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가을이의 사랑 2004-01-12
‘가을이’는 얼마 전 내가 새로 산 승용차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새차가 나에게 오던 날은 10월의 어느 맑은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쁘지요. 별 싱거운 사람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애완동물도 아닌데 자동차에 이름까지 지어주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지난번에 타고 다니던 작은 차에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꼬박 10년을 타면서 21만km를 주행했으니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한 셈이지요. 그러면서 단 한번의 사고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년은 더 타야지’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이제 그만 차를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워낙 간사하고 변덕스러워서 그런 말을 몇 번 듣다보니 슬슬 타던 차에 불만이 쌓이게 되었지요. 힘도 달리는 것 같고 소리도 요란해진 것 같고 주유구가 열리지 않아 일일이 열쇠로 열어주는 것도 창피하고……. 그러면서 세차는커녕 앞 유리에 눈구멍만 보일 정도로 대충 닦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에 탄 사람이 제 차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요. 전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이놈의 똥차 이제 갖다버려야지.” 차를 사고 처음 해본 소리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차를 타려는데 아뿔싸 누군가가 뒷문짝을 사정없이 찌그러트려 놓고 사라진 것입니다. 수소문해봐야 그 사람이 나타날 리 없고 차 앞에서 헤드램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차가 딱해 보이는 것입니다. 어제 공연한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득 중고차가 필요하다고 했던 사촌동생이 생각났습니다. 전화를 했지요. 아직도 씽씽거리고 잘 달리는 녀석이니 조금 손봐서 타고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대전에서 서울로 차를 갖다주는 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 주어서 고맙다고. 사촌동생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고 사라져 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해지더군요. 그런 걸 보면 그 녀석에게도 정이 꽤나 붙었던 모양입니다. 또 한 해를 지웁니다. 우리는 또 다시 소망을 빌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 소망들이 거의 대부분은 나를 위하거나 아니면 내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기원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원해 주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새해에는 그런 기원들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가을이’에게도 올 한해 조심해서 잘 다니라고 보네트라도 쓰다듬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알아듣기야 하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그렇게 하면 ‘가을이’가 나를 잘 보살펴 줄 것이라고 믿게되니, 그게 결코 부질없는 짓은 아니겠지요.
프라이드 베타를 끌고 나온 남편 2003-12-12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난 그의 선한 눈매와 똑똑 떨어지는 논리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약발’은 정말 오래 가지 않았다. 세 번 네 번 만나다 보니 금세 공통화제는 바닥났고, 어쩐지 처음보다 말이 없어진 그가 무척 따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갈등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재미없지만 특별히 나무랄 데 없는 남자를 견디며 더 만나보느냐, 아니면 소모적일지 모르는 관계를 이쯤에서 그만 접느냐.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기아 프라이드 베타다. 당시 회사에 다니던 나에게 어느 날 아주 속상한 일이 생겼다. 마침 그의 전화를 받고는 탈출구 없던 푸념을 시시콜콜 털어놓게 되었다. 한참 내 하소연을 듣던 그가 대뜸 회사 앞으로 오겠으니, 퇴근 후에 보잔다. 그는 들어 주고, 나 혼자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어질 것 같아 그러라고 했다. 근데 그는 혼자 나오지 않았다. 떡 하니 차를 끌고 나왔던 것이다. 푸르스름한 잿빛 프라이드 베타. 비록 멋진 스포츠카는 아니었지만 차가 있어 서울을 벗어나 한강을 끼고 달릴 수 있었고, 양평의 유명하다는 순두부집에서 맛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그만이 아는 옛길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뚜벅이인 그가 우울한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하여 후배한테 부탁해 차를 빌려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니, 그 정성과 배려가 눈물겹게 고마웠다. 회사 일로 울분이 쌓여 극도로 예민해지고 온 신경의 끄트머리들이 팽팽히 조여진 상태의 나에게 그것은 백 마디 재치 있는 말과 유머를 능가하는 초강력 안정제였다. 그냥 한번 차를 빌려 갖고 나온 그가 그리 감동을 줄줄은 어찌 알았으랴. 지금 생각해보면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린 식당이나 극장,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와는 달리 둘만의 공간에 오붓하게 갇힐 수 있었고 결국 첫 키스로 내몰릴(?) 수 있었던 것이다. 프라이드가 우리를 다시금 엮어준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수원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서울하고도 동북의 끝에 있고 그의 집과 직장은 수원. 상당한 거리였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에게는 좀 과장하자면 형벌과도 같은 시기였다. 이런 시련이 남들에게는 더 뜨거운 사랑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달라 보였다. 성격상 그냥 포기하거나, 불같은 사랑은 애초에 꿈도 안 꾸거나. 어느 쪽도 상대방을 만나기 위해 두 시간 넘게 대중교통에 몸을 맡기진 않을 듯 싶었다. 게다가 차 끊어지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평일 늦게까지 일하는 그는 서울로 오고 싶어도 주말에만 시간이 났다. 나에게도 수원은 너무 먼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니 주말이 되면 서로 상대방이 자기 쪽으로 와주길 바라다가, 다시금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때 프라이드가 두 번째로 우리를 찾아왔다. 차를 한 대 더 갖게 된 후배가 그 ‘푸르스름한 잿빛 프라이드 베타’를 내 남자친구에게 아예 줘버린 것이다. 덕분에 남자친구는 평일 늦은 밤에도 내가 보고싶을 때 지체 없이 달려왔고, 우리는 다시 ‘꾸준히’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린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 프라이드 베타 요놈도 아직 함께 있다, 비록 머플러가 나갔는데도 주인들이 손볼 생각을 안 해 탱크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그러고 보니 요놈이 자꾸 사람의 얼굴을 닮아 가는 것 같다. 바로 남편의 모습 말이다.
아침희망과 함께 떠났던 추억 2003-12-12
경마로 유명한 독일 국경도시 아헨, 역에 내리면 마상(馬像)의 역동적 질주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헨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와 경계하고 중부도시 프랑크프루트에서 4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브레멘에서 유학하던 나는 주말이면 아헨에서 정보공학을 공부하던 막내와 만나곤 했다. 배관 시스템을 건물 밖으로 둘러친 모습이 이색적이던 아헨병원의 화려한 치장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조카 한이가 태어나고 국경도시의 매력을 안겨다 준 아헨은 그래서 더 친근한데, 벼룩시장도 진풍경이었다. 동생의 아파트 바로 밑 공터는 한국인 상당수가 부러워하는 차종들이 가득한 중고차 전시장이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폭스바겐을 비롯한 전세계 유명차들이 중고답지 않게 나를 유혹했다(이 흔한 차들을 한국에서 마음껏 타볼 수 없는 현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여름 캠핑이 계획되고 봉고쯤 되는 12인승 차를 빌려 나와 막내, 주변인들이 벌이는 여름 나들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새벽 브레멘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오랜만에 육개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독일에서 금지된 고사리 채취로 육개장을 맛있게 끓여주던 한이 엄마의 모습과 집안에서 금연을 강조했던 대목은 퍽 인상적 담론으로 여겨진다. 아헨을 벗어나면 곧장 아우토반으로 벨기에, 프랑스로 연결된다. 프랑스 도심 한복판에서 여장을 풀었다. 색다른 체험, 캠핑 플라츠(유럽 전역 도심에 텐트를 치고 잘 수 있도록 만든 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캠핑족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야외에 있는 호텔의 자유 공간 정도 되는 이곳은 구속의 분위기를 싫어하는 젊은 자유인들이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오스트엔데에서 벤츠를 밤배에 실은 일행은 엄청난 냉방의 위력을 실감한 채 밤을 보내고 아침 런던에 도착했다. 여권에 런던 도착이라는 스탬프가 하나 더 찍혔다. 한국에서도 이제 흔히 눈에 띄는 간이 식탁에서 호사스럽게 한국음식들을 포식하고 대영 박물관을 비롯한 이곳 저곳을 살펴본 뒤 하이드파크 캠핑 플라츠에서 야영생활을 만끽했다.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으로 우리를 감싸며,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을 묵묵히 동행해준 벤츠 승합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제 겨울로 진입하면 그 벤츠 승합차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아니면 이태리 같은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나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세월이 가면 아름다운 추억은 새로워지고, 계절이 깊어지면 사람들이 더욱 그립다. 내 차들이 하나씩 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나는 떠나가는 그들에게 우리가 같이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 함께 했던 비밀, 비경을 같이 볼 때 느꼈던 동감을 떠올린다. 동물들이 가족으로 자리잡듯, 이제 우리의 차들도 가족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때론 불협화음 속에 속을 썩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차는 사랑을 베푼 만큼 사랑을 줄줄 아는 멋쟁이다. 우리의 차가 동성임을 아는 것도 재미있다. 남성에게는 여성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여성에게는 약간의 터프함과 스피드감을 일깨우는 여유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항상 아침의 신선함을 일깨우며 동녘의 붉은 해를 희망의 징표로 내세우는 우리의 차들로, 우리의 생활이 더욱 즐거웠으면 한다.
나뭇가지의 이슬 2003-12-12
11월 중순 아침 7시. 2박 3일 일정으로 부산 해운대에서 강원도 태백의 수도원으로 차는 달린다. 1950년대에 이 땅에 정착해서 복음을 시작한 영국인 대천덕 신부님이 지으신 그곳 수도원은 일반인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무료 숙식할 수 있는 곳이다. 몇 일 전 미리 전화 예약 후 지친 몸과 마음을 휴식하기 위해 떠난다. 그곳은 정해진 규율에 맞춰 생활하며 기도와 묵상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곳을 목적지로, 간단한 세면도구와 겉옷을 챙긴 후 35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빼곡한 방풍림과 푸른 해안선의 은빛 모래알은 찰나의 풍경에서 감각의 눈부심으로 자극된다. 비에 젖은 국도는 가을의 섬세함으로, 길 위에서 떠나는 자의 배면을 적시고 차창에 퉁기는 작은 물 알맹이와 송진 냄새는 도시를 떠나는 일탈의 시작이다. 알맞게 내리는 가을비 속에 태백에 도착하니 부산과는 온도가 다르고 살갗이 서늘하다. 예수원은 일반의 차를 주차할 수 없는 규정으로, 태백의 기차역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수도원을 경유하는 마을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구불구불하고 협소한 산길을 돌아 천천히 달리고 오후 햇살에 꾸벅꾸벅 조는 촌로들이 정겹다. 창 밖은 막 추수 끝난 고랭지배추밭이 산기슭을 따라서 파도처럼 이어져 있다. 간혹 덜 자란 채 추수되지 않은 몇 포기의 배춧잎이 햇빛을 받아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도원에 도착해서 간단한 예약 확인을 마친 후, 홑이불과 숙소를 배정 받고 여장을 푸니 오후 5시다. 저녁 타종소리에 맞춰 예배실에 들어서니 먼저 온 백여 명의 사람들이 저녁상을 기다리고 있다. 잡곡밥과 김치와 시래깃국의 간소한 식단을 모두 맛있게 먹고서 저녁 기도를 한다. 초심자인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만, 종교에 관계없이 두레 공동체의 이곳 분위기와 정서가 편안하다. 다음날 아침 5시에 일어나서 6시에 모여 기도 후 묵상하고 식사 후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수도원 둘레를 산책한다. 이곳의 집들은 모두 돌집으로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나무와 슬레이트로 덮고서 갈대로 이어 놓았다. 돌집은 건축비가 생각 외로 절감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따뜻하다. 돌의 자연스러움으로 집과 산이 형체가 닮아서 멀리서보면 분간하기 힘들다. 수많은 생각의 알맹이들이 표류하다가 정지하듯 반영된 형상은 태백산 준령의 이 지점에서 만난 후 수많은 나와 대면하고 있다. 잠시 후 서늘한 늦가을의 햇살에 내 모습은 증발할 것이고, 나무들은 광합성 운동으로 겨울채비를 할 것이다. 첫 햇살에 나무들의 짧은 그림자가 시작되면 나는 모든 곳에 있었으나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부산의 화실로 돌아오니 미완성된 그림 속의 인물이 나를 본다. 내 속의 숙주를 보듯이. 나는 반갑고, 또한 그것이 텅 빈 들판의 환각임을 알고 있다. 나는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려진 흔적을 경계한다. 현실의 표면과 인체의 내장을 지나가는 사이버틱한 공포의 이 세계에서 사유도 행동도 광대한 네트워크 속의 해협 위를 부유한다. 나는 태백에 있었고 지구의 끝에 있었으며 사해의 소금물에 저려 있고 전자공간 속 수십 억 조의 주사선과 이라크의 수많은 시신 속에도 있다. 그러니 선과 색채에 미혹되지 말 것. 며칠 후 태백의 야산 준령에 두고 온 내 혼이 몸을 찾아서 화실의 문을 두들기면, 그 또한 냉담할 것. 여행이라는 체험과 흔적에 출발과 끝은 처음부터 없었으며, 생의 깊은 숲길에서 사물에 미혹되지 않고 스스로 제 갈 길을 걸어가는 헤아릴 수 없는 이것. 집으로 가는 길들의 여정에서 결국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지점에서 이곳도 내 집은 아닐 것이다. 순간 창문에 날아들어 머리 박고 퉁겨지는 새 한 마리…….
노란 은행잎과 자동차산업 2003-12-12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이맘때면, 대학시절의 가을이 생각난다. 나의 대학시절인 70년대 초, 가을이 되면 대학은 항상 문을 닫았다. 유신과 긴급조치 등으로 학생들은 데모를 하고 대학은 휴교를 하거나 아예 휴업하여 아무도 캠퍼스에 들락거릴 수조차 없었다. 공과대학에서 자동차공학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째가 되던 1972년 가을에도 어김없이 휴교를 했다. 당시 필자는 과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얼마만큼 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알지 못했고 또 그 누구도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않아 스스로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그때 공과대학에서 발행하는 학생잡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상논문을 모집하고 있었고 겸사겸사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미래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동차산업의 현실에 직접 부딪쳐 살펴보기로 했다. 1972년 우리나라 자동차생산은 1만8천여 대였고 그해 신진자동차와 기술협력하고 있던 일본 도요타가 주은래 4원칙에 따라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서 한국을 버리고 철수하여 도요타 대신 GM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해이기도 했다. 그때 GM코리아는 서울 충무로 근처에 대형 사옥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 자동차회사였다. 또한 피아트와 기술제휴로 피아트 124를 생산하던 아시아자동차는 당시 국립도서관 옆(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료수집차 이 회사 기획실에 갈 때는 항상 소리나는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라는 논문을 쓰던 당시, 나는 한국 자동차산업이 잘 될 것 같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가졌다. 물론 그때 쓴 논문이 당선되어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던 기억도 아련하다. 그때부터 자동차산업과 인연을 맺은 후 공과대학 졸업 후 자동차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대학교에 와서 자동차산업에 대한 공부도 하다보니 30여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자동차는 이제 나의 업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연간 310만 대의 자동차를 만드는 생산대국으로 성장했다. 자동차 무역 흑자액은 지난해 기준 139억 달러로, 자동차는 이제 국내 최대 흑자산업이 되었다. 우리 자동차산업이 이렇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또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 일본 자동차와 일본 전자제품이 판을 치는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일본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자동차와 TV, 핸드폰 등의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우리의 경쟁력은 결코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일본과 한번 겨루어보자는 경쟁심과 자립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정책과 기업전략을 수행한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되고 없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1974년 정부는 한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개발정책을 제시했고 이에 화답하여 국산모델 자동차를 개발한 기업은 1967년 창립되어 생긴 지 몇 해밖에 되지 않은 현대자동차였다. 이때 개발한 자동차는 국내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또 수출 길을 텄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 우리나라는 연간 160여만 대의 차를 수출하는 ‘자동차 강국’이 된 것이다.
첫 일본 여행 때 받은 ‘문화충격’들 2003-11-12
처음 일본을 여행했을 때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예약해놓은 숙소를 찾는데 자칭 ‘인간나침반’을 자부했던 길 찾는 솜씨도 웬걸, 실력 발휘를 못하였다. 지도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오후 8시가 넘으면 거의 새벽 2∼3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본의 길거리에 지래 무서움을 느껴서인지 방향마저 헤매기 시작했다. 인적도 없고 불을 밝힌 곳은 편의점뿐. 종업원에게 물으니 연실 “스미마셍”을 외치며 갸우뚱한다. 급기야 주인장까지 호출했더니 다행히 따라오란다. 찾았구나. 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로 치자면 통장 집이다. 통반장에 급기야 순경까지…… 애고 애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한참만에 찾긴 찾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방이 없단다. 자신들 실수라며 택시를 부른다. 친절하기가 우리나라까지 소문난 MK택시다. 기본요금이 우리나라 돈 7천 원이나 돼 웬만한 배낭여행자에게는 그림에 떡인 택시까지 타보다니 좋긴 좋은데 택시비는 어떡하지? 마치 귀빈을 모시는 듯한 매너와 편안한 운전에 심장 박동수보다 더 빠르게 올라가는 미터기 숫자가 당연하게 느껴질 즈음, 운전기사가 길을 잘 모르는지 차를 세운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미터기를 꺾는다. 자신이 길을 못 찾아서 지체하는 것이니 그 시간 동안의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 일부러 돌아가는 일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 참으로 신선하였다. 조금 후 숙소에 내려주면서 연실 고개를 조아리며 오래 걸려 미안하단다. 뜻밖의 친절함에 택시까지 공짜로 타봤으니 우리가 더 고마운 일인데 말이다. 문화적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다음날 관광을 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다음에야 승객들이 일어서서 내리는 것이다. 곡예를 하듯이 위태하게 비틀거리며 미리 걸어 나오지 않아도 되고, 많은 승객들 사이에 끼어 내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즉, 맨 뒷좌석에 앉은 사람조차도 정차한 다음 천천히 걸어 나와도 누구하나 눈치 주는 이 없고, 거동이 불편한 분이 천천히 타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출발하는 일도 없다. 운전기사 좌석 뒤에는 커다란 화살표가 있어 좌회전, 우회전을 알려주니, 좌로 혹은 우로 쏠려 타인의 발을 밟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버스정류장에서 승객들을 내리고 나면 버스에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쪽으로 버스가 조금 움직인다. 뜀박질을 잘한다든지 운 좋게 먼저 탄다든지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부러운 모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도 나가는 입구를 잘못 찾아 배로 발품을 판다든지 하지 않는다. 객차에서 내리면 바로 눈앞에 이정표가 보이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이정표는 헤매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그네들은 운전자 혹은 보행자의 입장에서 헤맬 것 같은 곳에다 바로 ‘답’이 될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 놓는다. 도로에서도 철저하게 보행자 우선이지만 무조건 규칙 제일은 아니다. 정지신호라도 보행인이 없으면 그냥 달리고, 무단 횡단이라도 보행인이 있으면 무조건 서는 합리적인 적용과 클랙슨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높은 시민의식을 쉽게 볼 수 있다. 작지만 평범하지 않은 친절과 우리네와는 다른 소소한 차이점이 부러움과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금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첫 여행이다.
내 기억 속의 포니 2003-11-12
한두 달 전인가 볼일이 있어 국회의사당 근처에 갔다가 지금은 사라진 현대 포니를 본 적이 있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신기한 듯이 그 승용차를 쳐다보았다. 물론 지금의 10대나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에게는 생소한 차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대구에 살던 우리 집은 차가 없었다. 우리 반 70명의 친구들을 통틀어 한두 집 정도나 차를 가질 정도로 승용차는 당시 부의 기준이었다. 그래도 나와 내 친구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자동차 정비소로 가곤 했다. 용돈이 없던 우리가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범죄(?)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말이다. 나와 내 친구들의 가방에는 항상 일자 드라이버와 십자 드라이버가 있었다. 그걸 가지고 학교가 끝난 뒤 직장인이 많이 있는 건물의 지하주차장이나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다니며 포니 승용차의 말 모양 엠블럼이나 크라운 승용차의 왕관모양 엠블럼을 몰래 떼어냈다. 그걸 하나에 300원, 왕관은 귀하니까 500원을 받고 정비소에 팔아 용돈벌이를 했던 것이다. 물론 정비소 아저씨도 우리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갖고 온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놈들! 또 왔구나. 재주도 좋지”라며 흔쾌히 받아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들의 이상한 돈벌이는 계속되었다. 매번 같은 도시락 반찬에 질린 우리들은 벌어놓은 사업수익금(?)을 가지고 점심시간이면 선생님 몰래 학교 담을 넘곤 했다. 그리곤 지금이나 당시나 인기최고인 자장면으로 점심을 대신해, 주위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예나 지금이나 나쁜 짓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한 친구의 어머니가 우리 패거리들의 돈 씀씀이가 헤픈 걸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그 아들을 흠씬 혼내면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친구 엄마는 하염없이 울다가 학교로 찾아와 담임선생님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말았다. 뒷이야기는 상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학교에서 하루종일 혼나고 매맞고 집에 가니, 선생님께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도 무섭게 매를 드셨다. 다행히 어머니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인지, 아버지께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날 이후로는 포니 승용차의 앞뒤로 붙어있는 백마만 보아도 소름이 돋곤 했다. 물론 지금은 재미난 추억이지만. 그 날 이후 차를 갖고 있는 선생님들은 우리가 모여서 노는 것만 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이놈들아, 내차는 건드리지 마라.” 그때마다 우리는 겸연쩍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그 옛날 포니를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일이 생각나면서 싱긋 웃음이 돈다. 그때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아마 길을 가다가 포니를 보면 같은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그려보지 않을까!
타고난 초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가라사대 2003-11-12
제 주인은 한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지요. 맨 처음 이 주인을 만난 것은 2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에 하고많은 운전면허증 소지자 중에 하필 초보일까 하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액셀 페달을 밟아야 할 때 브레이크를 밟지 않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 액셀 페달을 밟지 않나. 휴우~ 진땀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브레이크를 그렇게 갑자기 밟아대니 제 몸이 자꾸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에휴,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전 주인은 저를 너무 잘 다뤄 주셔서 7만km를 뛰었는데도 새차 같다고 여기저기서 칭찬일색이라 제 어깨가 으쓱할 때가 많았었는데. ‘아 옛날이여~’ 유행가 가사처럼 옛날이 그립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 팔자가 뒤웅박인걸. 그런데 이 주인 갈수록 가관입니다. 속도 무진장 안냅니다. 가끔은 쌩쌩 밟아줘야 자동차로 태어난 스트레스를 확 풀기도 할 텐데, 이건 달팽이보다 느리니.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왜 자꾸 박는 겁니까? 후진하다 받아, 전진하다 받아. 제가 무슨 프로레슬러도 아니고. 어떨 땐 아찔하게 아예 중앙선까지 침범하네요. 그러니 제가 심장병 걸리지 않겠습니까? 병원에 들락날락, 건장한 체력의 소유자인 제가 졸지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된 것이지요. 이런 사람 정말 말로만 들었지 처음이었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인 사람은 드물 겁니다. 한 번은 차 별로 없는 일요일날 운전연습을 당당히 혼자 나가더군요. 어쭈! 운전 몇 주 했다고 담배까지 꼬나 무네요. 참 내. 별거 다하더군요. 음악도 크게 틀고. 터널을 지날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더니 담배 재를 터는데 그게 바람에 차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 후 이 사람 행동 보십시오. 그 재 턴다고 머리 아래로 숙이고 가다가 그만 터널 벽을 툭!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지, 다른 차들이 하나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대형사고 낼 뻔했습니다. 내가 못살아~내가 못살아~하는 말이 제 입에 붙었습니다. 몸에서는 예전에 안 나던 골골골 소리도 나고. 또 한번은 교차로에서 신호에 딱 걸려 중간에 서 있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러면 그냥 빠져나갈 것이지 거기에 왜 또 섭니까? 진땀 무지 흘리더군요.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제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다른 차들을 보면 괜히 자괴감에 손가락질을 하는 거 같고, 클랙슨이 울려도 다 저보고 비웃는 소리로 들리더라고요. 정신감정 한번 받아야 하지 않을지 심히 걱정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조금 지나니까 음주운전까지 하더군요. 좋은 것은 안 배우고 못된 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만 배우고 다닙니다. 다행히 요즘은 음주운전을 안 하더군요. 그나마 정신차렸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는 좀 나은 편인가 봅니다. 제 주인 옆 좌석에 탔던 어떤 분은 운전을 배우다가 그만두었다더군요. 초보라 천천히 가고 있는데, 뒤에 오던 트럭이 계속해서 클랙슨을 울리고 울리다 못해 앞지르더니 그 차를 막고 막 욕을 하면서 차 앞 유리에 가래침을 뱉고 가더랍니다. 그 후론 다신 운전을 안 하게 되었대요. 그리고 어떤 분은 브레이크 대신 액셀 페달을 밟아서 결국 인명피해를 내고 말았다더군요. 놓고 내린 라이터가 터져 전소된 자동차도 있고,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완전히 망가진 차도 있었다네요. 그러고 보면, 저는 참 다행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일 없고요. 음주운전도 안 하지요. 과속도 안 하지요. 길도 이제 조금씩 익혔는지 곧잘 찾아갑니다. 제 주인 베스트 레이서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가면 갈수록 제대로 된 운전을 하는 걸 보면 참 예쁘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씩 방어운전 요령도 터득했는지 갑자기 뛰어드는 중학생을 칠 뻔한 순간 잘 대처하더군요. 처음엔 욕도 많이 하더니, 이제는 그러지도 않고요. 제 주인, 아직 제 몸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다 하는 날까지 잘 모실까 합니다. 부럽지요? 이런 관계. 어어~ 끽~! 하여튼 칭찬해 주면 안됩니다. 제가 무슨 박치기왕 김일입니까? 또 받았네요. 그럼 그렇지. 그래도 매너 한번 좋네요. 이래도 저래도 제 주인이니까 예뻐 보이네요. 그럼 모두 안전운전하세요.
구형 쏘나타와 살인의 추억 2003-11-12
새벽에 길을 가는 여성만을 상대로 강도행각을 벌여 오던 범인이 잡혔다. 살해당한 여성도 있다고 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범인이 잡히던 그날 새벽에 나는 ‘살인의 추억’이라는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섬뜩한 우연이었다. 나는 밤늦은 시간에 퇴근이 잦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있는 편이라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걸어다니는 법이 없다. 퇴근길에 내가 타고 다니는 구형 쏘나타, 그는 내 유일한 보디가드다. 으슥한 밤길, 내 동행자는 구형 쏘나타뿐이다. 친구들은 십 년도 넘게 탔으니 이제 그만 차를 바꾸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내게는 더없이 익숙하고 잘 길들여진 차라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애인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 물론 간혹 시동을 걸 때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나는 새 구두보다는 내 발에 적당히 길들여진 구두가 더 좋다. 옷도 새 옷보다는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한 느낌의 옷을 더 좋아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편안한 옷, 이건 성향의 차이가 아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옷, 나와 함께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옷을 골라 입을 줄 알아야 진정한 멋쟁이다. 남자도 그렇다. 반들반들하고 멋진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보다는 털털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풍기는 남자, 조금은 구겨진 옷을 입더라도 진지한 눈빛의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새차처럼 번뜩이며 항상 당당한 남자보다는 어느 땐 우수에 젖은 눈으로 가을비 같은 눈물도 흘릴 줄 아는 남자가 더 좋다. 구형 쏘나타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괴한이 금품을 노리고 나를 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차장에 귀중품을 넣고 세워 두어도 차 모양새를 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안전하다. 적당히 흠집 있는 차가 안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연식이 오래되다 보니 자동차세도 소형자동차에 부과되는 세금정도면 된다. 기름 값 또한 출근용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에 부담 없는 유지비다. 물론 붓던 적금을 깨서라도 새 차를 살 수는 있지만 나는 구형 쏘나타가 더없이 편하다. 게다가 이번 연쇄강도사건이 한바탕 지나가고 난 뒤엔 구형 쏘나타가 더더욱 든든해졌다. ‘살인의 추억’에 보면 비 오는 날만 골라 연쇄강간살인을 한다. 신촌일대에서 유사범죄가 계속되면서 홍대생만을 노리는 계획적인 범죄가 계속된다는 홍대괴담이 떠돌 때도 있었다. 나는 사무실이 신촌 근처라서 당연히 저녁약속도 신촌일대에서 하곤 했다. 강도범을 수배중이던 지난 몇 주일 동안에도 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안심하고 다녔다. 후담인데 경찰은 같은 수법의 범죄가 유독 비 오는 날에만 일어나는 것에 착안, ‘살인의 추억’을 모방한 범죄로 보고 비 오는 날마다 신촌 일대에서 잠복근무를 계속하면서 신촌 일대의 비디오가게에서 이 영화를 빌려간 300여 명의 신원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적이 드물고 비명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비 오는 날을 택했다는 범인은 영화 ‘살인의 추억’은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은 매일 출근하기 전에 시동을 걸면서 범죄로부터 나를 보호해준 차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곤 한다. 범인의 표적이 절대 될 수 없을 만큼 허술한 듯하면서도 나를 보호해주니 말이다. 이제는 구형 쏘나타를 내가 모신다는 마음으로 운전할 생각이다.
위험한 달리기 2003-11-04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물건을 잘 쓰고 제대로 버리는 습관이다. 우리가 이미 배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교통문화가 바로 ‘잘 쓰고 제대로 버리는 법’이다. 매일 밤 달리기를 시작한 때가 2년 전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집에서 출발, 지하철 5호선 화곡역 네거리를 지나 우장산 공원 꼭대기까지가 정해진 코스다. 제법 먼 거리여서 한 번 달리고 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일 때문에 생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맨몸으로 달리고 걸으면서 삶의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달리기가 썩 즐겁지 않다. 골목을 가득 메운 차들을 피해 달리는 것을 ‘달리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 생각한 지 오래다. 문제는 막히는 길을 피해 골목길로 들어오는 차들이다. 자동차가 넘쳐흐르는 서울의 교통상황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주택가 골목길에서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운전자들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아무렇게나 세워둔 차와 그 사이를 비집고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차들 때문에 즐거워야할 달리기는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 된다. 사람들이 마음놓고 오가야 할 주택가 골목길마저 주차장과 자동차전용도로처럼 쓰여 사람이 발붙일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잘 썼으면 제대로 버리자’. 좁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주차하는 만큼 골목길을 달리는 운전자도 덜 위험하게 운전할 수 있다. 걷는 이들의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질 것은 당연하다. 며칠 전에는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던 동네 꼬마아이가 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매일 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달리는 것은 사고의 위험을 무릅쓴 곡예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걷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하고 이기적인 운전에 익숙한 곡예사들에게 잘 길들여진 원숭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우울한 골목길을 지나면 비교적 여유 있는 공원도로를 달릴 수 있다. 길가에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상쾌함이 더하다. 오가는 차도 드물어 주민들이 운동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물론, 주차된 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서 있게 세워져 있어 보기에도 좋고,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착각이었을까. 그 질서 있는 모습도 시간이 지나 자세히 알고 보니 또 다른 우울한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 주차된 차들로 여겼는데, 매일 한 자리에 서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녹이 슬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버려진 폐차였던 것이다. 동네꼬마들이 그 위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된다. 구청에서 나서서 폐차장으로 끌고 가는지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원마저 폐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한적한 공원 한켠에 쓸모를 다한 차가 버려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라는 제목의 책이 널리 읽힌 적도 있었지만, 우리가 살면서 알고 행동해야 할 수많은 ‘기본’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통문화가 좀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가르침을 잊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잘 쓰고 제대로 버릴 줄 아는 습관’ 말이다.
시골길, 사람 그리고 자동차 2003-11-04
내가 자란 곳은 전라북도의 농촌 마을이다. 그곳은 시내로 이어지는 ‘행길’ 외에는 모두 물 따라 산 따라 혹은 집의 담벼락을 돌아가는 ‘자연산’ 길뿐이었다. 행길을 신작로라고도 불렀는데, 나중에 학교 다닐 때 ‘행길이란 한길 즉 큰길이라는 전라도 말이며, 신작로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고 붙여놓은 이름’이라고 들었다. 포장이 안됐던 행길에는 버스가 하루 여덟 번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또 덜컹거리며 오갔고 간혹 트럭이며 자동차가 지나는 한적한 길이었는데도 부모님은 나에게 “행길에 나갈 때는 항상 조심해야 헌다”고 주의를 주시곤 했다. 당시만 해도 행길 외에 다른 길들은 사람이나 소가 다니는 길이었고 기계라면 농사일에 쓰이는 경운기나 자전거 정도였으니, 외지에서 오는 큰 차들이 다니는 이 행길은 어린 나에게 묘한 경외감과 공포감의 대상이었다. 나에게 심어졌던 것은 무서움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길은 동네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블랙홀 같았다. 커다란 버스가 입을 크게 벌려 사람들을 머금고는 다시 입을 꼭 닫은 채 다른 어떤 곳으론가 가버렸다가 저녁때쯤이 되면 다시 사람들을 뱉어놓고 사라졌다. 교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누나와 형에게는 그것을 이용할 자격이 있었고, 어머니의 손에 들린 막 채취한 나물이며 먹을거리는 그 ‘블랙홀’을 거쳐 새 옷이나 새 신발, 그리고 우리 동네서는 나지 않는 생선 등으로 바뀌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서 4km 떨어진 중학교로 가면서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 행길을 오갔고, 버스를 타고 익산시내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행길에 대한 그런 감정들을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1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할 무렵이었다. 휴학을 하고 집에서 쉬다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날짜에 맞추어 훈련소로 가기 위해 행길로 나왔다. 아버지는 내 절을 받고 그냥 방안에서 배웅을 해주셨고, 어머니는 괜찮다는 나를 붙들고 정류소까지 따라나오셨다.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 불현듯 어머니가 나오신 것이 생각나 뒤창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한 손을 흔들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먼지 속에 흐려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도 ‘아들이 저 길로 영원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겄지’ 하는 마음이셨단다. 내가 휴가 나올 때면 여전히 어머니는 정류소까지 나와서 나를 맞고 또 보내셨다. 아들을 처음 보낸 그 길 위에서 말이다. 요즈음 이 행길은 깔끔하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서 이제는 버스가 덜컹거리지도 않고 먼지를 풀풀 날리지도 않는다. 조금은 구불구불했던 길이 곧아지면서 소나무가 베어진 곳도 있고 헐려서 없어진 친구의 집터가 휑하니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하루 몇 번 들르는 버스는 여전해도 트럭과 자동차들은 무척 많이 늘었다. 명절 때 부모님 댁에 들르면 심심찮게 동네 어른들이 이 행길에서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인만 남아버린 농촌, 시력도 청력도 약해지고 다리 힘도 떨어져 반응도 더딘 이 양반들이 막걸리 한잔이라도 걸칠라치면 차가 와도 여유 만만하게 다니시는가보다 했더니 그것만도 아니라는 친구의 이야기였다. “그 분들한테 그 길이 찻길로만 보이간디. 그냥 편하게 다니는 동네 길이기도 헌 거지.”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어릴 때의 아련한 무서움이 다시 살아난다. 서울에 살면서 사람은 못 다니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할 때가 제법 많다. 하지만, 자동차가 못 다니거나 조심해야 하는 사람 전용도로는 거의 없다. 걸어다니기보다 차를 타고 다니기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사람보다도 자동차만을 위해서 길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 걸까? 길은 그 길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특히 한적한 시골길을 갈 때면…….
장맛비 속의 여행 2003-11-04
7~8년 전의 일이다. 방학이 되자 나는 여행길에 나섰다. 해인사를 둘러보고 그곳을 출발한 시각은 오후였다. 합천에서 밀양을 지나 동해안 해안도로를 탈 심산이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하늘엔 흑회색 구름장이 낮게 깔려 있었고 비린내 머금은 습기찬 바람이 불어왔다. 밀양읍내에 접어들자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맛비는 곧 폭우로 변했다. 읍내를 벗어나는 정류장에서는 우산을 움켜쥔 사람들이 태워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지만 멈추는 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도 그 정류장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내 시야에 문득 한 청년의 모습이 잡혔다. 20대쯤 되어 보이는 그 청년이 내 시선을 붙잡은 건 긴박한 몸짓 때문이었다. 우산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차도로 내려선 청년은 열심히 태워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돌렸다. 청년의 손짓에는 그만큼 필사적인 몸부림이 묻어 있었다. 차에 올라탄 청년은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그 날 밤 꼭 고향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택시도 잡을 수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는 거였다. 청년의 고향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내가 내쳐 언양까지 가겠다는 얘길 꺼내자 그 청년은 입을 딱 벌렸다. 앞길은 산을 넘는 외길인데 여간 험난한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괜찮다면 자기 집에서 하루 묵고 가라는 제안을 해왔다. 바쁜 이유도 없던 나는 그 청년을 따라가 하룻밤 신세를 졌다. 부모님 중 누군가의 생신이었다는 것과 삶은 고춧잎으로 쌈밥을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이 난다. 다음날 그 집에서 출발한 건 이른 아침이었다. 비가 그친 새벽길은 청량하고 신선했다. 한 10분쯤 달렸을까. 산으로 오르는 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서 나는 손에 진땀이 나는 걸 느꼈다. 길은 마치 뱀처럼 휘어져 산꼭대기를 향해 가파르게 치솟아 있었다. 오가는 차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기다시피 올라가는 동안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산벽을 들이받고 멈춰선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띈 건 전조등을 켜고 거의 180도로 굽어지는 도로를 막 돌아섰을 때였다. 오른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는데 고갯길을 넘던 차가 산비탈을 받고 멈춰선 듯 싶었다. 정상을 넘어서자 비교적 완만한 구배의 길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한참 내려오다 보니 석남사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때까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심산으로 절 입구로 들어섰다. 콸콸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싸리비 자국이 정갈하게 나 있었다. 일주문까지 걸어가자 밀짚모자를 쓴 비구니 서너 명이 길을 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절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입구부터 쓸어온 듯 싶었다. 스님들을 스쳐가며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밀양에서 언양으로 넘어가는 그 험한 산이 해발 1천189m인 천황산이며, 밤에는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절대 넘는 산이 아니라는 걸 안 건 서울에 돌아와서였다. 지금도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치 그 산꼭대기에서 사고난 차가 내 차인 것 같은 착각으로 눈앞이 아찔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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