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RBURGRING SPECIAL 3 PRO DRIVER - 시미즈 가즈오의 뉘르 타임어택 “카타르시스? 프로 드라이버에겐 …
2008-12-16  |   16,310 읽음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지금보다 조금 젊은 내가 조금 멋쩍게 파이팅 자세를 한 사진이다. 장소는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이다. 아주 오래된 느낌인가 하면 최근의 일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 스바루 임프레자로 타임어택을 했던 2004년의 사진이다. 계절은? 오후 5시부터 독점 주행이었는데 주변이 밝았으니 여름이었을 것이다.

‘드라이빙 하이’를 프로 드라이버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그날의 기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만일에 대비해 짐을 정리하고 잠들었다
뉘르부르크링 서킷 바로 옆에 있는 서킷 호텔. 주위에는 유흥시설이 하나도 없어 밤은 고요 속에 깊어갔다. 다음날 저녁 5시에 임프레자 WRX STi의 타임어택을 앞두었으나 흥분되지는 않았다. 염려되는 것은 날씨뿐이었다.

혼자 앉아 내일 있을 타임어택을 시뮬레이트 해보았다. 1주 약 21km 뉘르부르크링의 북쪽코스, 예비 주행에서 8분 4초, 8분 5초를 계속 기록했다. 조금 더 집중을 하면 8분벽을 깰 수 있을 것도 같다.
200개나 되는 코너 중 195개는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거기서는 더 이상 기록을 줄일 수 없다. 시간 단축이 기대되는 것은 95∼96%밖에 공격하지 않은 5개 초고속 코너뿐이다. 그래서 나머지 다섯 코너를 어떻게 달릴지 그것만 생각했다.

특히 어려운 곳이 출발점에서 2km 지점에 있는 플루크플라츠였다. 시속 240km보다 조금 낮은 속도로 진입하는 초고속 오른쪽 코너다. 이곳을 제대로 빠져나가면 그 뒤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에서 속도를 낼 수 있다. 플루크플라츠를 바르게 코너링하면 2초를 벌게 된다.

그렇지만 배짱과 근성만으로는 좋은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주행기록장치가 보여주는 숫자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시속 240km에서 액셀 오프, 뒤이어 살짝 브레이크, 진입속도는 215km까지 떨어진다.
안된다. 여기는 시속 220km로 들어설 수 있다. 220km로 진입할 방법을 생각했다. 브레이킹을 조금 늦출까? 아니,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액셀 오프만으로 들어서는 것이 속도가 빠를 것이다.

시속 215km까지는 테스트해 보았으나 220km는 체험하지 못한 속도영역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더욱이 플루크플라츠 코너 정점은 너비 12m쯤으로 아주 좁다. 시속 160km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컨트롤할 자신이 있지만 220km에서는 자신이 없다.

예전에 이 서킷의 레이스에 출전해 달리면서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맨 처음 코스 위에서 눈에 띈 것은 범퍼와 타이어였다. 그 뒤 휠이 보이고 서스펜션 시스템을 발견했다. 조금 더 달리자 숲속에 일그러진 BMW의 캐빈이 있었다. 그것은 추락한 비행기처럼 처참한 모습이었다.

시속 200km가 넘게 달리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운이 좋아도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게 된다. 그래서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의 타임어택을 앞두고는 폐를 끼치지 않도록 속옷을 깨끗하게 빨아놓고 짐도 정리해 둔다. 지금까지 몇십 년 일하면서 실력이 좋은 동료들의 죽음을 많이 보아왔다. 아무리 안전에 신경을 써도 러시안 룰렛 같은 큰 위험이 따른다. 이번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

원래 술은 잘 못하지만, 이런 때도 술을 안마시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다.

경험을 넘어선 영역에서의 드라이브
아침, 눈을 뜨고 커튼을 젖혔다. OK. 비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다. 식욕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아침과 점심을 모두 보통대로 먹었다.

스바루에게 배정된 시간은 오후 5시부터 6시까지의 1시간. 아무래도 오후 3시가 지난 때부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큰 비나 큰 지진으로 중지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드디어 오후 5시, 스바루의 스태프가 한 바퀴를 돌아보고 나서 코스가 말라 있고 오일도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준비 끝. 이 서킷에서의 타임어택은 스탠딩 스타트여서 출발점에 스톱워치를 든 관계자들이 보인다. 압박감이 밀려온다.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달리기 직전 요괴를 물리치러 가는 기분이 든다. 서킷의 숲 속에 있는 뉘르부르크 성에는 요괴와 악마가 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과장한 말이 아니다.

닛산의 R32 스카이라인 GT-R 테스트 때 액셀 페달이 끝까지 밟았는데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은 경험이 있다. 달리는 중에 팬벨트가 끊어져 엔진이 멎거나 하이캐스(HICAS, 닛산의 네바퀴 조향 시스템) 역위상(逆位相)으로 초오버스티어 상태로 고정된 일도 있었다. 자동차와 타이어 테스트를 위해 지금까지 3천 랩 이상 달렸으나 ABS가 말썽을 일으켜 1초 안에 90。 나 회전하는 놀라운 요 모멘트를 기록하고, 시속 230km에서 브레이크가 한쪽만 들어 차가 옆으로 돌아버리는 등 믿기지 않는 사태도 일어났다. 더욱이 이 서킷의 이스케이프존은 정말 손바닥만하다. 뉘르부르크링에서의 테스트에 비하면 일본의 서킷이나 테스트 코스의 주행은 주부들의 배구시합 수준이다.

바바바방! 수평대향 엔진의 액셀을 힘껏 밟자 걱정과 압박감이 단숨에 날아가 버린다. 5천rpm까지 올리고 출발 신호와 함께 페달을 꾹 밟아 클러치를 잇는다. 1주 동안만 견뎌준다면 클러치는 망가져도 된다.
1주? 그렇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오일쿨러, 타이어, 브레이크 등 여러 컨디션을 생각하면 한번뿐인 승부다. 그래서 서킷 독점시간은 10분이면 된다.

클러치를 넣어 로켓 스타트, 타이어가 1회전한 순간 모든 중압감에서 해방된다. 이젠 아무런 방해 없이 나와 머신으로 완벽한 세계를 꾸미는 일만 남았다.

가장 큰 난관인 플루크플라츠까지의 2km, 타이어 상태를 파악한다. 내 스타일대로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달린다면 드라이버의 컨디션에 따른 기록의 변화는 거의 없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타이어의 완성도뿐이다. 아직까지 손으로 작업하는 부분이 많아 때로는 잘못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다행스럽게 타이어가 적당히 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플루크플라츠가 가까워지자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밤에 시뮬레이트한 대로 조금 앞쪽에서 액셀 오프, 노 브레이크로 달려들었다. 시속 220km에서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215km 때와는 아주 다르다.

보통 때보다 진입 속도가 빨라 스티어링을 의식하고 조금 빠른 타이밍으로 핸들을 꺾기 시작했다. 코너에 들어서기 전에 ‘어림짐작’으로 스티어링을 꺾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스스로 몇 십 년 걸려 이루어 놓은 논리와 경험, 기술과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의 조종. 상식 밖의 타이밍으로 스티어링을 조작하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상태는 ‘드라이빙 하이’일까? 그럴 리가 없다. 자신감 없이 스티어링을 조작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레이스나 타임어택을 할 때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자동차 전문지에는 ‘스포츠카의 쾌감’이라 쓰여 있지만, 내가 서킷에서 느끼는 것은 고통뿐이다. 경주차 상태가 좋아 폴포지션을 차지하면 태풍으로 결승 레이스가 중지되지 않기를 빌고 타임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배가 살살 아파진다. 자동차 전문지에서 때때로 보는 ‘코너에 달려든다’는 표현도 내게는 정확하지 않다.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논리적으로 옳은 조작을 정확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뜬 것은 일순간뿐이었다
플루크플라츠 코너의 정점에서 엔진 회전이 보통 때보다 300rpm 높았다. 성공! 그러나 성취감은 없다. 거꾸로 실패할 수 없다는 압박감이 더 조여온다. 남은 4개 난관도 99점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내달렸다. 보통 때 필자는 메르세데스 벤츠 E클래스를 타면서 일반도로에서는 4매틱과 EPS에 의지하고 모험은 안한다. 그래서 이런 장소에서는 행운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마지막 2km의 직선로. 요철의 영향을 안받도록 고른 노면을 골라 달렸다. 뒷바람이 불어주기를 빌면서 내달렸다.

드디어 1주 골인. 피트에 들어서니 7분 59초. 그러나 여기서도 쾌감이 머릿속을 뚫고 지나지는 않았다. 그냥 멍한 상태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함께 애쓴 엔지니어가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보자 잠시 목이 메었다. 그렇다, 1993년에 처음 임프레자로 이 서킷을 달렸을 때는 8분벽을 깨는 것은 꿈속의 일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고양된 것은 그 순간뿐이었다. 곧바로 ‘55초를 기록할 수 있을지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6시.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오후 8시 50분에 출발하는 JAL을 예약해 두었었다. 보통대로 내 차를 몰고 아우토반을 내달려 공항까지 약 1시간 반. JAL기에 오르자 승무원이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PC를 켜고 NAVI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드라이빙 하이’ 이야기인데 너무 담담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숨김없는 프로 드라이버의 모습이다. 나도 뛰어난 스포츠카로 하코네의 산길을 드라이브하면 즐겁다. 그러나 서킷에서는 쾌감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액셀을 밟아대는 것일까.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른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액셀을 힘껏 밟은 젊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뉘르부르크링에서의 타임이 2초 늦어졌다고 생활에 지장이 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사의 경계선까지 내달린다.

한마디로 지기 싫은 것이다. 이길 자신도 있다. 그것은 드라이빙의 쾌감이라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사명감인 것 같다. 결국 프로 드라이버의 ‘드라이빙 하이’는 과정에는 없고, 기대에 부응한 결과에만 있는 것 아닐까.

뉘르부르크링의 코스가 내 영혼 깊숙이 어떤 호소를 해 오는 것도 액셀을 끝까지 밟는 이유일지 모른다. 이 서킷을 달릴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이 깨끗해진다. 나에게 타임어택을 부탁해오는 이가 있으면 일당이 5천 엔(약 6만 원)이라도 달리겠다. 나는 이 서킷에 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F1 머신으로 뉘르부르크링을 달려 7분벽을 깬 니키 라우다를 생각하면 8분벽을 깼다고 요란하게 파이팅 포즈를 하는 것도 멋쩍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 편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냉정해진다. 
결론적으로 레이싱 드라이버는 ‘드라이빙 하이’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못된다. 초고속 달리기는 즐거운 취미가 아니라 목숨을 건 직업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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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때 시미즈는 절대로 이런 짓은 안한다. 그런데도 파이팅 포즈를 한 것은 뉘르부르크링의 요괴를 물리친 성취감 때문일까뉘르부르크링의 유명 코너인 카라치올라-카루셀을 지나고 있다. 뱅크로 된 고속 헤어핀 코너로 노면이 거칠어 매우 까다로운 곳이다 “타임어택 때는 죽어도 액셀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카운터스티어는 최소로 한다.”(시미즈)뉘르부르크성을 에워싸는, 21km 길이의 뉘르부르크링크 북코스. 일반 공개 시간에는 트럭과 버스까지도 달릴 수 있다7분 59초 41. 꿈속의 일로 생각되던 8분 벽을 깼다“노면에는 독일어로 ‘파이팅 임프레자’라고 쓰여 있다…는 것은 거짓말. 테스트팀과 관광객들이 노면에 낙서하고 간다.”(시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