5천원에 지나지 않았으니 임금인상 투쟁과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제조업체로서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공장용 토지를 싼 가격에 제공하고 법인세를 5년간 면제해 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생산 근거지를 중국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한국 업체의 중국 이전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한국에서 공장을 유지하던 분들에게 아직도 어렵게 한국에서 공장을 하나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광저우에서 일을 마치고 칭다오 행 비행기를 탔다. 출발시간이 2시간여 늦어져서 칭다오에 도착한 시각이 밤 11시였다. 택시를 탔더니 호텔까지 100위엔을 달라고 한다. 상하이나 썬전(深圳)과 같은 대도시라면 몰라도 중국의 기타 지역에서는 미터기가 있으나 마나다. “내가 매번 다니는 길인데 20위엔이면 간다”고 했더니 80위엔에서 60위엔..다시 50위엔으로 내려온다. 중국에서는 매번 택시 요금 때문에 시비가 붙는다. ​2년 전에 베트남에서 온 바이어와 함께 광저우에서 택시를 탔더니 공항까지 200위엔을 달라고 한다. 이를 거절하고 미터기로 가자고 했더니 이상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공항가는 길이 아니라고 했더니 맞다고 계속 우긴다. 광저우 기차역에서는 지창루를 따라 가다 공항 고속도로를 타면 된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강한 어조로 맞다고 우기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광저우 타워가 앞에 보였다. 서울로 치면 공항방면이 아니라 천호동 쪽으로 가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화를 벌컥 내며 “여긴 공항 가는 길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그래도 “맞다”고 우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서 현재의 위치를 손으로 짚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곤 연신 진땀을 흘린다. 공항에 도착하니 택시 요금이 330위엔이 나왔다. 본래 광저우 역에서 공항까지 100위엔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택시에서 내려서 공안을 불렀다. 택시 기사는 요금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뺑소니를 쳤다. 베트남에서 온 바이어는 결국 시간이 늦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을 했다.​ ​거리에서 만난 무장경찰​​절반 가까이 줄어든 한국인들칭다오에는 아직도 한국 기업이 많다. 초창기에는 1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공장을 운영했으나 지금은 많이 철수를 해서 5만 명 정도로 줄었다.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칭다오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허허벌판에 공장을 짓고 농사를 짓던 중국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급여까지 주었으니 그야말로 칭다오 정부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 중국인들이 독립을 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외국기업들은 중국의 법규를 다 지키면서 일을 해야 하니 제약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공장은 시간외 근무를 하더라도 초과 수당이라는 것이 없지만 외국 기업들은 이를 꼬박 꼬박 지불해야 하니 가격 경쟁력이 사라졌다.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가진 기술이라는 게 사실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다 보니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한 세금을 면제해 주던 기한이 넘으면서 자금상황이 어려워졌고 세계적인 불경기로 주문이 감소하면서 하나 둘씩 폐업하는 업체가 늘어났다. 중국에서 폐업하려면 폐업신고를 해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 누렸던 모든 혜택을 중국 정부에 토해 내야 하는데 사정이 어려워서 폐업하는 상황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기업들이 야반도주를 택했다. 지금도 언제 야반도주할지 모르는 업체들이 많다고 한다. 그만큼 칭다오의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인 불경기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도로에는 한국차들이 많이 발견된다. SM5는 한국 회사들이 중국에 투자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차다 ​ 한국인이 많은 편이라 한국 음식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칭다오로 한국기업들 덕분에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중국내 조선족의 위상이다. 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한국 기업이 있는 청도로 대거 몰려오는 새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문화적인 차이 외에도 언어상의 문제로 일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 때 통역을 담당하던 이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만약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없었다면 조선족은 아직도 중국의 변방에서 농사나 짓는 소수민족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날 조선족들 중에는 큰 사업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국 기업이 진출한 초창기에는 한국 사장 밑에서 일을 했던 그들이 이젠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한국인 직원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독일식 건축물 많이 남아있어칭다오를 감싸고 있는 해변 주위에는 고풍스런 독일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한 때 독일이 이곳을 지배했던 영향이다. 100여 년 전 지어진 독특한 건축 양식의 독일식 건물들은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여기가 중국인지 유럽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독일인들이 만들었던 별장이 현대식 건물과 멋진 대조를 이룬다​1842년 영국이 난징 조약으로 홍콩을 영구지배하기로 한 이후에 서구 열강들은 호시탐탐 중국을 노렸다. 당시 독일이 선택한 곳이 바로 칭다오였다. 1897년 칭다오에 들어온 독일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 군인들이 나섰지만 서방의 신식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독일에 굴복한 청나라는 1898년 3월 6일 칭다오를 99년간 조차하는 굴욕적인 협정에 서명했다. ​ ​​독일인들이 집단거주하던 지역. 이런 치외법권적 거주지를 조계라 불렀다​오늘날 칭다오 맥주가 유명한 것은 당시 독일인들이 거주하면서 독일식 설비와 기술로 맥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칭다오 맥주는 1903년 설립되어 1906년 뮌헨 국제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03년에는 칭다오 맥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맥주 박물관을 개장했다. 칭다오 맥주 공장 안에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방문객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칭다오 맥주는 최근 100주년을 기념해 박물관을 개관했다​독일의 칭다오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지지 못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세르비아의 청년에 의해 암살을 당하면서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을 맺었고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함께 대응하는 공동 전선을 펼쳤다. 1차 대전은 천만 명이 사망하고 2천만 명이 부상을 당하는 처절한 씨움이었다. ​ 1900년 독일인들에 의해 세워졌던 소청도 등대는 일본군이 침공하면서 크게 부서졌다​​등대 주변의 간이철로 역시 독일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영국은 중국에 진출해 있던 독일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을 차지한 후 중국 땅을 넘보던 일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빌미로 1914년 일본군은 칭다오를 공격해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서 독일의 칭다오 지배는 종말을 맞이한다. 오늘날 칭다오에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 미카엘 성당과 저택들, 그리고 당시 경찰서로 쓰던 건물들이 전형적인 독일 양식을 보여준다.​​​성 미카엘 성당으로 오르는 길 양쪽으로 독일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칭다오 반환을 외치며 일어났던 5.4운동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는 우리의 3.1운동과 같은 역사적인 운동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일본은 전리품으로 산동성을 점령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군벌이 지배하던 상황이라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또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혼란기였다. 이에 항거해 베이징 학생들과 시민들이 봉건주의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일어난 것이 5.4운동이다. 이들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동반도의 반환을 요구했다. ​​​5.4 광장에 있는 기념탑​당시 많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배에 고통받던 많은 나라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3.1 운동 역시도 여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중국에도 자극을 주었고,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루신 공원 ​루신은 저장성 출신의 작가이자 사상가로 5.4운동 이후 중국에 큰 변화를 몰고온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중국의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에도 유럽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와이탄을 마주보고 있는 황푸지구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조계지가 있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를 개항하면서 영국인들이 거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위한 치외법권적 거주지를 조계(租界)라고 불렀다. 상하이와 함께 광저우에도 영국과 프랑스인들이 살던 지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의 중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이리저리 찢기는 덩치 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청나라를 숙명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조선의 운명은 험한 파도위의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칭다오도 그런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도시다. 현재 칭다오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이다. 칭다오를 산동성의 성도(수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지난(濟南;제남)이 성도이다. 산동성은 중국에서 농산물이 제일 많이 재배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김치도 전량 이곳 배추로 만들어진다. 우습게도 우리나라 식당에서 사용하는 김치를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다 보니 산동성이 세계 최고의 김치 수출 기지가 되었다. 산동성은 위도가 같아 기후도 비슷한 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칭다오를 많이 선택하는 이유는 거리가 가까운 점도 있었지만 이런 환경적인 부분도 많이 작용했다 보여 진다. 산동성 사람들은 공자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서인지 남아 선호사상이 매우 강하다. 또 여자들이 남자들을 대신해서 힘든 일을 다 할 정도로 생활력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남자들은 집안에서 놀고먹고 여자들이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지하철은 2016년 12월이 되어서야 개통이 되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리고 노선도 건설 중인 것까지 3개이지만 아직까지는 한 개 노선만 개통된 상태. 그래서 도심은 하루 종일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10년 전 칭다오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동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었다. 고층건물들이 경쟁하듯 늘어선 지금의 칭다오 교통상황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혼잡한 시내를 들어가려면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버스비는 2위엔(340원)으로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혼잡한 시내로 들어가려면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3개 노선이 계획된 칭다오 지하철은 아직 한 개 노선만 운행 중이다​​사드로 인한 반한감정은 상대적으로 낮아요즘 사드문제 때문에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어느 때보다 강하지만 칭다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다지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이 지역경제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하의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정부에서 지시를 내리면 무조건 따른다. 그러다 보니 한국 상품 불매운동과 한국식당 출입을 금지 때문에 현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중국인들은 사드의 실체를 잘 모른다. 사드가 설치되면 중국에 실제적인 위험이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드가 마치 공격용 무기인 것으로 잘못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중국 전역에서 반일감정이 고조된 적이 있다. 당시는 영토 문제라 지금의 사드 문제보다 더욱 격렬했다. 일본 식당에 돌을 던지고 일본차를 때려 부수는 폭력사태까지 유발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직접적인 폭력을 당할 위험에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부득이 외출을 해야 할 경우에는 ‘한국인이라고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칭다오에 있는 일본계 백화점 자스코(JASCO)는 물건을 도둑질 당했다. 그것도 중국 공안들이 버젓이 보고 있는 앞에서의 약탈이었다. 자스코는 거금 8천억이라는 손해를 봤지만 일본정부에서는 유감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번 사드사태를 보면서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펼쳐 나가는 G2국가로서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드의 본질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뒷전으로 하고 대한민국에 경제적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대국답지 못한 행동이다. ​​ 사드의 본질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뒷전으로 하고 대한민국에 경제적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대국답지 못한 행동이다. ​​칭다오 인근에 스다오(石島)라는 부두가 있다. 이곳은 우리 서해 바다의 황금어장을 노리는 중국 배들이 출항하는 곳이다. 불법으로 우리 어장을 싹쓸이 하고 대한민국의 해양경찰에게 위해를 가하는 해적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배를 쇠창살로 무장하고 흉기로 우리의 해양경찰을 위협한다. 이들 불법행위를 단속하다가 경찰관이 2명이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어느 나라 어부가 다른 나라 해양경찰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있는가? 중국 정부는 이런 일이 발생을 하면 원인을 제공한 중국 어부들의 불법행위를 단속을 해야 하지만 앵무새처럼 유감이라는 성명만 발표한다.중국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 의존도는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때 큰 타격으로 돌아 올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도 한·중간 사드와 유사한 사태가 일어날 경우 그들이 경제보복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대책을 세우고 보완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피해를 반복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장 다변화를 꾀해야만 할 때다.    글 사진  양인환(중국통신원)
오버랜더의 축제 한마당- 2017 오버랜드 엑스포 2017-06-14
​오버랜더의 축제 한마당2017 OVERLAND EXPO오버랜더를 위한 차량과 소품을 전시하고 여행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개최되는 오버랜드 엑스포는 미국 동부와 서부에서 매년 열린다.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애리조나에서 열린 2017 오버랜드 엑스포에 직접 참가했다. 멋진 캠핑카들과 그보다 더 눈부신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 우주부부(윤진영&신선아)필자 윤진영은 아내와 함께 자동차여행 중이다. 2016년 9월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캐나다, 미국을 거쳐 현재 멕시코에 이르고 있다. 중앙대학교 천체관측 동아리 ‘Cosmos’에서 처음 만나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의 별명은 ‘우주부부’(Cosmosian). 그들은 지난해 각기 직장을 퇴사한 뒤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낮에는 땅을 달리고 밤에는 별을 담으며 먼 나라 어딘가를 누비고 있다.  멕시코 칸쿤에서 2,500km를 달려 미국 국경을 넘었다. 4일이 걸렸으니 하루에 약 600km씩 운전한 셈. 무리를 해서 미국에 온 이유는 바로 ‘오버랜드 엑스포’(Overland Expo)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오버랜드(Overland)는 Over(가로지르다)와 Land(땅)의 합성어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이용해 국경을 넘나드는 장거리 여행을 뜻한다. 이러한 여행 방식을 오버랜딩(Overlanding)이라 하고, 여행자는 오버랜더(Overlander)라 부른다. 미 대륙을 여행하는 오버랜더의 99%는 북미 혹은 유럽인이다. 지금껏 우리부부 외에 동양인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러시아를 경유해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고는 있지만 육로로 다른 나라에 갈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을 감안하면 오버랜딩은 꿈같은 여행이다.오버랜더를 위한 차량과 소품을 전시하고 여행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개최되는 오버랜드 엑스포는 미국 동부와 서부에서 매년 열린다. 올해는 마침 우리의 여행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애리조나 포트터트힐 카운티공원에서 열려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개성만점 캠핑카, 오버랜더와의 만남행사장 도착 시간은 오전 12시경,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다행히 한 달 전쯤 VIP 초대권을 받아뒀기에 자리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버랜드 엑스포에서는 실제로 오버랜딩을 하고 있는 여행자에게 심사를 통해 VIP 티켓을 발부해준다. VIP에게는 모든 부대행사 참가기회와 캠핑장이 무료로 제공된다. ​​ VIP 사이트 전경. 오버랜딩 중인 여행자 중 심사를 통해 VIP 티켓을 발부해준다​이번 엑스포는 총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250개 이상의 전시 부스와 170개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었고, 다양한 푸드 트럭까지 참가해 생각했던 것보다 행사 규모가 훨씬 크고 화려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괴물 같은 거대 캠핑카들에 넋을 잃었다. 실내엔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이고 전자레인지까지 있다.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은 화려한 캠핑카가 있는 반면 앙증맞은 트레일러들도 눈길을 끈다. ​​괴물처럼 거대한 캠핑카들이 넋을 잃게 했다 괴물 캠핑카의 내부.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있다  행사장 곳곳을 세 시간 정도를 구경하고 나자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해발 2,000m의 고산지대인 데다 강렬한 애리조나의 햇살 때문이다. 푸드 트럭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푸드 코트의 이름은 오버랜드 오아시스(Overland Oasis). 메뉴는 미국답게 바비큐가 주를 이루고 있다. 뭘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맥주 트럭을 발견하곤 고민할 것 없이 맥주를 마시러 갔다. 이곳 플래그스태프 지역의 작은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맥주인데 맛이 기가 막힌다. ​​팀버리프 트레일러라는 이름의 소형 트레일러가 마음에 쏙 들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팀버리프 트레일러 대표 캐빈 몰릭입니다​​앙증맞은 트레일러들이 매력적이다​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딘가에서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중앙아메리카 여행세미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발표자는 멕시코, 파나마 등의 중미를 2년간 여행한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질문이 ‘중미는 여행하기 안전한가?’ 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안전합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현재 멕시코를 여행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말에 100% 동감한다. 우리도 6개월간 멕시코를 여행했지만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의외로 3일간 머물렀던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우리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지였다.​​​중앙아메리카 여행세미나 참가자들은 중미 여행이 안전한지 궁금해 했다​정신없이 구경하다보니 어느 순간 주변이 한산해진다. 공식 행사시간인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캠핑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텐트로 가던 중 관록이 묻어나는 차량이 있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가까이 와서 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차량 주인의 이름은 바바라. 우리와 같은 토요타 4러너로 미국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멕시코도 여행하고 싶지만 남편의 반대로 못하고 있다는 그녀에게 멕시코의 매력을 장황하게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맥주도 한잔 기울였다. 서로의 여행경험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이곳에서 만난 바바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토요타 4러너로 여행 중이었다​​다채로운 부대행사와 볼거리 다음날, 캠핑장 청소차량 소음에 눈을 떴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준비된 프로그램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되어 과자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날 가보지 못한 동편 행사장부터 방문해보니 세상에나! 한국에서는 한 대도 보기 어려운 캠퍼밴들이 오리떼 마냥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1972년식 포드 이코노라인을 개조한 차량부터 메르세데스 벤츠 스프린터까지 다양한 캠핑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코노라인, 스프린터 등 다양한 캠퍼밴을 볼 수 있었다  1972년식 포드 이코노라인 캠퍼카​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2015년식 포드 이코노라인이었다. 운전석 부분을 제외한 전체를 강화유리섬유로 제작해 무게를 대폭 줄였다고 한다. 거기다 풀타임 4WD로 개조해 어떤 오프로드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차체가 유리섬유로 구성된 2015년식 포드 이코노라인. 25만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동편 행사장에는 오프로드 드라이빙 체험공간도 있었다. 랜드로버와 BF굿리치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였다. 준비된 시승차는 물론 본인 차량으로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스 난이도가 꽤 높아 차가 뒤집어질 것 같은 아찔한 광경이 자주 연출되었다.   랜드로버가 주관하는 오프로더 체험장BF굿리치가 주관하는 오프로더 체험장  모터사이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전시장도 있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3륜 바이크들은 자동차 못지않게 화려했다. 모터사이클에 문외한인 탓에 그저 눈요기만 했지만 마니아였다면 지갑을 열기 충분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반가운 브랜드도 만났다. 바로 세나(SENA). 바이크용 블루투스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 브랜드인데 멀리 타향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행사부스 책임자인 제이는 30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 세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4년째 이 엑스포에 참가했지만 한국에서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수많은 모터사이클 여행자를 볼 수 있었다​​바이크용 블루투스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 브랜드 세나 부스에서 한국계 직원 제이를 만났다​차를 한 번 움직이면 500km는 우습게 가야하는 미국이다 보니 행사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당일치기 관람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인 만큼 행사기간 동안 묵을 수 있는 캠핑장도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차를 세워둔 VIP용 캠핑장은 가장 외진 곳에 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이트들을 지나쳐가야 했는데 이게 문제였다.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개성 있는 차를 보고 주인들과 한두 마디 나누노라면 발걸음 떼기가 쉽지 않다. ​​​랜드 크루저 커스텀 리빌딩 업체에서 전시 차량들. 값은 대개 7만 달러를 호가한다​X캠퍼의 트럭 캠퍼. 차를 제외함 캠핑 모듈 가격은 1만~2만 달러 정도 독일커플 오버랜더의 2003년식 디펜더​이날 역시 귀여운 자동차로 여행하고 있는 매기 덕분에 한 동안 발걸음이 묶였다. 그녀의 애마는 토요타 랜드크루저. 매일 괴물 같은 차들만 보다가 가녀린 체구의 랜드크루저를 보니 신선했다.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미국을 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장비 세팅이 번거로워 좁다란 트렁크에서 잠을 해결한다고 했다. 곧 캐나다로 간다는 우리의 말에 미국을 떠나기 전 포웰 호수, 그랜드 티튼, 데스벨리를 꼭 들러보라고 권했다. 여행자들의 공식 작별인사인 “Safe Travel!”을 외치며 이틀째 밤을 마무리했다. 오버랜드 엑스포 코리아를 꿈꾸며행사 마지막 날. 참가 업체들이 제각기 간단한 음식을 제공한 덕분에 행사장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무료 아침이라 하니 가벼운 주머니로 다니는 여행자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도넛부터 오믈렛, 타코까지…….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행사다.​​ 마지막 날에도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났다. 포드 F550 픽업트럭 개조차에 태극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차 주인은 40년째 여행 중이라는 웨스트콧 부부. 여행 중 지나온 나라의 국기를 붙인다는데, 한국에는 2015년 방문했다고 한다. 부부는 한국인들의 매너와 친절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우리를 무척이나 반겼다. ​​​2년 전 한국을 여행했던 웨스트콧 부부와 함께!​차에는 40년 세월의 여행 노하우가 짙게 녹아 있었다. 실내에는 샤워실, 화장실, 심지어 와인저장소까지 있었다. 올해 말 멕시코에 간다는 그들에게 지난 6개월간의 멕시코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꼭 가봐야 할 곳, 운전 매너, 경찰 피하는 법, 무료 캠핑장 등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 캘리포니아에 오면 꼭 들리라는 신신당부에 몇 번이나 알았다고 답한 뒤에야 헤어질 수 있었다. 웨스트콧 부부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행사장을 빠져 나왔다. 행사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2박 3일도 턱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키 작고 새카만 한국인 오버랜더 부부가 신기했는지 많은 이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선배 오버랜더들로부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노하우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준비하던 2012년부터 사진으로만 보던 이 행사에 직접 참가할 수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오버랜딩이 쉽지 않다. 하지만 자동차여행을 꿈꾸는 이들은 적지 않으니 언젠가 한국에서도 오버랜드 엑스포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 이번 행사에 참가한 우리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래본다.   글, 사진 윤진영(www.cosmosian.co.kr) ​  
단양에 가다 2017-06-02
봄바람 불고 볕 내리는 그 어느 날 단양에 가다 ​충주호 유람선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면서 윤선도의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가 수묵화처럼 다가온다.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눈을 뜨면 충주호의 절경이, 다시 눈을 감으면 신선들이 노닐던 풍경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아련하게 펼쳐진다. ​​​​​휴대폰이 파르르 떨며 옅은 숨을 토해내고는 곧이어 쥐어짜내듯 강도를 높여간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그야말로 미몽의 시간이다. 숙면의 끝자락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안타까운 저항은 얼마가지 못해 백기를 내걸어야 했다. 지난밤 맞춰놓은 시간은 벌써 7분이나 지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약속장소에 닿을 수 없어 갑자기 마음과 몸이 부산을 떤다.  10여 분 후 현관을 나서면서도 “늦으면 어떡하지”라는 조바심이 일었다. 총총걸음을 내딛으면서도 연신 휴대폰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적지에 내려줄 버스는 찬 공기를 가르며 이미 떠나버리고 없을 터. 새벽의 분주함도 헛품으로 남을 일이다. 무엇보다도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에 한껏 들떠 있던 기분이 씁쓸함만 남긴 채 사그라 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운전으로부터의 자유’, ‘달콤한 수면’, ‘이기적인 사색의 게으름’, ‘여행의 여유’ 등등 그 어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때 스치듯 떠오른 붉은 볕의 고장이라는 단양(丹陽). 국내 여행사들이 선보이는 소셜커머스의 그 많은 상품 중에서 “단양에 와보지 않고서는 천하절경을 논하지 말라”는 문구가 구미를 당겼다. 여기에다 ‘마음을 푹 놓고 여행을 하고 싶은 워너비 패키지족’ 등은 봄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3만원이 채 되지 않은 비용으로 충주호 뱃놀이를 즐기고 도담삼봉의 절경에 빠지며 국내 최대의 사찰이라는 구인사를 둘러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한 매력이 또 있을까. 그렇게 덜컥 예약을 해놓고 보니 출발은 이른 새벽.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려고 서두르다보니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다행스럽게도 서두른 보람이 있어 45인승 버스는 한 자리만을 남겨두고(도착 시간에 늦을 같아 취소됐다고 한다) 서울을 벗어난다. 첫 목적지 장회나루선착장까지는 잠실에서 170여km로 광주-원주 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한다. 소요 시간은 2시간 30여분. 10시 30분에만 닿으면 되기에 제법 여유가 있었다.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고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자 눈은 저절로 감기고, 새벽에 잠시 맡겨놓았던 잠의 세계를 돌려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이드가 “휴일이어서 많은 이들이 나들이 행렬에 동참했는지 교통 체증이 심하다”며 “지금 이 상태로는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이어 그는 “이렇게 되면 점심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에 미리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다. 대기시간을 줄여야 한다”며 식당 연락처를 알려주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유람선이 출항(1시간 30분 간격)을 10여 분도 채 남기지 않은 시간이 되어서야 버스는 장회나루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2시간 이상이 늦었으니, 일정 전체가 차질을 빚을까봐 가이드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나보다. 옆 좌석의 한 여행자가 “요즘은 여행객들이 더 잘하고 시간과 질서를 잘 지키기에 가이드도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며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니 의욕 넘치는 초보인 듯하다”며 오랜 여행으로 쌓은 경험을 말해준다. ​ ​2시간 연착으로 출항 10분 전에 버스가 도착한 까닭에 가이드가 조바심을 부렸다​바닥에 발을 딛자 근질근질하던 몸이 한껏 기지개를 켠다. 하늘은 맑았고, 5월의 산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단양 8경의 하나라는 구담봉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왔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의 끝에 이르자 유람선이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3층으로 설계된 유람선에 올랐다. 1, 2층은 쾌적한 실내에서 미끄러지듯 나가는 잔잔함을 맛볼 수 있고, 문을 열고 나가 난간에 기대면 귀밑머리를 스치듯 지나는 바람의 손결에 충주호 주변의 경치가 느릿한 파노라마의 잔상으로 따라붙는다. 선장의 구수한 입담에 여행객들은 시종 웃음과 미소로 여독을 털어낸다. 반면 사방이 탁 트여 햇살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3층은 충주호의 절경과 봄날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구담봉. 단양8경 중 하나다 ​배 안 간이매점에서 산 맥주를 한 모금을 들이키니 목젖을 타고 건너오는 짜릿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면서 윤선도의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가 수묵화처럼 다가온다.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눈을 뜨면 충주호의 절경이, 다시 눈을 감으면 신선들이 노닐던 풍경이 씨줄과 날줄이 오가는 것처럼 아련하게 펼쳐진다. 얼마가지 않아 왼쪽으로 희고 푸른 바위들이 우뚝 솟아올라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돌기둥처럼 생긴 석봉들은 비가 갠 후 옥과 같이 푸르고 흰 대나무 순이 돋아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옥순봉이라 불린다. 이 주변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는데, 옥순대교에서 구담봉 방향으로 올라가면 병풍을 접은 것과 같고, 반대로 하류로 내려오면 병풍을 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유람선 3층에서 바라본 충주호의 절경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화가들이 가만 둘 리 없는 법. 조선 명종 때의 황준량은 일엽편주가 옥순봉을 지나는 모습을 보고 “조각배에 탄 사람이 병풍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단원 김홍도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는 실경산수의 화법으로 ‘옥순봉도’를 그려 1796년에 제작된 ‘병진년화첩’에 남겼다. 엄치욱, 이운영 등 많은 고금의 화가들이 신비스러운 옥순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비가 갠 후에 푸른 옥처럼 푸르고 대나무순이 돋아난 것처럼 보인다는 옥순봉 ​ 40여 분을 항해한 후 청풍선착장에서 10여 분 정박한 유람선이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오자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섰다. 미리 주문한 마늘더덕구이가 한상 차려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가이드는 또다시 재촉이다. 20분에 식사를 마쳐야 다음 일정이 수월하다고.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손꼽히는 도담삼봉은 푸른 강물 위에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이중 가운데 봉우리(중봉)가 가장 높고, 남과 북에 낮은 봉우리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중봉은 장군 같은 늠름한 모습이고, 남봉은 교태 어린 여인을 닮아 첩봉 또는 딸봉이라 불린다. 이를 외면하는 듯 홀로 서 있는 북봉은 처봉 혹은 아들봉이라 이름지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저녁노을로 아름답게 물든 도담삼봉을 보고 그 빼어난 경치를 이렇게 노래했다.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에는 저녁노을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은 푸른 절벽에 기대어 자고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진다 ​  도담봉은 단양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손꼽힌다 ​​​아쉬 남긴 구인사와의 짧은 만남단양군 소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한불교 천태종 본산 구인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966년에 창건되어 현재에 이르렀으니 역사는 겨우 50여 년. 세월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며 숙연함이 감돌게 하던 여느 유명 사찰에 비해 청년의 활기찬 기운이 감돈다고 할까. ​​소백산자락에 자리잡은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1966년 창건된 구인사는 고색창연한 여느 사찰과 달리 청년의 활기찬 기운이 감돈다.​​소백산구인사라는 현판이 내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천왕문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웅장하다. 이어지는 대법당과 목조강당인 광명당, 사천왕문과 국내 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 걸음을 떼고 눈길을 줄 때마다 감탄사가 저절로 인다. ​​​ 1 소백산구인사라는 현판이 걸린 구인사 일주문  2 일주문을 지나면 웅장한 천왕문이 나타난다 3 구인사 박물관 입구 4 구인사 박물관​​​단청과 연등이 산에 만발한 꽃들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거기다 단청과 연등, 그리고 산에 만발한 꽃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봄날의 향연이 마치 선계와의 경계를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구인사에서 주어진 시간은 1시간여 남짓. 더 이상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자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안녕, 구인사. 다시 오마, 단양이여!​​​​​구인사충북 단양군 소백산의 구봉팔문 중 제4봉인 수리봉 아래에 자리잡은 구인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본산이다. 1966년 창건됐으나 천태종의 개조인 상월조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46년이었다고. 첫 번째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자리에 지어진 대법당을 비롯해 목조강당인 광명당, 사천왕문과 국내 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이 있으며 50여 동의 건물에 동시 수용인원이 5만 6,000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수리봉 정상에는 상월선사의 묘가 있는데 이는 화장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 불교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상월선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이 자리를 잡아놓았다고 한다. 이 절은 특히 치병에 영험이 있다고 하여 매일같이 수백 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관음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글,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중국 제일의 위용 자랑하는 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 2017-05-16
중국 제일의 위용 자랑하는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황과수폭포는 중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제일 큰 폭포로서 짐바브웨의 엔젤폭포, 아르헨티나의 이과수폭포,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구이저우 통런에서 구이양을 거쳐 황과수폭포로 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그러나 폭포와 주변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웠고, 이곳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대단한 호의적이었다.    중국 남부의 구이저우(貴州: 귀주)성은 중국에서도 좀 특별한 곳이다. 중국에는 한족과 더불어 55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39개의 소수민족이 구이저우에 살고 있다. 필자는 중국 제품을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가끔 중국 업체에 한국 물건을 파는 일도 한다. 지난겨울 거래처에 새로운 물건을 보여주고 상담을 하기 위해 구이저우에 있는 통런(銅仁: 동인)에 들렀다. 통런에서 일을 마치고 구이양(贵阳: 귀양)을 거쳐 광저우로 갈 계획이었는데 거래처 사장이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중국에서 제일 큰 폭포를 구경하고 가라”며 안내를 해주었다. 구이양 인근에는 중국에서 제일 큰 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 황궈수푸부)가 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구이양을 거쳐 황과수폭포를 가보기로 했다.​​중국 최고의 명주로 치는 마오타이(茅台)는 구이저우에서 생산된다​구이저우에는 39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통런에서 고속철을 타고 구이양역에 내리니 마침 여행 안내소가 있다. 거래처 사장은 출발하기 전 구이양에서 버스를 타고 안순으로 간 후 그곳에서 황과수폭포를 가는 차를 이용하라고 일러주었다. 구이양에서 안순까지 2시간, 그리고 안순에서 황과수까지 1시간 반이 걸리니 총 3시간 반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렇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과 이동 거리 등을 감안하면 대략 5시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구이양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반이었으니 당일치기로 구경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하룻밤을 황과수폭포 인근에서 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행 안내소에서 “1시간 20분 안에 황과수폭포 매표소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100위안(약 1만7,000원)에…….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일치기로 황과수폭포를 다녀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여행용 가방을 물품 보관소에 맡기고 여행 안내소의 여자를 따라 나섰다. ​​​구이양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매의 눈으로 고객을 찾고 있는 호객꾼들. 중국의 역이나 버스터미널은 이들의 천국이다​​호객꾼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는? 그렇지만 여기서부터 고행길이 시작되었다. 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으슥한 골목에 빵차(소형 승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필자가 타고 나니 7인승의 빵차에 승객들이 모두 찼다. 내가 차에 탄 후 안내를 해준 여자와 운전기사가 한동안 실랑이를 하더니 돈을 주고받는다. 한마디로 나를 운전기사한테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에는 이런 식으로 호객꾼들이 고객을 모으고 운전기사와 흥정을 해서 돈을 받고 사람을 넘기는 것이 일상사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대로 황과수까지만 가면 된다고 여겼다. 운전기사가 고속도로를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늘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갈 때 조그마한 승합차에 합승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부분 호객꾼들에 의해 안내된다​승합차가 30여 분을 달리는가 싶더니 고속도로를 내려와 허름한 마을로 들어선다. 그리곤 승객들에게 모두 내리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운전기사가 우릴 다른 차의 운전자에게 인계한다. 그리고 보니 빵차를 같이 타고 온 승객들은 목적지가 모두 다르다. 이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승객들을 정리해서 그쪽으로 가는 차량으로 배정했다. 여기에서도 운전기사들끼리 흥정이 오간다. 주는 사람은 덜 주겠다고 버티고 받는 사람은 더 받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고……. 한참 실랑이를 하더니 우리를 태우고 갈 운전기사가 짐을 들고 고속도로 위로 올라가라고 한다. 차가 고속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 고속도로에 닿았다. 우리가 서 있는 갓길 옆으로 씽씽 소리를 내며 차들이 지나간다. 약 300m를 더 걸어가니 빵차가 한 대 서 있다. 그런데 승객이 어린 아이를 포함해서 9명, 운전기사까지 포함하면 총 10명이다. 빵차라는 것이 우리로 치면 다마스 정도의 경승합차인데 여기에 10명이 탔으니 보통 비좁은 게 아니다. 2열에는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하나 더 놓았고 한 열에 4명이 앉으니 문을 닫기가 힘들 지경이다. 마지막 열에도 가뜩이나 좁은 좌석에 4명이 앉으니 발을 뻗을 공간이 전혀 없다. 그래도 운전기사는 사람을 많이 태워서 기분이 좋은지 신나게 달린다. 빵차에는 별도의 트렁크가 없다. 어느 누군가 닭을 사가지고 가는지 바로 뒤에서 닭이 발톱으로 좌석을 박박 긁어댄다. 답답하고 괴로운 모양이다. 2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닭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차를 바꿔 타기 위해 고속도로에 오르고 있다​고속도로 갓길로 300m를 더 걸어가서야 차를 탈 수 있었다​​많은 승객 때문에 고속도로 갓길에서 오른쪽 문을 열지 못하고 왼쪽 문으로 타고 내리는 위험한 모습​10명을 태우고 달리는 빵차가 너무 빨라 겁이 덜컥 났다. 빵차는 불법으로 영업을 하는 차이므로 사고가 나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 잘못하면 황천길로 바로 갈 수도 있고 사고가 나도 치료비 한 푼 못 받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린다. 그런 상황에서 큰 교통사고까지 목격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빵차를 계속 타고 가는 것이 더욱 불안해서 좌불안석인 상황. 그렇다고 고속도로에 그냥 내릴 수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함이 계속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중국 승객들은 모두들 무표정하다. 한 시간 넘게 가면서 다리를 뻗을 수 없으니 다리에 감각이 없다. 다행히 중간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 바람에 차에서 내려 다리를 한 번 뻗을 수 있었다. 또 중간에 아이를 동행한 한 가족이 내려서 그나마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원래는 1시간 20분이면 도착한다는 황과수가 2시간 가까이 달렸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차를 갈아타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애초에 황과수까지 그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황과수란 표지판이 보이는데도 운전기사는 모른 체하고 그냥 달린다. 내가 “황과수가 여기 아니냐?”고 했더니 머리를 긁으며 “저 앞에 내려주겠다”고 한다. 나 참,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을까? 구이양역에서 만난 호객꾼은 황과수폭포 매표소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런 차들은 고속도로에서 사람을 태우고 고속도로 위에 내려주는 게 보통의 영업방식이다.고속도로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다리 밑으로 연결된 경사 길을 따라 내려오니 마을이 나온다. 그런데 지나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다. 택시라도 보이면 타고 가겠는데 그 흔한 택시도 안 보인다. 때마침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있어 세웠다. 황과수를 가자고 하니 10위안(약 1,700원)을 달라고 한다. 원래 오토바이로 영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지역 주민이었다.​엄청난 규모에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황과수폭포는 중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제일 큰 폭포다. 짐바브웨의 엔젤폭포, 아르헨티나의 이과수폭포,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규모가 크다. 구이양까지 와서 그곳을 보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황과수는 여름에 찾아야 제대로 된 폭포의 위용을 볼 있다. 여름에는 수량이 많아서 폭포가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관광객은 여름에 황과수를 찾는다. ​​​ 황과수 도우포탕폭포(陡坡塘瀑布)​매표소에서 표를 샀다. 황과수는 3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표 한 장으로 모두 돌아볼 수 있다. 또한 이 표로 이틀 동안 관람이 가능해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 구이양역에서 황과수폭포까지 1시간 20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고 했지만 중간에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기사들끼리 흥정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허비해 실제로 황과수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그래도 부지런히 돌면 마감시간인 6시까지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황과수의 규모가 컸다.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하더라도 반나절 만에 다 돌아보기엔 무리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계획을 변경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황과수 디이수이탄폭포(滴水滩瀑布) 높은 산악지형이 길고 긴 계곡을 만들어낸다​​ 황과수는 평균 해발 900m에 이르는 첩첩산중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며 황과수 안에 18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있다. 그중에서 제일 큰 황과수 대폭포는 높이 77m, 폭 101m에 달한다. 폭포 주위를 황과수 나무가 덮고 있어 황과수폭포라 불린다고.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보아왔던 폭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폭포가 크기도 하거니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물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은 듯하다. 겨울이라 수량이 많이 줄었음에도 웅장한 모습인데 물이 많은 여름에는 더욱 장관일 듯하다. 황과수폭포를 제대로 보려면 물이 많은 여름에 와야 하지만 성수기에는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깊고 큰 산이 많아 크고 작은 폭포가 무수히 많다​구이저우는 대부분 해발 900m가 넘는 산악지형이다​​겨울이라 관광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혼잡하지 않아 구경을 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중국 인들은 물론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다만 겨울에는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기념품을 파는 매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여름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리지만 물이 줄어드는 겨울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관광객이 없는 탓에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그런데 폭포 주위에 손오공과 삼장법사 등 손오공의 흔적이 있다. 손오공은 명나라 때 쓰여진 ‘서유기’의 주인공이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만나 인도까지 그를 호위하게 되는데 황과수가 그들이 지나갔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폭포 주변 곳곳에서 손오공과 삼장법사, 저팔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손오공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 나오는 상상의 원숭이가 아니던가.​​​손오공 일행이 황과수를 지나갔다고 한다​​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원정​ 황과수는 거대한 폭포와 함께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가지고 있어 웨딩 사진을 찍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폭포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러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 있었다. 요즘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진 중국인들은 결혼식을 하기 전에 많은 이벤트를 하는 것이 유행이다.​​​황과수는 폭포와 주변 풍광이 수려해 웨딩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이곳 주민의 70% 이상이 소수민족첫째 날 황과수를 대충이라도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6시가 채 되기도 전에 어둠이 몰려들었다. 산에 둘러싸여 해가 빨리 지기 때문이다. 서둘러 폭포 지역을 빠져 나왔다. 6시가 막차인 셔틀 버스를 타고 공원에서 입구까지 왔다. 이곳은 폭포를 보기 위해 찾는 관광객들이 뿌리고 가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공원 내를 관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한다. 이들은 70% 이상이 소수민족이다. 소수민족들의 삶은 한족들과는 크게 다르다. 한족은 중국 경제 성장의 과실을 많이 누리고 있지만 산중에 사는 소수민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농사를 짓고 산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느 민족이냐?”고 물어보면 처음 들어보는 민족이 태반이다. 구이저우성에는 좡족(壯族: 장족)이 제일 많지만 이들 외에도 38개의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언어와 생활 풍습이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구이저우는 중국 소수민족의 터전이나 다름없다.​황과수 관광단지 내에 있는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여름에는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방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몰리지만 겨울에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방값이 하룻밤에 238위안(약 4만원)으로 여름에 비해 반값도 되지 않는다. 겨울에 오면 이런 장점도 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혼잡하지 않을뿐더러 바가지요금 때문에 머리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단점도 있다. 황과수가 있는 중국의 남방 지역은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기후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은 겨울에 대단히 고통스럽다. 호텔에 있는 에어컨 온도를 높여 히터처럼 사용할 수 있지만 난방 효과가 미미하고 공기를 탁하게 만들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퉁퉁 붓는다. 히터를 사용하지 않고 잠을 자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게다가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호텔 단지의 저녁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저녁부터 해가 뜨는 아침까지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마치 무인도에 갇힌 듯한 신세다. 인터넷이라도 잘 되면 웹서핑이라도 하겠지만 자주 끊기는 통신망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거의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웠다.​​황과수는 겨울에는 관광객이 없어 저렴한 비용에 호텔에 묵을 수 있다​겨울에는 황과수 관광단지가 썰렁하다​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고 사진으로 남길 심산이었다. 호텔 단지에서 폭포 입구까지 무료 셔틀 버스가 운행되지만 버스 정류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이라 관광객이 없는 탓이다. 허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나밖에 없었다. 그나마 버스 정류장 옆에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공원으로 가자고 했다. 공원 입구까지 가는 길은 험준한 산을 수없이 넘어야 했다. 주위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개가 아스라이 낀 산등성이에 마을이 듬성듬성 보인다.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집들이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마을. 구이저우에는 39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구이저우에서 소수민족이 참 많이 만났다. 생김새로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입고 있는 복장과 휴대품을 보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들은 예전의 우리처럼 포대기를 이용해서 아이를 업고 다녀 멀리서도 티가 난다.​ ​​이곳 사람들은 아기를 포대기를 이용해 업고 다닌다. 대신 안짱다리를 방지하기 위해 아기의 다리를 쭉 펴게 해서 업는다​​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의 삶은 상당히 고달프다. 중국은 한족이 지배하는 나라다. 물론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이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의 중심부로 나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때문에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친다. 이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변방에 살고 있다. 만주족이나 조선족은 동북에, 몽고족은 내몽고, 위구르족은 신장,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은 구이저우와 광시성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이야 소수민족들이 중국의 외곽에만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민족들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외곽의 집단 거주지에 있지 않고 중국 중앙부에 있던 소수민족들은 민족적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 한족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황과수 주민의 70%는 소수민족들이다. 이들은 중국의 발전 혜택을 별로 누리지 못하고 산다​​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자태원래 아침 7시부터 공원 문을 연다고 했으나 관람객이 없는 탓인지 관리원이 보이지 않는다. 20여 분을 기다린 끝에 공원 안으로 입장을 할 수 있었다. 산 위쪽에서 시작된 폭포는 물길을 따라 계속 흐르면서 크고 작은 폭포를 만들어낸다. 물길을 따라 난 계곡은 수억 년 동안 깎이고 패여서 기기묘묘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아마존의 정글 같은 밀림이 있는가 하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자태로 다듬어진 암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산의 모습을 보면 인근의 광시성 구이린(桂林: 계림)처럼 카르스트 지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이저우성에서부터 광시성에 이르는 수백 킬로미터 지역이 수억 년 전에는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때론 아마존 같은 풍경도 보인다​기암괴석들이 방문자의 발길을 가로막는다​​폭포도 장관이지만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곡으로는 길이 여러 갈레로 나 있어서 잘못하면 계속 같은 길을 쳇바퀴 돌듯 한 지역만 헛돌게 된다. 아무도 없는 공원 안에는 인근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아침부터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 폭포는 규모가 꽤나 크다. 이틀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돌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다.​​수억 년에 이르는 풍화작용이 절경을 만들어낸다비가 온 날이라 주위 풍경이 서시의 마음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출구를 통해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또 돈을 받고 다른 기사한테 날 팔아넘긴다. 중국에서는 어딜 가나 이런 식이다. 의도하지 않게 종종, 그리고 자연스럽게 팔려 다니는 신세가 된다. 황과수 마을로 돌아와 안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황과수에서 구이양까지 직접 가려고 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편밖에 없다고 한다. 여름에는 여러 편이 있지만 겨울에는 딱 한 편, 그것도 오후에만 있다고 한다.안순 버스터미널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작년에 들렀던 계림과 음식 맛이 비슷하다.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한족과 달리 매콤하고 쌉쌀한 맛을 선호한다. 음식에 고추와 마늘을 많이 사용한 것이 이곳 음식의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의 입에도 거부감이 없다.구이양역에 도착해서 맡겨놓은 짐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역 구조가 특이해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나가는 출구가 없다. 검색대에서 보안검사를 하는 직원에게 출구를 찾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본다. 내 중국어 발음이 좀 특이하게 들린 모양이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오, 한국인” 하며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그러더니 부하 한 명을 불러 “이분을 짐 찾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명령했다. 원래는 나갈 수 없는 문이었는데 보안요원이 동행한 덕에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었다면 복잡한 길을 찾아 한참동안 헤맸을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는 한국인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아 반가운 마음에 호의를 베푼 듯하다. 대도시에서는 사드 배치로 인해 한국에 대한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지만 구이저우에서 만난 많은 중국인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에게 대단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비록 매번 호객꾼들에게 팔려 다닌 신세였지만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밀양에서의 1박 2일 2017-05-04
하룻밤 뒤에 찾아온 치명적인 매력밀양에서의 1박 2일서울에서 4시간 30분이면 닿는 이 조그만 도시는 처음에는 너무나 평범해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에는 곳곳의 치명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재약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표충사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고 있었고, 오래된 다리를 보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밀양강의 물안개를 살짝 머금은 영남루에서는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영남루에서 내려다 본 밀양​  바람이 출렁거리자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야 얼굴을 내민 꽃잎이 파르르 떤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헐벗은 모습에서 가벼운 초록의 차림으로 바뀌어간다. 거기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가 봄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드는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다.볕이 가득한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밀양(密陽)도 어느새 봄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에는 유채가 노랗게 화사함을 뽐내고, 이에 화들짝 놀라듯 벚꽃이 앞을 다퉈 피었다. 바람은 간지러웠다. 서울에서 4시간 30분이면 닿는 이 조그만 도시는 너무나 평범해서 처음에는 매력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에는 곳곳에서 찾은 밀양의 치명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남 알프스가 시작되는 곳밀양에서의 첫 추억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후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 탄 열차는 긴장한 신병들을 싣고 위쪽으로 더디게만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에구, 이러다가 전방(그때나 지금이나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은 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 듯)에 배치받는 것은 아닐까? 아니 뭐 걱정이 사실로 바뀌고 있네”라며 거의 반포기를 하자 한숨이 절로 일었다. 먼저 군에 가서 전방에 있던 친구들의 모습도 오버랩됐다.몇 시간이 지났을까. 수십여 차례(그렇게 느낀 것이겠지만) 객차와 객차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철커덩!’ 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앞으로 2년 넘게 보낼 곳이 이곳부터 시작인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기적처럼 열차는 다시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위쪽으로 올라갈 때는 그렇게 더디었건만 이번에는 미끄러지듯 신이 났다. 기차에 오른 지 11시간쯤 되었을 무렵 열차에는 10여 명이 채 남아 있지 않았고, 호송병은 크게 인심을 쓰듯 “내려서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사제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다시 탑승하라”고 했다.어찌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는 희미해져서 빛이 바랜 추억의 그 장소가 바로 밀양의 삼랑진(역)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통화를 마치고 그곳에서 먹은 한 끼의 식사가 바로 ‘돼지국밥’이었다. 사실 맛에 대한 기억은 없다. 허겁지겁 끼니를 때웠을 것이라는 생각 뿐. 그 이후 밀양을, 삼랑진을 찾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인연의 끈을 그렇게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밀양의 소문난 맛집 ‘우시장 돼지국밥’ 앞에 차가 멈춘다. 아마도 우시장이 근처에 있어서 지은 이름인 듯한데 소시장에서 돼지국밥을 판다는 게 재미있다. 반찬은 정결하고 국밥은 깔끔하면서도 맛이 깊었다. 이곳이 밀양의 맛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비결은 바로 가마솥에 있다. 두꺼운 가마솥에 재료를 넣고 장작불로 은은하게 고아서 우려낸 맛이 일품이라고. 얇게 저며 낸 수육도 ‘찰지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쫀득했다.  밀양의 명물 우시장 돼지국밥과 수육우시장 돼지국밥은 가마솥에 재료를 넣고 장작불로 푹 고아낸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인 여정을 위해 한걸음 더 내딛는다. 차에 오르자 밀양을 소개하는 문성남 해설사가 입담을 과시한다. 이웃 합천에서 밀양으로 시집을 와 20여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녀는 ‘밀양’의 매력을 하나 둘 끄집어 내놓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녀의 구성진 ‘밀양 아리랑’ 가락이 귓가를 떠돌고, 도도하게 흐르는 ‘밀양강’의 멋진 풍광에 탄성이 절로 인다.밀양 여행의 첫 목적지인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헐벗은 나무들이 산등성이를 빼곡하게 수놓은 곳을 지날 때쯤 각종 농원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5월 초에야 꽃을 피우는 사과나무 과수원들이다. 문 해설사는 “얼음골 사과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등지로 수출을 하고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로 맛과 당도가 뛰어나다”며 “씨가 있는 부분에 꿀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에서 사과나무 과수원을 하는 농가가 1,000여 세대가 넘는다고. 케이블카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낳은 산물이다. ‘얼마나 더 편하게 자연으로 들어갈까, 그리고 자연과 호흡할까’라는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듯 얼음골 케이블카는 순식간에 관광객들을 영남알프스가 한눈에 보이는 하늘정원에 내려놓는다. 국내 최장거리의 왕복식 케이블카로 선로 길이가 1.8km에 달하며 상부의 높이는 해발 1,020m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케이블카로 정상에 오르면 영남알프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 산들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녹산대에서는 왼쪽의 천왕산과 재약산 앞의 백호바위를 중심으로 한 백운산 등을 볼 수 있다. 백호바위의 웅장한 모습에 “아~” 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인다. 또한 하늘사랑길은 상부승강장에서 전망대까지 280m에 걸쳐 이어지는 데크로드로, 넓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산들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하지만 이날 하늘은 잿빛을 머금은 데다 간간히 빗방울을 뿌려대고 있어 원하던 풍경을 보진 못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알아차린 듯 밀양시의 투어 담당 김영근 계장이 케이블카의 하부 승강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시례호박소’로 안내한다. 원래의 투어 일정에는 없는 곳이었지만 불순한 날씨로 하늘정원에서의 시간이 단축되었기에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란다. 시례호박소로 가는 길은 제법 운치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백운산에서 발원한 계곡을 거느렸고, 왼쪽에는 백련사라는 조그만 절집에서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김 계장은 “여름이면 이 계곡 전체가 시꺼멓게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며 “그만큼 물이 찬 것은 물론 경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자랑에 여념이 없다. 호박소는 주차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다.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연못)를 이룬 곳인데, 모양이 마치 절구의 호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성남 해설사는 “호박소에 실을 넣으면 동해바다에서 나타날 정도로 깊이와 물길을 알 수 없다”고 그럴듯하게 전설 한 자락을 깔았다.  시례호박소로 가는 길에 있는 백련사 밀양 8경 중 하나인 시례호박소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는 가운데 도래재를 넘어 표충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흔하디흔하던 사과나무 과수원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추나무와 표고버섯 등을 재배하는 농장이 즐비하다. 밀양의 대추는 전국 생산량의 20%에 이르며 매년 10월 중순에 ‘밀양대추축제’가 열린다.  1,108m 재약산 기슭에 자리잡은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시키고 성현들을 제사지내는 표충서원이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찰로 꼽힌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헌종 5년(1839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과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을 이곳에 모시면서 절 이름을 표충사로 했다고.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만일루 앞마당에 있는 보물 제467호 ‘삼층석탑’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여기서는 밀양 8경 중 하나인 ‘표충사 사계(3경)’와 사자평으로 이름을 얻고 있는 ‘재약산 억새(8경)’가 자랑이지만 사계 중 ‘이른 봄’을 만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재약산 기슭에 자리한 표충사표충사의 사천왕문표충사의 경내 모습  보물 467호로 지정된 표충사 3층석탑  ​표충사 범종루의 모습​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밀양과 이웃한 곳을 이어주는 5개의 다리가 있는 강변에서 일몰이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는 기분이 묘하다. 불과 몇 해 전에 개통된 낙동대교와 삼랑진교, 그리고 이제는 역할을 다해 레저용으로 사용하는 구 낙동철교, 1905년 개통해 철교로 사용하다 지금은 승용차나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한 낙동인도교(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다리와 비슷하다) 등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일까? 해가 저문 듯 발밑에서부터 점점 먹빛이 짙어진다.   이젠 새로운 다리에 역할을 넘겨준 구 낙동철교​은근하게 비치는 스카프를 두른 것처럼 밀양강의 물안개를 살짝 머금은 영남루. 이곳의 야경은 과연 밀양이 ‘엄지 척’ 하고 으뜸으로 내세울 만하다. 그러나 빛을 그대로 담은 대낮이나 어둠이 깔린 야간이나 영남루는 언제나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경관이 빼어나다. 이곳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공을 넘나들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 영남루의 야경을 머금은 밀양 아리랑비석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영남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 있노라니 옛사람들의 정취가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쓴 시를 낭송하면서 그 기운에 취하고, 빼어난 문장에 넋을 놓고, 때론 농이 섞인 문장에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곤 했으리라. 때론 거문고를 튕기고 가야금을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리저리 술잔을 돌렸을 터. 상상만으로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남루의 매력에 빠져든다.  무봉사로 올라가는 길 무봉사에서 내려다 본 밀양의 전경​경내 북쪽에는 단군을 비롯한 나라를 세운 8왕조의 위패를 모셔놓은 천진궁이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나오는 구조가 특이한데, 그 이유는 입구와 출구를 따로 두었기 때문이다. 영남루 아래 죽림에 자리해 아랑의 슬픈 얘기를 간직한 아랑사, 영남루와 밀양강이 어우러져 멋진 운치를 자랑하는 무봉사를 오가며 하루를 보내다보니 밀양에서의 1박 2일이 짧기만 하다. 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꽃이 만개한 삼문동 벚꽃터널  밀양한천밀양한천은 밀양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한천(우뭇가사리 등을 고아 만든 식품)을 제조하는 회사로 이곳에서 운영하는 한천테마파크는 박물관과 각종 체험 프로그램, 레스토랑과 판매장, 한천송덕비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마련해놓았다.     박물관에서는 한천의 역사와 변천과정 등의 정보와 영상, 생산에 필요한 도구 등을 볼 수 있고 레스토랑에서는 한천을 활용한 비빔밥과 돈가스, 우동 등을 내놓는다. 판매장에 들러 다양한 물건도 구입할 수 있다. 한천을 이용한 젤리나 푸딩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은 평일에는 사전 예약, 주말에는 현장접수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밀양한천 1577-6526    
시티투어버스로 즐긴 알찬 하루 - 부산 2017-04-06
시티투어버스로 즐긴 알찬 하루부 산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의 첫 차는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한다. 정차하는 곳만 14곳인 부산역-해운대를 운행하는 ‘레드라인’이다. 이 노선을 타면 오륙도가 종착지인 ‘그린라인’과 해운대-용궁사의 ‘블루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만5,000원이지만 당일 KTX 영수증이 있으면 2,000원을 할인해준다.   금련산청소년수련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야경  살랑살랑하던 바람이, 나긋나긋하던 바람이 심통을 부리듯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코트 깃을 다시 올려 세우고 어깨를 잔뜩 오그라뜨렸다.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듯 세상은 차가운 침묵이었다. 봄의 문턱을 넘기가 그만큼 어려운 걸까. 바깥은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꽃샘추위는 한겨울보다 더 매서웠다.귓불을 살살 어루만지는 봄바람이 그리워질 즈음 부산의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업계에서 알게 돼 20여 년의 시간 동안 정을 쌓아 이제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 약간의 취기가 묻어나며 “니, 요즘 어찌 지내는데?”라는 구수한 사투리에 “뭘, 그렇지. 근데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라고 답한다. “OO형이랑 있다 아이가. 둘이 술 한 잔 하다가 니 얘기하다 보니 목소리도 듣고 보고 싶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언제 올끼고?”라는 말이 묘한 끌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부산과의 아련한 추억이 스쳐간다. 부산 인근에서의 군대생활이 부산병무청과도 연결되어 있어 군인일 때 처음으로 부산을 찾았던 것 같다. 제대를 한 이후에도 기분에 따라 밤 열차에 몸을 실어 태종대로, 자갈치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던 때가 몇 번이었던지. 따듯하게 속삭이는 바람을 부산에서는 서울보다 앞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형! 수일 내로 시간을 낼게. 술은 적당히 마시고 그만 들어가.”얼굴 보고 술 마시고, 그렇게 수다를 안주로 곁들인 후 이름도 기억할 수 없을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귀경하는 일정이라면 너무 구태의연하다. 그를 만나고 부산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 끝에 ‘부산시티투어코스’를 떠올렸다. 아침 일찍 서두르면 부산의 명소 대부분을 둘러볼 수 있는데다 야경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야경 투어버스 타고 부산의 밤 감상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의 첫 차는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한다. 이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6시 이전에 나서서 KTX를 타야 한다. 시간을 더 늦출 경우 투어는 ‘버스 타고 부산 한 바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오후에 도착해 야경을 보고 하룻밤을 잔 다음 ‘시티투어코스’로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이튿날 오후 6시 38분. KTX 부산행 열차는 종착지인 부산역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마치 처음 방문한 것처럼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어둠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도시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야경 투어버스는 정류장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는데 이미 10여 명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부산역 앞의 모습지붕을 연 2층버스를 타고 시티투어 코스 출발~  하루 한 번만 운행하는 이 버스는 저녁 7시에 부산역을 떠나 부산대교를 건너 영도로 들어선다. 안내방송을 통해 영도의 유래(절영도라고 불렸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영도로 바뀌었다)를 들려줘 귀가 쫑긋해진다. 영도에 들어선 지 채 5분이 지났을까. 버스는 어느새 부산시 남구와 연결되는 부산항대교로 올라선다. 총 연장 약 3.3km에 달하는 이 다리는 최대 상판의 높이가 60m나 되는데 부산항에 입출항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나 크루즈선이 통과하기 위해 이렇게 높게 설계했다고 한다. 램프 길이가 짧은 영도구에서는 진입하기에 어려워 진입 램프를 나선형 구조로 설계,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라고.   부산항대교를 건너가는 모습​​ 부산의 부두와 밤거리를 거침없이 내달은 버스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멈춘다. 10여 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는 광안대교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시티투어 버스는 다시 마린시티와 해운대해수욕장을 거쳐 광안대교를 지나 금련산청소년수련원의 전망대로 향한다. 오르는 길은 제법 거칠다. 도로의 폭이 좁고 오르막이어서 마주하는 차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전망대에 닿으면 광안대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마린시티의 웅장한 불빛이 부산의 밤을 황홀하게 밝히고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의 풍경광안대교 너머로 마린시티가 보인다저 멀리 유람선 티파니호가 정박하고 있다​​티켓 하나로 3개 노선 모두 즐길 수 있어이튿날, 2층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부산역 시티투어 코스 정류장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정차하는 곳만 14곳이나 되는 부산역-해운대를 운행하는 ‘레드라인’이다. 이 노선을 타면 오륙도가 종착지인 ‘그린라인’과 해운대-용궁사의 ‘블루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만5,000원이지만 당일 KTX 영수증이 있으면 2,000원을 할인해준다.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는 외국인 지붕이 열린 2층에 자리를 잡자 전날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하늘은 열려 있고 온기를 조금 머금은 바람이 싫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서 부서진다. 영도대교를 넘어 부산항대교를 타고 버스가 첫 번째 멈춘 곳은 UN기념공원. 목적지로 정하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쳤지만 이곳은 세계 유일의 UN군 묘지라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해 4월 완공했다고. 이후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의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했고, 1959년 11월 UN과의 협정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린라인’으로 환승하니 오륙도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곳의 명물은 스카이워크. 35m 해안절벽 위에 철제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유리판 24개를 말발굽 모양으로 15m를 이어 놓았다. 바닥은 12mm 유리판 4장에 방탄필름을 붙여 특수 제작한 두께 55.49mm의 고하중 유리라지만 발아래 투명유리를 통해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모습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앞바다는 시시때때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색상이 펼쳐진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를 가까이 볼 수 있지만 오늘은 그쪽 하늘이 맑지 않은 모양이다.​​아찔한 스카이워크의 모습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오륙도​​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는 스카이워크​오륙도와 더 가까워지려 계단을 내려가자 바다와 바위가 만나는 곳에서 꾼들의 낚시가 한창이다. 해녀들이 인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전복과 해삼, 멍게들을 좌판에 깔기 시작하자 슬슬 사람이 모여든다. 신선한 해산물에 술 생각이 절로 일었지만 갈 길이 멀어 아쉬움을 남기며 다시 용호만으로 돌아왔다. ​​쌀쌀한 날씨에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금관해녀들이 좌판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는 관광객들​​​20여 분 정도를 기다리자 ‘레드라인’의 2층버스가 들어온다. 환승할 수 있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해동용궁사 노선인 ‘블루라인’에 몸을 실어 달맞이 고개와 송정해수욕장을 그냥 통과했다. 다음에 올 차가 2대밖에 남지 않아 하차할 경우 해동용궁사를 둘러볼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 같아서다. 1376년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한국 3대 관음성지로 불린다. 바다와 용과 관음대불이 조화를 이루어 그 어느 곳보다 신앙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곳이라 하여,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누구나 꼭 현몽을 받고 한 가지 소원을 이루는 영험한 곳으로 유명하다.​​해운대해수욕장의 모습. 날씨가 쌀쌀해 사람들이 별로 없다​​바다와 접한 해동용궁사해동용궁사 인근에 수산과학관이 있다수산과학관의 독도관 ​사하촌이 끝나는 곳에서는 동양철학의 육십갑자 십이지상이 봉안되어 있고 안전운행을 기원하는 교통안정기원탑이 눈길을 끈다. 춘원 이광수의 시비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라고 한 나웅화상의 시귀도 정겹다. 용문석굴을 지나 108돌계단을 내려가면 정렬된 석등군이 나오고, 이내 펼쳐지는 검푸른 넓은 바다가 용궁으로 들어가는 해탈에 이르는 길처럼 다가온다.부산시티투어 www.citytourbusan.com​​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자동차 여행가 조용필 2017-04-04
자동차 여행가 조용필일단 떠나야 알 수 있는 것들 여기 무모하고도 용감한 여행을 떠난 남자가 있다. 조용필 씨는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자동차로 15개월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또 다시 새로운 대륙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 그는 출발 전에 보다 많은 방법으로 이 여행의 보람을 여러 사람과 나눌 참이다.     “이름 때문에 어릴 때 놀림 많이 받았죠.” 유난히 추웠던 3월 초, 성산대교 아래에서 조용필 씨를 만났다. 취재진보다 먼저 도착한 그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스티커가 붙은 차를 보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랜드로버 디스커버리3 앞에 선 중년 신사는 여행에 대해 말하는 내내 생글거린다. 돌아온 일상에서도 여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나오면 사람들이 차를 보고 주인이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고, 길에서 만난 택시 기사들이 사진 한 장 찍자고 세우는 경우도 있어요. 신기하지요.” ​​​재작년 4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15개월 동안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지 꽤 되었지만 여행 직후 기록삼아 시작한 블로그(http://blog.naver.com/feelyoume)는 이미 30만 팔로어를 넘겼고 일상에서도 수시로 주목을 받는다. 그간의 기록을 모은 여행기 ‘내 차로 가는 세계 여행’(미다스북스)을 두 권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직업은 공식적으로는 ‘무직’이다. 이만 하면 작가로 부를 만도 하건만 아직은 부족하단다. 종종 전국 각지에서 가슴 속 로망을 가진 어른들의 초청으로 강연자가 되는 것으로 인생의 다음 스텝을 가고 있을 뿐이다. 그가 떠난 것과 같은 여행을 꿈꾸는 이들, 그의 여행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철들지 않는 남자가 겪은 자세한 루트와 노하우는 블로그와 책을 통해 참고하시길.​​ ​사람들이 다들 재산부터 궁금해하지 않나요?맞습니다. 다들 제가 아주 부자라서 수입차 끌고 가족들 태우고 떠난 줄 압니다(웃음). 당시에 4억원 정도 하는 서울 아파트 전세금을 통으로 빼서 통장에 넣고, 연고도 없는 조치원까지 가서 아파트를 찾으니 훨씬 큰 평수가 서울 아파트 전세값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세간살이를 다 옮겨서 넣어 놓고, 나머지는 차 구매와 여행 경비로 대부분 썼습니다. 차는 처음에 국산 승합차로 갈 생각을 하고 실제로 해당 메이커의 지원책이 혹시나 있을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름 없는 아저씨에겐 여의치 않았어요. 어차피 정비성이나 내구성을 생각할 때는 SUV가 좋겠다 싶어서 7만~8만km 탄 랜드로버 디스커버리3를 중고로 구매했습니다. 차로 달리면서 중간 중간 길에서 캠핑도 했지만 숙소 생활도네요 했고요. 비용도 예상하시는 것보다는 그리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차값 빼고 1억원 정도 쓴 것 같아요. 당연히 통장은 텅텅 비었지만 내가 40년 동안 꾸어온 꿈이고 세 식구가 다녀왔으니까.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맞아요. 유럽 패키지 여행도 한 15일짜리 갔다 오면 1,000만원 이상 쓰니까요.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한 번도 어디가면 뭐가 맛있고 어디 가서 자면 좋고 이런 걸 써본 적이 없어요. 근데 참 많이들 블로그 댓글로 물어요. 어디가 좋냐면서요. 그런데 전 대응 안했습니다. 그걸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이잖아요. 너무 구체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그 과정이 여행 아닐까요? 제가 생각하는 여행은 사람 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내일이 어떨지 다 알진 못하잖아요. 여행도 다음 가는 목적지는 알지만 안 가본 길이 어떤지는 모르듯이. 그걸 즐겨야죠. ​총각도 아니고, 남자 나이 50줄에 갑자기 떠난다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철이 없거나 인생 막다른 길이란 생각일 때요. 그렇지 않고서야 통장이 빌 때까지 여행을 할 수가 있나요? 음…(한참을 망설이다), 맞습니다. 죽을 것 같은 스트레스가 있었지요. 처음부터 얘기하자면, 친구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잘못됐습니다. 15년 은행원 경력도 소용이 없었던 일이지요. 그리고는 가족들 보기가 미안해서 서울로 혼자 올라와 렌터카 운전 일을 했습니다. 서울 길도 모르는데 제가 가진 재주가 운전이라서 한 일인데요, 우연한 기회에 일본 사업가를 손님으로 모셨는데 좋은 인상을 남겼나 봅니다. 제가 일본어를 웬만큼 하거든요. 그 분 제안으로 새 일을 하게 되었죠. 액세서리 부속 등을 남대문에서 주문하면 일본으로 대신 부쳐주는 작은 사무실을 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때 자리도 잡혀서 가족들과 다시 뭉칠 수 있었죠. 그 즈음 세무조사가 왔는데, 추징금이 상당했습니다. 제 딴에는 은행에 꼬박꼬박 넣고 받은 내역이 있어서 억울한 일입니다만, 작은 사업체에서는 몇 달 검사를 받는 것만으로 정말 피폐해지고 일에도 모든 의욕이 사라지더군요. 지난 빚도 다 갚고 우리 아들 삼형제도 알아서 제 공부 열심히 해서 다 커 가는데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있는 살림을 다 날릴 정도로요?두통과 이명이 시작됐습니다. 갖은 검사를 해도 원인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에서 쓰러져서 대형병원 응급실까지 실려 갔을 정도였어요. 집에만 들어오면 베란다에 나가 뛰어내릴 생각을 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죠. 그런데 그때 타던 바이크로 3번 국도를 고속으로 한 번씩 ‘땡기고’ 나면 머리가 안 아픈 겁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걸 하니까 안 아프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냥 어느날 불쑥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어릴 때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언젠가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걸 기억해냈지요. 의외로 아내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3월에 대학에 입학한 막내 놈도 휴학시키고 데려갔지요. 원래는 입학 첫 학기는 휴학이 안 되는데(웃음) 제가 학교 교수님을 찾아가서 담판지었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웬만한 학교 교육보다 더한 걸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교수님도 이 말엔 동의하셨고요, 학교 스티커를 한 장 붙이고 달리는 조건으로 같이 짐을 쌌습니다.  ​가족들이 더 대단합니다. 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셨던 거겠죠? 어릴 때 저희 집이 운수업을 했습니다. 차 좋아하는 대개 그렇듯이 면허 따기 전에 운전을 할 줄 알았지요. 몰래몰래 많이 했습니다(웃음). 고등학교 졸업 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심사하는 경찰관이 좀 달리다 말고 “차 세워, 임마” 하더라고요. “면허증 줄 테니까 면허증 가지고 다니면서 운전해”라면서요. 이후로 직장생활 하면서도 갖은 차를 많이 탔습니다. 모터사이클도 엄청 좋아해서 동호회 생활도 오래했습니다. ‘R차’라고 부르는 바이크나 BMW GS 같은 멀티퍼퍼스도 탔고요. ​​​​오지에서는 정비할 일도 많았을 텐데 정비는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글쎄요. 저도 어느 책에선가 보고 통감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행에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있답니다. 여행에 필요한 하드웨어 세 가지가 뭐냐면 돈, 체력, 시간이래요. 나이 먹으면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남아 있는 시간은 적다보니 조급함이 생기기 마련이죠. 저 같은 경우는 웬만한 차 정비도 혼자 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믿었으니까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가면 목적지에 맞는 어학원도 등록해 현지에서 바로 소통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겁니다. 정비는 돈만 안 아끼면(웃음) 현지에 가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을 잘 못 하니까 진짜 힘들더라고요. 유라시아나 라틴 대륙 쪽으로 가면 영어가 거의 안 통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어를 무척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여행 중에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스페인어나 독일어 같은 걸 미리 공부해서 왔더군요. 정말 부러웠습니다. ​​ ​​타이어는 몇 개나 교체하셨어요? 한 9만km 달렸는데요, 11개 갈았습니다. 닳아서 찢기는 게 아니라 그냥 터질 때도 있었죠. 사막에서는 고온으로 돌을 크게 밟은 것도 아닌데 그냥 폭탄 맞은 것 같이 찢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이 차도 자세히 보면 조수석 앞에 에어백이 들어 있는 대시보드가 살짝 금이 가 있습니다. 외부 열이 40도가 넘으면 차량 내 체감 지수가 거의 70도쯤 되는 기분인데 코 속이 아파서 문을 열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 내장이 굳어서 갈라지는 거죠. 윈드 실드를 뒤덮는 모래먼지를 닦아내느라 와이퍼도 갈렸고요. 보닛이랑 범퍼 쪽에 움푹움푹 돌로 파인 건 별 일도 아니죠. 그래도 차가 튼튼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지인이 랜드로버 매장에 가서 영업사원에게 디스커버리를 물어보니까 내구성은 최고라며 제 블로그를 보여주더래요. ​​​​ ​아찔한 경험이 없진 않았겠죠?당시에는 미치게 힘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다 추억입니다. 강도나 도난 없이 여행을 잘 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없었던 고생을 몽땅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하루 만에 다 겪었습니다. 안전하라고 경찰서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어딜 다녀왔는데 차 유리가 깨지고 카메라부터 반찬으로 싣고 온 젓갈까지 다 털렸더군요. 이 차가 연식이 좀 됐어도 이모빌라이저가 있어서 창이 깨지면 저절로 문이 잠깁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죠. 그런데 이런 경우가 많은지 깨진 유리만 고쳐주는 전문가를 경찰서에서 연결도 해줍니다. 카자흐스탄 일대를 달릴 때 수시로 경찰이 검문하는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에요. 이유는 딱히 없어요. 신분증이랑 입국 관련 서류를 일단 내놓으라고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돈을 요구하는 식이지요. 나중에는 어차피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능청스럽게 대충 협의하고 넘어가게 되더군요. 브라질에 가서는 어떤 부자가 2억원을 줄 테니 이 차를 자기한테 팔고 가라는 말도 들었답니다. ​​갖은 일을 겪고 나면 성격도 바뀌나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다 버리게 되죠. 제 수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차가 멈춘 적도 있어요. 남미 쪽에서였는데 빈부격차가 크면 이런 차를 소수가 타니까 정비사도 무척 적고 여기저기 정비소끼리 계측기 찾아서 옮기고 하다가 그 값을 어마어마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정비 비용으로 한 1,000만원을 달라고 할 때도 있었어요. 차를 실어 보내야 할 배나 세관원들도 그래요. 늘 “내일 해줄게, 기다려”라고 말이죠. 그러다 일주일, 열흘이 그냥 지나가 버리다보면, 그만큼 체류비가 늘어나기 마련.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고, 여러 루트로 연락해 SOS를 쳐도 답이 없으니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보니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처럼 즐기게 되더군요. 일주일씩 호텔에서 정비소나 통관사무소 연락을 기다리다가 안 되면 근처 유명한 해변에서 일광욕도 하고 주변을 놀러다니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두어 곳을 돌다 이젠 가족들끼리 웃으면서 얘기하는 여유도 얻었답니다. “대기업 회장도 못 할 휴양을 우리가 몇 주째 하고 있네”라면서요.​​​​많은 분들이 여행의 재미를 그렇게 말씀하시죠. 혹, 여행 중에 자신의 다른 면도 발견하셨나요?돈보다 큰 스트레스는 내가 지금 이 여행의 리더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라는 점입니다. 다들 걱정할 걸 아니까 제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을 드러내질 못해요. 그러다가 길에서 마구잡이로 달리는 차를 만나면 욕을 해댔죠.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욕을 하면 그걸 듣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니까, 욕 그만하세요.” 머리를 딱 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무척 미안했고요. 그 뒤로 험한 말을 안 하게 됐습니다. 가족들이 더욱 소중해졌죠. 한국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장모님, 복학해야 할 막내아들을 생각해서 일단 돌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또 다시 저 차 끌고 이번에 못 간 나머지 땅들을 보러 가려고 합니다. 당시 IS 테러 위협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쪽은 못 돌아봤거든요.​​​​ 아내는 또 따라 가신다고 하던가요?누가 한번 물어보니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더군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저보다 그걸 허락하고 따라간 아내와 가족들이 더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아들만 삼형제를 뒀는데, 다들 제 아버지 성질을 아니까 일찌감치 스스로 알아서 자리를 잡아서 각자 잘 살고 있어요. 이제 예전처럼 좋은 아파트로는 못 돌아갈 상황이지만 사람들 만날 일이 많아 일단 반전세로 서울에는 들어왔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여행 갔다 오니까 뭐가 걱정이 안 돼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사실 이런 얘기를 또래 남자 분들은 무척 부러워할 겁니다.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여행을 가려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던지고 가야 해요. 다들 ‘돈 모으면 가야지’ 하는데, 그러면 계속 못 갑니다. 특히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포장된 도로만 갈 거라면 평범한 세단을 끌고 가도 됩니다. 즐기며 가보십시오. 더 늙기 전에요. 다만 하체부터 보강해야 할 건 많습니다(웃음).​글 김미한(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최재혁, 조용필 ​​  
중국인의 혼이 서린 곳, 황허 후커우폭포 2017-03-16
중국인의 혼이 서린 곳황허 후커우폭포길이가 5,414km의 황허(黃河: 황하)강은 중국에서 장강 다음으로 긴 강으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의 5천년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중국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강이다. 황허강에 형성된 폭포 중 가장 큰 후커우폭포는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구이저우성의 황과수폭포보다 더 웅장한 느낌이다.   ​   이우에 있는 필자가 시안(西安: 서안)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곳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중국인 천(陳: 진) 사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 사장은 저장성 동양 출신으로 이우 시장에서 가방을 팔던 장사꾼이었다. 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2003년이다. 당시에는 매달 미국으로 가방을 실은 2~3개의 컨테이너를 선적했었다. 그가 이우 시장에 매장을 열자마자 우리와 거래를 시작했고 몇 년 동안 수십 개의 컨테이너를 수출했으니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돈을 벌게 해준 필자에게 항상 고마워했고, 지금까지 좋은 유대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방 장사를 통해 돈을 번 그는 3년 전부터 시안으로 자리를 옮겨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니 사업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필자가 알고 있는 많은 이우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다가 돈이 될 만한 제품을 찾으면 공장을 지어서 직접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바탕으로 부동산 시장에 뛰어든 그들은 얼마 전부터는 금융업에까지 진출한 상태다. 아무튼 그는 시안의 땅을 싼 값에 사서 아파트나 오피스 건물을 지어 분양을 하는 방식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몇 해 전부터 계속 시안을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었는데 아마도 돈을 많이 번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천 사장 덕분에 병마용과 화칭궁을 비롯해 시안의 구석구석을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후커우폭포를 안내한 천 사장.오래전에 이우에서 가방을 팔았었다​​시안에서 350km 떨어진 곳당나라 궁이 있는 대명궁을 둘러본 후 대뜸 천 사장이 ‘내일은 폭포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시안에는 그다지 유명한 폭포가 없는데 무슨 폭포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좀 멀기는 하지만 황허(黃河: 황하)강에 있는 폭포라 한번 가볼 만하다’며 나를 꾀었다. 사실 필자는 시안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동산 일 때문에 바쁜 그가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가자고 하는데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황허(黄河) 후커우폭포(壶口瀑布)에 가게 됐다. 한국 관광객들은 시안에 들르면 대부분 병마용과 회민제 등 유명한 관광지만 보고 간다. 시안에서 후커우폭포는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폭포를 아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시안에서 약 350km 거리에 있으니 아무리 빨리 다녀와도 하루는 다 잡아 먹는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시안을 출발했다. 차는 천 사장이 갖고 있는 BMW 526i다. 천 사장이 오너드라이버이긴 하지만 그다지 운전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운전은 필자가 하기로 했다. 시안 시내를 빠져나오니 곧바로 훤하게 뚫린 왕복 8차선 고속도로가 나온다. 고속도로는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꽤 깨끗했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 이후 눈부신 경제 개발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동안 이곳 서부는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중국의 경제개발은 대부분 남부와 동부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그러나 근래에 들어 서부 대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도 시안에 엄청난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그런 연유로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고속도로가 많은데 모두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했다. 훌륭한 고속도로가 뚫려 있기는 하지만 이곳 고속도로를 통행하는 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서부대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방으로 고속도로를 뚫어놓았다​​서부 쪽 고속도로의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다​​시안에서 후커우폭포까지 가는 길의 주변은 사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겨울이라 주변의 경관이 황량해서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토질이라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땅이 아니다. 그래서 산시성(山西省: 산서성)의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비라도 한번 내리면 토사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풍경이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고속도로는 산과 산을 다리로 연결하고 큰 산으로 막힌 곳에서는 터널을 뚫어 길을 냈다. 고속도로 밑을 내려다보니 발아래 황량하게 펼쳐진 광야가 장관이다. 필자가 이제껏 보아왔던 곳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중국이었다. 토지가 척박하다 보니 이곳에서는 주로 밀농사를 짓는다. 산시성을 비롯해 칭하이성(靑海省: 청해성)이나 간쑤성(甘肃省: 감숙성) 등에서 국수가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간쑤성의 란저우 라면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드문드문 고속도로 휴게소가 나온다. 그러나 이곳을 거쳐 가는 차들이 거의 없어서 휴게소는 무척 한산하다.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과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천 사장이 차를 세우고 거래처에 나누어줄 사과를 5상자 샀다. 먹어보니 사과가 생각보다 달고 물도 많다. 산시성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중국에서 제일로 친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의 사과 생산량이 전세계의 36%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모습. 차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매우 한산하다휴게소에서 사과를 파는 상인들의 모습​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색다른 인물을 만났다. 필자가 카메라로 휴게소 이곳저곳을 찍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한 장 찍어 달라고 요청하는 트럭 운전기사였다. 필자가 가진 큰 카메라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순박하게 생긴 야오(姚) 성씨를 가진 트럭 운전기사는 윈난성(云南省: 운남성) 쿤밍(昆明: 곤명)에서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흑룡강성) 하얼빈(哈爾濱)까지 짐을 운반하는 중이라고 했다. 쿤밍에서 하얼빈까지는 4,000여km에 이른다.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사진을 집으로 꼭 배송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중국에서는 트럭 운전사들이 먼 길을 운전하고 다니기 때문에 대부분 부부가 같이 다닌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는 형과 함께 교대로 운전을 한다고 했다. 장거리 운전의 외로움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원숭이도 한 마리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속도로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 트럭 운전사는 장거리 운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형과 교대운전을 하며 원숭이도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닌다고​​​공산당도 주둔했던 동굴들장시간 운전을 하는 동안 고속도로 주변에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주 드문드문 집들이 조금 보일 뿐이었다. 중간에 제법 도시다운 규모의 시가지를 딱 하나 만났다. 그리고 집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동굴들이 보였다. 예전에는 동굴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요즘은 곡식이나 야채를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멀리서 바라본 동굴들. 비가 오면 패일 것만 같은 토사형 지형이다​이 동굴은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대장정(1934~1935)을 펼쳤던 공산당이 시안에 머물 때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중국 영화를 보면 공산당의 본대가 동굴에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점은 시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옌안(延安: 연안)이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을 시작해 그 먼 거리를 거쳐 옌안까지 이동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했다. 초창기에는 국민당과 합작하여 북부 군벌을 토벌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1925년 쑨원(1866~1925)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 장제스(1887~1975)는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공산당 본부가 있던 장시성(江西省: 강서성)을 집중 공격하자 공산당은 서부 지역으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장시성 루이진(瑞金: 서금)에서 시작된 대장정은 11개 성을 거쳐 산시성 옌안까지 1만5,000km에 이르는 목숨을 건 고난의 행군이었다. 처음 출발을 할 때 8만 명이 넘었던 공산당이 옌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1/10에도 못 미치는 8,000여 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처절하고 비참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인 옌안에서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옌안에서 재정비를 한 후 절대적으로 우세하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으니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에 다름 아니다. 야구에서 흔히 말하는 9회 말 투아웃 이후 대역전극을 펼친 격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극적인 중국의 현대사를 쓴 것이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1893~1976)이 이끈 공산당이다. ​황허강에서 가장 큰 폭포점심을 후커우폭포 입구에서 먹었다. 식당가는 한산했다. 폭포를 보기 위해 여름에는 구름처럼 관광객들이 몰려오지만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천 사장은 가는 내내 2개월 동안 서안 쪽에 비가 내리지 않아 폭포가 초라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와서 볼품없는 폭포를 보여주게 되면 실망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식당 앞으로 마르고 건조한 거대한 협곡이 형성되어 있었다. 협곡 밑으로는 흙탕물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황허黃河: 황하)강이다. 황허강은 길이가 5,414km로 중국에서 장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황허강은 칭하이성에서 시작하여 내몽고와 산시성, 허난성을 거친 후 산둥성의 발해만으로 빠져 나간다. 황허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의 5,000년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중국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강이다. ​​대협곡 사이로 황허강이 흐른다협곡을 따라 입구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사방공사를 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비가 내리면 패여 나가는 토질을 바꾸는 한편 모래 산에 나무를 심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 심어지는 나무는 건조한 땅에서도 잘 견디는 수종이라고 한다. 비로 인해 패여 나간 비탈길에는 전봇대가 전깃줄에 대롱대롱 위험천만하게 매달려 있다.   쓸려 내려가 전봇대가 공중에 떠 있다. 전깃줄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위태한 모습사방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폭포 입구에 가까워지자 엄청난 굉음이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폭포에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커지면서 주위를 집어 삼킬 듯 포효한다. 마치 계속해서 울리는 거대한 천둥소리 같다. 이윽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래는 곳에 다다랐다. 바로 황허강에 형성된 폭포 중 가장 큰 후커우폭포(壶口瀑布)다. 양쪽을 둘러싸고 있는 협곡이 워낙 커서 폭포가 작아 보이지만 그 물이 쏟아져 내리는 위력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위용은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구이저우성의 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이다. ​​​후커우폭포의 웅장한 모습​​후커우폭포는 높이 약 50m, 폭 30여m이지만 수량에 따라 폭과 높이가 달라진다. 물이 떨어지며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낙차 때문에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는 물줄기의 양도 엄청나다. 이런 영향으로 폭포 주변에는 항상 무지개가 형성된다. 초당 1,000입방미터의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2,500입방미터까지 늘어난다고. 물의 양이 현저하게 적은 겨울에도 이렇게 웅장한데 물이 많으면 그 위용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 같다.후커우(壶口)란 주전자의 주둥이라는 뜻인데 커다란 주전자에서 작은 주둥이를 통해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실제로 협곡 사이에 난 강폭이 수백m에 이르는데 후커우폭포에 이르러 갑자기 좁아지면서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실제로 물이 흐르면서 암벽 사이에 물길을 낸 것을 보면 그 위력을 충분을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후커우폭포는 중국 북서부에 소재한 산시성(陕西省: 섬서성)과 싼시성(山西省: 산서성) 사이의 협곡에 조성되어 있다. 2억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비바람과 물에 깎이고 패여서 만들어진 폭포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황허강의 발원지인 칭하이성(青海省: 청해성)을 만날 수 있다. 황하(黄河)란 강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누런 황토물이어서 붙여진 표현이다. 물속에 워낙 많은 진흙이 포함되어 있어 물 반 진흙 반이라고 말할 정도다. 쓸려 내려오는 진흙 때문에 하류의 지반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물이 흘러 우리의 서해로 나온다. 황해(黃海)라는 표현도 황하의 탁한 물이 만들어낸 바닷물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중국에서 황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산시성과 싼시성을 잇는 다리. 건너편이 싼시성이다​​​건너편으로 보이는 싼시성도 푸르름과는 거리가 멀다​흙탕물이 흐르는 황허강의 모습. 그야말로 물 반 진흙 반이다 ​흙탕물이 흐르는 황허강의 모습. 그야말로 물 반 진흙 반이다 ​비가 와서 수량이 늘어나면 물이 위쪽까지 넘쳐난다.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흔적들 ​​​필자는 세계 4대 폭포에 속하는 미국의 나이아가라와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중국의 황과수폭포를 가보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도 곧 가볼 생각이다. 후커우폭포를 나이아가라나 이과수와는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그런 큰 폭포와는 또 다른 감동을 후커우폭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작지만 강렬한 황토색의 물줄기는 일반적인 폭포와는 전혀 다른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게는 규모와 관계없이 중국인들의 혼과 역사가 담겨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고 있다. 황허는 중국인들의 사상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갠지스가 인도인들에게 마음속의 고향과 같은 곳인 것처럼 황허란 중국인들에게 평생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하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우리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 맛보는 가슴 벅찬 감동을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느끼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천 사장이 자신들이 자랑으로 삼는 황허강의 후커우폭포를 나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후커우폭포를 찾은 관광객들의 모습​​후커우폭포 인근에 사는 중국인들 역시 한족이다​기념품 매장의 점원. 소수민족 같은 복장이지만 한족이란다​​천 사장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장차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비롯하여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중화사상의 바탕이 이곳 황허에서 비롯되었음을 필자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후커우폭포에서 서안으로 돌아오는 길도 그다지 어려운 여정이 아니었다. 고속도로가 잘 뚫려 있고 도로상태도 양호했다. 천 사장은 필자와 같이 후커우폭포를 둘러본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다. 15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천 사장이 이젠 BMW를 몰고 시안에 높은 건물을 지어서 파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필자는 변한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당일치기로 가는 세계꽃식물원 2017-03-06
봄·봄·봄, 봄이 있어요~​충남 아산 세계꽃식물원 겨울에 만나는 봄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봄이었고 여름이었으며 가을이 함께하니 마치 사계절을 한곳에 들여다 놓은 듯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자리한 ‘세계꽃식물원’이 바로 그곳. 서해안고속도로 서서울 톨케이트에서 100km 남짓, 경부고속도로 한남IC에서는 120km 정도여서 이 두 곳을 기점으로 각각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봄은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쌀쌀한 날, 유독 봄이 더 그립다. 여기다 한 달을 앞서 가야 하는 매거진의 경우라면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 더욱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각종 소식들이 엮어져 <자동차생활>이 독자들의 손에 닿을 때쯤이면 봄은 이미 문턱에 와 있다. 그리고 봄 길은 저무는 태양을 마주하는 그림자처럼 점점 더 길어져 절정으로 내닫을 것이다. 그리하여 늘 이맘때쯤이면 철 지난 겨울 얘기에 눈길을 주고 귀를 기울여줄 마음씨 너그러운 이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게 된다.  겨울에, 아니 그보다도 더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에도 풀내음 솔솔 풍기고 각종 꽃향기가 은은하게 휘감아 봄의 한가운데 선 듯 착각이 드는 그런 곳 어디 없나? 뜻밖에도 그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봄이었고 여름이었으며 가을이 함께하니 마치 사계절을 한곳에 들여다 놓은 듯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자리를 잡은 ‘세계꽃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당일 코스세계꽃식물원은 서서울 톨케이트에서 100km 남짓하고, 경부고속도로 한남IC에서는 120km 정도여서 이 두 곳을 기점으로 각각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에서 당일로 다녀오기에 손색이 없고, 지척에 도고온천과 옹기 및 발효음식 전시체험관, 코미디홀 등이 있어 아쉬움을 남길 여지를 주지 않는다.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올려놓으니 발길이 가볍다. 목적지에 대한 설렘이 주는 야릇한 기운에 따사로운 햇살이 거들어 이미 차 안은 봄의 전령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의 환대에 느긋하게 몸을 맡기고 서해대교를 넘어 당진IC로 빠져 32번국도로 접어드니 예당의 너른 들판이 일어선 듯 다가온다. 예산·당진·아산·서산에 걸쳐 있지만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산과 당진의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길 이름도 ‘예당평야로’다. 충남 당진군 궁평리의 간양사거리에서 천안·아산 방향의 21번국도로 좌회전한 후 오른쪽 길을 이용해 터널을 건너면 세계꽃식물원이 너른 들 한가운데 서 있다. 아직은 빈 들판이지만 볍씨가 뿌려지고 싹을 틔워 신록이 한창이거나 누렇게 익어갈 때의 장관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가슴이 탁 트인다. 여기에 들어선 식물원은 생각보다 소박해서 ‘어, 투자한 시간에 비해 볼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물음표 하나가 눈앞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직은 겨울이어서 식물원의 입구를 앞 다퉈 치장했을 꽃들은 생명의 빛을 잃었다. 그러나 어차피 내친걸음. 매표소에는 관광버스에서 내린 나이 지긋하신 분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하고, 관람을 마친 이들이 무언가를 받아가며 짓는 만족한 미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감이 말끔하게 씻긴다. 식물원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8,000원으로 관람을 마친 후 귀가할 때 제공하는 다육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간다. 출입문을 제치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적당한 온기가 도는 실내는 카페와 레스트랑, 쉼터 등으로 꾸민 ‘삶이 꽃이다’라는 뜻의 리아프(LIAF, Life is a Flower) 가든이다. 쉼터의 테이블과 의자가 특이해서 눈여겨보았는데 물건을 담을 수 있는 플라스틱 상자(아마도 식물들의 모종 등을 운반하는 데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에 나무를 알맞게 잘라 고정시켜 놓았다. 완성도가 뛰어나고 나름대로 멋도 있어 일상에서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다양한 종류의 호박은 한데 어우러져 관람객들의 시선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이 정겹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군고구마를 내놓기도 한다지만 아쉽게도 오늘이 그날은 아닌 모양이다.​​LIAF가든의 카페​​​​눈은 즐겁지만 이게 무슨 꽃인고반대편의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식물원 탐방이 시작된다. 2004년 개장한 세계꽃식물원은 온실 2.8헥타르와 실내식물원 1.8헥타르로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온실 식물원이라는 것이 이곳의 설명이다. 연중 3,000여 종의 원예종 관상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 올 사람은 그리 많이 않을 것 같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꽃과 식물의 수를 손꼽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고, 그것이 또 그것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실내식물원의 문을 여니 산발을 한 것 같은 식물이 천장에서부터 늘어졌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 꽃 사이로 길을 냈다. 식물원 안에는 관람을 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탄성을 자아내는데 초록의 무성함에, 꽃들의 밝은 빛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의 신비로움에 저마다의 느낌을 추억으로 담으려는 듯하다.   온실 천장을 뚫을 듯한 벤자민선인장 정원​  걸음은 느긋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부족한 것을 더 채우려 하기에 이리조리 뜯어보고 요모조모 살펴서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관람객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으니 사람들의 정체 아닌 정체가 발생하는 것. 이쯤 되니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등으로는 땀이 미끄러지듯이 흘러 겨울 외투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다. 풀과 나무, 그리고 꽃들의 향연이 끝이 없을 듯 이어지지만 그럴수록 아쉬움은 커져간다. 꽃 이름표를 붙여 놓은 곳은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보내며 “아, 이게 그 나무야, 그 풀이야, 그 꽃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대부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이라니! 식물원 측이 관람객들이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좀 더 강구하면 좋을 듯하다.      무슨 꽃일까? 이름표를 붙여 줬으면 좋으련만​노란 꽃잎이 빛을 발한다극락조화  발길이 무거워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무와 천장에 매달아 놓은 꽃그늘 아래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저마다 식물원과 추억의 한 페이지를 간직할 수 있도록 마련된 촬영장소에서는 사람들의 맑은 웃음꽃이 피어난다. 식물원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앵무새 체험관은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각양각색의 빛깔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앵무새들은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일상을 즐긴다. 미로정원을 걷는 것과 각종 선인장들의 모양과 형태를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식물원 곳곳에 쉼터들이 있다  앵무새정원의 주인공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막바지에 이르면 허브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내놓은 상점이 나오는데 둘러보면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LIFA 가든과  맞댄 온실에서는 다육식물과 화기를 판매한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일정을 끝낸다. 하지만 더 즐겨보고 싶다면 아름다운 꽃에 옷을 입혀주는 ‘분갈이 체험’과 물감이 아닌 꽃잎으로 손수건을 곱게 물들이는 꽃수건 염색체험을 신청할 수 있다. 세계꽃식물원은 계절을 앞서거나 거스를 수 있고,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색다른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홈페이지의 콘텐츠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는 것. 지금의 홈페이지에서 볼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세계꽃식물원 www.lifa.kr 041-544-0746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봉농리 577)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 광저우 2017-02-20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로 광동성 성도이자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이다. 또한 중국 근대화에서 중심적인역할을 한 역사적인 도시이며, 13세기부터 유럽과의 교역을 이룬 무역도시다. 하지만 개방정책 이후 인구와 차량급증으로 인한 교통체증, 공해, 빈부격차의 심화 등으로 골치를 앓고 있기도 하다.​​​시타(서탑)로 불리는 103층의 IFC 빌딩(좌)과 동타(동탑)로 불리는 120층의 주다푸 빌딩(우)​ 광저우는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로 광동성 성도이자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이다. 또한 중국 근대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역사적인 도시이며, 13세기부터 유럽과의 교역을 이룬 무역도시다. 한나라때부터 무역을 시작하여 당나라를 거쳐 명·청에이르기까지 서남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중국 최대의 항구로 거듭났지만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홍콩을 할양한 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광저우가 역사적으로 가장 부각된 것은 신해혁명으로 오천 년이 넘는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공화국을 건설했다는 데 있다. 중국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외세의 침탈로 나라가 이리 저리찢기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이때 뜻이 있는 선각자들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취지로 모여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중화민국을 선포한다. 그 중심에 쑨원(손중산)이 있었다. 광동성 중산 출신으로 미국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홍콩의 학교를 졸업한 쑨원은 중화민국의 이념인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주창하며 새로운 공화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쑨원의 뒤를 이어 집권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과의 패권다툼)에서 패하여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긴다. 쑨원은 광동성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광저우에는 그의업적을 기리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다. 손중산 기념관과 중따(중산대), 중산대 부속병원, 중산대로,중산대교 등이 그것이다.​​​쑨원이 설립한 국립대학교인 중산대학손중산 기념관​​개방정책으로 남부 최대의 도시로 발전광저우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정책에 힘입어 남부 최대의 도시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중국의 개방 정책은 광동성 썬전과 산토우에 특별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썬전은 홍콩과 인접해 있고 산토우는 홍콩 최대 재벌 이자청의 고향이다. 중국의 개방정책을 실현하는 데에는 홍콩의 역할이 컸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포기하겠다는 뜻인 만큼 서방국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것은 당연한 일.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홍콩에 손을 벌렸고, 이자청을 비롯한 홍콩의 재력가들이 중국에 투자를 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개방 정책의 의지를 펼치는 한편 서방세계의 투자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개방정책의 가장 큰 공신은 홍콩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개방 정책이 시작되고 30년이 지난 홍콩의 현재는 암울하다.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다. 그동안 홍콩은 중국 개방정책의 최대 조력자이자 수혜자였다. 외국인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을 등에 업은 홍콩은 중계무역이라는 무기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아 왔다. 과거에는 중국과 거래를 하려면 홍콩을 통해야만 했는데, 이런 상황은 2,0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외국인들도 홍콩을 제쳐두고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면서 홍콩의 역할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홍콩은 점점 중국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양상은 홍콩과 비슷한 상황으로 몰릴 수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경제가 중국에 예속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 감소하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도 0.6%가줄어든다는 통계도 있는 만큼 지속적인 시장의 다양성을 통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중국의 개방 초기 대부분의 공장들은 광동성에 산재해 있었으며 그 중심에 광저우가 있었다. 광저우는 인구 1,400만 명의 큰 도시로서 인근의 포산, 중산, 혜조우 등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3,000만 명에가까운 인구가 주위에 살고 있어 공해, 교통체증등 복잡한 현안을 안고 있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이자 시장이 되면서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도 큰 골칫거리다. 광저우 도심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교통체증으로 인한 대혼잡이 계속된다. 급기야 광저우 시에서는 차량등록제를 실시해 차량이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광저우를 다녀 봤지만 지금까지 맑은 하늘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광저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광저우타워에 오르면 시꺼먼 스모그에 덮인 광저우 시내만 보일 뿐이다. 광저우 시내를 전체적으로볼 수 있는 백운산에 올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광저우는 대기오염이 심해서 맑은 하늘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백운산 정상에 올라도 시꺼먼 스모그에 덮인 시내만 보일 뿐이다 ​​밤이 되면 색깔을 바꾸며 빛나는 광저우타워​​교통체증, 공해, 빈부격차 등의 폐해개방정책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로 인한 빈부격차의 폐해도 중국 정부의고민거리다. 서울의 강남에 비견되는 텐허에는 호화스러운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화청광장 주변에는 시타(서탑)로 불리는 103층의 IFC(국제금융센터)를 비롯해서 종신, 중국 이동통신 등초호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광저우에서 가장 높은 120층짜리 주다푸 빌딩(일명 동타)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텐허광창, 정지에 광창 등 초호화 쇼핑몰들이 밀집되어 있다.​​화청광장 주변에는 시타로 불리는 IFC 빌딩, 동타로 불리는 주다푸 빌딩을 비롯해서 초호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쇼핑몰의 인테리어나 팔고 있는 제품들을 보면 과연 이곳이 중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인구 밀집지역에 들어서면 또 다른 중국을 만나게 된다. 호화스런 아파트 옆으로는 예전의 우리네 달동네보다 더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년 내내 해가 들어오지않는 벌집처럼 생긴 건물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급속한 인구 증가에 따른 병폐다. 만약 불이라도 나면 과연 이곳에서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무덥고 습한 여름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광저우 시민들의 생활상은 현대화된 광저우의모습과는 또 다른 일면이다.​​​호화스러운 아파트 저편엔 예전 우리네 달동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일 년 내내 해가 들지 않는 빈민가의 집, 창문이 숨구멍처럼 마주 트여있다​​​한편, 광저우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이지만 제대로 된 옛 건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웨이슈 공원에청나라의 성곽이 남아 있을 뿐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한 흔적이 없다. 근래에 들어 송대의 길을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공원은 잘조성되어 있고, 그 숫자도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광저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백운산은 광저우시민들이 항상 찾는 시민공원이다. 그 밖에 웨이슈공원, 류화후 공원 등 도심에 많은 공원이 산재해있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백운산 공원은 광저우 시민들이 즐겨 찾는 시민공원이다인민공원에 있는 광저우 제로 포인트​​웨이슈공원에선 청나라 시절 성곽을 볼 수 있다​​정부의 토지 대여로 땅부자가 된 토박이들중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동북에 가서 술 잘 마신다고 거들먹거리지 말고(동북에는 워낙 주당들이 많으니), 베이징에 가서 벼슬 자랑 말라(베이징에는 고위 관리들이 즐비하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광동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 돈으로 묻어 죽인다”는 말이 있다. 광동에는 그만큼 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무역을 통해 외국으로부터 돈을 벌어들였고 개혁 개방 이후에도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곳이 바로 광동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몇 해 전 광동성의 GDP가 대만을 넘어 섰으며, 그 중심에 광저우가 있다. 예로부터 광동 상인을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꼽아왔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신용을 쌓아왔는데 이는 광저우가 개방 이후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 앞서 나가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광저우에서는 이 지역 토박이를 만나기가 정말어렵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광저우에는 순수한 광저우 사람들보다는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이 더많이 살고 있다.​광저우 토박이들은 외부로 잘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부동산 사업을 영위한다. 중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대여 형태로 나누어 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연스레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필자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 주인도 광저우 토박이인데 주변에 큰 빌딩을 일곱 채나 소유하고 있다. 이처럼 상행위를 통해 부자가 되었다기보다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가 저절로 부가 축적된 경우가 많다. 그것도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분배를 한 덕분이니 복이 절로 굴러든 셈이다.  중국인들은 미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광동 사람들이 심한 편이다. 건물 주인도 건물 문 앞에 주차를 못하는데 그 이유는 돈이들어오는 흐름을 막기 때문이란다. 집집마다 또 상점마다 재물신을 모셔놓고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제를 올리는 모습은 이들의 일상이다. 중국인들이 8을 좋아하는 이유도 돈을 많이 번다는 ‘파차이’의 ‘파’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8은 ‘Ba’, 파차이의 파는 ‘Fa’로 발음된다. 하여튼 중국인들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연관성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한편 중국에는 아직도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물론 부통화(보통화:표준말)가 통용되고 있지만 지역에서 쓰는 말이 별도로 있다. 각 지역의 언어는 우리나라의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 개념이 아니라 전혀 알아들을 수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특히 광동성에서는 세 개의 언어가 쓰인다. 광동성에서 주로 사용하는 캔토니스(광동), 즉 광동어를 비롯하여 싼토우, 양지앙, 주하이 등 다양한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같은 싼토우라고 해도 지역마다 또 다르니 외국인들이 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광동 지역에서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그지역 말(구쌍화: 고향 말)을 배우고, 방송이나 지역 간 교류를 통해 자연스레 광동어를 접하며, 학교에 들어가면 표준어를 배운다. 따라서 광동 사람들은 자연스레 세 가지 말을 구사하게 된다. 광동 사람들은 광동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데, 중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지역이라는 이러한 우월감을 언어로 표출한다. 다른 지역 사람들과 차별화되고싶은 감정을 자신들의 언어인 광동어로 나타내는것이다.​광저우는 광동성 교통의 중심지이다. 전국으로 통하는 고속버스와 기차가 매일 출발하고, 기차도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노선을 구축하고 있다. 광저우에는 광저우, 광저우 동, 광저우 남, 광저우 북의 네개 역이 있다. 전국으로 통하는 일반열차는 광저우 역에서 출발한다. 홍콩으로 통하는 관통열차는 광저우 동역에서 떠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50년간 자치를 인정하기로 한 까닭에 아직도 홍콩과 중국을 오가기 위해서는 출입국 수속을 밟는다. 요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고속열차는 광저우 남역이 종착점이다.​​​광저우에서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버스다​​전국으로 통하는 일반열차는 광저우역에서 출발한다 많은 시민이 모여 사니 대중교통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역시 버스다. 아침 5시 반부터 밤 11시 반까지 운행되는 버스는 도심 전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시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버스 요금은 2위안(약 37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버스 다음으로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지하철이다. 광저우 지하철은 8개노선이 개통되어 있으며, 현재 9호선이 건설 중이다. 일반 버스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우리의 마을버스와 같은 버스들이 운행되고 있고, 교통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오토바이가 많이 사용된다. 예전에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오토바이가 운행되었지만 지금은 전기 오토바이만이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10여 년 전 오토바이를 이용한 날치기가 성행하면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사고 또한 많아지자 오토바이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내린 조치다. 때문에 광저우 시내의 주유소에서는 오토바이에 급유를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호스를 이용해서 자동차의 휘발유를 오토바이에 급유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경찰에게 적발되면 바로 압수당한다.​외국계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커피점 성황광동음식은 중국음식 중에서 담백한 것으로 유명하고 어느 지방보다 다양한 음식으로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음식점에 가면 상어 지느러미, 뱀, 전갈, 비둘기 등 희귀한 재료를 이용한 음식들이 즐비하다. 전에는 살아 있는 원숭이 골 요리도 광동음식에 속했으나 요즘은 광저우 시내에서는 팔지 않는다. 광동 전통음식으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딤섬과 탕펀을 들 수 있다.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5시 반에 저녁을 먹고 일찍 쉬는 것과는 달리 광저우 사람들은 저녁은 일찍 먹더라도 늦게까지 술자리를 만들거나 야식을 즐겨 먹는 편이다. ​한편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이곳의 식생활도 서구식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깨끗하고 청결한 음식을 선호하면서 피자헛, 맥도날드, KFC 등 외국의 프렌차이즈 음식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던 중국인들도 얼마 전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웬만한 수퍼마켓에는 인스턴트 커피를 팔고, 광저우도심의 유명한 건물에는 반드시 스타벅스가 있을정도로 커피문화가 대중화되고 있다. 커피 전문점은 미국의 스타벅스와 영국 브랜드 코스타가 선도하고 있으며 한국의 카페베네와 대만의 85도가 그뒤를 따르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 브랜드의커피 전문점도 하나씩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외국계에 비해 약세다.​​​광저우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루​​광저우는 오래전부터 중국산업의 견인차 역할을하고 있다. 1957년에 시작되어 2015년 가을에 118회를 맞이한 광저우 무역 박람회(Canton Fair)는 중국 최대의 전시회다. 봄과 가을에 개최되는 이전시회는 전세계 바이어들을 불러 모은다. 불과20여 년 전만 해도 이들은 광저우에 오지 않고 홍콩을 통해 수입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품질이 국제 규격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장들의 해외 교류가 많아지면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크게 늘었다. 이로인해 중국 전시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광동 전시회는 중국 무역의 판도를 바꾸는 대형 이벤트로자리잡기에 이르렀다.​​​광저우 총영사관에서 개최하는 광동한국주간행사에서는 한중 문화교류의 장이 열린다​​현재 광저우에는 2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 의류업에 종사하며 일부는 한국식당을운영하고 있다. 특히 웬징루라 불리는 한국인 타운은 한국식당과 카페가 많아 광저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웬징루라 불리는 한국인 타운은 한국식당과 카페가 많아 광저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본 내용은 자동차생활 2016년 2월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포탕(佛堂) 2017-02-16
이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포탕(佛堂)​세계 최대의 도매시장이 있는 이우는 오늘날 현대식 건물과 고급아파트, 최고급 승용차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개혁개방 이전에는 그리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우 중심지에서 10km 떨어진 포탕이 명나라 때부터 이우의 중심지였다. 최근 재정이 풍족해지고 시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긴 이우시는 이우 시장과 포탕의 역사시설을 함께 엮어 쇼핑과 관광을 겸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오래전에 소개했던 이우(义乌: 의오, 의로운 까마귀라는 뜻)에는 세계 최대의 도매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점포 수만 7만 개가 넘어 이를 다 구경하려면 9개월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이우는 세계와 중국 시장을 아우르는 상거래를 통해 중국에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도시 중 하나다. 조그만 도시답지 않게 고층빌딩과 고급 승용차가 도로를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곳이 중국일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처럼 이우에는 현대식 건물과 고급아파트, 최고급 승용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지만 개방 이전에는 그리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우는 광동성과 더불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다. 만약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우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도매상가인 국제상무성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현대화된 도시를 형성하고 있지만, 2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우의 중심지는 포탕(佛堂: 불당)이었다.​​​ 포탕은 이우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공업단지가 형성되어 겨울철 여성들이 즐겨 입는 레깅스와 장갑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다. 포탕이 이우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기차가 생활화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은 배였다.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인력이나 물자를 다른 지역으로 수송하는  난관에 부딪치곤 했다. 육로를 이용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운하를 만들었고 그 결과 교통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운하를 만들어서 수천km에 이르는 뱃길을 운송수단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물을 잘 이용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수로 덕분에 포탕은 옛 이우의 중심지였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어 인력과 물자의 수송을 위해 일찍부터 운하를 만들었다수로 주변의 강태공들​​명·청 흔적 간직한 이우의 옛 중심지포탕이 21세기에 와서 다시 뜨는 이유는 이우가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역사에 별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필자가 미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은 어딜 가나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민과 개척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200여 년의 짧은 역사 탓도 있겠지만 사실 먹고 살만하니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싶었으리라. 이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우 시장이 세계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시의 재정이 풍족해지고 시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겼다. 인간이 부를 축적하면 명예욕이 생기듯이, 이우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역량을 치장하고 과시하고 싶어졌을 터. 하지만 이우는 도매시장 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유적지가 없었다. 그래서 주목한 곳이 바로 이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포탕이다. 세계 각국에서 많은 바이어들이 드나드는 이우에는 사실 내세울 만한 관광명소가 없다. 1,000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이 이우 시장에서 쇼핑을 한 뒤 인근 똥양(东阳: 동양)의 헝디엔(横店) 영화촬영소로 향하는 것을 본 이우시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내 집으로 들어온 이들을 다른 도시로 빼앗기는 것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놓치는 꼴 아닌가. 그래서 이우시는 쇼핑과 관광을 함께 할 수 있는 종합 관광레저 타운 개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포탕은 이우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오래전부터 운하를 통해 뱃길을 이용했던 중국인들은 그 수로를 이우까지 연결해 물자를 운반하면서 이우가 내륙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포탕에 조성되어 있는 옛 거리에는 명대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0여 년 전에 지어진 2층 집과 돌로 다져진 길을 걷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200년 전의 중국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오후부터 기나긴 담뱃대를 물고 마작을 즐기는 한량들이 주점을 점거하다시피 하고, 돌로 다져진 길 위를 바쁘게 지나가는 인력거의 모습이 눈앞에 들어온다. 부두에는 힘겹게 물자를 나르는 고단한 노동자와 미소를 머금으며 돈을 세는 배 주인의 얼굴이 함께 투영된다. ​ 포탕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흔적이 공존한다​명나라 시대에 지어진 500여 채의 집들은 아직도 건재하고, 200여 미터에 이르는 구시가지에는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들 건물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건물 소유주인 이우인들은 이들 건물을 임대하고 환경이 좋은 이우 시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집이라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시내에 비해 임대료가 싸기 때문에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이런 시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근의 짱시(江西省: 강서성), 안후이(安徽省: 안휘성),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건물이 3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지역의 높은 습도 때문이다. 포탕은 우기인 겨울과 봄에는 빨래가 거의 마르지 않을 정도로 습도가 높은데, 중국 중부 지역은 이처럼 대부분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방으로, 1층은 주방으로 사용한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이 큰 도시는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핵가족화되어 가고 있지만 작은 도시나 농촌은 아직도 2~3대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2층은 자녀들이, 3층에는 부모세대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명나라 시대 건물과 최신 카페가 공존포탕의 여름은 기온이 섭씨 40도가 넘기 때문에 에어컨 없이는 살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실외기가 달려 있는 집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대부분 선풍기로 무더운 여름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점이 있는 길 안쪽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이 그야말로 영화에서 본 청나라의 풍경을 방불케 한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일상용품에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대부분 빨간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노라면 이곳 역시 중국의 한 지역임이 실감하게 된다. 중국인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은 빨간색이 행운을 불러오고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포탕의 어디를 가나 마오쩌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와 모자, 가방 등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재물 신처럼 받들어지고 있는데,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룬 마오쩌둥이 자본주의화된 지금에도 신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절이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 안에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의 경우도 고려시대까지는 국교처럼 여겨지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절이 민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마을에 있었다. 마을에는 명나라시대부터 영업을 해온 중의원이 있고 약국도 있다. 지금도 중의원은 진료를 하고 있으니 200여 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으로 엿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원래 이우에는 오래전부터 탕(엿이나 사탕 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있었다. 이우에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를 재료로 사탕을 만들어 외부에 팔아왔다고. ​​​​오늘날 이우의 번영을 가지고 온 것은 일명 ‘지모환탕’(鸡毛换糖) 정신의 계승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모환탕이란 ‘탕과 닭털을 바꾼다’는 뜻으로, 오래전부터 이우 사람들이 탕을 만들어 짱시성(江西省: 강서성)에서 판 돈으로 닭털을 사와 부채를 엮어 다른 지역에 내다 팔았다. 당시에는 변변한 교통편이 없었던 만큼 걸어 다니면서 밤이 되면 길에서 잠을 자며 장사를 하러 다녔다. 여름에는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이 작렬하고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을 한 달 가까이 걸어 다니며 장사를 했으니 그들의 억척같은 삶이 오늘에 이르러 이우인의 정신으로 빛나고 있는 듯하다. 혼자 다니기가 무섭고 위험해 보통 10명 정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곤 했다고. 엿 가게에서는 지금도 옛날 방식으로 엿을 만드는 방법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당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형상화한 조각들​엿 가게 바로 옆으로는 현대식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현대식 카페가 있다는 것이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 풍경이 이색적이어서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홍콩에서 왔다는 젊은이들은 이우에 상품조사차 나왔다가 이곳에 들렸다고 한다.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커피 한 잔 값이 30위안(약 5,500원)이나 하니 마을 주민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들를 일은 없어 보인다. 아직은 포탕이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우 시장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빈번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니 이곳에도 있을 건 다 있다.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치과도 있고 이발소도 있다. 치과는 이곳에서 치료를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해 보인다. 옆에 있는 이발소는 어린 시절 우리네 동네 이발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목표는 쇼핑과 관광을 아우르는 도시시내 밖으로 나오니 강과 엉성하게 이어진 다리가 보인다. 예전에는 강을 건너는 중요한 교통로였겠지만 지금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낡은 모습이다. 강을 끼고 강변에 제법 큰 규모의 나루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런 나루터를 마토(码头)라고 부른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한강에도 나루터가 여럿 있었다. 노를 저어 한강을 건너던 나룻배는 당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낭만적인 풍류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사공이 무척 힘든 직업 중 하나였다. 마토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이 정도라면 당시 강을 통해 운반되었던 물자의 양이 엄청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강변에 자리한 옛 나루터 표지석과 기념물들​​​실제로 포탕에 와서 보니 예전부터 이곳이 이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실감이 간다. 강변에는 당시 일을 했던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을 보니 그때 사용했던 운반도구가 뗏목이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지류는 물살이 세지 않아 뗏목으로도 운반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뗏목이 수시로 드나들던 나루터는 이제 낚시터로 바뀌어 강태공들의 차지가 되었다. 표지석에 관청마토(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청에서 관리하던 마토도 있었던 모양이다. 마토는 당시 물자를 운반하는 대단히 중요한 장소여서 관청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관청으로 들어오는 물품도 이를 통해 오갔을 것이다. 이 강의 지류는 가깝게는 인근의 진화(金?), 롱요(?游), 멀리는 항저우(杭州)까지 연결된다.낡은 다리를 걸어서 강을 건너니 새로 짓는 건물들이 마지막 단장을 하는 중이다. 이우시가 이곳에 종합 위락시설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 시장과 포탕의 역사시설을 함께 엮어 쇼핑과 관광을 겸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우시의 구상이다. 이에 따라 명나라와 청나라 풍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으나 그다지 훌륭한 외관은 아니다. 당시의 이우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항저우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니었기에 시선을 끌 만한 웅장하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우시가 새로 짓고 있는 명나라와 청나라 풍의 건물들  어쨌든 이우시의 이 같은 노력으로 포탕이 점점 변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여파로 포탕의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이 기회를 틈타 재빠른 건설업자들은 인근을 재개발하여 대규모 아파트를 지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불경기로 인해 중국도 부동산 경기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 최근 몇 개월 사이 중국의 외환보유고 6,000억달러가 해외로 빠져 나갔고 이우의 인구도 50만 명이나 감소했다. 우리나라의 전체 외환보유고가 3,000억달러가 조금 넘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의 경제가 크게 요동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포탕이 새롭게 단장하여 이우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우에서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가 포탕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 사진 양인환(중국통신원)​※본 내용은 자동차생활 2016년 3월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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