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중국이야기 [시안] 2017-02-13
중국 5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곳시안(西安)중국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서안)은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자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13개의 왕조를 거친 역사적인 도시다. 1974년 발견된 진시황의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양귀비가 목욕한 화칭궁이나 당태종이 지은 대명궁의 터도 남아 있다. 개방 이후 상대적으로 경제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나 지금은 서부 대개발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병마용 1갱도를내려다본 모습. 세계 8대 불가사의 중하나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74년, 시안(西安: 서안)의 외곽에서 농사를 짓던 양즈파(杨志发:양지발)는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도자기 재질로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파편과 무기로 쓰였을 듯한 쇳조각들이었다. 2천년 동안 묻혀 있던 진시황의 지하 세계가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바로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병마용(兵馬涌: 빙마용)이다. 오늘날 시안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병마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사후 세계에까지 전하려는 중국인들의 혼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시안은 주나라부터 한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왕조를 거친 역사적인 도시다. 진시황(B.C. 259~210년)이 춘추전국시대의 험난한 여정을 거쳐 중국에 최초로 통일된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221년의 일이다. 진나라는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 불과하지만(기원전 221~206년) 거대한 중국을 통치하는 체계를 확립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깊다. ​진시황은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봉건제를 폐지하고 황제가 각 지역에 지방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그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해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기존에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개축해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성을 산 데다 호사스런 아방궁을 만들면서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묻어 죽이고 책들을 모두 불살랐던, 저 유명한 갱유분서(坑儒焚書)가 일어나게 된다. 영원불멸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기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했던 진시황. 하지만 그는 50살이 되던 해 원정길에 나섰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나라는 후계자 문제와 환관의 계략으로 3대를 잇지 못하고 15년 만에 멸망하니,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제일 큰 병마용1갱도의 입구 모습​​진시황과 양귀비의 발자취시안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병마용은 전체 규모가 2만5,000평방미터에 달한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4개의 갱을 발굴하였으며 아직도 새로운 병마용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4개의 갱 중에서 처음 발견된 1호갱은 길이 210m, 폭 60m, 높이가 4.5~6.6m로 규모가 가장 크다. 1호갱에는 약 6천 병사들의 도용(陶俑,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병사들의 신장은 175~196cm로 실제 키보다 조금 크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맨 앞에는 겉옷만 입은 보병들이 도열해 있고 그 뒤로 갑옷을 입은 장수와 말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용맹스런 군인들의 대열 같다. 2호갱과 3호갱은 1호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4호갱은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원래 병사들은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발굴 과정에서 햇빛을 받자마자 색이 변했다고 한다. 화려한 색으로 단장한 제각기 다른 얼굴의 8,000여 병마용을 보노라면 이를 제작하느라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을지 감탄이 절로 난다. 한쪽에서는 부서진 병사들과 말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술자들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마치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8천여 병사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 발굴작업과 함께 부서진 병마용을 복원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시안에는 병마용 외에 중국 제일의 미인인 양귀비(楊貴妃, 719~756)가 목욕을 한 것으로 유명한 화칭궁(華靑宮: 화청궁)이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중국의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에서도 제일로 꼽히는 양귀비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통통한 얼굴을 지닌 가장 중국적인 여인이다. ​원래의 이름은 양옥환이다. 걸출한 미모에다 춤과 노래 솜씨가 뛰어나 17살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이모의 부인이 되었지만 당 현종이 왕귀비의 미모와 춤 솜씨에 반하여 그녀를 품게 된다. 그러니까 며느리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당 현종은 원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양귀비와 사랑에 빠진 이후 정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고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빠져들었다. 특히 양귀비의 형제들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양귀비는 매일 온천욕을 하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단장을 해서 당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꿈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간의 갈등으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쓰촨성(四川省: 사천성)으로 피신한 당 현종은 사랑과 목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피난길에 마차를 끌던 병사들이 이런 원인을 제공한 양귀비를 처벌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고 반항했기 때문이다. 반란군이 뒤쫓아 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리자 당 현종은 결국 양귀비를 버리게 된다. 이에 양귀비는 비단 끈으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자결이 아니라 환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화칭궁에는 양귀비가 당 현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 온천욕을 했다는 목욕탕이 여러 군데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지금도 온천수가 나온다고 한다. 궁의 규모를 살펴보면 당시 당나라가 얼마나 번창한 국가였는지 짐작이 간다.​​양귀비가 목욕한 곳으로 유명한 화칭궁. 수려한 경관과 온천 덕에 예로부터 고관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았다중국 제일의 미인이라 일컫는 양귀비.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여인이다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연못​지금도 온천수가 땅에서 솟아 나오고 있다​​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무대화칭궁에는 중국의 근대 역사를 바꾸어 놓은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시안사변(西安事變: 서안사변)이라 불리는 장제스 납치사건이다. 1936년 12월,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 장제스가 화칭궁에 머물고 있었다. 시안 인근의 옌안(延安: 연안)에 주둔하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의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는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을 독려하기 위해 이곳에 온 터였다. ​장쉐량은 동북의 마적 두목 출신인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의 아들이다. 만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이 장쭤린이 탄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자 장쉐량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내전을 치렀다. 당시 공산당은 국민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군사력이 열세였다. 국민당에 쫓긴 공산당은 대장정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병사들을 잃고 시안 인근의 연안에 자리잡은 뒤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사실 말이 좋아 대장정이지 국민당을 피해 도망만 다닌 것이 전부였다. ​처음 장시성(江西省: 강서성)을 출발할 때 8만 명에 이르던 인민해방군이 대장정 말기에 8,000명으로 줄었으니 공산당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국민당은 연안의 공산당만 휘어잡으면 중국을 차지하게 되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쉐량은 공산당을 없애는 것보다 중국 땅에서 일본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그는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힘을 합해 일본군과 싸우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단호하게 “그렇게 못한다”고 대답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공산당은 이제 궤멸 직전의 상황. 바로 진격하면 중국은 자신들의 차지가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산당보다는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제안을 거절당하자 장쉐량은 양후청(楊虎城)과 함께 장제스를 납치, 구금한다. 이것이 시안사변이다. 장쉐량에 의해 구금된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마오저뚱과 함께 일본에 대항한다는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수용한다. 만약 그때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까?장쉐량은 장제스로부터 국공합작의 승낙을 얻은 후 비행기를 태워 그를 난징으로 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난징의 군사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았다. 국가원수를 납치한 하극상에 대한 처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으나 55년간 구금과 연금 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당시 장쉐량은 장제스를 죽일 수도 있었다. 또 장제스에 버금가는 막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군사재판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험난한 고행의 길을 걸었으니 모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최고의 신사로 대접받아야 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화칭궁 안에 있는 국민당 장제스의 집무실​​서부 대개발로 급속하게 발전 중시안 시내는 온통 공사 중이다. 서부 대개발이라는 정책 아래 시안 일대에 개발의 광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 중국 지도를 펴놓고 보면 시안은 중국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중국 서쪽에는 위쪽으로 신장이, 남쪽으로는 시장(티벳)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면적은 중국 전체의 약 1/4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크지만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다. 또한 오랜 기간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영토를 확정한 것은 1950년 이후다. 신장과 티벳을 빼면 시안은 중국의 서부에 속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시안을 포함한 이 지역을 통상적으로 서부라고 부른다. 그동안 시안이 속한 서부지역은 개방 이후 급속히 발전한 중국 경제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산시성(陝西省, 섬서성)의 성도인 시안 인근에는 웨이난(渭南: 위남)이란 도시가 있는데, 현재 중국의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 때문인지 시진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서부개발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동안 시안에는 군수공장 외에는 다른 산업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가 시안에 2014년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 것도 시진핑 주석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안의 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서부 대개발 이후 급격히 늘어났고 지금도 늘고 있는 상황이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현재 공사 중인 아파트와 상업용 건물도 곳곳에 눈에 띈다. ​​시안 구시가지의 중심지 서부 대개발로 도시의 랜드마크가 달라지고 있다​시안의 택시는 BYD가 장악하고 있다  시안시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안쪽에서도 공사가 한창이다. 정방형의 성곽은 14km에 이르는데, 당나라 시절 쌓았던 성을 명나라 때 보수 및 증축했다고 전해진다. 성곽에 올라보니 시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난 성벽 밖으로는 물이 흐르는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려면 물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방어에 대단히 유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들도 이런 식으로 성 밖에 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나 있는데 문을 연결하는 통로는 대단히 넓다. 워낙 길고 넓어서 이곳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자전거나 전동차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다. 성은 웬만한 공격에는 전혀 동요될 것 같지 않게 견고하게 지어졌다. 당시의 중국은 북쪽의 오랑캐들의 침략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만리장성도 쌓았고 수도 안의 성들도 튼튼하게 지었다.   시안 중심부에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시안성의 남문인 영녕문. 가장 큰 문이다성 주변에는 수로가 있어 공격하기 힘든 구조다 성벽이 높고 견고해 외적이 침입하기 힘들다. 제국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민심의 이반 때문이었다​성곽 위쪽의 모습​성곽은 상당히 넓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할 정도다 시안은 역사적인 도시답게 예전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궁터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태종이 지었다는 따밍궁(大明宮: 대명궁)도 당나라의 권위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 궁궐이 있었다는 함원전에 오르니 정문인 단풍문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조각상에는 낙타와 함께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종종 보인다. ​​​당나라 시대에 건설된 대명궁. 베이징의 자금성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대명궁에는 함원전의 터가 남아 있다. 함원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보인다대명궁의 남문인 단풍문​​대명궁에는 시안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많은 사적들이 있다​ 비상 시작한 실크로드의 시작점시안은 중국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다. 실크로드는 6,000km가 넘는다. 실크로드가 열린 것은 한무제(漢武帝, 재위기간 B.C. 141~87년) 때다. 중국은 당시 비단과 칠기, 화약과 제지 등을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까지 수출했다. 특히 종이는 유럽의 인쇄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한 시기는 당나라 때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으로부터 기린과 사자 등 희귀한 동물들과 문물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또한 시안은 중국의 사상과 이슬람의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 서부지역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사상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들은 이슬람 복장을 하고 코란을 읽으며 돼지고기 대신 양고기를 먹는다. 또한 밥 대신 빵이나 국수를 즐겨 먹는다. 이곳의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쌀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잔모래가 날려 도시 전체가 스모그에 덮인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슬람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회민제거리회민제에서는 이슬람 복장을 한 중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이걸 먹지 않으면 시안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양러우파오모. 양고기가 든 국수에 빵을 잘라 넣어서 같이 먹는다 시안에서 이슬람 문화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곳은 회민루다. 이곳 사람들은 이슬람식으로 생활을 하고 이슬람 음식을 먹는다. 때문에 이곳의 번화가인 회민제거리에는 양고기와 이슬람식 국수를 파는 곳이 많다. 특히 양러우파오모(羊肉泡馍)를 먹지 않으면 시안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시안 특별식이 있다. 양러우파오모는 양고기가 든 국수에다 빵을 잘게 조각내어 같이 섞어 먹는 음식이다. 특별히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고유의 음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안 사람들은 우리처럼 생마늘을 먹는다는 점. 시안 사람들은 빵이나 국수를 먹으면서 생마늘을 같이 씹어 먹는다. 또 먹는 양이 남방 사람들과 비교해서 대단히 많다. 남방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의 그릇을 보고 2명이 먹어도 남을 양이라고 혀를 찬다.시안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5천년 중국 역사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이다. 아울러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했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서 중국 서부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해안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현대사에서는 소외된 면이 있으나 서부 대개발 정책 이후 다시금 중국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회민제의 밤거리​
지중해마을 · 외암민속마을 2017-02-07
이국적인 풍경과 과거로의 시간여행지중해마을 · 외암민속마을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와 그리스 산토리니를 들여다 놓은 듯한 충남 아산의 지중해마을은 수도권에서 넉넉하게 잡아도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다. 인근의 외암민속마을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살아왔는지 읽을 수 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주변 환경과 자연 속에서 어우러졌을 때 생동감과 가치가 살아나는가 보다.  냇가 건너편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근사했다. 눈이 부실 정로로 새하얗게 다가서는 이국적인 건물과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에메랄드빛 지붕. 햇살에 비친 지중해풍의 이국적인 풍경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와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경이 국내에 있었다. 충남 아산시 외곽에 자리한 블루크리스털 빌리지, 흔히 지중해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으니 바쁜 일상에서 가볍게 떠나기에도 부담이 없다. 외암민속마을과 현충사 등 주변에 둘러볼 곳이 많다는 것도 흔쾌히 발길을 옮기게 하는 매력이다.충남 아산시 탕정면에 위치한 지중해마을은 초입부터 남다르다. 키 높이를 자랑하듯 우뚝 솟은 아파트의 숲 아래 자리를 잡은 2~3층의 건물에는 대부분 다양한 소품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 그리고 옷가게가 들어서 있다. 추운 겨울철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간간이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지중해마을의 거리 모습. 겨울철 평일 낮이라 사람들이 뜸했다​색색으로 치장한 지중해마을의 모습​기대가 컸던 것일까? 마을을 둘러보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미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내리고 조명으로 환하게 밝아지면 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활기를 찾을지도 모를 일. 건물들도 새롭게 치장을 할 것 같지만 밤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기다려야 할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느린 걸음으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곳에서 외암민속마을은 차로 20여 분이면 닿는 곳에 있으니 지척이라면 지척이다. 아산시 내에서도 거리가 8km에 불과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선조 때 예안 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되었고, 그 이후 후손들이 번창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양반촌의 면모를 갖췄다. 성리학의 대학자인 외암 이간 선생이 살면서 더욱 널리 알려져 ‘외암’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마을은 우리의 옛 것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이룬 작은 하천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는데, 뉘엿하게 비치는 햇살을 받아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하다. 입구의 나무로 엮은 제법 운치가 있는 다리는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타임머신이 되어주고, 다리 아래에는 겨울의 포근한 햇살을 즐기는 앙증맞은 원앙들의 모습이 한참이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외암민속마을로 들어가는 타임머신 같은 다리 외암민속마을 시냇가에서 노니는 원앙과 오리 익살스런 표정의 장승들 매표소(성인 기준으로 2,000원이고 주차비는 무료)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현재와 단절된 듯한 과거가 그럴듯하게 펼쳐진다. 충청지방 고유의 격식을 갖춘 양반가의 고택과 초가, 돌담, 정원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다양한 농기구와 민속품이 이따금씩 발길을 멈춰 세운다. 집들은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감찰댁, 풍덕댁, 교수댁 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마을 뒤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정원수로 이용하는 특색 있는 정원도 만날 수 있다.걸음은 시작부터 느려진다. 조청을 팔고 있는 초가집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볏짚으로 엮어서 올린 지붕과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농기구들에 눈길이 머문다. 쟁기로 논과 밭을 갈고, 풍구로 곡물에 섞인 쭉정이나 겨, 먼지를 날리며, 탈곡기로 벼를 터는 농부의 일상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 옆 가마솥이 걸린 부엌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아궁이에서는 나무가 타는 연기에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아낙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한 집을 둘러보고 나니 이번에는 상류층 가옥을 대표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떡 하니 서 있다. “이리 오너라”라는 큰 목소리에 “게 누구쇼”라며 얼굴을 빼꼼 내밀며 길손의 정체를 확인하는 청지기가 그려진다. 앞서의 초가와는 달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점이 반갑다. 행랑채의 한쪽 벽에는 옷이 걸려 있고, 반다지가 놓인 수수한 공간은 그 시절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벗이 찾아온 듯 수담(바둑)을 나누는 장면이 정겹고, 대나무 병풍을 두른 연못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 푸름에 겨울을 잊게 된다. ​​​외암민속마을 상류층의 가옥상류층 가옥의 부엌. 아궁이가 정겹다 상류층 가옥의 반다지가 있는 방 바둑을 두는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길은 다시 초가로 이어지는데 규모에 따라 한 칸에서 세 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전형적인 서민층 가옥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았다.“이게 전부일까?”라는 생각에 마을에서 높이가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자 설화산 자락의 탁 트인 대지가 드러나면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바라본 그림 같은 마을의 모습​​사람이 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마을외암민속마을은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경기도 용인의 한국민속촌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단순하게 옛 시공간을 보여줄 뿐 아니라 진짜로 사람이 살고 있기에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곳에서는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떡메치기, 전통혼례, 다듬이와 전례구전, 문화예술공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홈페이지(www.oeammaul.co.kr)를 통해 예약을 하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돌담으로 담장을 두른 초가와 기와집들 사이로 걷다보면 처마 아래의 벽에 ‘메주’와 ‘씨 옥수수’ 등을 엮어놓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화사한 날씨와 초가지붕, 그리고 황토색 벽과 어우러져 멋드러진 풍경을 선사한다. 출사를 나온 이들도 연신 셔터를 눌러대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햇볕을 받은 처마 밑 풍경 메주와 씨 옥수수를 매단 풍경​문이 열린 가옥(마을 내 일부 가옥은 사생활 침해 및 도난, 훼손 등의 예방하기 위해 개방을 하지 않는 곳도 있음)으로 들어서니 뜰 한쪽에는 장독대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고, 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객을 맞는다. 이미 많은 이들과 소통(?)을 했는지 짖지도 않고 재롱을 떠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인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보는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 3시간여. 이정표가 이끌어 마을 어귀로 나오니 추수가 끝난 논에는 제각각의 익살스런 개성을 간직한 허수아비들이 허허벌판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외로움에 지쳐 있을 이들과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기운다. 일정으로 잡았던 현충사와 온양온천랜드는 다음 기회로 남겨야 했다. 외암민속마을을 소개하는 안내책자의 설명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독대 요즘 사람의 모습을 한 허수아비​ “옛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삶의 터를 정하지 않고, 바람과 물, 주변의 환경과 지리, 나아가 인심까지 두루 살폈다. 외암민속마을은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수백 년을 살아왔는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나 경관 속에 사람이 어울려 살고 있을 때 생동감을 지니고 가치가 살아난다.” ​외암민속마을 문화체험행사외암민속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와 10월 중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달집태우기라고도 하는 장승제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달이 떠서 비칠 무렵 마을 뒷동산이나 들판 등에서 달집을 태우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10월 중 열리는 짚풀문화제에서는 이간 선생을 기리는 ‘과거시험’이 재현되고, 추수를 통해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을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짚풀공예는 새끼꼬기와 짚신 만들기 등을 통해 정을 나눈다.  ​*글, 사진 김태종 ​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 2017-01-23
AUTO & TECHNIK MUSEUM, SINSHEIM인간의 욕망이 스며든 130년을  한눈에현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욕망과 투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 중 어떤 기술은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자리한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은 이런 130년에 걸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를 잘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역사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옛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크고 작은 박물관 또는 옛것들을 모아놓은 만물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기술 강대국이라 불리는 독일에는 기술 관련 박물관이 많다. 철도, 자동차, 배, 항공기 등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교통 기술에 대해 독일만큼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웰컴 투 ‘오덕’ 월드!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이하 진스하임 박물관)은 슈파이어 기술 박물관과 같은 그룹에서 운영한다. 하지만 두 박물관은 여러 모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곳을 ‘처치곤란 골동품을 모아놓은 곳’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자동차와 항공기를 비롯한 기계, 군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동시에 정신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슈파이어 기술 박물관도 규모 면에서는 여느 박물관 못지않지만 본점(?) 격인 진스하임은 더 많은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를 더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진스하임 박물관은 이름그대로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진스하임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진스하임 박물관의 상징인 커다란 굴뚝의 끝자락이 보인다. 굴뚝에 가까이 가면 진스하임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콩코드와 투폴레프 Tu-144의 모습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낸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한눈에 보여주는 두 대의 음속 민간항공기는 진스하임 박물관의 또 다른 아이콘이다.1981년 개관한 진스하임 박물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유럽 박물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면적은 5만㎡로 연간 방문객이 100만 명에 이른다. 전시 품목도 다양해 초음속 항공기, 일반 항공기, 자동차, 전차, 증기 엔진, 기관차 등 3,000여 점이 넘는다. 단일 품목으로 가장 많은 전시물을 자랑하는 자동차는 300여 대의 빈지티카와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카, 마이바흐 컬렉션, 독일에서 가장 많이 부가티를 모아 둔 부가티 컬렉션 등으로 나뉜다. 또한 200여 대의 모터사이클, 150여 대의 트랙터, 50여 대의 항공기, 각종 엔진과 부품들, 2차대전 컬렉션까지 포함하면 전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 많은 소장품을 꼼꼼하게 보려면 넉넉히 3일은 투자해야 할 것이다.     Don’t Miss!콩코드 F-BVFB & 투폴레프 Tu-144  음속 민항기인 콩코드와 Tu-144는 속도경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런던부터 뉴욕까지 3시간 20분 만에 주파가 가능한 콩코드는 음속 민항기 시대를 알렸지만 환경문제와 채산성을 이유로 지난 2003년 퇴역했다. 전체 생산대수는 20대로 에어프랑스와 브리티시에어라인만 운용했으며, 진스하임 박물관에는 2004년 6월부터 전시되기 시작했다. 투폴레브 Tu-144는 콩코드에 맞서기 위해 탄생한 음속 민항기이다. 콩코드가 서방 진영의 상징이었다면 Tu-144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기술의 상징이었다. 콩코드에 비해 실용화는 조금 늦었지만 크기에서는 콩코드를 압도한다. 두 항공기를 냉전시대 소모적인 기술경쟁의 아이콘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진스하임에는 콩코드보다 빠른 2001년에 들어왔다. Tu-144의 퇴역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진스하임 박물관에서는 이 두 음속 항공기의 실내도 구경할 수 있다. ​​발을 들여 놓으면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전시장은 크게 네 곳으로 나뉜다. 실내에 마련된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은 각기 다른 두 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고 항공기가 전시된 야외전시장과 3D 아이맥스 영화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한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은 동선이 매우 복잡하다. 공간 크기에 비해 많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천장에는 각종 항공기들까지 매달아놓았다. 항공기 사이사이에는 채광창이 달아 자연광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하면 유지관리 비용은 높지만 직접 조명보다 관람객 눈이 덜 피로하다는 장점이 있다. 자동차를 비롯한 운송수단은 모두 하얀색 자갈 위에 전시해두었다. 슈파이어 기술박물관과 프랑스 국립 자동차 박물관도 이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하얀 자갈은 방충 효과가 있고 습도 조절에 도움이 되며, 자동차와 같은 운송 수단의 경우 오일 누유를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미국차들을 전시한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카 섹션. 할리우드를 주제로 꾸며진 이 공간은 195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차들과 할리우드 배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핑크 캐딜락부터 뷰익과 올즈모빌, 쉐보레 콜벳, 포드 선더버드, 플리머스 퓨리 등 미국 자동차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 눈길을 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동차 메이커들도 있고 현존하지만 예전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미국차들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해진다. ​    ​Don’t Miss! 크라이슬러 300G풍요롭던 시절의 아이콘, 크라이슬러 300G는 전형적인 미국차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길게 뻗은 테일핀과 늘씬한 보디라인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다. 차체 길이는 5.7m에 이른다. 300은 크라이슬러의 럭셔리 라인업이며 컨버터블인 300G는 300시리즈 중에 가장 희소가치가 높다. 엔진은 V8 6.8L를 얹었으며 최고시속은 232km에 육박했다. 진스하임 박물관의 크라이슬러 300G는 1961년에만 생산되었으며 총 생산대수는 337대이다.​​​​Don’t Miss! 포드 갤럭시 500 뉴욕 경찰차 1960년대 말부터 뉴욕 경찰이 사용하기 시작한 포드 갤럭시 500은 V8 325마력 엔진을 탑재한 고성능 차이다. 경찰차로는 어울리지 않는 쿠페 타입이었지만 넉넉한 출력과 민첩한 핸들링 덕에 자동차를 이용한 범죄 수사나 도심 추격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뉴욕 경찰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갤럭시 500은 이후 크라운 빅토리아에게 바통을 넘겼다. 갤럭시 500은 미국 경찰이 본격적으로 퍼포먼스카를 경찰차로 사용하기 시작한 첫 모델로 꼽힌다.    ​​ 제2차 세계대전 디오라마 아메리칸 드림카 섹션을 지나면 제2차 세계대전을 테마로 꾸민 디오라마 부스가 나타난다. 독일에게는 흑역사이긴 하지만 현대 과학 기술이 가장 빠르게 발달했던 시기가 1940년대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자료들이 복원되어 있는 셈이다. 이 곳은 ‘밀덕’(밀리터리 마니아)에게는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늘에서 활약했던 독일의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판터 5호와 같은 전차들이 가득하다. 이 섹션에서도 자동차가 등장한다. 나치의 수송 장비 대부분이 메르세데스 벤츠와 마이바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메르세데스 벤츠는 총독 의전차부터 시작해 각종 트럭과 수송 장비들을 나치에 제공했으며, 마이바흐는 탱크나 자주포에 쓰이는 특수 엔진과 항공기용 엔진을 제공했다. 전쟁 상황에서 자동차 메이커가 살아남는 과정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Don’t Miss! 융커스 Ju-78  제2차 세계대전을 풍미했던 독일의 항공기를 꼽으라면 단연 융커스 Ju-87을 들 수 있다. 수투카로 불린 이 소형 폭격기는 다이브 밤버(dive bomber)라 불리는 수직 폭격기로 유럽과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수직 강하 때 발생하는 독특한 마찰음은 멀리서도 수투카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총 6,500대가 생산되었는데 의외로 원형이 남아 있는 건 단 2대에 불과하며 현재 미국과 영국에 각각 보관 중이다. 진스하임 박물관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1989년 지중해에서 발굴한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잔해만 남은 수투카 역시 전세계에 단 3대뿐이다. 엔진은 메르세데스 벤츠 엔진을 사용했다. ​​ 본격적인 컬렉션은 이제부터제1전시장은 역사의 흐름을 나름대로 해석해 놓은 공간이었다. 진짜 시작은 제2전시장부터였다. 야외로 나와 하늘 한 번 보고 제2전시장에 입장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스하임이 자동차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 제2전시장은 그야말로 자동차 마니아들의 천국이었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지금은 전설이 된 그룹C 경주차부터 F1 머신, 챔프카 등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2층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멋들어진 자동차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티렐의 6륜 F1 머신과 블루 플레임이라 불리는 최고속력 경신용 로켓 비클까지 자동차의 역사 중에서도 속도에 대한 도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제2전시장을 돌아다니다보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제1전시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 볼만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카를 모아놓은 스포츠카 컬렉션과 정말 다양한 자동차를 만들었던 마이바흐 컬렉션,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부가티 컬렉션이었다.한편으로는 오래된 차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모델을 구분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친절한 설명판이 없었다면 어떤 차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좀 아는 차들이 모여 있는 곳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스포츠카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데토마소 판테라 GTS를 비롯해 페라리 250 GT 루소, 람보르기니 미우라는 어린 시절 자동차 관련 서적에서 많이 봤던 차들이다. 자동차 쪽으로 직업을 정한 후에도 몇 번 실차를 봤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차들이다.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차를 실제로 만난 부가티 컬렉션의 감동은 지금까지 보고 싶은 차들을 찾아 방방곳곳을 누비던 필자의 경험 중에 가장 값진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직접 운전해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2층과 제2전시장 뒷부분에는 각종 산업용 엔진과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기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내연기관은 현재까지도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연기관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상상 이상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선박 엔진부터, 부피가 작고 무게가 가벼운 로터리 엔진과 바이크 엔진 등 다양한 내연기관을 둘러볼 수 있다.진스하임 박물관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 때로는 흑역사였기도, 때로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이었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편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인간의 욕심과 욕망 속에 발전해온 현대 기술을 짧은 시간에 모두 본다는 것이 무리이긴 하다. 하지만 자동차를 좋아하고 비행기나 각종 기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더군다나 박물관에 전시된 자동차는 100% 운행이 가능하며 전차나 기관차도 90% 이상이 운행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Don’t Miss! 페라리 250 GT 루소  지구상에서 단 한 대의 차를 줄 테니 선택해보라는 농담을 들으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차를 꼽는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 단 351대만 만들어진 250 GT 루소는 에릭 클랩튼과 스티브 맥퀸이 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닌파리나의 디자인과 페라리의 언더 섀시, 그리고 스칼리에티가 제작한 250 GT 루소는 250 시리즈 중에서 250 LM 다음으로 희소가치가 높다. 공식적인 거래가격은 4억~5억원 사이. 경매가로 45억원을 기록한 적도 있다. 엔진은 뱅크각 60도의 3,000cc 콜롬보 엔진이 탑재되었으며 최고속도는 시속 240km.  Don’t Miss! 데토마소 판테라 GTS  1971년부터 1992년까지 생산된 데토마소 판테라의 GTS 버전은 극소수만 만들어진 희귀 모델이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에 포드 클리브랜드 엔진을 올린 판테라는 특히 날렵한 외관과 컨트롤하기 힘든 동력계로 유명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랜드의 자동차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이탈리아 디자인에 남성적이고 와일드한 터치를 불어넣은 외관만으로도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다. 진스하임의 판테라 GTS는 1974년식으로 판테라 시리즈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모델이다. 판테라는 데토마소의 대표 모델인 망구스타의 후속으로 개발되었으며 데토마소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차로 꼽힌다. 1990년대 데토마소는 판테라의 뒤를 잇는 구아라를 발표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이후 2004년 데토마소가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Don’t Miss! 브루투스 1908년 제작된 브루투스는 전투기 엔진을 올린 경주차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투기 생산이 금지된 독일에서 전투기 엔진을 납품하던 회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판로가 바로 경주차에 전투기 엔진을 올리는 것이었다. 브루투스의 엔진은 BMW에서 개발한 V12 50L였는데 1,530rpm에서 550마력, 1,700rpm에서 750마력의 힘을 냈다. 브루투스가 한 번 움직이면 운전자는 매우 긴장했다. 엔진의 백파이어 불꽃이 옷에 붙기는 예사였고 실린더의 실화를 확인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배기구를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체인 구동방식을 채택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차는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보다 ‘사람을 잡는 데’ 더 최적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Don’t Miss! 애스턴마틴 DB6 밴티지 007 시리즈의 본드카로 유명한 DB6 밴티지는 1964년 작품인 ‘골드핑거’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애스턴마틴의 간판 모델이자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DB 시리즈 중 가장 인기가 많은 DB6 밴티지는 애스턴마틴이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낸 모델이기도 하다. 사실 국가기관의 정보원이 애스턴마틴 같은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것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한때 영국을 대표했던 스포츠카 브랜드인 만큼 픽션과 논픽션은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스하임의 애스턴마틴 DB6 밴티지는 직렬 6기통 4.0L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324마력의 힘을 냈다. ​​​Don’t Miss! 독일 최대 규모의 부가티 컬렉션  진스하임의 자랑인 부가티 컬렉션에는 총 7대의 부가티가 전시되어 있다. 에토레 부가티의 최전성기 시절 만들어진 부가티 타입 57을 비롯해 타입 35, 타입 37, 타입 30, 타입 41 르와이얄, 타입 57 벤톡스, 마일리카 CC, 푸조와 협업으로 만들었던 베베 등이 그것. 이 중 가장 희소가치가 높은 타입 41 르와이얄은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총 6대가 만들어졌으며 각 보디의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에도 있었던 르와이얄은 진스하임과 프랑스 국립 자동차 박물관에 있는 것들이 현재까지 공개된 모델의 전부다. 희소가치와 클래식카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꼭 봐야 할 컬렉션이다. ​​​Don’t Miss! 재규어 D타입  레이스를 위해 제작된 재규어 D타입은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제패한 경주차이다. 1954년에는 스털링 모스가 이 차로 시속 270km에 도달했으며 이후 재규어 스포츠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스하임의 재규어 D타입은 1954년식으로 직렬 6기통 3.4L 엔진을 얹어 253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D타입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모터스포츠에서의 눈부신 활약은 재규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로 꼽히는 E타입으로 이어졌다.​​​Don’t Miss! MAN 24실린더 디젤 엔진 상용차 시장의 강자 만(MAN) 역시 역사가 길다. 진스하임에는 만에서 제작한 엔진이 여러 개 전시되어 있는데 1943년 선박용으로 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전함에 채용된 이 엔진은 배기량이 무려 850L로 1만2,600마력의 힘을 냈다. 전시된 만의 엔진 중 배기량이 가장 크다. 독특한 점은 디젤 엔진임에도 불구하고 투 스트로크 방식이라는 점이다. 실린더는 총 24개이며 실린더 하나의 크기가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다. ​​​Don’t Miss! 메르세데스 벤츠 G4 군수용으로 개발된 G4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6륜 세단이다.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에 둔 G4는 높은 생산단가로 인해 독일 육군 납품이 좌절되면서 나치의 퍼레이드용과 군무원, 사령관의 작전지휘용으로 전환됐다. 7인승 로드스터 구조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1926년부터 시작한 G1 프로젝트에서 이어진 것이며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총 57대가 생산되었다. 엔진은 연식에 따라 5.0L부터 5.4L까지이며 모두 직렬 8기통을 사용했다. 출력은 덩치에 비해 낮은 115마력 정도. 진스하임의 G4는 복원된 모델이다. ​​​Don’t Miss! 마이바흐 SAW 엔진 개발자였던 마이바흐는 고급차만 만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메르세데스 벤츠와 마이바흐, BMW 등은 상당한 양의 자동차와 엔진을 군수물자로 독일정부에 납품했다. SAW는 전쟁 후 군용에서 민수용으로 전환된 모델로 다양한 공구를 싣고 다니는 다목적 자동차이다. 마이바흐가 이런 차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겠지만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SAW는 전쟁 이후 민수용으로 쉽게 전환된 모델로, 마이바흐의 설계 센스가 유독 돋보이는 모델이다.    Don’t Miss! 마이바흐 스페셜 레이싱카1920년 마이바흐가 만든 스페셜 레이싱카는 마이바흐 제펠린의 엔진이 올라간 경주차이다. 이름은 스페셜 레이싱카이지만 섀시는 기존 메르세데스 벤츠가 만든 승용차의 것을 사용했으며 커다란 변속기를 탑재하고 최고출력 300마력을 자랑했다. 단거리 기록용으로 제작된 이 경주차는 최고시속 160km를 기록했다. 당시 단거리 기록용 레이스는 현대의 드래그레이스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Don’t Miss! 람보르기니 미우라 P400 S현대 수퍼카의 기원이 된 미우라는 가로배치 미드십 레이아웃을 가진 스포츠카이다. 베르토네 시절의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한 미우라는 공력특성을 고려한 부드러운 디자인이 특징이다. 진스하임의 미우라는 1968년 토리노모터쇼에서 공개된 미우라 P400 S로 누적 주행거리는 2만km 정도에 불과하다. 진스하임 측은 ‘최초 출고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세계 유일의 미우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엔진은 V12 3.9L이며 최고출력은 미우라 P400보다 20마력 높은 370마력, 최고속도는 시속 280km다. 참고로 미우라의 최종 생산대수는 764대이다.​​*글, 사진 황욱익 ​​ 
중국이야기 [난징] 2017-01-05
중국 근대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난징(南京)​​장쑤성의 성도이자 경제와 교육의 중심지인 난징은 과거 삼국시대 오나라와 명나라의 수도였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지금은 인구 800만 명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난징조약과 난징대학살 등 중국 근대 역사에서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질곡과 치욕, 그리고 슬픔을 품은 곳이기도 하다.​난징은 인구 800만 명의 큰 도시이다  중국의 북쪽에 베이징(北京: 북경)이 있다면 남쪽에는 난징(南京: 남경)이 있다. 베이징은 북쪽의 수도이고 난징은 남쪽의 수도라는 뜻이다. 난징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수도로 삼았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난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난징대학살이다.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각광받았던 지역이자 가장 치욕적이고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난징은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도로 경제, 교육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중국에서도 큰 도시에 속하며, 상하이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난징은 중국에서 제일 긴 강인 장강(양쯔강)의 하류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자리한 장강대교는 장강에 놓인 세 번째 다리이자 길이가 6,800m에 달하는 장강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난징에는 공자가 세운 서원이 있다 공자서원의 모습​공자서원의 모습서원 안의 공자상 난징은 여름이 무척 더운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3대 더운 지방으로 우한(무한)과 충칭(중경), 그리고 난징을 꼽는다. 한여름에는 최고 기온이 섭씨 40도가 넘고 습도까지 높아 찜통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필자는 지금까지 난징을 세 번 방문했는데, 15년 전에는 기차, 5년 전에는 승용차, 그리고 이번에는 고속철을 이용했다. 이우에서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렸으나 고속철이 개통되면서 4시간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난징 지하철의 모습 난징-상하이간 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으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오나라에 이은 명나라의 수도삼국시대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난징은 주원장(朱元璋)시대에 다시 중국의 중심으로 탈바꿈한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수도가 바로 이곳 난징이었던 것. 주원장이 태어날 무렵은 원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상당히 혼란스러운 때였다. 황족들 간에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으로 나라는 큰 혼돈에 휩싸였고, 백성들은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고통과 더불어 기근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주원장은 배고픔과 질병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탁발승을 하며 걸인이나 다름없던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홍건적에 가담하게 된다. 도적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고족이 중심이었던 원나라는 상대적으로 남방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주원장은 이를 기회로 남방의 세력을 하나씩 결집시켜 절대권력 같았던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 1367년의 일이다. 걸인에서 시작해 일국의 황제 자리에 앉은 주원장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드라마다. 1398년 70세 때 주원장이 죽고 적손인 주윤문(朱允文: 주윈원)이 왕위를 잇는다. 주원장은 자신의 직계들로 하여금 각 지역을 분할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그중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 주디)는 베이징을 근거지로 한 북방지역을 맡고 있었다. 새로 황제에 등극한 어린 주윤문은 삼촌인 주체의 존재가 항상 두려웠다. 이 때문에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주체가 군사를 이끌고 난징을 함락시킨 후 새로운 황제에 등극한다. 그가 명나라를 가장 번영시킨 영락제다. 조선 초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좌에 오른 세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영락제는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무참하게 살육한다. 이에 난징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영락제는 자신이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던 베이징으로 천도한다. 이후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난징을 방문하면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 명나라 당시의 궁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상당히 웅장한 궁이 존재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흔적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중국이 근대화되면서 고대의 역사적인 현장들이 많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난징에는 명나라 당시 세워졌던 성벽은 아직 존재한다. 난징시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은 34km에 이른다. 도심에 세워진 성벽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보다 긴 만리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북방의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한 전국적인 성벽이고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으로서는 난징의 것이 제일 완벽하고 길다. 성벽 위에는 길이 나 있어 구 난징 시가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곳 전시실에는 각 나라의 성벽을 비교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난징에는 명나라의 궁터만 남아 있고 실제 궁궐은 없다. 사진은 그나마 남아 있는 궁궐의 잔재​​난징도 공해가 심한 편이다. 미세먼지로 인해 평소 시야 확보가 어렵다 성벽의 길이는 34km로 도심에 형성된 성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성벽 위에 당시의 무기를 재현해놓았다  난징조약과 중화민국의 거점명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간 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난징은 청나라 말부터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한다.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 때문이다. 중국이 맺은 가장 치욕적이고 불합리한 조약이라 할 수 있는 난징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청나라의 건륭제는 “중국은 물자가 풍부해 외국과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고 거드름을 피웠으나 실상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영국에 많은 비단과 차를 팔았으나 중국에 팔 물건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영국은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아편을 팔았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청나라는 아편대금으로 지출되는 은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 국가 재정이 거덜 날 정도였다. 이를 보다 못한 청나라 조정에서 임칙서를 내세워 아편 거래를 엄격하게 막았다. 이에 반발한 영국이 중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한번 못해보고 일방적으로 패한 중국은 결국 영국에게 홍콩을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1842년 난징에서 이루어진 ‘난징조약’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억지이지만 당시 힘이 없었던 중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치욕스런 사건이다.청나라가 쇠락하면서 난징은 우리에게 손중산(孫中山)으로 잘 알려진 쑨원(孫文: 손문)이 건국한 중화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광동성 중산 출신으로 광동성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는 호를 중산으로 쓸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애틋했다. 손중산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에 항거하여 민중들에 의해 일어난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한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다. 소비에트공화국의 지원 아래 설립되었던 광저우의 군사학교도 난징으로 옮겨와 정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중국을 꿈꾸었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었던 손중산의 꿈은 살아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중국을 위해 불철주야 전국을 순방하며 세를 규합하던 1925년 베이징에서 59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중국을 구하라”라는 말을 남긴 채.   웅장한 손중산의 묘를 올라가려면 숨이 턱밑까지 찬다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했던 손중산의 묘는 난징 중산능에 있다. 필자가 위대한 영웅을 참배하기 위해 중산능을 찾은 날은 평일인데도 수많은 참배객들로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손중산의 묘까지 올라가는 길은 멀고도 가팔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가까스로 참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데 아쉽게도 그의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흉상이 있는 건물에서 그를 참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원래 손중산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은 손중산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손중산의 처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은 손중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의 중국이 되길 바랐고 후에 공산당을 위해 열정을 바쳤다.   손중산의 실제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중화민국을 세운 손중산.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손중산과 장제스는 동서지간이다. 광동의 갑부 송가수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첫째인 쑹아이링(宋蔼龄:송애령)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은행가와 결혼했다. 미국 힐러리 클린턴이 졸업한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한때 손중산의 비서를 맡았었다. 중국에서 첫째라고 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은 그녀를 중국인들은 ‘돈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둘째 딸인 쑹칭링은 언니의 뒤를 이어 손중산의 비서로 들어가 결국 그의 아내가 된다. 손중산의 애국심에 반한 그녀에게 27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손중산이 사망한 후 그녀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힘을 합쳐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했으나 장제스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국민당과 거리를 두고 공산당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녀를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셋째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사치가 심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즐겼는데, 중산릉 바로 밑에 있는 호화스런 쑹메이링 궁은 그녀의 이러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8,000평에 이르는 이 저택은 호화롭기가 이를 데 없어 유명 관광지로 개방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장제스의 비서와 조언자 역할을 하며 대외관계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러나 그녀를 비롯한 주위의 인물들이 미국의 지원물자를 빼돌리고 부정축재를 하면서 국민당이 몰락하게 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일제가 자행한 대참사, 난징대학살난징에는 국민당의 정부가 있었던 총통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1912년 중화민국 임시총통으로 취임하여 집무를 했던 방과 행정기관, 도서관 그리고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군악대와 기마부대의 숙소가 인상적이다. 국민당 총통으로 중국을 통치하던 장제스의 집무실에는 쑨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장제스는 손중산의 법통을 자신만이 유일하게 이어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공산당과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손중산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전력 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지녔던 국민당은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민심이 천심이라는 국민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멀리 대만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았다. 국민당의 근거지인 이곳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총통부의 모습 인형으로 재현해놓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 부부와 부총통 이종인 부부중화민국 총통과 부총통 취임식 사진전시실에는 일본군의 중국 침략사를 기록해 놓았다 근래에 난징이 우리의 뇌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난징대학살이라는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도 난징대학살은 중국에서 지어낸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항상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19세기 말부터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품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편입하고 중국 진출을 꾀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한다. 호시탐탐 중국 내륙을 노리던 일본은 1937년 노구교사건을 트집 잡아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노구교사건이란 베이징 인근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핑계로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중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징을 공략했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은 군복을 벗은 중국군인들이 민간인에 섞여 있다는 구실로 남자들을 끌어내어 처형했다. 그들의 살해방법은 잔인하기보다는 악랄했다. 일본군인들이 중국 남자들을 총살시키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인 방법이었다. 민간인들을 총검술로 죽이거나 칼로 목을 베고 생매장을 시키는 등 극도의 잔학상을 보였다. 나중에는 노인과 여성,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중국에 따르면 그 숫자가 30만 명에 달한다고. 나아가 일부 일본군 장교들은 서로 칼로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을 벨 수 있는지 경쟁을 할 정도로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일본은 아직도 난징대학살을 부인하고 있지만 역사는 지울 수 없는 기록이다.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 기념관이라고 부른다)은 당시 일본의 잔학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어찌 보면 중국으로서는 치욕의 역사이지만 이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좋은 교훈이 되리라.  중국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가 30만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중국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가 30만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죽은 이들의 호구(호적)가 보관된 장소 일본군인들의 잔학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잔혹하게 살해되었던 중국인들의 유골. 발견된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올해 전지현이 주연으로 등장한 ‘암살’이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는 독립군에 관한 영화였다. 요즘은 별로 없지만 필자가 어릴 적에는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에 관한 영화가 많았었다. 독립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시절은 우리에게 많이 잊혀진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일본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진행 중이다. TV를 켜면 아직도 일본과 전쟁을 하는 드라마를 매일 볼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크기에 그런지 짐작이 간다.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많이 들어와 있지만 중국과 외교적 마찰이 있을 경우에는 불매운동을 하고 일본 제품을 불태우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중국에 상주하는 일본인들은 외출을 자제한다. 중국에서 일본차가 많이 팔리기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따라잡지 못한다. 다른 나라 시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만약 중국에서 반일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본차의 판매량은 몇 배나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도 중국 침략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죄할 생각이 없다. 일제의 침략을 받았거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반일감정이 남아 있는 나라는 현재 한국과 중국밖에 없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보면서 일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난징대학살 기념관.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 기념관이라 부른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겨울바다 2016-12-29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겨울바다영종•용유•무의도​​겨울바다를 찾아 나선 영종도. 간조 때라 바다는 저 멀리 물러섰고, 한여름 그렇게 북적였을 해변은 철이 지나 찬바람만 휑하며, 상점들은 죄다 문을 닫았다. 그런 속에서도 드넓은 바다를 품고 싶은 한 쌍의 연인은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뗀다.​용유도에서 바라본 바다​​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잃어버린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간간이 햇살을 드러내고는 이내 새색시마냥 얼굴을 붉히며 회색의 커튼 뒤로 얼굴을 가렸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다. 어느 순간 흰 사라기 눈이나 비를 뿌려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날이다.그럼에도 ‘떠남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던 누군가의 말이 장막을 비집고 진군하는 화사한 빛으로 다가선다. 굳이 ‘이런 날’이라는 생각의 문은 굳게 빗장을 걸었고, 잠시 후 제2경인고속도로를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과 경합하듯 나란하게 달리고 있다. 나설 때만 해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주택가의 이면도로에서 큰 도로로 들어서니 한나절의 드라이브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거기다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그리하여 정해진 목적지는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용유도와 주변의 섬. 신도와 시도, 장봉도 등이 지척이지만 주변의 작은 섬은 무의도 하나로 결정했다.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이젠 두 개의 큰 다리(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육지와 섬을 잇고 있지만 이전에는 영종도로 가기 위해선 월미도나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야 했다. 카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10여 분 만에 닫는 영종도의 선착장에는 인근 바다에서 나는 각종 생선들로 회를 떠주는 좌판이 벌어졌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당시에는 삼목도와 용유도가 영종도 부근의 섬이었지만 이들 사이의 간석지를 매립한 후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세 개의 섬은 이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영종도 선착장에서 10여 분 떨어진 곳에서는 80~90년대 스피드를 자랑하던 이들이 드넓은 공터에 일정한 코스를 만들고 경주용으로 꾸민 자동차로 경기를 벌였었다. 굉음을 토해내면서 흙바람을 일으키고 질주하는 경주차들의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에 넋을 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카페리가 아닌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이용하면 된다. 편안함이 생긴 대신 기억의 한 페이지가 희미해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아름다운 낙조로 유명한 을왕리해수욕장제2경인고속도로와 이어지는 인천대교는 다리 길이만 21.23km에 이르는 국내에서 가장 긴 사장교로 주탑의 높이가 238m에 달한다. 중간 부분을 높게 만든 것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큰 배들을 위해서다. 다리에 진입하자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송도의 마천루가 도열하듯 늘어섰다. 손에도 쥐어질 듯한 여객선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하면서 휘적휘적 인천항으로 향한다. 인천대교의 이용요금은 6,200원으로 민간출자 방식으로 건설됐기에 결코 싸지 않은 금액이다.   ​ 인천대교는 다리 길이만 21.23km에 이르며 주탑의 높이는 238m에 달한다 인천대교 고속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장봉도와 신도, 시도를 가는 삼목여객터미널을 오른쪽에 둔다. 삼목교차로까지는 공사 등으로 인해 길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이곳을 지나면 ‘인천공항북측방조제’의 탄탄대로가 펼쳐진다. 아쉬운 것은 제한속도가 60km라는 것. 오른쪽 방조제 위로 보호철조망을 친 탓에 달리면서 조망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점도 아쉽다.방조제의 끝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서자 이정표가 친절하게 왕산해수욕장으로 안내한다. 때마침 간조라 겨울바다는 저 멀리 물러서 있고, 한여름 그렇게 북적였을 해변은 철이 지나 바람만 휑하다. 상점들도 죄다 문을 닫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드넓은 바다를 품고 싶은 한 쌍의 연인은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뗀다.  왕산해수욕장 입구 왕산해수욕장에서 나와 5분 정도 달리니 ‘용유도’에 펼쳐진 넓은 모래밭 을왕리해수욕장에 다가선다. 늘목 또는 얼항으로도 불리는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백사장 길이가 약 700m에 이르고 울창한 송림과 해수욕장 양쪽 옆으로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서해안에서 낙조가 아름답기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하늘을 보니 오늘은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마치 다운타운을 연상시킨다. 여러 숙박시설과 다양한 메뉴판을 건 즐비한 식당들, 그리고 잠시 쉬어가기를 권하는 멋진 카페. 차를 세우고 걸으면서 여유 있게 분위기를 감상하며 식욕을 돋궈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일부 식당에서의 호객행위가 부담스러워 선뜻 들어서기가 주저된다. 바닷가에는 많은 이들이 백사장에 추억을 새기면서 귀밑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만끽한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데다가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쉽기 때문에 평일에도 찾는 사람이 꽤 있는 모양이다.선녀바위는 해수욕장에서 ‘국립수산과학원서해수산연구소’ 방향으로 5분이면 닿지만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세월을 온 몸으로 맞아 부서졌거나 부서지고 있는 굴과 조개껍데기가 버물려 있는 것처럼 하얀 띠를 두르고 있는 해변을 ‘사각사각’ 밟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왼쪽으로 황토 빛깔의 괴석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이게 바로 선녀바위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다 펴보고 조목조목 뜯어봐도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앞이 아닌 뒤쪽 모양 때문인가? 이건 더 아리송하다. 선녀바위라는 이름을 어떻게 갖게 됐을까? 맑은 날에는 선녀들이 놀러 와서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선녀바위의 모습. 이름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선녀바위 부근에서 해풍을 맞고 있는 생선들​​머지않아 추억이 될 무의도 뱃길영종도(용유도 포함)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을왕리해수욕장에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는 영종도를 절반밖에 즐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녀바위를 지나 더 달리면 오른쪽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서해바다와 이따금씩 만나는 송림, 그리고 조망이 아주 뛰어난 식당(대부분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주메뉴)이 늘어서 있다. 길은 마시란로로 이어져 영종도 용유솔밭을 지난다. 오가는 차가 드물어 천천히 달리며 주변의 경치를 여유 있게 감상하기에 그만이다.슬그머니 시장기가 고개를 들자 유명세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황해해물칼국수’를 찾는다. 용유역 근처에 자리잡은 이 집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분점을 냈는데 각종 조개류에 황태와 새우 등으로 국물을 낸 칼국수의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여기에 갓 버무려낸 겉절이와 알맞게 익은 깍두기를 곁들여 기분 좋은 포만감을 선사한다.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인 황해해물칼국수​용유역에서 무의도는 바로 지척에 있지만 잠진도 선착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항하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배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데도 왕복 이용요금이 3,800원(외래객 기준)이나 한다. 승용차는 여기에 2만원을 더 내야 한다. 무의도까지 다리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어서 이 뱃길도 머지않아 추억이 될 듯. 주변에는 실미도, 소무의도 등의 섬이 있는데 과거에는 무의도에서 소무의도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어선을 이용해야 했으나 현재는 연륙교가 연결되어 있어(광명항 선착장에서 소무의도 사이) 걸어서 10~15분이면 갈 수 있다.  잠진-무의를 오가는 잠진도의 여객터미널 무의도에서 가장 큰 갯벌이라는 하나개해수욕장은 선착장에서 차로 10분이면 닿는다. 하나개라는 지명은 ‘큰 갯벌’이라는 뜻이라고. 주변에 호룡곡산, 국사봉 등이 있어 등산까지 즐길 수 있다.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모래가 깔린 갯벌 앞으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는데 날씨가 맑은 날이면 멀리 황해도 장산곶까지 보인다고. 바닷가에 원두막식으로 지은 방갈로가 늘어서 있으며, 드라마 ‘천국의 계단’ 세트장을 둘러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겨울의 짧은 해가 점점 빛을 잃어갈 즈음, 먼 곳으로 물러나면서 갯벌을 내어줬던 바닷물이 다시 찰랑찰랑 마중을 나온다. 겨울날의 짧은 해가 이내 바닷속에 잠기며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글, 사진 김태종 무의도의 하나개해수욕장. 하나개는 큰 갯벌을 의미한다 
TRAVEL 태백산 2016-12-09
 부드러운 웅장함과 후덕함을 품은태백산(太白山)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짐을 챙겨 곧바로 나설 수도 없었다. 어둠은 절정이었고, 그렇게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몇 번의 뒤척임 끝에 주섬주섬 옷을 여미고 문을 나선다. 짜릿한 전율이 온 몸에 흐른다. 이건 설렘이다. 미지의 세계가 부르는 신호와 교감하면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고치고, 등산화 의 끈을 조이면서 팽팽해지고 있는 이 긴장감은 분명 싫지 않은 떨림 그 자체다. ​​어둠은 동이 트기 직전에 가장 짙다는 말이 ‘태백산’ 자락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상 정보를 통해 미리 파악한 태백산의 해 뜨는 시각은 오전 6시 42분. 6시가 안 된 ‘당골 매표소’는 칠흑이다. 이 곳은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1,567m)을 오르는 여러 루트 중 하나로 태백시내와 가까워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다. 넓지 않은 주차장은 휑하니 비어 있어서 더 을씨년스러웠고, 밤바람 소리는 말을 달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해돋이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어둠을 밝힐 장비를 갖추지 않은 것이 쉽게 발길을 내딛지 못하게 한다.​ ‘밝다’는 것과 ‘어둡다’는 것의 경계는 찰나였다. 먹물보다도 더 짙었던 어둠은 어느 순간 시나브로 산자락을 타고 내달리기에 바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빛의 전령들이 개선장군처럼 들어섰다.​​태백산 등산로​ 내딛는 발걸음에 으스러지는 낙엽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1,577m의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달려온 바람이 싸늘한 미소로 유혹 의 손길을 내민다.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건 뭐야.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리는 것은 어때?’라며. 유혹과 도전 사이, 힘겨운 선택의 기로에 서 결국 내가 택한 것은 도전.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당골 광장을 지나 매년 개천절이면 단군께 제를 올린다는 단군 성전을 오른쪽으로 비껴서 돌아드니 태백산이 마중을 나왔다.​​​단군성전​​숲으로 들어서자 산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들이 부드러 운 천을 깔아놓은 듯 푹신하고 부드럽다. 내딛는 발자국에 으스러지는 낙엽들이 연신 비명을 질러대지만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냐는 듯 발걸음은 더 신이 난다. 산새들도 잠을 자는 시각. 숲은 말을 잃었다. 바람도 잦아들어 아기의 숨소리처럼 부드럽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만이 이따금씩 정적을 깨뜨릴 뿐.​​​돌돌돌 흐르는 계곡물이 잠시 발을 멈추게 한다​​ 강원도 태백시와 영월군, 그리고 경상북도 봉화군에 걸쳐 있는 높이 1,567m의 태백산은 태백산맥의 주봉이다. 산은 높으나 가파르지 않아 오르기가 수월하며 부드러운 웅장함과 후덕함을 갖추고 있다. 당골 매표소에서 장군봉까지는 4.4km.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매표소에서 2km를 채 못가서 1차 난코스가 나타난다. 당골 3교에서 반재에 이르는 500여 m의 계단이 바로 그것. 가파른 계단이 거친 숨을 토하게 하지만 활엽수와 침엽수의 경계를 넘나드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반재에서 망경사까지 1.7km도 완만한 능선이다. 망경사에서는 한국 명수 100선 중 으뜸이라는 용정에서 목을 축인 후 2차 난코스인 장군봉의 천제단으로 길을 잡는다. 단종 비각의 길 안내를 받으며 500m 가까이 오르면 드디어 정상!​​​한국 명수 100선 중 으뜸이라는 용정​​꼭대기에 이르니 어느새 새벽이 걷히고 환한 아침이다. 켜를 킨 듯 겹겹이 누운 산들이 발아래에서 조용하게 안개와 구름을 두르고, 따사로운 햇살이 온 몸을 어루만진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가운데 단풍이 든 산들은 화려한 불기둥을 뿜어대며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2시간의 등정이 주는 호사치고는 너무나 감격스런 풍경 이다.​​​조선 단종의 비각​​태백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망경사​​​가을에 겨울을 만나는 짜릿한 경험​그러나 찰나의 순간, 산 아래서 일기 시작한 바람은 능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 거칠게 내달린다. 안개와 구름은 일순간 어지러웠다. 풀이 눕고 다 자라지도 못한, 아니 더 이상 자랄 수 없어서 서글픈 나무들이 ‘얼음 꽃’을 피워대며 가냘프게, 때로는 거칠게 울음 을 토해낸다. 볼은 불에 덴 듯 얼얼하고, 귓가는 침 을 맞은 것처럼 따가웠다. 가을에 겨울을 만나는 그 순간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산에 오른 사람들은 연신 천제단으로 향한다. 천신의 영험함이 자신에게도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일 까. 속세에서 바리바리 싸온 제수 음식들을 제단에 올린 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산의 정기를 받는 모습이 비장하다. 천제단은 중요민속자료 제 228호로 ‘천왕단’(天王壇)이라고도 하는데, 매년 10 월 3일 개천절에 제의를 행하며 이를 천제 또는 천 왕제라고 한다.​​​한배단이 천제단 곁에 있다​​ 태백산은 신라 삼산오악(三山五岳) 중북악(北岳)으로, 신라인들은 북악을 진산으로 여겨 나라에서 제사한 기록이 ‘삼국사기’ 제사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에도 무녀가 참여하여 제의를 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돌을 쌓아 만든 천제단은 높이 2.4m, 둘레 27.5m, 좌우너비 7.36m, 전후너비 8.26m나 되는 타원형의 거대한 석단이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 같은 루트나 태백산의 제2봉인 문수봉(1517m)을 지나 당골 광장, 유일사와 백단사를 거치는 코스가 있다. 당골 매표소로 길을 잡으면 석탄박물관을 만나는 보너스를 준다. * 글, 사진 김태종  태백산 축제매년 1월에 ‘해맞이 축제’와 ‘태백산 눈 축제’가 열리고, 6월에는 ‘철쭉제’가 등산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7~8월에는 ‘쿨 시네마’가 개최되어 영화 마니아들을 유혹하고, 10월에는 ‘개천제’가 열린다. 등산을 계획하고 있다면 축제에 맞춰 일정을 잡으면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http://festival.taebaek.go.kr 태백석탄박물관여정을 길게 잡지 않았다면 당골 매표소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태백석탄박물관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이 박물관에서는 석탄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청소년의 교육에도 좋다. 별도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 태백산도립공원 입장권으로 둘러 볼수 있다. 이 밖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황지연못도 가까이에 있다. http://coalmuseum.or.kr 태백석탄박물관  
송월동 동화마을이 시작되는 곳 2016-11-23
​송월동 동화마을이 시작되는 곳​​​​지하철 1호선 종점인 인천역에서 이정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송월동 동화마을이 나온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인천 차이나타운’과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 글, 사진 김태종 아련한 추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에 제격인 계절, 가을이다. 문득 백설공주와 오즈의 마법사, 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흥부와 놀부, 신밧드의 모험 등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동화를 떠올려본다. 이제 그 시절의 기억들은 수명을 다해가는 전등처럼 잠시 켜지는가 싶다가 이내 꺼져버리기 일쑤고, 새벽강의 안개처럼 희미해져 간다. 어른에게 있어 동심(童心)은 새벽녘 이지러지는 달과 같이 그렇게 사라져야만 하는 걸까? 기억의 창고 한 귀퉁이에서 먼지 뽀얗게 앉고 색이 바래 막상 꺼내어도 도통 원본을 되살릴 수 없는 그런 것일까? 그래서 떠났다. 아련한 동심을 다시 꺼내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은 이제 다 자란 어른들을 행복했던 그 시절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현재의 아이들에게는 웃음으로 가득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다.  양철나무꾼  다양한 동화 캐릭터와의 만남인천 송월동에 동화마을이 조성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송월동이라 불리게된 이곳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부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마을에는 연로한 노인들만 남아 활기를 잃어버렸고, 사람들이 떠난 빈집들이 군데군데 썰렁함을 더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인천시가 꽃길을 만들고 세계 명작 동화를 주제로 담벼락에 색칠을 해 아름다운 동화마을로 만들었다.  신데렐라와 함께 춤을!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인천역에서 내려 이정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10분 이내에 동화마을 입구에 들어선다. 이곳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먹거리가 풍성한 인천 차이나타운과 실처럼 연결되어 있어 한나절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동화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동심의 세계로 빨려든다. ‘오즈의 마법사’를 테마로 한 건물에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도로시와 그의 친구들인 사자와 허수아비, 그리고 양철나무꾼의 캐릭터가 친근감을 준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도끼를 든 양철나무꾼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장이 없어 아주 작은 생물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하며, 따뜻한 마음을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난 동화속 이야기처럼 조형물은 정겨운 낙서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허수아비가 정겨움을 더한다.  허수아비 라푼젤과 백설공주  동화의 장면은 수시로 바뀐다. 멀리 ‘라푼젤’의 긴 머리를 타고 올라가는 왕자가 보이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그 밑에 갖가지 색으로 칠한 성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서 있다. 한 여인이 뽕이 잔뜩 들어간 드레스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백설공주가 분명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인은 누구지? 사악한 계모가 아닐까 싶다가도 백설공주보다 예쁘고 어려 보여 헛갈린다. 400년 사랑의 증표 별비녀가 소원을 이뤄준다며 유혹하는 곳에서는 저절로 발걸음이 멈춘다. 아리따운 여인과 왕자가 더없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며 춤을 추는 그림을 보니 신데렐라가 분명하다. 맞은편에서 심술 맞은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언니 둘을 보니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닭과 고양이, 늙은 개와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한 ‘브레멘 음악대’는 이들의 노래에 깜짝 놀라 도망치는 도둑들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영심이와 경태가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영심이’ 벽화에는 부러움과 시샘, 그리고 자신들도 그러하기를 기원하는 낙서가 빼곡하다. 그 옆에서 ‘드래곤볼’의 용이 불을 뿜으면서도 착하디착한 눈망울로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골목을 돌아 언덕으로 향하자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대한 몸을 곧추세웠다. 마치 소원을 빌면 금방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표정으로.  400년 사랑의 증표, 별비녀브레멘 음악대불을 뿜는 귀여운 용  너무 서두르지 말고 쉬어가라며 ‘개구리 왕눈이’의 아로미가 어깨를 내어준다. 살짝 기대어 맞은편의 카메라를 향해 살짝 포즈를 취하노라니 연잎을 우산 삼아 빗속에서 왕눈이와 뛰놀던 아로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가로등은 이제 ‘콩나무’가 되어 끝도 없는 하늘로 뻗었고, ‘잭’은 하늘의 성으로 나무를 타고 오른다. 그리고 육지여행이 서서히지루해질 즈음, 거북과 수중 생물들이 나들이객들을 바다속 세계로 안내한다.한국의 전래동화도 발길을 붙잡는다. 흥부가 박을 터트리자 금은보화가 쏟아지고 놀부는 심술이 날 대로 나 있다. 용왕과 용궁의 풍경을 그려놓은 ‘별주부전’에서는 거북의등에 올라탄 토끼가 용궁으로 향한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몰래(?) 구경한 뒤, 도깨비 방망이 앞에서 동심과는 거리가 먼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며시 외쳐본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잠시 쉬어가라고 어깨를 내주는 아로미와 왕눈이잭과 콩나무흥부와 놀부별주부전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이 지척에화마을을 거닐던 발걸음이 어느새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화단에는 가을의 향기를 머금은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그 너머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의연하게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상의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서자 ‘제물포구락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물포구락부는 1891년 청국과 일본을 비롯해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1901년 러시아인 사바친이 설계해 건물 안에 사교실, 당구장, 독서실과 외부에 테니스장을 설치했다. 이후 일본 재향군인회, 미군의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을 재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제물포구락부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기자가 이곳을 찾은 10월에는 ‘독일을 보다’라는 주제로 도서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시장 공관은 현재 인천 역사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1882년 신헌과 로버트 윌슨 슈펠트가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체결한 한미수호통상조약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웅장한 탑을 만나게 된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동물 모형과 나무그늘이 운치를 더하는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차이나타운 뒤편에 다다른다. ‘초한지’와 ‘삼국지’ 벽화는 사실적인 그림에 간결한 문장을 더한 것이 특징인데, 천천히 감상하며 나도 모르게 한 고조 유방이 되기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강한 힘과 기운을 일컫는 말)의 항우가 되기도 한다. 사나이들의 진한 의리가 느껴지는 ‘삼국지’의 도원결의 장면과 ‘적벽대전’의 화려한 전투장면 앞에 이르자 타임머신이라도 탄 양 2000년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차이나타운 입구 ‘삼국지’의 도원결의  차이나타운의 식당거리에 들어서면 대형 중식당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길거리에 늘어선 상점들도 중국식 만두와 공갈빵 등 온갖 먹거리로 여행객의 시각과 후각을 사로잡는다. 중국 민예품과 생활용품을 구경하고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동화마을과 자유공원, 그리고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넉넉하게 반나절 정도면 둘러볼 수 있고, 잠시 쉬고 싶으면 어느 곳에서든 차와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수도권에서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있고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접근성도 좋다. 어느 날 문득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다면, 인천 동화마을로 떠나보자. 
중국이야기 [서시의 고향을가다] 2016-11-09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서시(西施)의 고향을 가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는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중국 미인들의 운명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애꿎은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주지로 향했다.​​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이우 부근에는 주지라는 곳이있다. 저장성의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는 아주 오래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의 고향이 있다. 서시는 잘 알려진대로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중국 4대 미인의 슬픈 사연들중국의 4대 미인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먼저 중국최대의 미인으로 알려진 양귀비(楊貴妃, 719~756년)는 본명이 양옥환이다. 산시성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천성 관리로 일하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춤과 노래 솜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壽王 李瑁)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새로운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현종이 홀로 되자 외로워하는 그를위해 환관이 백방으로 미녀들을 수소문하던 중 그녀를 찾게 된 것. 그리고 환관의 집요한 설득 끝에 양귀비는 시아버지인 현종의 부인이 된다. 양귀비를 품은 현종은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녀를 위해 새로운 궁을 짓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빴다. 양귀비는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중국 미인의 기준은 가냘프기보다는 풍만한 몸매를 선호한다. 양귀비는 현종의 관심을 사기 위해 화장법을 개발했고 항상 목욕을 즐겨 흰 피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양귀비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2,000km나 떨어진 남방에서만 자라는 리즈를 매일 도성으로 운송했다. 말이 쉼 없이 일주일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다 죽어나간 말이 셀수 없이 많았다고. 현종이 정사를 멀리할수록 양귀비 친인척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들과 암투를 벌이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피해 달아나던 현종과 맞닥뜨린 성난 군중들과 호위병사들이 양귀비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종은 목숨과 양귀비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양귀비를 버렸다. 이에 양귀비는 자결로 생을 마쳤으니, 그녀의 나이 38세였다.​‘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 175~199년)은 춤과 노래에도 능했지만 달처럼 빛나는 용모가 무엇보다뛰어났다. 어느 날 저녁 초선이 달을 쳐다보고 있을때 달이 구름에 가리자 달이 초선의 뛰어난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에 숨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사실 그녀에게서 나온 말이다. 왕윤의 수양딸로 알려진 초선은 포악한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여포와의 이간질에 이용된 여자라고 전해진다. 결국 동탁은 여포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당하고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된다. 초선은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허도로 보내졌다는 설과 관우에게 넘겨졌다는 설이 있다.​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원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처지였다. 궁 안에 워낙 많은 후궁이 있었으니 황제의 눈에 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대부분의 후궁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에게 돈을 주어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려 황제의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왕소군은 그런면에 약했다. 그런 가운데 번번이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족들과 화해하기 위해 중국 여자들을 보내 달래야 하는 일행에 왕소군이 끼게 되었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원제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절세미인이 저기에 있구나” 하며 가슴을쳤다. 그림 때문에 그녀가 떠나게 된 것을 알고 크게노한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을 참형하였다고 한다. 흉노족의 호얀아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아들을 하나 낳았고, 호얀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복주루와 재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 역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주지로 향했다. 주지는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있다. 필자가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이제야 가게 되니 내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주지로 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고속철이 달린다​​오·월 대립 속에 수많은 고사성어 탄생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서시를 만나러 가는 날 고속도로에는 비가 내렸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판에는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로도 표기가 되어 있다. 일본인들도 서시의 명성을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제의 침략으로 건물 대부분이 훼손되어 1986년에 복원한것이라고 한다. 일본이 상하이를 거쳐 난징은 물론 이곳 주지까지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중국이 일본과 대등한 관계이거나 오히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100여 년 전의 중국은 종이호랑이에지나지 않았다. 만주 전역은 물론 광동성과 상하이 인근의 강소성, 저장성이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주지는 산업화가 이루어진 현대적인도시다​​서시 고향의 입구​ 서시전에 오르니 분을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을 한 서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미인으로 치는 전형적인 얼굴이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의 기준은 달덩이처럼 동그란얼굴에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를 한 인물상이다. 서시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나라의 주루오산에서 평범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난 서시는 타고난 미모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모든 이들의 선망이 되었다. 뭇 여자들이 서시 따라잡기에 열심이어서 심장병을 앓고 있던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습까지 따라 할 정도였다고. 심지어 연못의 물고기까지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넋을 잃었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 태어났다면 유명한 아이돌이 되었으리라. 서시전을 돌아 옆 사당으로 오르니 범려와 구천, 문종의 상이 나타난다.​ ​연못에 있던 물고기들마저도 서시의 미모에 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시를 말하려면 월나라와 오나라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시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경쟁구도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여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는 철저하게 원수처럼 지냈다. 오나라는 지금의 강소성, 월나라는 절강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왕 합려는 월나라를 정복하러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합려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로 만든 섶 위에서 자며 문을 드나들 때마다 부하들에게 “부차야,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냐” 하고 외치게 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출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월나라의 구천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오히려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나라의 포로가 된 구천과 범려는 부차의 노예가 되어 온갖 모욕을 이겨내며 3년간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쓸개를 매달아 놓고 이를 핥으며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훗날 부차가 중원에만 신경을 쓰고 월나라와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다시금 오나라를 정복하게되니,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다.​와신상담처럼 오나라와 월나라가 경쟁을 벌이는 동안 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할 위기에 처했으나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빠져 나왔다고 해서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나왔다.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승리를 한 배경에는 범려의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후 그는 제나라로 갔다.그리고 공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난은 같이 할 수있지만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며 길을떠날 것을 조언한다. 문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범려의 우려대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한다. 토끼사냥이 끝나고 나면 개도 결국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여기에서 유래된다. ​토사구팽이 더욱 유명한 고사성어가 된 것은후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한신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고 나서다.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조 유방은 가장 큰 공신인 한신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나중에 자신에게도 도전을 해오지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항우의 수하에 있던 종리매가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종리매를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한신은 차마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종리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한신은 그의 목을 유방에게 바치지만 끝끝내 체포되어 장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속세를 떠나 있던 장량이 한신에게 장안을 떠나라고 권유하지만 주저하다가 결국 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100만 대군을 지휘했던 천하의 한신도 토사구팽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여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던 나라의 운명 범려는 오나라의 왕 부차에게 당한 아픔을 복수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다. 여기에 동원된 인물이 바로 서시다. 범려는 서시에게 각종 예법과 노래, 춤을 가르쳐서 오왕에게 바친다. 서시의 미모에 반한 오왕 부차는 서시를 위해 궁궐을 다시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 이에 충신 오자서는 오왕에게 서시로 인해 정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으니 그녀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왕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서시의 치마폭에 푹 빠진 오왕의 절대 권력은 점차 힘을 잃어 월나라에게 패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남긴다.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범려와 함께 은둔처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물에 빠져 자결을 했다는 설, 월나라에돌아올 경우 구천이 서시에 반해 같은 처지에 빠질것을 우려해 살해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난무한다. 아무튼 미인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유명세에 시달리는 서시다.​ ​구천과 범려, 문종의 상이 모셔져 있는 고월대서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 왼쪽부터 문종, 구천, 범려​​​마타하리의 예에서도 보듯이 세계 역사는 여자들에 의해서 바뀐 경우가 많다. 특히 절대 권력을 가졌던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미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국력을 쇠진시켜 나라를 망친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하나라에서 주나라와은나라로 이어진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걸왕이었다. 하나라에게 항복한 유시국은 절세미인인 매희(末喜)라는 여인을 걸왕에게 바친다. 매희에 흠뻑 빠진 걸왕은 그녀를 위해 궁궐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곳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북을 치면3,000명이 넘는 신하들이 소처럼 그 연못의 술을 마시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매희가 좋아했다고 하니 나라가 온전할 리 없었다. 결국 하나라는 은나라에의해 패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잘나가던 은나라도 마지막 왕인 주왕이 주색잡기에 혈안이 돼 정사에는 무관심하다 결국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여기에도 미인이 등장을 한다. 은나라에 패한 유소씨(有苏氏)는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주왕에게 바친다.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에 흠뻑 빠져 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충신들의 충심어린 간언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왕도 결국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런데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얻은 주나라 역시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주나라 유왕을 위해 포나라에서 보낸 여인 포사(褒姒)에게 흠뻑 빠져 있던 유왕의 관심은 오로지 그녀를 즐겁게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절대 웃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실수로 병사 한 명이 봉화를 올려 이때문에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을 본 포사가 박장대소하며 무척 즐거워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에서 견융족(犬戎族)이 침입했다.병사들이 봉화를 올렸지만 이것이 매일 되풀이하던 유희라고 생각할 뿐 아무도 외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주나라는 그렇게 허무하게망하고 말았다.​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서시의 고향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서시전에는 서시의 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그녀가 태어났다는 주루오(苎萝) 마을은 2,000년 전에 서시가 살았던 주택을 재현해 놓았다.​​​​​​서시의 상이 모셔져 있는 서시전​서시가 생활했던 마을의 모습​​​​서시전 앞의 연못에도 서시의 상이 세워져 있다​​주루오산 위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서니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산 위에 지어져 있다. 전시품이 그다지 많지 않아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서시란 중국의 미인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일 뿐.​​​​주루오산 위에 정자가 서 있다. 이곳에 서면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서시를 추모하는 향과 초를 태우고 있다​​예로부터 중국에서도 항저우에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다. 항저우에 미인이 많았음에도 서시가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는 것은 남의 마음을 빼앗아버릴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서시를 중국 제일의 미인이라고 믿었던 중국인들의 미인에 관한 시각도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서시보다 더 예쁜 미인이 한국에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서시전을 나와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안 주인장이 한국의 화장품을 보여준다. 인터넷을 통해 샀는데 이게 정말 한국제인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알지 못하는 브랜드의 한국 화장품이었다. 어쨌거나 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이 아닐까 싶다.  *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중국이야기 [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2016-10-25
 桂林山水甲天下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  배를 타고 리지앙(Lijiang, 漓江: 이강)을 내려오면서바라보는 구이린(Guilin, 桂林: 계림)의 풍경은 필자가 이제껏 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예전에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과 화가들이이곳으로 몰려와서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서슴없이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환상적인 풍경을 안고있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낀 날이라면 시라도 한 수읊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중국의 지폐 뒷면에는 중국의 아름다운 풍광들이그려져 있다. 50위안에는 티베트 포탈라 궁전이, 1위안에는 항저우 서호(西湖)의 모습이, 그리고 20위안에는 구이린의 황부탄다오잉(Huang bu tandaoying, 黄布滩倒影)이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구이린은 중국에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 그리고 비고속철을 타고 광동성을 지나 광시성에 들어서면주위의 기묘한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는 대상으로 생각해왔던 산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마치 전북 진안의 마이산 같은 산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마이산은 2개의 봉우리가 생뚱맞게 올라와 있지만 이곳에서는그런 모습의 크고 작은 산들이 수백 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구이린의 절경은 수억 년 전 바다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상으로 돌출되어 수만 년동안 침식작용과 비바람에 씻기면서 만들어졌다.지질학자들에 따르면 가르스트(Karst)라고 하는 석회암으로 조성된 산들로서, 중국 계림과 베트남의 하롱베이가 이와 비슷한 구조다.​​광저우에서 계림까지 고속철로 연결된다​카르스트라는 형태의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들이 계림(구이린)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속철 안에서 찍은 사진) 구이린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큰 도시에서 보았던 8차선 같은 대로는 없고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연간 1,5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이지만 그리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다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도로에는 이층버스가 돌아다니고 무엇보다 모터사이클이 많다.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동남아시아의 큰 도시만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모터사이클을 운전하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아마 오토바이인 모양이다. ​​관광객을 위한 2층 버스와 구이린 시민들의 발인 모터사이클​ 구이린에는 메리어트와 쉐라톤 등 세계 유수의 체인호텔들이 대부분 들어와 있지만 한결같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작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매장은 있다. 그동안 필자는 베이징이나 난징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큰 도시에서 고대건물들을 별반 볼 수 없는 점을 특이하게 생각해왔다.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인 광저우에도 옛 성터의일부가 웨이슈 공원에 남아 있을 뿐 오래전에 지어진 건축물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구이린에서도이러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다. 중국은 최근까지도 경제개발이 모든 정책에서 우선시되어왔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과 연결되지 않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헐어버리고 새시대의 건물들을 짓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왔다. 구이린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시황 시절부터 천하의 구이린이란 소리를 들어왔고, 한때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区)의 성도였지만(지금은 난닝(南宁)이 성도) 변변한 역사적인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구이린의 중심부는 두개의 강과 네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에서봄은 베이징, 야경은 상하이, 안개는 중경, 비는 구이린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물과 무척 친숙하다. 구이린 관광은 배를 타고 강과 호수가 이어진 시 중심부를 도는것으로 시작된다. 여름에는 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을 길에서 잘 볼 수 없지만 저녁이 되면 그들은 호수로 나와 더위를 식힌다. 밤늦게까지 시내의 강과 호수를 도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 시내에는 4개의 호수가 있다​​​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도시에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가 있고 비까지 많이 내린다​ 연중 온화한 날씨를 보이지만 여름에는 섭씨 36도를 오르내려서 무척 덥고 습도 또한 높다. 겨울에는평균기온이 섭씨 4~5도 정도이고 역시 습도가 높은 편이다. 봄에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이곳을여행하려면 9월이나 10월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0위안 지폐 속의 환부탄다오잉구이린의 진면목을 보려면 리지앙(漓江: 이강)을 따라 양수어(Ynagshuo, 阳朔: 양소)까지 이어진 강을 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구이린에서 양소까지63km에 이르는 강 옆으로는 그림 같은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구이린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코스를 선택한다. 여기를 보지 않고는 구이린을 구경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구이린의 선착장에는 항상 수많은 관광선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이린은 도시 전체가 관광을 위한 도시이고 이곳 주민들은 모두 관광 가이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텔마다 그리고 길거리의 관광안내 부스마다 여행 패키지 상품과 유람선 티켓을 팔고 있다. 식당 앞이나 택시 정류장에도 안내를해주겠다는 호객꾼들이 상주를 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구이린에서 지내면서 받은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대체로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구이린에서 배를 타고 양소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강 양쪽으로 펼쳐진 비경들을 감상하다보면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2시간쯤 지나면 좀 지루해지기도 한다. 워낙 멋진 풍광이지만 너무 많으니 나중에는 조금 무감각해지는느낌이랄까.​ ​유람선을 타고 이강(리지앙)을 따라 내려가는 코스가 구이린 관광의 기본이다​​아무튼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기이한 산세 때문에 이곳을 보기 위해 국내외에서 연간 1,500만 명이 훨씬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 수익은 정부의 재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구이린 시민들의 삶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상하이나 선전처럼 돈 많은 갑부나 큰 기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구이린의 관광 시스템은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다. 전날 호텔에서 예약을 하니 아침에 관광버스가 각호텔을 돌며 여행객들을 태우고 선착장까지 안내한다. 선착장에는 수많은 유람선이 출발을 위해 정박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나룻배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생각보다 크고 깨끗한 유람선이다. 필자는 구이린에서는 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한가로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제 맛이라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예전부터 구이린에 관한 자료를 보면 묘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나룻배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장면이 꼭 나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최신 유람선이 우리를 반기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우리와 같이 배를 탄 여행객 중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 여행객도 꽤 많았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을 위해 안내원이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를해주었다.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마을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유람선보다 훨씬 작은5~6인승 배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이런 마을에서 며칠 푹 쉬었다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따라 유유히달리던 유람선이 갑자기 속력을 늦추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지붕이 낮은 작은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허름한 배가 유람선과 머리를 맞대더니 나이 지긋한 부부가 생선과 조개 등 각종 음식재료를 유람선에 전달하고 순식간에 떠나간다. 유람선에서 승객들이 주문한 음식 재료들을 이런 배를 통해 조달하는 모양이다. 모든 거래가 강 위에서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 마을들​​허름한 배가 유람선에 식재료를 팔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뗏목을 탄 젊은이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빠른 물살을 따라 내려오더니 금방 유람선에 달라붙는다. 뗏목에는 망고, 수박 등 과일이 담겨져 있다. 지나가는 유람선에 뗏목을 대고 과일을 파는 과일장수다. 물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거의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하는 위험천만한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뗏목을 타고 과일을 팔러 다니는 과일장사​​무협지를 보면 중국인들은 과장이 좀 심한 편이다.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손에서 장풍을 뿜어내서 상대방을 날려 보낸다. 이강에서 멋진 풍경이 몇 군데있는데 그 중 하나가 9마리 말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九马画山)이라는 기암괴석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억지로 꿰어 맞춰도 아홉 마리의 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하여튼 중국인들은 9마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9마리의 말이 새겨져 있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점심을 먹을 즈음 구이린이 자랑하는 황부탄다오잉(黄布滩倒影)에 도착했다.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20위안 지폐에그려진 모습과 대조하니, 지폐의 그림이 약간 과장되게 그려졌음이 한눈에 느껴진다. 천하제일이라는풍경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워낙 비슷한 풍경이 많다보니 ‘천하제일’이라는기대 효과가 반감된 걸까? 우리나라의 마이산처럼 봉우리 2개만 우뚝 올라와 있다면 마냥 신기하겠지만 이곳의 풍경은 전체가 그런 마이산 봉우리의 연속이다. 어쨌든 눈앞에 펼쳐진 황부탄다오잉의 모습은 인간이 그려낼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조각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억 년 동안 지구의 역사를그대로 간직한 위대한 자연의 보고다.​​​계림의 제일이라는 황부탄다오잉​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구이린 음식약 3시간 동안의 유람선 여행의 종착지는 양소다. 양소는 인구 5만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전체가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아니다. 기묘한 형상을 한 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있는 신비스런 모습이다.​ 양소의 환상적인 풍경​ 계림이 속해 있는 광시성은 광시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로 불린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조선족을 포함해서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좡족(壮族)은약 1,600만 명 정도로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좡족은 광시성과 구이저우(Guizhou, 贵州:귀주)와 윈난성(Yunnan, 云南省: 운남성) 등 중국 남부에 널리 퍼져 있다. 또한 계림에는 좡족 외에도 묘족, 위족, 동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살고 있다.​​​전통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양소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스와이타오위안(世外桃源: 세외도원)이다. 큰 호수를 끼고 소수민족들의 전통가옥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생활풍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또한 배를 타고 돌아봐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으니 계림은 역시 물이풍부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소수민족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관광객들을상대로 춤을 추고 노래하며 기념품을 만들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거의 없다고 한다.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중국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외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관광지에서 얻는 이익이 이들에게 들어오지 않고 정부에귀속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이다.​​세외도원(世外桃源)에서 바라본 구이린의 모습​ 구이린을 거쳐 양소에 도착하면 하루 일정의 관광코스가 끝난다. 양소에서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대부분 육로를 이용한다.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도로 사정은 별로 좋지 않다. 새롭게 도로 공사를 하고있어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내내 먼지가 폴폴 날리는도로를 달려야 했다.​​중국음식은 주로 기름에 볶는 것이 많아서 우리 입맛에는 너무 느끼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구이린의 음식은 기름지고 느끼한 대부분의 중국음식과 달리 담백하고 매콤하다. 덕분에 입맛이 까다로운 한국인들에게도 이곳 음식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이는 구이린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고추와마늘, 그리고 마를 이용한 독특한 양념 때문인데, 이 양념을 어느 음식에나 이용하기 때문에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매운 맛이 느끼하면서 무척 매운 사천요리와는 또 다르다. 덕분에 구이린에 머무는 동안 음식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이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구이린의 음식은 맵고 쌉쌀한 맛을 낸다 ​한편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오래 전부터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구이린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지닌 쌀국수 식당이 있을 정도로 오랜 쌀국수 역사를 자랑한다. 구이린 사람들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처럼 아침을 밖에서 사먹는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많이 먹는 죽이나 유토(油条)도 인기가 있지만 구이린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것은 역시 쌀국수.​​​구이린의 명물인 쌀국수 ​일전에 베트남에서도 쌀국수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다.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간단한 쌀국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입맛이 돋는다. 쇠고기 두 점과 숙주나물이 조금 올라간 것이 전부였지만 육수의 맛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반면 계림의 쌀국수는 베트남쌀국수와는 조금 다르다. 물 국수에서는 중국 특유의 약간 느끼한 맛이 나지만 비빔국수는 텁텁하면서도 끝맛은 쌉쌀한, 묘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포드 포커스로 달린 시드니 2016-10-20
​​​포드의 초청을 받아 호주 시드니로 날아갔다. 이번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일반적인 시승출장과 달랐다. 이틀을 꽉 채운 일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먹고 놀고 운전하기. 포드는 포커스오너에 어울릴 라이프스타일을 체험시켜주고자 했다. 20년 만에 찾은 시드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민첩한 포커스와 함께한  덕에 추억은  한층 더 명징해졌다. ​머나먼 지평선의 한 지점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비행기 창밖으로 아침 햇살에 노릇노릇 물든 시드니가 펼쳐졌다. 멀리서도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또렷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20년 만에 찾는 호주, 그 중에서도 시드니. 과거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눈에 비친 시드니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문득 그때의 감흥이 밀려들었다. 이번 여정은 포드 아시아태평양 지사에서 기획했다.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포드 측은 “일반적인 시승 출장과 많이 다르다”고 미리 귀띔했다. 심지어 짐을 꾸려 시드니로 떠나기 전까지도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설렘을 한가득 안고 시드니 국제공항을 나섰다. 맑고 푸른 하늘, 늘씬한 홀덴 승용 픽업. 시드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만, 엄청 추웠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느낄 수 있어기자의 이름이 적힌 포드 푯말을 든 스태프를 만나 몬데오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이날은 저녁까지 공식 일정이 없었다. 목적지는 본다이 비치. 서퍼들의 천국으로 유명한 해변이다. 시드니 공항에서 본다이 비치까지 가는 길은 단조롭고한산했다. 20년 전엔 시드니 도심에만 머물렀다. 다른 데 갈 차편도, 돈도 궁해서였다. 도시 외곽의 허름한 풍경이 퍽 낯설었다.​한 시간여를 달려 본다이 비치에 도착했다. 해변을 이웃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여름 시즌에 장기 투숙하는 서퍼들이 많은지, 콘도미니엄처럼 취사 시설은 물론 세탁기까지 완벽하게 갖춰놓았다. 짐을 대충 풀고 서둘러 바닷가로 나섰다. 과연 서퍼들이 사랑할 만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은 거셌다. 짙푸른 바다는거대한 파도를 연신 둥그렇게 말고 있었다.​​​​정오쯤 되어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처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으니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식당에서 대만과 중국 기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홍보 담당은 “다른 기자들 체크인을 챙겨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대만에서 온 기자 빈센트에게 물었다. “이번 출장 뭐하는 거래?” 빈센트 왈, “글쎄~.” 나머지 기자들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진 분명했다. 시대가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기자들은 으레 돼지저금통만 한 DSLR과 수첩을 들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 고프로나 액션캠, 스태빌라이저가 필수다. 컨텐츠도 달라졌다. 이날 함께 한 기자 넷 가운데 셋은 영상컨텐츠를 만들러 왔다. 대만에서 온 꽃미남 친구는 공중파 프로그램의 진행자라고 했다. 어쩐지 얼굴이 조막만하더라니.​나중에 만난 중국의 또 다른 친구는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다. 말레이시아에선신문사가 운영하는 방송국의 여기자를 보냈다. 장비도 장난이 아니다. 삼각대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늘 보던 친구들이 모이는 자동차 전문지 대상의 시승회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아이폰 하나로 찍어보겠다고 캠코더도 마다하고온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이날 저녁, 모든 기자들이 호텔 로비에 모였다. 중동과 호주, 아시아 각국을 아우른 다국적 기자단. 우린 포드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시드니 도심으로 향했다.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시드니의 마천루가 눈앞에 한가득 펼쳐졌다. 꼬깃꼬깃 아껴둔 호주의 플라스틱 돈을 모아 킹스크로스 인근의 한국 식당을 찾던 2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찡했다.​저녁을 먹고 돌아와 웰컴패키지를 열어 보니 일정을 소개한 책자가 있었다. 어색한 오탈자나 삐뚤빼뚤한 서체 없이 완벽한 한국어판이었다. 책자의 한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여러분은 단순한 차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서 포커스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나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사진과 영상 스태프가 대기 중”이라고 했다.​​​​라이프스타일 체험 위주의 행사다음날인 8월 24일 아침이 밝았다. 낭패였다. 창밖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있었다. 처음 겪는 겨울의 호주. 날씨는 걱정 이상으로 춥고 스산했다. 우린 셔틀을 타고 본다이 비치를 바로 옆에서 굽어보는 ‘본다이 아이스버그’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브리핑을 들었다. 비바람을 헤치고 파도를 타는 서퍼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기자는 대만 꽃미남과 한 조였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부담스러웠는지 한사코 운전대를 양보했다. 결국 기자가 먼저 몰고 나섰다. 포커스의 행렬은 샤워기로 쏟아 붓는 듯한 빗줄기를 헤치며 본다이 비치를 빠져 나갔다. 이 친구는 스스로를 방송인이 아닌, 유튜버라고 했다.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지 1년 반 정도 됐다”고 했는데, 한국 미디어에 궁금한 게 많았다.​포드가 준비한 첫째 날 여정의 테마는 ‘남부 해변 어드벤처’다. 본다이 비치를 출발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코스였다. 일반적인 시승회처럼 출발 이후 도착지까지 알아서 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중간 중간 콘텐츠를 만들 포인트와 운전자 교대장소, 커피 스톱을 마련해 지루할 짬이 없었다. 한참을 달려 로열 내셔널파크에 도착했다. 비는 아직도 그칠 조짐이 없었다.​​​​​​​로열 내셔널 파크는 호주의 흔한 공원처럼 야생동물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곳을 점령한 동물은 앵무새와 오리였다. 포드 스태프는 코알라 주식인 유칼립투스 잎으로 만든 이 지역의 전통차와 쿠키 등 주전부리를 한 상 차려놨다. 문제는 우리보다 새들이 이 간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 특히 앵무새는 끊임없이 과자를 노렸고 짬짬이 훔쳐 먹었다.​​​​ 간식을 지키는 우리와 호시탐탐 노리는 앵무새의 실랑이를, 포드의 사진과 영상 스태프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기록했다. 조명까지 동원한 스태프에게 에워싸여 있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왠지 으쓱했다. 그런데 바쁜 건 스태프뿐이 아니었다. 각 나라의 기자들은 저마다의 장비로순간순간을 기록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일반적인 시승회와 분명 달랐다. 우린 시드니 인근의 명소를 따라 밟는 투어를왔는데, 다만 이동수단이 포커스일 뿐이었다. 이번엔 꽃미남이 운전대를 쥐었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익숙지 않은지 자꾸 왼쪽 갓길로 차를 붙였다. 그때마다 “차선 가운데로 달리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꽃미남은 웅웅거리는 영어 무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교대 포인트에서 운전자를 바꾸고, 포커스의 행렬은 시클리프 브릿지로향했다. 높직한 교각 형태의 도로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해안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비바람이 워낙 드셌기 때문. 궂은 날씨 속에서도, 포커스는 네 바퀴를 지면과 밀착시킨 채 늠름하게 달렸고, 실내는 쾌적하고 아늑했다. 안팎 다듬고 1.5L 에코부스트 엔진 얹어땅거미가 질 무렵, 첫째 날 일정의 종착지인 패퍼스 매너 하우스에 도착했다. 드넓은 농장을 낀 저택을 개조한 호텔이었다. 포드는 앞마당에 유리창을 검게 칠한 포커스 한 대를 준비했다. 직각 주차보조 기능을 체험할 기회였다. 한 번에성공한 기자에겐 샴페인을 건넸다. 기자들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다른 이들의 실수에 탄식하고 성공에 환호했다. 둘째 날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이날 일정은 좀 더 운전 위주였다. 벤들리 에스테이트, 버랑고랑 전망대, 글렌브룩, 시드니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포커스는 포드의 간판 해치백이다. C세그먼트에 속해 폭스바겐 골프, 푸조 308 등과 경쟁한다. 현재 140개국에서 판매 중인 포드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지난해 전세계시장에서 40분마다 한 대꼴로 팔았다.​​​ 포드를 대개 미국 빅3 중 한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사실 유럽에 뿌리 내린 지100년이 넘었다. 1909년 영국 포드(Ford of Britain), 1916년 프랑스 포드, 1925년독일 포드(Ford Germany)를 통해 유럽 현지형 포드를 만들어오다 1967년에는유럽 전체를 총괄하는 유럽 법인(Ford of Europe)을 독일 쾰른에 설립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 시장과 궁합이 좋은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다.유럽 기반의 포드는 앵글리아, 타우너스, M시리즈, 에스코트, 카프리, 컨설, 코티나, 그라나다 등 북미와는 다른 유럽 스타일의 포드를 만들었다. 현대자동차가 60~70년대 라이선스 생산한 코티나와 20M, 그라나다도 바로 유럽 포드에서 만든 것이다. 포커스는 1998년 에스코트의 후속으로 데뷔했으며, 현행 모델은 2010년 나온 3세대다.​이번에 시드니에서 만난 포커스는 최근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최신형이다. 포드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싱크3’으로 진화했다. 애플 카플레이가 기본이고 기존의 장점이던 음성인식기능도 한 차원 업그레이드했다. 그래서 이제 단어뿐아니라 문장도 인식한다. 가령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면 주위의 커피숍을 가까운 곳부터 일목요연하게 띄우는 식이다.​​​​국내에서 판매 중인 포커스는 4도어 세단과 5도어 해치백으로 나온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5L 디젤 터보(TDCi) 한 가지로, 최고출력 120마력, 최대토크27.5kg·m를 낸다. 변속기는 6단 듀얼 클러치. 반면 시드니에서 시승한 포커스는 직렬 4기통 1.5L 가솔린 터보(GTDi) 엔진을 얹고 180마력, 24.4kg·m를 낸다. 변속기는 자동 6단 ‘파워시프트’다. 실내 구성은 국내에서와 정확히 반대다. 운전석 위치가 바뀌었을 뿐인데, 포드코리아의 배려로 출국 직전까지 몰던 포커스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계기판을비롯한 디스플레이는 정교하고 컬러풀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 정보를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워낙 다양한 요소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다 보니 실제보다 공간이 빠듯해 보이는 단점도 있다.​이번에 포커스에 새로 얹은 1.5L 에코부스트 엔진은 기존의 1.6L 에코부스트를대신하게 된다. 포드는 “배기량을 살짝 다독이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힘은 아담한 차체를 끌기에 차고도 넘친다. 특히 토크는터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화끈하게 치솟는데, 이 순간이 퍽 극적이어서 본의 아니게 ‘터보랙’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포커스의 장점 부각시킨 프로그램이날 환상적인 날씨에 힘입어 포커스의 행렬은 움직임의 템포를 바짝 당겼다.대만 꽃미남도 어제보단 오른쪽 운전석에 적응한 듯 운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포드 측은 정숙성도 강조했다. 포드의 자랑엔 과장이 없었다. 꽤 속도를 높여 달리면서도 우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플로어 카펫과 옆 유리창 두께, 엔진룸 방음에 남다른 공을 들인 결과다.​포커스의 또 다른 장점은 민첩하고 굳건한 몸놀림이다. 국내 시장엔 실용적인엔진만 얹는데, 사실 포커스의 꼭짓점은 스펙이 막강하다. 최근 나온 포커스 RS는 직렬 4기통 2.3L 에코부스트 엔진을 품고 무려 350마력, 48.3kg·m를 뿜는다.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4.6초로, 폭스바겐 골프 R보다 0.5초 더 빠르다. 최고속도는 시속 266km.​​​​1.5L 에코부스트를 타면서 RS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섀시의 잠재력을 설명하기위해서다. 신나게 달린 이날의 결론은 명확했다. 섀시가 엔진을 압도했다. 이따금씩 평정심을 잃고 과욕을 부려도, 섀시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다 받아줬다. 격렬하게 달리다 종종 노면을 놓치기도 했는데, 그건 섀시의 밸런스보단 경제적인 사이즈와 소재의 타이어 문제였다. 둘째 날은 다들 어제의 우중충한 기분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달렸다. 포드는 구간별, 운전자별로 연비 테스트를 진행했다. 가속 페달을 깻잎 두께로 밟는 ‘신공’을 동원한 끝에 기자는 평균 30km/L를 넘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2등에 머물렀다. 기름 값도 싼 말레이시아에서 ‘연비의 달인’을 보냈을 줄이야. 포드는 주차장을 막아 짐카나와 J턴 체험도 진행했다.​​​​이른바 ‘다이내믹 체험’을 하는 사이,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어느덧 각자출국 일정에 맞춰 헤어질 시간. 그새 친해진 우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본다이 비치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기자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서서히 기수를 높이는 비행기 창밖으로 시드니가 아련히 멀어졌다. 이번 역시20년 전처럼, 코알라는 코빼기도 못 본 채.​* 글 김기범  사진 포드자동차​​​
인천 송도 미래길 2016-10-18
 2010년 4월 인천 송도에 조성된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평탄해 2시간 정도 걸으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 컴팩스마트시티는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 추석과 설 당일은 쉰다.  바다를 타고 넘어온 선선한 바람이 한순간 가을을 데려 놓았다. 전혀 누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태양의 기세는 꺾일 대로 꺾였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기운마저 살갗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계절의 변화는 몸으로부터 온다는 말을 절감하는 요즘이다.​여행이라……. 마음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막상 몸과 현실은 따라주지 않아 현대인 열 명 중 겨우 한 명이 문밖을 나서는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가 있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여행이나 떠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결단을필요로 한다. 하지만 거창하게 ‘여행’이란 이름표를 붙이지않아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채우거나 비울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총 4.5km 구간의 도심 속 미래길글로벌 미래도시를 지향하는 인천 송도의 ‘미래길’은 사색을 즐기려는 이들이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려는 연인들,그리고 나들이를 떠나려는 가족들에게 추천해도 고개가 끄떡여지는 곳이다. 2010년 4월에 조성된 이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 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 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평탄해 2시간 정도만 걸으면 별 어려움 없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에서 만나는 송도 신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찾다보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다.​자, 준비가 되었다면 최대한 편한 차림으로 길을 나서자. 초입에서 만나는 ‘컴팩스마트시티’는 인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인천광역시립전시관으로,고대에서 근대 개항기의 인천으로 시간여행을 돕는다. 또한 현재 인천자유경제구역 개발을 통해 글로벌 인천으로변화되고 있는 인천의 미래를 최첨단 전시시설로 보여준다.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과 추석 및 설 당일은 쉰다. 관람료는 무료다.​3차원 곡명 형태로 만들어진 ‘트라이볼’은 그 웅장함이 눈길을 사로잡아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추게 한다. 3개의 사발모양은 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형물도 특이하지만 그 아래의 담수와 그림자가 아름답게 하모니를이루고 있으며, 밤에는 불빛을 받아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트라이볼에서는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만큼 겉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안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 좋다.​​3차원 곡명 형태로만들어진 트라이볼.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그리고 땅’의 의미를 형상화했다​​​한국 속의 작은 유럽, 커넬워크센트럴파크를 가로지르는 1.8km의 인공호수는 국내에서는처음으로 바닷물을 활용해 조성한 것으로, 폭이 최소 12m에서 최대 110m에 이른다. 호수를 따라 난 길을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면 수상택시를 탈 수 있는 서쪽의 보트하우스에 이른다. 물살을 가르며 송도의 고층건물 속으로달리는 낭만을 선사하는 ‘미추홀호’는 성인 기준으로 요금이 4,000원, 소요시간은 20분 정도로 짧지만 굵직한 추억을 갖고 돌아오기에 충분하다.​​​​​길이 740m에이르는 쇼핑상가‘커넬워크’.중앙수로 곁으로쉴 공간이 많다​​​인공호수를 오가는 미추홀호.성인 기준으로 4,000원이면 20분동안 낭만 여행을 즐길 수 있다​​인천대교 전망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다. 잘조성된 지금까지의 길과 달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건물,그리고 하늘과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이름 모를 각종 풀들이다소 거친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뒤로하고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과눈에 잡힐 듯 보이는 웅장한 인천대교가 불쾌했던 감정을누그러뜨리고도 남는다. 컨테이너로 만든 독특한 모양의 전망대는 건물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데, 알고 보니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꼽히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2010년 건축조형물 분야 대상으로 선정되었단다.​​인천대교 전망대. 컨테이너를 활용해 만든 이 조형물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2010년 건축조형물분야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걷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즈음 만나는 ‘커넬워크’는 대한민국 속의 유럽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총 길이 740m에 이르는 유럽형 쇼핑 상가로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테마로 조성되어 중앙의 수로를 따라 340여 개의 유럽풍 매장이 늘어서 있다. ​​​​커넬워크 여름 테마가시작되는 곳. 중앙수로의말과 돌고래 조형물이운치를 더해준다.​​​수로 옆에 마련된 벤치와 파라솔에서 차를한 잔 시켜놓고 앉아 느림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듯. 아이스크림, 팥빙수, 다양한 차를 파는 곳들과세련된 레스토랑들의 차림표가 윈도에 나열되어 있어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주문하면 될 일이다. 샘솟는 입맛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으면 된다​​여정은 아직도 남아 송도센트럴공원과 송도 신도시의 랜드마크인 ‘송도컨벤시아’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멈춰도 좋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면 미래길이 송도를 환하게 밝히면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호숫가 난간에 기대어 깊은호흡을 하다보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가 아닌, 오늘까지 쉼 없이 열심히 살아온 나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쉼터, 바로 송도 ‘미래길’이다.​​​​송도 미래길에서만날 수 있는조각상. 세계의탈들을 형상화한조형물이다​​* 글, 사진 김태종​​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2016-09-08
드레스덴에서 찾아낸 밀리터리 마니아의 성지​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옛 동독지역 드레스덴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은 소장품의 다양성과규모에서 첫손에 꼽을 만한 군사 관련 박물관이다. 프로이센부터 독일 제국, 두 번의 세계 대전과냉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이 걸어온 드라마틱한 역사 속의 유산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이곳은밀리터리 마니아라면 꼭 한번 가볼 만한 명소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남아 오전 중에 뭔가 할일이 없을까 빈둥거리던 차에 근처에 군사 박물관이있다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따라 나선 길. 생각지도못한 수장품 규모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 보니 금세 출발 시간이 되어버렸다. 드레스덴에 위치한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얼치기 밀덕인 기자는 몰랐지만 사실 이곳은 군사 역사 박물관으로는 유럽최대, 독일 역사 박물관으로도 빅3에 꼽히는 명소다. ​독특한 건물 속 충실한 수장품들숙소를 떠난 지 불과 5분. 올브리히트 공원을 가로지르자 모습을 드러내는 연한 베이지색 건물은 마치 거대한 금속 피라미드가 박혀 있는 듯한 기괴한 형상이다. 원래 병기고로 지어졌던 옛 건물을 바탕으로 미국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7년에 걸쳐 개축했다. 위에서 보면 ㄷ자형 건물 중간에 거대한 금속 화살이박힌 모습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부모 밑에서 성장한 폴란드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건축가 리베스킨트는 베를린 유다야 박물관, 영국 맨체스터의 국립전쟁박물관, 캐나다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등을 담당했던 건축계의 거물이다.​기본 건물은 19세기 말 빌헬름 1세 때 병기창으로 지어졌다가 1914년 작센 왕국군 박물관이 되었다. 한편포츠담에서 1961년 개관했던 독일군 박물관이 1972년이곳 드레스덴으로 이관되어 동독 군사박물관으로이름을 바꾸었다. 당시에는 동독군과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의 역사를 주로 다룬, 조금은 딱딱한 구성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면서 1990년 독일연방군에게 넘겨져 지금의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으로 거듭났다.​건물 밖에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냉전 시대를 아우르는 각종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는 물론 비교적 최근일선에서 물러선 레오파르트2와 zh2000 자주포,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다른 박물관이라면 애지중지할 물건들이지만 소장품이 넘치는이곳에서는 실내에 발을 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조명을 다소 어둡게 세팅한 실내는 1~3층에 시대별로 나누어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군 장비들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옛 동독 지역에 자리잡은 지리적 요건 덕분에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유산까지 풍성하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은 이 박물관의 장점. 비교적 크기가 작은 군용차나 자동차들은 실내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실물을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영국산 장갑차 유니버설 캐리어가 무척이나 반가웠다.​비행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건물을 나서는데 아까보았던 건물 밖 기갑차량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레오파르트1과 T-72 전차는 냉전 시절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주력 전차들이다. 현역 시절, 자신들이 은퇴한 후 통일된 독일에서 이렇듯 사이좋게 마주보며 여생을 보내리라고는 상상도못 했을 터.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묘한 감흥에 젖게 하는 광경이었다.​​​T-72M 전차 (소련, 1983)​냉전시대 소련의 기갑전력을 대표하는 존재 중 하나였던 T-72는 사실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T-62의 후계기종을 계획하던 소련군은 모로초프 설계국(오비옘트 432)에게 차기 전차 개발을 맡겼는데,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일종의 보험으로 우랄열차공장이 제출했던 오비 트 167도 계속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T-64로 제식화된 오비 트 432가 실패작으로 판명되면서 오비 트 167이 T-72로 제식화될 수 있었다.동독이 1978~86년 사이 196대 도입했던 T-72M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되었던 수출형. 장갑이 얇고 장비 등이 일부 빠진 다운 그레이드 버전이다. 이곳에 전시된 T-72M은 러시아 니즈니타길에 위치한 우랄열차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BMP-2 장갑차 (소련, 1983)​1967년 공개된 BMP-1은 병력수송과 함께 어느 정도 전투까지 가능한 보병전투차였다. 1980년에는 단점으로 지적되던 화력을 보강한BMP-2로 진화했는데 명중률이 낮았던 73mm 저압포를 30mm 기관포로 교체했지만 대량생산과 도하능력 등을 위해 장갑은 그다지 보강되지 않았다. 6기통 300마력의 UTD-20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5km, 행동반경 600km를 갖추었으며 물 위에서 시속 6km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전시차는 동독 시절인 1983년 소련으로부터 도입했던 23대의 BMP-2 중 한 대다.​​ ​​​​M109 A3 GE A2 자주포 (독일/미국)​한국전쟁을 거치며 기동력과 방어력을 갖춘 대포, 즉 자주포의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은 전차 차대에 대포를 얹은 형태였던 M107을 대체할 새로운 자주포 개발을 시작했다. 1956년 개발에 들어간 M108은 105mm 포의 위력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1961년 등장한 M109로 금세 대체했다. 70년대 중반까지 2,500대,89년까지 5,000대가 넘는 M109가 만들어졌으며 M109 A2부터는 반동을 줄인 신형 포 받침대를 장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한국 포병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K55 자주곡사포는 바로 이 M109 A2를 라이선스 생산한 것이다. 독일연방군은 1964~73년 사이 586대를 도입해 개량을 거친후 M109 G라는 제식명을 붙였으며, 1986~91년 사이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해M109 A3 GE A1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M109 A6 팔라딘, 독일의 PzH2000이 나오기 전까지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자주포였다.​​​루크스 A2 정찰장갑차 (서독, 1975)​​스라소니’라는 뜻의 루크스(lynx의 독일어)로 이름 붙인 이 차륜 장갑차는 1968년 시작해 1983년까지 408대가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사용했던 Sd Kfz 231과Sd Kfz 234의 후계자로 다임러 벤츠가 개발을 담당했다. 캐터필러 방식과 달리 고무 타이어를 사용하는 차륜 장갑차는 포장도로에서 속도가 빠르고 제작비가 싸며 승차감과 정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방어력과 험로주파성에서는 뒤처진다. 벤츠의 OM403 디젤(V10 389마력) 엔진을 얹어 전후진최고시속 90km를 낼 수 있으며 행동반경은 730km에 이른다.​​​레오파르트1 A4 전차 (서독, 1974)​​동서로 갈린 독일은 이어진 냉전 시기에 서방과 공산세력이 대립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1955년 창설된 독일연방군(Bundeswehr)은 적의 막강한 기갑전력을 감안해 미국 패튼과 영국산 센츄리온 전차를 도입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1957년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해진 프랑스와의 차세대 전차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한 독일은 독자개발로 전환, 포르쉐와 아틀라스 등이 공동개발한 차대에 라인메탈과 베르그만이개발한 포대를 얹어 레오파르트1을 완성했다.1974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이 전차는 기동력에주력하느라 방어력에 약점을 보였지만 네덜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에도 도입되어 NATO지상 전력의 일익을 담당했다. A4형은 전자식탄도계산기와 야간관측장비가 추가된 모델로1974년 하반기에 생산되었다. 레오파르트1은레오파르트2의 등장에 따라 2003년부터 점차일선에서 퇴역했다.​ ​M113 A1 GE 장갑차 (미국/서독, 1974)소련 BMP 시리즈에 대항하는 서방의 병력수송차를 미국에서는 APC(Armoured PersonnelCarrier)라고 부르는데, ‘전장의 택시’라는 별명으로 널리 일컬어진다. 그 대표기종인 M113은1960년 등장해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M59 시절부터 전통이 된 상자형의 차체는내부공간 확보를 위함이며 알루미늄 합금으로무게를 줄여 물길도 건널 수 있다. 다만 경량화에 주력하느라 방어력은 상당히 취약해 현지에서 강철판을 덧대는 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독일은 1982년 괴팅겐에 주둔한 45 보병 대대를 통해 M113G A2를 처음 도입했고 3년 후 티센-헨셸이 이를 개량했다. 디트로이트 디젤의V6 디젤 21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4km를 내며 평지에서 300km를 이동할 수 있다.   알비스 스탈워트 Mk2 FV622 (영국)유럽 전선에서 자동차의 유용성을 실감한 각국은 다양한 노면과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군용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6륜 구동에 수륙양용이 가능한 영국 알비스의 스탈워트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1,110대가 만들어졌다. 롤스로이스제 8기통 220마력 가솔린 엔진(B81MK8B)을 짐칸 아래에 두고 그 앞쪽에 기어박스와 트랜스퍼를 배치한 구조로, 완전군장한 군인 30명 혹은 5톤의 화물을 싣고 지상에서는 시속 64km, 워터제트로 수상에서 시속 10km의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다. FV622로 불린 개량형 Mk2는 적재인원이 38명으로 늘었고워터젯 성능도 개량되었다.​​​M16 MGMC 반궤도 장갑차 (미국)병력을 안전하게 전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병력수송 장갑차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 필요성이 빠르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타이어가 달린 일반적인 트럭으로는 이동성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구동륜을 캐터필러로 대체한 물건들이 개발되었는데, 바로 미군의 M3와 M5,그리고 독일군의 Sd.Kfz 251 등이다. M16 MGMC(Multiple Gun MotorCarriage)는 M3를 기반으로 대공포를 올린 개량형으로 M2 기관총 4문을 뒤에 실어 대공사격이나 지상전투에서 널리 쓰였다. 전시차에서는기관총이 제거되어 있었지만 그 강력한 화력 덕분에 ‘미트초퍼’(meatchopper, 고기 다지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HS30 장갑차 (서독)종전 후 재편된 서독 연방군은 초창기에 미국산 전차를 주로 도입했다.하지만 장갑차의 경우는 달랐다. 오직 병력 수송에만 중점을 둔 미국산M113과 달리 서독연방군은 전차와 함께 이동하며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보병전투차를 원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이스파노스이자가 독일을위해 개발한 HS30은 피탄율을 고려한 낮은 차고에 20mm 기관포를 장비했다. 그런데 당초 1만 대를 발주할 예정이었던 HS30은 공간부족 등각종 문제점이 드러난 데다 뇌물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2,000여 대가만들어지는데 그쳤다. 1956년 이를 대체하기 위한 마더 IFV의 개발이진행되면서 HS30은 1971년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크스2 A1 전투공병차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영국이 선보였던 퍼니 전차는 독일군 지뢰밭과 대전차 방어물, 토치카 등을 무력화시키며전투공병차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제시했다. 전투공병차는 말 그대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땅을파고 다리를 만들기 위한 군용차. 현역 공병차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다크스2는 레오파르트1 차대를 기반으로 크레인과 쇼벨 등으로 갖추어 기갑부대를 따라다니면서 각종 토목작업을 수행한다. 도하장비를 갖출 경우 수심 4m정도는 물속으로 건널 수도 있다. 방어용의 7.62mm 기관총과 연막탄을 갖추고 있으며 MTU의 10기통 37L 83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2km를 낸다. 1988~90년 사이 140대가 생산되었다.​  ZSU 23/4W1 쉴카 자주대공포 (소련, 1970)소련은 독일군의 자주대공포를 참고해 대구경 57mm2연장 기관포를 갖춘 ZSU-57/2를 개발했다. 탄 자체의 위력은 셌지만 발사속도와 포탑 선회가 느린데다 레이더도 없어 점차 빨라지는 제트기에 대응할 수없었다. 이런 요구에 따라 23mm 기관포 4문을 갖춘ZSU-23/4 쉴카가 1962년 등장했다. 대공포로는 최초로 레이더를 갖추고 연사속도를 높인 쉴카는 중동전쟁 당시 대공미사일과 함께 사용되어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시키다시피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스텔스 기술 개발에 박차가했다. 이론상으로는분당 4,000발도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고질적인 냉각 문제로 1문당 15초 이상 연사되지 않도록 제한했다. 1974년에는 이런 단점들을 해결한 개량형 ZSU-23/4M이 나왔다.    하노마그 AL28 (서독)하노버에서 1835년 창업한 하노마그는 증기기관을 시작으로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만들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걸작 반궤장갑차인Sd.Kfz 251을 개발했다. 그밖에도 다양한 트럭과 군용차를 만들었던 하노마그가 종전 후 처음개발한 L28은 군용 앰뷸런스나 수송용 트럭 외에 일반 상용 트럭으로도 애용되었다. AL28은뒷바퀴굴림이었던 L28을 기반으로 제작된 네바퀴굴림 버전. 1953년부터 71년 사이에 다양한버전의 AL28이 6,000대 이상 제작되었다. 4기통 2.8L 디젤 65마력 엔진을 얹었고 최고시속은70km. 하노마그는 1952년 라인슈탈, 69년에 헨셸 상용차 부문에 인수되었다가 현재는 메르세데스 벤츠에 흡수되었다.    레오파르트2 A4​1960년대 초 독일과 미국은 차세대 전차를 공동개발하기로 하고 유기압 서스펜션, 1,500마력 디젤 엔진,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관측장비를 갖춘 신형 사격통제장치 등을 탑재한 프로토타입을 KPz.70(미국은 MBT-70)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혁신적인 신기술 탓에 가격이 폭등하자 결국 파트너십을 끊고 독자개발로 돌아서 MBT-70은 훗날 미국의 M1 에이브람스, KPz.70은 레오파르트2가 되었다. 70년대 초 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지면서 신형 전차에 더욱 강력한 방어성능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레오파르트2는 1977년 서독 국방부의 정식 승인을 얻어 2년 후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1982년부터 92년까지 695대가 생산된 레오파르트2 A4 중 한 대로 개선된 사격통제장치와 신형 장갑을 갖추었다. V1247.6L 디젤 1,500마력 엔진을 얹어 55.4톤의 거구임에도 시속 68km로 달릴 수 있다. 장갑과 무기 등 꾸준한 개량이 이루어진 레오파르트2 시리즈는 현역 전차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다.​​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 발사대​​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종말고고도 요격 미사일 ‘사드’(THAAD)의 배치가 결정되면서 수도권 방어에 대한 논란이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저공으로 날아드는 스커드 미사일은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막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한국은이미 독일에서 운용하던 패트리어트 팩2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최신 팩3를 추가로 들여와 방어진영을 더 촘촘하게 짜기로 했다. MIM-104 패트리어트는 1970년대 미국 레이시온에서 미사일 방어를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대공 미사일 시스템으로 팩2(MIM-104C)는 탄도탄 대응력을 개선, 걸프전에서스커드 미사일을 격추시켜 화제를 모았다. 패트리어트라는애칭은 애국이라는 뜻과 함께 Phased Array Tracking RadarIntercept On Target(목표물을 요격하는 추적 위상배열 레이더)의 약자이기도 하다. 만 트럭에 실린 하나의 발사대에는 9기의 미사일이 수납되며 1개 중대는 5~8개의 발사기와 레이더 시스템, 전용 발전기 등으로 구성된다.  푸크스 A6 A1 장갑수송차 NBC 방어 버전푸크스는 여우를 뜻하는 독일어. 독일연방군 두 번째 차륜장갑차인 푸크스는 다임러 벤츠와 포르쉐의 조인트벤처에 의해개발되었으며 생산은 타이센-헨셸이 담당했다. 8기통 디젤428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98km가 가능하며 뒤에는 스크류 2개를 달아 물 위에서도 이동이 가능하다. 1979년 배치를시작해 주로 특수임무에 투입되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NBC 방호 버전으로 방사능, 생물학전, 화학전 상황에서도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2002~2003년에는 항구적 자유 작전(Enduring Freedom)의 일환으로 쿠웨이트에 주둔했다.​  비젤1(Mk20) 공수장갑차 (독일, 1991)기갑사단계의 카이맨? 서독 공수부대가 사용하던 크라카를 대체하기 위해 1970년대 개발된 비젤은 포르쉐가 개발에 참여했다. 1975년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 당시 독일연방군은 레오파르트2 개발에 돈을 쏟아붓느라 1984년에야 프로젝트를 재개할 수 있었다. 7.62mm 이하철갑탄이나 고폭탄 파편까지는 방어가 가능하고 20mm 캐논 외에 TOW 미사일, HOT2 대전차 미사일 탑재도 가능했다. 폭스바겐의 5기통2.0L 디젤 직분사 87마력 엔진을 얹어 400km순항에 최고시속은 80km. 2.69톤으로 0.75톤의 크라카에 비해 한결 무거워져 공중투하는 불가능하지만 대형 수송헬기인 CH-53로 최대 3대 공중수송이 가능하다. 전시된 비젤은 독불여단(Deutsch-Franzosische Brigade) 292 보병연대 소속으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니바,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활약했다.     PzH2000 자주포 (독일, 2001)한국이 자랑하는 명품 자주포 K9은 결코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바로 PzH2000과 동시대에태어난 탓이다. 1970년대에 미국산 M109를 대체할155mm 자주포를 공동개발하기 시작한 서독과 영국,이탈리아는 1986년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개발로 돌아섰다. 독일은 이듬해 새 프로젝트에 착수해 크라우스-마파이와 라인메탈이 개발을 담당했는데, 당시요구조건은 로켓 보조장치 없이 최대 사거리 30km확보, 자동 장전장치에 의한 빠른 연사속도, 60발 분량의 탄약과 장약 탑재, 높은 기동력과 신뢰성, 독자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시스템, 상부공격에 대한 방호력 등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이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막강 기갑전력과 전면전을 상정하느라 화력과성능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2000년대 실전배치를 목표로 PzH2000라는 이름을붙인 이 신형 자주포는 155mm 포신에 자동장전장치를 결합해 분당 8발을 쏠 수 있었으며 테스트에서 1분에 12발, 1분47초에 20발을 쏘기도 했다. 최신 둔감 화약을 사용한 덕분에 과열로 인한 오폭 위험 없이 지속적인 연사가 가능하다. 미국의 크루세이더 프로젝트가 어그러지고 러시아제 코아실리차SV가 쌍열포를 포기함에 따라 PzH2000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최강 자주포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대가로 엄청난 가격표가 붙었지만 말이다.    프러시안 모델 1865 드라이제 췬트나델 게베어프로이센 기술자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는 1836년에 볼트액션식 소총을 개발해 소총 역사에 혁명을 불러왔다. 기존에는 총구 앞에서 화약과 총알을 쑤셔 박아야 하는 전장식이었지만 볼트액션식 소총 덕분에 노리쇠를 당겨 뒤에서 장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야금술이나 제조정밀도의 한계로 가스가 새거나 볼트가 부러지는 문제를 노출했지만1분당 1발 정도였던 발사속도가 5발로 빨라짐으로써 전투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연사속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대열을 지어걷다가 한 발씩 쏘던 이전까지의 전투방식은 사라지게 됐다. 무기의발전이 전장의 양상을 바꾼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1866년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은 드라이제의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에게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공군용 보온병전쟁용으로 개발된 기술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경우도 수없이많다. 2차대전 당시 고고도를 장시간 비행하며 추위와 싸우던 승무원들에게는 몸을 덥혀줄 보온병이 지급되었다. 이를 발전시켜 외병과 내병사이를 진공으로 만들어 열전달을 차단하는 기술이 19세기 말에 발명되어 1904년 독일 서모스를 통해 상품화되었고, 1940년대 군용으로 처음 보급되었다.​    V2 로켓 A4패전의 위기에 몰린 히틀러는 눈엣가시 같은 영국에 큰 타격을 주고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를 원했다. 그중에서도후세에 미친 영향력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V2 로켓이다. 액체 로켓으로 추진력을 얻고, 기계식 자이로를 사용해 스스로 자세를잡으며 아날로그 계산기가 엔진을 멈추는 이 물건은 오늘날 대륙간탄도 미사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V1과 달리 포물선을 그리다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V2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V2 개발을 주도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국의 페이퍼클립작전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해 아폴로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V2 로켓과 시제품들 역시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 의해 철저하게 수거되어 뒤이어 벌어진 우주경쟁의 토대가 되었다.    프러시안 청동포불화살과 돌을 날리던 유럽의 공성전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의 등장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되었다. 17세기에 전장의 사신으로 떠오른 대포는 19세기 말 강철제련법의 발달에 힘입어 값싸고 단단한 강철제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으며, 뒤쪽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후장식 시스템의 개발로 발사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곳에 전시된 프러시아의 야포는 청동포의 마지막 시대에해당되는 188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동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날렵한 포신에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인 강선을 넣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아직 포병의 주력은 이런 전장식 청동포였다.​ ​800mm 포탄히틀러의 독특한 무기 취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포인 구스타프 열차포를 탄생시켰다. 50m 길이의 철도차량에 35m 포신을 얹은구스타프는 무게가 1,350톤에 달해 복선 철로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원래 프랑스의마지노선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프랑스가 너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쓸 기회가 없었다. 1호는 구스타프, 2호는 도라로 불렸는데,도라는 실제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800mm 구경의 구스타프용 고폭탄은 포탄무게만도 4.8톤에 달했으며 러시아 세바스토플을 공격할 때 그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1942년 크림반도에 배치된 구스타프가 발사한고폭탄은 세바스토플 시내에 떨어져 무려 높이350m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냈다. 한편 철갑탄은 천연암반 27m를 관통해 요새의 지하 탄약고를 박살냄으로써 요새 함락에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유즈29 (소련, 1978)소련의 유인 우주선 최초 발사에 충격을 받은미국이 달착륙 성공으로 응수하자 소련 역시 달착륙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N-1 로켓 개발 실패로 타이밍을 놓친 소련은 대신 우주정거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71년 살류트 1호를시작으로 우주인들이 장시간 우주에 머물며 다양한 연구에 사용했다. 1978년 8월 26일 동독군대령 지그문트 옌은 소유즈 31호를 타고 살류트6호에 도착, 8일간 우주에 머물렀다가 소유즈29호를 타고 지구로 귀환했다. 독일인으로서는 최초의 우주여행이었다.​​ 레프레센탄트 퍼레이드카 (동독)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의해 관리되던 호르히 공장에서 개발된 P240은 6기통 엔진을 얹은 고급차로 1958년까지 생산되었다. 당시에는 작센링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했는데, 인근의 서킷이었던 작센링에서 따온 것이다.이 공장에서는 1957년부터 동구권을 대표하는 대중차 트라반트가 만들어져 1991년까지 370만 대나 생산되었고현재는 폭스바겐에 인수되어 아우디 공장이 되었다. 이 차는 P240의 지붕을 잘라낸 퍼레이드 전용차로 동독 국가인민군을 위해 제작되었다. 보디는 VEB 카로세리베르케 드레스덴에서 담당했다. 동독 시절 국경일이나 군사퍼레이드 등에 사용되었다.​ AWO 425 T 모터사이클 (동독, 1952)​​전쟁 당시 무기나 차를 생산했던 기업 몇 군데가 소련 점령 하에서 아브토벨로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동독 튀링겐 주 쥘에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단기통 12마력 4스트로크 엔진을 얹은 모터사이클AWO 425를 선보였는데, 모델명의 4는 4스트로크, 뒤의 25는 250cc의 배기량을 의미했다. 최고시속 100km에 L당 33.3km를 달릴 수 있었던 이 모델은 외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BMW R23의 데드카피였지만 출력을살짝 높인 고출력형 425S나 배기량을 350cc로 키운 레이싱 버전도 만들어졌다. 생산대수는 약 21만 대.​​​​Mod 56 105mm 산악포 (이탈리아, 1956)​머신건이나 함포 등 비교적 대구경 화포에 능통한 이탈리아의 오토멜라라는 그 역사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범기업으로 종전 후 트랙터나 직조기계를 제조하던 오토멜라라는 금새 본업인 병기 제조에 복귀해 현재는 핀메카니카의 방위 부문에 흡수된 상태. 1956년 선보인 이 곡사포는 이탈리아의 산악지대를 위해개발한 산악포로 1.29톤의 비교적 가벼운 무게를 자랑한다. 게다가 간단하게 분해조립이 가능해 자동차나 노새, 헬리콥터로 공수가 가능했다. 성능과 기동력이 뛰어나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과 캐나다, 독일, 포르투갈, 뉴질랜드 등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었다.​​​바르카스 앰뷸런스 (동독)​​냉전 시절을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에서 한번쯤 보았음직한 이 원박스 밴은 동독 바르카스에서 생산한 B1000. 동독 지역 캠니츠(당시 명칭은 칼-막스-슈타트)에 있던 바르카스는 원래 덴마크인 외르겐 라스무센이 작센 주에 설립했던 프라모를 국영화한 것으로그 이름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성에서 따왔다. 1969년부터 91년까지 이곳에서 생산된 B1000은 DKW의 3기통 2스트로크 엔진을 얹고 밴과 트럭, 미니버스 등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있었다. 17만 대 이상 생산된 공산권의 대표 밴으로 우편배달과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앰뷸런스 등에 사용되었으며통일 후에도 연방군 소속으로 제한적인 용도에 활용되었다.​​ 유니버설 캐리어 (영국, 1950년대)전쟁이 꼭 크고 화려하고 강력한 무기들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 캐리어는제2차 세계대전 내내 무려 11만3,000대가 생산된 베스트셀러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기갑차량으로 연합군의 사랑을 받았다. 작은 상자형 차체에 캐터필러를 붙인 단순한 형태는 오스틴 미니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절약의 극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보병 기동력에 필요성을 절감한 영국이 개발에 들어갔지만 채용되지 못하다가 2차대전 직후 대량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다양한 버전에 비커스 중기관총, 브렌 경기관총,보이즈 대전차 라이플 등을 달았는데, 브렌 경기관총을 기본으로 한 까닭에 ‘브렌건 캐리어’라 불리기도 했다. 종전 후 1956년, 서독이 300대의 T-16 유니버설 캐리어(포드 캐나다가 생산한 미국형)를 구입했고, 동독은 전쟁 당시 연합국이었던 소련에 랜드리스 형식으로 제공되었던 것을 공여받음으로써 동독과 서독이 동시에 사용했다.   호르히 830BL 컨버터블 (독일 제국, 1938)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초기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순식간에 항복하자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그런데당시 프랑스군의 주력은 사실상의 괴뢰정부인비시 프랑스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드골과 자유 프랑스의 영향력은 아직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파리 해방을 주도하면서 급격하게 입지를 키운 드골은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프랑스의 제5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 호르히 830BL 컨버터블은 파리를점령했던 디에트리치 폰 콜티츠 중장(히틀러의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의 차고에서 압수한 것으로, 드골이 2차대전 말부터 대통령 초기인 1959년까지 사용했다. 호르히는 벤츠에서 독립한 아우구스트 호르히에 의해 1898년 설립되어 1920년대 8기통의 대형 고급차를생산하다가 1932년 아우토우니온에 통합, 오늘날 아우디의 뿌리가 된 메이커다.  트루펜파라드 25 대전차 자전거 (독일, 1925)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물자와 연료까지 바닥이 난 독일군부에서는 연합군의 탱크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 무기까지 만들기에 이른다. 바로 자전거 앞에 판처파우스트 60M 2기를 매단 대전차 결전병기다. 육상전의 황제라는 전차에 병사가 60m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판처파우스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강력한 대전차무기였다.긴 막대 부분에 넣은 추진제에 따라 30m, 60m, 100m 버전이있었으며 성형작약탄두는 무려 85%의 격파율을 자랑했다.   HK-101 반궤도 모터사이클 (독일, 1942)군용차 중에는 타이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구동륜만무한궤도 방식으로 바꾼 이른바 반궤도 차량이 있다.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개중에는 모터사이클 뒷부분에 캐터필러를 단 괴이한 물건도 있었다. Sd Kfz2 케텐크라프트라드 HK101이 그 주인공. 로터리 엔진으로 유명한 NSU가 독일 군부의 지시를 받아 1939년 개발을 시작해 공수부대나 항공기 견인용으로 활용되었다. 캐터필러의 안정적인 트랙션 덕분에 진창이 많았던 동부전선에서도 연락용이나 통신선 설치, 병력수송 등에 애용되었다.   골리앗 V 원격조종 지뢰 (독일, 1944)1차대전 때 등장한 최초의 전차 마크Ⅰ의 축소모형처럼 보이는 이것은 독일에서 1944년 등장했던 원격조종 지뢰다. 폭약을 싣고 고정목표물이나 군용차를 공격하는 데 사용된 이 유선 원격조종 무기는사실 프랑스의 아돌프 케그레스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프랑스 침공 때 강 속에 숨겼던 설계도를 독일이 입수해 개발을 진행시켰고,모터와 엔진 두 가지 동력원으로 만들어졌다. 전동식은 60kg, 엔진식은 75kg과 100kg 등 세 가지 버전이 있었다. 주로 공병부대에서사용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유타 해변(영화 ‘마이웨이’의 무대가 되었던 곳)에서 여러 대의 골리앗이 투입된 기록이 있다.​ ​AGM-88 함 대레이더 미사일 (2006)​​​월남전 당시 월맹군의 대공미사일(S-75)에 크게 놀란 미국은 적의 레이더를 전문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미 개발이 완료된 슈라이크 외에 스탠더드라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은 베트남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후계 기종인 AGM-88 함(HARM)은 레이시온에서 개발해 1985년 배치를 시작했다. 다양한 레이더 주파수를 추적할 수있을 뿐 아니라 마하2의 빠른 속도로 레이더 기지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작들의 문제점을 개량한 덕분에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방공망을 ‘탈탈 털어버린’ 일등공신이 되었다. 코소보 전쟁 때 NATO 일원으로 참전했던 독일은 구형의 타입B를사용해 세르비아의 방공망을 무력화시켰다.​ *글 사진 이수진 편집위원​​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